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의 첫 번째 파트의 세 번째 기도문이라고 할 수 있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말씀을 가지고 함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를 축복합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간절한 소원이 담긴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문은 단지 한 편의 기도문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기도문이요, 우리의 사명이요 비전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많은 기도를 드리겠지만, 가장 자주 하는 기도 중 하나가 주기도문입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예배 순서마다 이 주기도문을 한 번씩 암송하잖아요. 그렇다면 매일처럼 하는 이 기도문이 얼마나 중요한 기도문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자주 하는 주기도문이, 온전한 정신과 뜻을 담지 못하고 그저 입으로만 반복되다 보면, ‘주문(呪文)’처럼 되어버릴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이 ‘주문’으로 전락해서는 안 되겠지요. 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주기도문의 바른 정신을 붙잡아, 주기도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누구일까요? 여러 가지로 대답할 수 있겠지만, 주기도문을 자기 기도문으로 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왜냐하면 주기도문 자체를 제자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곧, 주기도문을 인생에 가장 중요한 기도문으로 붙들고, 그 기도대로 인생의 방향과 목적, 비전을 삼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일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주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조가 있습니다. 맨 처음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지막에 송영으로 마무리를 하며, 그 사이에 여섯 가지 간구가 나옵니다.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름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첫 세 가지 기도는 전부 ‘아버지’와 관련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 세 가지 간구는 아버지를 향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세 가지 기도는 ‘우리’를 향한 기도, 곧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원하소서”라는 간구가 이어집니다. 이 여섯 가지 간구가 끝나고 마지막에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송영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굉장히 조직적이고 단단한 기도문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때로 방향을 잃어버릴 때, 주기도문으로 돌아오면 기도의 영점을 조정받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이 우리 기도의 가늠자 역할을 하여,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죠.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간구는 아버지의 이름,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에 관한 것이고, 이어지는 나머지 세 간구는 우리의 양식, 우리의 용서, 우리의 시험과 관련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베틀로 옷감을 짤 때, 먼저 세로줄(날줄)을 세우고, 그다음 가로줄(씨줄)을 넣어서 문양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수직을 세우는 것이고, 그다음에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수평으로 삶의 문양을 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이 제시하는 중요한 기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기도문을 여러분 인생의 기도문으로 삼으시길 축복합니다.
이 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이 부름이야말로 기도의 열쇠입니다.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름조차 부르지 못할 정도로 두려운 존재로 여기며,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말하지 않았던 문화였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상적인 호칭으로 ‘아빠’라고 부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기도문은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켜 주는 기도문입니다. 이전에는 종처럼, 하인처럼 기도했다면, 이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순간, 우리는 자녀 됨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의 창고를 여는 단 하나의 열쇠입니다. 어떤 큰 문이라 해도, 맞는 열쇠 하나면 열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 해도, 우리가 자녀 된 신분으로 “아버지”를 부르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 기도 응답의 확신은 큰 목소리나 특별한 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나옵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그 관계가 얼마나 깊고 확실한가에 따라 기도의 은혜가 흘러나옵니다.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그런데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주기도문이 아버지를 찾아주심과 동시에 ‘형제’를 찾아주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이므로, 우리에게도 형제, 이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웃과 형제를 위한 기도를 하게 됩니다.
또 “우리 아버지”라 하니, 어떤 분은 “자녀가 이렇게 많으면, 내 기도 제목이 응답되지 않는 것 아닐까?” 염려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아버지는 재정과 능력의 한계가 있겠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온 우주의 주인이시고 능력이 무한하십니다. 그러므로 한없이 풍성하게 채워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온 땅을 향한 모든 기도를 담대히 드리고, 그분의 무한한 능력과 공급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드리는 첫 번째 간구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잘못된 기도를 고쳐주는 놀라운 기도문입니다. 때로 우리는 기도라는 거룩한 행위를 하면서도 불안과 근심, 욕망을 가득 담고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기도의 동기가 염려, 그 진행이 근심, 마지막이 욕심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기도 전체가 걱정과 욕망으로만 가득 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우리의 기도를 땅에서 하늘로 끌어올려줍니다. 우리의 욕망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로 고쳐 주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31~33절 말씀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방인들처럼 의식주만을 구하고 끝나면 안 됩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채워주십니다. 자녀가 “밥 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매번 호소하지 않듯, 우리가 굳이 의식주 문제에 매달리지 않아도, 아버지는 우리에게 이미 주실 마음이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더 큰 기도, 곧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른 기도이고, 바른 기도에는 빠른 응답이 따릅니다. 반면, 나쁜 기도는 ‘나뿐인 기도’, 나의 욕심과 욕망만 가득한 기도이므로,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간구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이 땅에, 내 인생에, 내가 걸어가는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기를 원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먼저 우리가 무너뜨려야 할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나의 나라’입니다. 내 나라, 내 왕국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 없이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내 나라, 내 욕심만을 세우는 기도를 드릴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거룩한 기도 행위를 통해 우리의 왕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데이비드 웰스라는 목사님이, “당신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는 사실 “내 나라가 끝나게 하소서”라는 뜻이라고 하셨어요. 곧,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내 나라가 종말을 맞이하게 해달라는 기도인 셈입니다. 내가 쌓아 올린 애녹성, 바벨탑이 무너지고, 십자가 깃발이 내 삶 속에서 휘날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십자가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마귀의 나라를 멸하셨고, 그 왕국을 우리 안에 가져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내 삶에 “오직 십자가”가 작동 원리가 되게 하겠다는 고백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거하는 모든 영역에서 십자가 깃발이 휘날리는 복된 인생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세 번째, 오늘 집중적으로 살펴볼 기도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주기도문 첫 파트인 아버지 관련 세 가지 기도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다시 한 번, 여기까지를 암송해 볼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여기까지가 하나님과 관련된 세 가지 간구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주기도문의 흐름을 정리해 보면, 이 기도는 우리의 필요를 먼저 채우는 방법을 알려주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의 ‘본질’을 붙잡아 주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인생과 기도의 ‘방향’을 알려주는 기도문이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바벨탑을 쌓으며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혼란’(바벨)만 가져다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을 높이는 삶은 결국 무너지고 망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기도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입니다. 사실상 모든 기도는, 결국 하나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다섯 가지 있습니다.
