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먹을 것, 입을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 아니면 그 길이 있는 걸까요?
사실 살면서 불안이나 걱정, 근심이 생기면, 어쩌면 믿음 생활을 잘 하려고 애쓰고 교회 생활을 하는 분들 입장에서는, 이렇게 걱정하고 있는 자신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이거나, 혹은 내가 바르게 믿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불필요한 죄책감을 갖게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지고 “염려”라는 행위 자체를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겠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하시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라고 말씀하시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염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비결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는 것이다”라고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성경을 볼 때, 자칫 우리의 연약한 한계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는 자꾸 성경을 보면서 ‘비결’을 찾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노하우’를 알고 싶어 하죠.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이 다 채워 주시니까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보면서 히스기야 왕이 병이 났다고 하면, “히스기야 왕이 어떻게 병이 나았을까?”를 살피면서 우리도 어떻게 하면 그 질병에서 고침받을 수 있을지를 생각한다든지,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을 보면서 “여리고성이 왜 무너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지만, 그래도 어떤 노하우가 있지 않을까?” 하고 찾아보는 식이죠. 사실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 가운데 이루어진 일인데, 우리는 자꾸 “성을 돌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면 승리할 수 있다” 같은 식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하지만 여리고성 사건은, 어떻게 하면 성을 무너뜨리는가,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나안 전쟁 가운데, 여리고성이 무너진 것과 똑같은 일이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오히려 여리고성 사건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능력을 보여주고 싶으셨다면 굳이 백성들에게 성을 돌게 하실 필요도 없었죠. 그냥 “봐라” 하시고 곧장 무너뜨리셔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이 순종했고, 나중에 아이성에서는 불순종했을 때 어떤 결과를 맞았는가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서 전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거예요. 그것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노하우”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러면 나머지는 다 해결된다”는 말씀 역시, 자칫 노하우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한 분이 행상을 하면서 아주 힘들게 살았습니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마음속에는 “내가 돈을 좀 모아서 시장 어귀에 가게 자리를 하나 마련해야지” 하는 꿈이 있었죠. 그래서 열심히 일해서 어느 정도 돈을 모았는데, 마침 그분이 다니는 교회에서 건축을 위한 부흥회가 열렸어요. 부흥회를 인도하던 강사 목사님이, “하나님은 ‘셋방살이’를 하는데, 교인들은 좋은 집에 산다”고 하시면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 해결될 텐데, 세상 일로 염려만 하고 있으니 삶이 지지부진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여인은 “정말 그렇구나!” 싶어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모든 돈을 건축헌금으로 드렸어요. 하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시고 채워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말이죠. 보통은 이런 간증이 뒤따르면서,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가게 터를 얻게 해 주셨다”든지, “몰랐던 유산을 얻게 되었다”든지, 그렇게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만약에 그 여인이 실제로 그런 간증을 한다면, 그게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그 교회가 어떤 형편이었는지 모르니까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런 간증이 갖는 위험이 있다면, 바로 “공식화”의 문제입니다. 즉, 자신이 경험한 특별한 은혜를 일반화하고 공식화하려는 경향이 있죠. “내가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당신도 이렇게 하면 은혜받습니다. 내 기도는 이렇게 응답됐으니, 당신도 이렇게 하면 응답될 겁니다. 나는 이렇게 살았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데, 당신도 이렇게 살면 큰 복을 받을 겁니다.” 하고 말이죠.
이런 간증이 가져올 두 번째 문제는 “성(聖)과 속(俗)의 구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교회와 관련된 일이면 거룩한 일, 종교적 일이면 거룩한 일,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세속적 일들은 덜 거룩한 것으로 구분해 버리는 거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를, 곧 “먼저 교회에 헌금하라, 먼저 봉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나머지를 해결해 주신다”라고 이해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심각한 이원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염려하지 않고 산다”는 게 혹시 무책임하거나 태만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요?
예수님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그들이 길쌈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신다고 하신다면,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삶이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염려도 하지 말고, 그냥 하루하루 아무렇게나 살아라”라는 식일까요? 저는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의미하지 않는 바가 무엇인가부터 생각해 봐야 한다고 봅니다.
우선, 이 말씀이 태만이나 무책임함을 권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걱정은 사실 책임감에서 비롯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그런 책임감에서 오는 염려까지 다 버리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또, 마태복음 6장 전체 문맥을 살펴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염려는 ‘외식(外飾)’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6장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신 외식의 사례는, 유대인들이 종교적 경건을 위해 했던 기도, 금식, 구제였죠.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골방에서 기도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구제할 때 나팔 불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 가지 경건 행위에 공통된 문제는, “하나님을 향해야 할 일인데, 정작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또 다른 형태의 위선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배당 안에서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노래하고, 전능하심을 찬양하지만, 정작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내 삶을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거죠. 이것이 이원화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이 광대하시고, 교회 밖에서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모습을 말이에요.
