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이 흐트러져 있거나 타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연약함 속에 있거나 낙담 속에 있는 까닭은 어쩌면 아침 기도에 소홀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나면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도는 인간의 불안과 공허를 채우고, 하나님의 마음에 자신의 마음을 조율하기 위한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기도를 하며 살 수밖에 없는데, 그 까닭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유한함을 느끼기에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에덴의 동쪽 땅의 이름을 영어로 번역하면 노드인데, 그 의미는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입니다. 땅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기본적 조건을 상징하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불안과 공허함을 내면에 간직한 채 삽니다.
불안하다는 것은 내 마음속에 안식이 없다는 것이고, 안식이 없다는 것은 어떤 결핍을 느끼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 결핍이 채워지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채워지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라고 하는 것이 형식을 갖추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도합니다. 예를 들면 갓난아기가 막 우는 것도 기도입니다. 언어는 없지만 ‘내가 배가 고픕니다. 나를 돌봐 줄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하는 표현이지요.
자연재해가 발생해 살던 집이 다 물에 휩쓸려가고, 비바람이 치는 바람에 농사를 망친 농부가 망연히 하늘을 바라볼 때도 그 하늘을 바라보는 빈 시선 역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박함이 극에 달해 예배당에 엎드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고 드리는 그 기도도 기도이지요.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기도할 수밖에 없고, 인간이기에 기도를 합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기도라는 것은 무엇인가?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도가 분명히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기도를 두고 기독교인의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들숨과 날숨이죠. 숨을 쉬지 않으면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고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는 뜻이 그 말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현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박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 속에 살면서도 내 영혼의 중심이신 분, 곧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기도입니다. 불안하고 내 삶을 기약할 수 없는 안식 없음의 상태인 현실의 가장자리로 떠밀려 있는 내 마음을 영원한 평화가 있는 곳에 붙들어 매기 위한 일체의 행위가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아니 이렇게 말하면 실례겠지요. 많은 이들이 기도할 때는 언제냐 하면 인생의 어려움을 겪을 때입니다. 예를 들어 사업이 어려워지면 새벽기도회를 시작합니다. 병에 걸리면 철야기도를 시작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처럼 기도를 여기는 경우이지요.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내가 호출하기만 하면 언제나 달려와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하는 ‘해결사’처럼 여기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농담처럼 “하나님은 비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해결사가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언제 하느냐 하면 내가 바라는 것에 응답해 주시기를 기대할 때입니다. 그리고 자기 바람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며 기뻐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왜 나의 절박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나 원망하고 믿음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일화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쓰셨던 김교신 선생님 이야기입니다. 정확한 해는 기억이 분명치 않지만, 1943년으로 추정됩니다. 그해 섣달그믐 무렵에 김교신 선생님이 자기 일 년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 지난 1년 동안 저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부족한 것이 당신 앞에 바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더욱더 감사하기는 제 기도를 기각해 주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내가 절박함 가운데 올렸던 기도를 하나님이 거절해 주신 것이 더 고맙다는 뜻이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정말 세상이 아름다울까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해서 그 기도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응답되는 세상을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좋은 세상일까요? 김교신 선생님이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그래서 어떤 기도는 기각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우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삶을 배우게 되었다면, 오히려 기각된 기도가 복일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뭘까요? 흐트러지기 쉬운 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곧 중심에 조율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지요. 사실 연결한다고 했지만, 저는 ‘조율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기타 줄이 너무 느슨해도 제대로 된 소리가 안 나고, 너무 팽팽해도 제소리를 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준음을 잡고 거기에 맞춰 줄을 조율해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일상을 살면서 나라고 하는 악기가 지나치게 긴장하여 팽팽해졌다면 하나님의 선율을 연주할 수 없게 된 상태를 인식하고,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 마음에 따라 나의 마음과 지향을 조율하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 하는 분들을 보면, 밝은 조명 아래에서 기타를 치며 한 곡 노래를 마친 뒤 거의 틀림없이 기타 줄을 다시 조율합니다. 기도도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고, 내 마음을 거기에 맞추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오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이냐 하면, 내 마음으로만 세상을 바라볼 때에는 한없이 좁은 시선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을 연결하게 되면, 나를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나의 일들을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됩니다. 시편을 보면, “내 삶이 왜 이리 힘든가.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나에게 더 이상 견딜 힘이 없다”라며 절규하듯이 노래하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지난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던가”를 떠올립니다. 그러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나를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런 눈으로 다시 현실을 바라보면 현실이 더 이상 나를 억압하지 못하는 힘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탄식으로 시작된 시가 찬양으로 끝나는 것이지요. 