첫째, 하늘과 땅은 분리되어 있지만, 기도로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문은 “하늘”과 “땅”을 언급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처럼, 하늘과 땅은 분명히 구분됩니다. 하늘은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영역이고, 땅은 우리가 살아가는 영역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늘과 땅이 하나 되는 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완전하게 임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기도문은, 우리가 그날만을 마냥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도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기도”를 통해서입니다. 기도를 드릴 때 하늘이 움직이고,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는 하늘을 움직이는 통로이며, 또한 그 하늘의 역사로 이 땅을 변화시키는 통로입니다.
이렇게 하늘의 일이 땅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땅에서 드리는 기도가 하늘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고(마 18:18) 하셨습니다. 땅에서 드리는 우리의 기도가 하늘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합심하여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강조하셨습니다(마 18:19). 이것이 바로 금요기도회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금요기도회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시간이며, 우리가 기도로 하늘에 정조준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땅을 변화시키시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주기도문에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지만,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아야 할까요? 신앙생활이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뜻의 분별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서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명합니다. 에베소서 5장 17절에서도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지 뮬러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지식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행동은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맞닥뜨리는 한계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가 정말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문제가 하나님의 뜻입니까?”를 물으며 이리저리 다니기도 하죠. 그런데 물어보는 사람마다 답이 다를 때는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려면, 먼저 ‘하나님의 뜻’이라는 개념을 세 가지로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인간이 다 헤아릴 수도, 볼 수도 없는 ‘크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분의 모든 경륜을 알 수 없습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보시며, 다스리시는 그분의 섭리를 우리가 온전히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차원의 뜻’은 우리의 직접적인 고민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 도리가 없으니까요.
2) 성경에 명시되어 있는 ‘보편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이나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같은 말씀들입니다. 이런 것은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따로 구할 필요 없이 믿고 순종하면 됩니다. 예컨대 “음란한 것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아도 됩니다. 성경에 이미 ‘거룩하라’고 명시되어 있으니까요.
3) 세 번째가 각 개인에게 고유하게 요구하시는 ‘개별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곧, 나만을 향한, 나의 상황에 딱 맞는 주님의 음성과 인도하심입니다. 같은 신앙인이라도 개인마다 이 ‘개별적 뜻’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이 영역에서 생깁니다. “어떤 직업을 택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맞나요?”, “이 일을 계속해야 할까요, 멈춰야 할까요?” 이런 질문들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런 뜻을 구합니다. 요나처럼 괜히 다른 길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고, 아브라함처럼 실수로 애굽에 내려가서 곤욕당하기보다는, 처음부터 바른 길로 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뜻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도 어렵지만, 알았다고 해서 순종하기는 더욱 어렵다는 점입니다. 명백히 기록된 뜻조차 지키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같은 말씀을 자명하게 알면서도, 실제로 순종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만큼 우리 연약함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은 죄를 우리가 ‘알면서’ 짓습니다. 그러므로 ‘뜻을 아는 것’보다 ‘뜻에 순종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의 뜻은 ‘운명론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내 인생은 이미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으니, 나는 그저 자동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겠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셨고, 우리를 기계적으로 이끌어 가지 않으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도 “동산의 모든 실과를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마라” 하셨죠. 그 외에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누릴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방향이라면, 그 안에서 어떤 것을 골라 행해도 괜찮습니다(고전 10:31). 바울과 바나바가 2차 선교여행에서 갈라졌을 때, 하나님은 둘 중 하나만 ‘정답’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방향(복음 전파)은 같으나 방법이 다른 것을 다 허용하신 거예요.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님도, 하나님의 뜻과 관련된 여섯 가지 원리를 제시했는데, 구원받고, 성령 충만하고, 거룩하고, 순종하고, 주를 위해 고난받는 다섯 가지가 분명하면, “그 뒤에는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해도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다섯째,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뜻을 먼저 파악한 다음에 기도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다 몰라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도 그 뜻인지 몰라 불안해한다는 점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삶에 나타난 어떤 일이 “하나님 뜻이었구나!” 하고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내 인생을 붙드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경험하게 되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불안해하며 뜻을 강박적으로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고 담대하게 도전하며, 하나님의 뜻이 내 인생에 펼쳐질 것을 믿고 걸어갑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기도문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불안과 염려로 가득 차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루하루 기도의 자리에 머물러, 하늘을 움직이고 땅을 변화시키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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