한 청년이 제게 와서, “우리 교회 장로님 때문에 힘들다”고 하더군요. 회사에서 그 장로님 밑에서 일하고 있는데, 교회에서는 너무 자비롭고 친절한 분이 회사에서는 인색하고 무정하다는 겁니다. 청년은 그것이 위선처럼 보인다고 했는데, 제가 말하기를, “위선의 문제라기보다 어쩌면 ‘신학적 오리엔테이션’의 문제일 수 있다. 그 장로님은 교회에서 ‘겸손하고 온유해야 한다’고 진심으로 믿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는 거고, 회사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별개로 믿고 있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따르는 원칙과, 회사에서 따르는 원칙이 달라서 그런 것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할 때는 “하나님이 주인”이라고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이원화된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문제라는 거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먹고 마시는 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뜻이지, 염려라는 행위를 죄악시하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세계관을 바로잡으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구해라. 그리고 나머지 먹고 마시는 문제들도 해결될 것이다”라는 메시지죠.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우리는 자꾸 ‘명령’으로 듣지만, 사실 저는 이것을 ‘위로’로 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버겁고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왜 염려하느냐, 너는 죄인이야!”라고 책망하시는 게 아니에요. “엎친 데 덮친 것 같은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억해라. 염려하지 말아라.” 이런 위로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천로역정』을 보면, 순례자가 여행길에 너무 지치고 힘들어 한참을 걷다가,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집 앞에 이릅니다. 그 안에 들어가서 쉬고 싶지만, 문 어귀에 사자가 으르렁대며 버티고 있으니 겁이 나서 못 들어가요. 안에서 정원지기가 “그 사자는 사슬에 묶여 있어서 너를 해칠 수 없다. 걱정 말고 들어오라”고 계속 격려하는데도, 순례자는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한 발 내딛었다가도 사자가 으르렁거리면 뒤로 물러서고, 또 시도하다가 무서워서 물러서고를 반복하는 거죠. 하지만 결국 정원지기의 반복된 격려 덕분에, 사자가 묶여 있어 물 수 없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게 되어, 조금씩 전진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이런 맥락이라고 저는 봅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시는 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앞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도 다 아시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먹고 마시는 문제, 살아가는 모든 문제, 사랑하는 가족 문제, 자녀들의 진로 문제 등등,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신다. 그러니 염려하되, 염려 속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마라”라는 말씀이라고요. “하늘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르시고 입히지 않느냐. 그 하나님이 너희도 돌보신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이 “위로”라고 생각합니다.
“가족이 아픈데 염려가 안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자녀가 방황하는데 왜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놓치지 말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잊지 말라.” 저는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가끔 저한테 “목사님, 믿음이 뭡니까?”라고 물어보는 분이 계세요. 저는 믿음이란 “모든 것을 제자리에 놓고 보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손가락 두 개로도 세상을 다 가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가릴 수 있죠? 아주 가까이 들이대면, 시야가 손가락에만 집중되어서 결국 아무것도 안 보이거든요. 그럼 세상이 캄캄해지죠. 믿음이라는 것은 손가락 두 개(문제 자체)를 없애 버리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제자리에 내려놓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너머에 있는 길과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해요.
요즘 세상이 참 살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전에도 늘 살기 힘들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어느 분은 “인생은 사람이 살기엔 좀 버겁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이런저런 일로 걱정이 끊이지 않고, 불안함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면 이런 불안과 염려에서 좀 자유로워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신앙이 있어도 여전히 버겁고, 삶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 때가 많죠.
“내가 조금만 더 여유로우면 괜찮을까? 좀 더 건강해지면 나아질까?” 해서 스스로 강해지려 애도 써 보지만, 그러려고 해도 불안과 염려가 사라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국 중요한 것은, “나 혼자 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겁니다. 그게 위대한 신앙의 힘이겠죠. 저는 예수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점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삶 속에 여전히 버겁고 힘든 일이 많을 겁니다. 제가 impromptu로(즉흥적으로) “괜찮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라고 말씀드리는 건, 여러분이 느끼는 그 무게를 무시하고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고 지키시니까, 괜찮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힘들고 어려운 시대, 염려와 걱정이 끊이지 않는 삶이지만, 그 염려와 근심, 불안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심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로 인해 새 힘과 용기를 얻어, 이 삶을 끝까지 잘 살아 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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