이는 객관적 상황이 바뀐 게 아니라, 그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과 입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깨달음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청해야 할 때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맨날 하나님의 마음에만 조율될 것을 구해야 하나, 하고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나면,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반드시 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도의 태도와 응답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요한복음 15장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많은 이가 이 구절을 읽을 때 끝부분에 밑줄을 긋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정말 얼마나 좋은 약속입니까. 그러나 거기만 취하면 안 됩니다. 앞부분이 더 중요합니다. 앞에서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게 ‘존재’이지요. 정말 기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하셨던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존재론적 일치를 우리도 이루어야 합니다. 삶은 제멋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힘만 빌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핵심은 먼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가 되어야 하고, 그다음으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속에 머무른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 안쓰러워하고, 귀신 들린 사람을 보면 그 귀신을 내쫓아 온전케 하고 싶어 하며, 소외된 사람을 보면 어떻게든 그의 생을 긍정해 주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속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우리가 무엇을 청하든 하나님이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적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내가 청하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 속상해하는 분들이 계시다면, “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까?” 하고 원망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소망하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머물러 있는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한번 기도를 회복해 보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낭비한 시간, 이기지 못한 유혹들, 연약함과 낙담 속에서 하는 일, 다른 사람과의 교제나 우리의 생각 속에서 나타나는 무질서와 방종은 모두 기도에 소홀함에서 비롯됩니다.”라고 말합니다. 내 삶이 흐트러져 있거나 타자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연약함 속에 있거나 낙담 속에 있는 까닭은,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고 조율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기도는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신뢰를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오늘 ‘기각된 기도’ 때문에 속상한 분이 계시다면, 속상해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리라 생각합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셨지요. “기도할 때 가만히 앉아 있는데 뭘 하느냐”라고 묻자,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본다니, 그러면 하나님은 어떡하시나요?”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십니다.” 참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일치가 일어났을 때 비로소 “제가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속상합니다. 누군가가 정말 밉습니다. 혹은 해결되지 않는 이 문제로 마음이 찢어질 것 같습니다.” 하고 하나님께 토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이렇게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할 수도 있지요.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고 서둘러 끝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다 털어놓은 뒤에는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 무엇이라 말씀하실까, 음성으로 들려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내게 알려 주시기도 하십니다. “네가 정말 힘들었겠구나. 네 마음 내 심정, 내가 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메시지를 주실 수 있습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하나님께 청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 마음을 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몸을 씻듯 마음을 씻기도 하잖습니까. 마치 영혼을 샤워하는 것처럼, “하나님, 오늘 제가 생각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머리에 손을 얹으며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눈에 손을 얹으며 “하나님, 제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 눈빛을 허락해 주십시오. 제 시선이 맑고 순수하기를 바랍니다. 남의 허물을 찾는 데만 쓰이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귀에 손을 얹고는 “하나님, 달콤한 말만 듣지 않도록 하시고, 미묘한 가운데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다른 이들이 말하지 못하는 고충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제 귀를 열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코를 두고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교만하게 콧대만 세우지 않도록 지켜 주시고, 들숨과 날숨 속에 하나님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내쉬게 해 주십시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하나님의 생기가 내 안에 채워지고, 내쉴 때마다 부정적 감정들이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입을 두고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제가 먹는 음식이 제 육체에 활력이 될 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되게 해 주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되게 해 주십시오. 제가 하는 말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무너뜨리는 말이 아니라, 일으켜 세우고 격려하는 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손을 두고 기도하며 “하나님, 제가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때, 제 손을 통해 주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발을 두고 기도하며 “제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평화가 깃들게 해 주십시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머리에서부터 발까지 몸 전체를 놓고 기도하면, 조금은 더 나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구원
구원받는 방법을 아느냐고 묻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구원받는 사람이 14만 4천 명뿐이냐”라는 질문을 예로 들면,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오직 그 수만 구원받는다는 식은 하나님의 대실패를 이야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14만 4천이 나온 까닭은, 당시에 로마 제국의 권세나 황제를 상징하는 ‘짐승의 수’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꿈에 붙들려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수입니다. 12라는 수는 완전수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그 12에 12를 곱하고, 10의 3승을 곱해 14만 4천이라는 완전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라고 말한 시인이 있습니다. 아라비아 숫자라는 것은 사람을 서열화하고 줄 세우는 도구인데, 구원은 서열화나 줄 세우기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지요.
사람들이 “내가 구원받았는지 모르겠다”라고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당신 구원받았습니까? 언제 구원받았습니까?”라고 물으며 날짜와 시각까지 따지기도 합니다. 사실 구원이란 말은 성경 안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입니다. 병들었다가 치유받았을 때도 구원이라고 말하고, 마음이 산산조각 나 있다가 하나로 회복된 것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더러운 삶에서 깨끗한 삶을 지향하게 되면, 그 역시 구원으로 표현합니다. 총체적인 구원은 하나님의 큰 생명에 내가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가 구원받았는지 정말 알고 싶다”라고 할 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어떻게 사느냐를 보면 됩니다.”
독일의 작가이자 사상가였던 레싱의 희곡 「현자 나탄」에 나오는 ‘반지’ 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롱하게 아름다운 반지를 손에 넣었는데, 그 반지를 낀 사람은 모두에게 사랑받는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반지를 물려줄 때마다 ‘이 반지에 합당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 줍니다. 어느 날 아버지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들 셋 다 훌륭해 도무지 반지를 누구에게 주어야 할지 모르겠어, 세공사에게 부탁해 똑같이 생긴 가짜 반지를 두 개 더 만들게 됩니다. 아버지는 임종 직전에 각각 하나씩 반지를 주고, 아들 셋은 모두 “아버지가 내게 주셨다”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재판관에게 가는데, 재판관도 구별할 수 없기에 말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반지를 낀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사랑받는다 했소. 그러니 누가 진짜 반지를 낀 사람인지, 그 사랑이 삶으로 드러나는지 보겠소.” 한마디로 ‘삶’을 보면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만 하면서 실제 삶은 욕심투성이이고, 배타적이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면, 그 고백을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그러나 내 삶에서 깨졌던 마음들을 사랑으로 녹여내고, 서로 다른 사람들을 품으며, 진실하고 순수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 사람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이고, “내가 바로 구원받은 자이구나” 하는 확신을 가져도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을 선물 받았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는데 세상이 어둡기에 빛을 영접하지 않았고, 영접하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받았으며, 빛을 영접한 이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영생이란 시간을 무한정 늘려서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 속에 접속되어 사는 오늘, 그것이 영생의 시작입니다. 그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감사, 경탄, 감탄을 하며 삽니다. 자기 옆에 있는 사람을 경쟁자로만 여기지 않고, 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감사해합니다. 이런 사람이 이미 영생에 접속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
누군가 칠순 잔치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자신은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남편과 사별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함께 여행을 다녀오다가 차 안에서 손을 꼭 잡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 단 한 시간이 사십 년을 견디게 했다고요. 그 한 시간이 굉장히 두터운 의미를 지닌 시간인 것입니다. 시간을 세는 시계적 시간이 아니라, 두께와 깊이를 가진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던 것이지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라는 말씀도 바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마련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깊이로 흐르는 시간, 두께를 가진 시간. 구약 시대에는 여섯 해(날)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기념하여 모두가 쉬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 안식일에는 신분, 성별, 종과 주인, 나그네, 가축까지 모두 쉼을 누려야 하는데, 이것은 어떤 소수 특권층만 쉰다는 고대 바빌로니아나 그리스 신화의 개념과 완전히 달랐습니다. 또 “너희가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것을 기억해라”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통해, 안식일이란 인간을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신약 시대의 교회가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곧 일요일에 부활하신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이 걸어가신 길,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끝까지 지키신 삶을 기념하고, 우리도 그 길을 따르기 위해 주일로 모여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일요일에 교회 안 가면 구원이 없느냐”라고 묻지만, 중요한 것은 그 주일이라는 때를 ‘깊이로 흐르는 시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삼아 하나님의 영광과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그 시간 속에서 우리의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며, 이웃들과 더불어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점입니다.
물론 제도교회에 실망한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동체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혼자서 하기 어려운 일들을 서로 격려하고, 갈등이 생겨도 함께 풀어가며 성장해 가는 공동체적 장점이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주일 성수는 형식에 매이지 않되,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명과 해방을 기억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약성경의 부활 증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느냐”라는 것은 과학적 사실로 검증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반복 실험이 불가능해도, 여러 사료와 증언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그렇지 않다고 가정했을 때 더 많은 모순이 발생한다면 역사적 사실로 여길 수 있습니다. 바울 같은 인물이 왜 박해자에서 순교자에 이르는 사도의 길을 걸었는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두려움에 숨었다가 다시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담대히 외치며 박해받고 순교까지 했는가, 부활을 제외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습니다.
성경에서 부활 사건을 전하는 네 복음서가 조금씩 다른 세부 묘사를 남긴 것도,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각자 기억하는 핵심은 같아도 세부 사항이 달라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기독교인들은 부활을 역사적·상호주관적 사실로 받아들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사흘 만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부활체’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 체험이 제자들과 초대교회를 완전히 변화시켰습니다.
“구원”을 얘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14만 4천 명만의 전유물이냐고 묻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표현일 뿐, 누구나 구원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구원받았나?”라고 스스로에게 물을 때는, “나는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에 접속해 있는가, 그분 안에서 사랑과 감사와 경탄을 느끼고 있는가, 이웃을 배려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데 함께하고 있는가”를 돌아보면 됩니다.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구원의 선물을 삶에서 드러내느냐입니다.
또 주일 성수를 꼭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도, “일요일에 예배당 안 가면 구원 못 받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해방의 기쁨을 기억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쁨을 누리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차원에서 접근할 수 있습니다. 교회 제도에는 문제도 많지만, 그럼에도 신앙은 항상 공동체에서 배우고 나누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
성경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묻는다면, 한마디로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한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인간의 움직임이라기보다, 고통받는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강렬한 개입을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으로부터 해방된 사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적으로 인간에게 드러난 사건 같은 것들이 차곡차곡 모여서 성경을 이룹니다. 이런 하나님 체험과 그 경험을 언어화하고,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 기록한 텍스트가 성경입니다. 따라서 성경 안의 문자 자체가 아니라, 그 문자 너머에 있는 하나님 체험의 세계, 그 깊이를 찾아가야 합니다.
“모든 종교가 같은 것 아니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선행·양심·긍정 같은 공통 가치를 공유하지만, 결국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강조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단순히 선지자나 교사로 보는 데서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 참 하나님이자 참 인간,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봤다. 그분이 곧 나의 구원자”라고 고백합니다. 이 점이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특징입니다.
성탄절이 기독교인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모든 인류에게 제한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는 그 아버지의 제한 없는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줍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에게도, 가만히 있던 첫째 아들에게도 한없이 다가가고, 감싸고, 설득하며, 다시 품어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상징합니다.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옷 벗긴 강도 피해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준 사마리아인”이 상징하듯,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우리 가운데 임했다는 증거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이 우주의 본질은 한없는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또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누며 살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고 초청하신 분입니다. 그 사랑이 분열된 우리 마음을 녹이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해케 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용기와 기쁨을 주십니다. 성탄절은 그 사랑이 세상 한복판에 오신 사건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성탄을 맞는 날에는 “하나님이 정말 낮고 낮은 곳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며, 그분과 같은 마음으로, 주변에 있는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돌아보는 다짐을 합니다.
“의심해도 되느냐, 의심 없는 믿음이 좋은 것 아니냐”라는 질문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의심하는 모습을 드러냅니다. 제자들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 동시에 의심했다고 말합니다. 믿음이란 완벽히 정적(靜的)인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붙들려하면서도 내 한계와 삶의 모순을 직면하는 ‘갈등 속에서 자라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의심이란, 우리의 인식이나 경험을 넘어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데도 끝내 하나님을 붙드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의심은 잘만 다루면 믿음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신 그 순간, ‘하나님 부재’를 경험하셨으나, 끝내 하나님을 향한 결단을 놓지 않으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죄’라는 말 역시 오늘날에는 오해를 부릅니다. “나는 범죄 하지 않았고 나름대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왜 나를 죄인이라고 하느냐” 하고 불편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에는 ‘빚’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주기도문 원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를 탕감해 준 것 같이 우리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지요. 우리 삶이 사실 부모와 이웃과 사회, 자연과 역사에 빚을 지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빚진 존재라는 자각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심지어 생명마저도 빚진 것이며, 무한 감사로 갚아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는 그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채워 주셨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되, 그 자유는 은혜로서 받은 것을 이웃과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빚진 자로서 서로 돕고 돌보는 삶을 살라는 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라고 질문한다면, 세 가지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만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지. 둘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행하셨는지 제대로 알고 동의하는지. 셋째, 그 믿음의 열매가 실생활에서 드러나는지.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고, 함께 예배하고 음식을 나누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는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열매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말 천국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곳’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죽어서 가는 저 먼 세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임하면, 그곳이 이미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동시에 우리는 죽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죽어서 천국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예’라고 대답하면서, 동시에 “천국은 이미 여기서도 맛보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결국,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스스로를 사랑받는 존재, 빚진 존재, 그리고 함께 사랑을 실천해 나갈 동역자로 보도록 이끕니다. 매일의 삶에서 기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더 앞당기는 삶을 살도록 초대합니다. 이것이 긴 이야기를 모두 담을 순 없어도,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기도, 구원, 죄, 천국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한 갈래라고 말씀드립니다. 제가 드린 이 말씀이 부족하더라도, 주어진 자리에서 매일 조금씩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어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모두 삶을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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