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연예인, 드라마 등 세상 것들이 신앙에 방해가 되는가?
어거스틴이 본인의 고백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저를 정결하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지 마소서.” 왜냐하면 세상도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노래라고 하는 것도, 즉 노래는 우리의 감정, 내 속에 있는 상한 감정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또 내가 잊고 있었던 감정들을 떠오르게 만들어 주기도 하니 좋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붙들려서 살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분별력도 필요하고, 그 노래들이 우리를 애상(哀想) 속으로 깊이 빠지게 하거나, 나의 슬픔만 부각하도록 만들어서 내 삶이 마치 그런 것만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노래를 즐기되, 그 노래가 내 삶을 근본적으로 뒤흔들도록 허용하지는 말자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드라마 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배울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드라마에는 정말 배울 것이 많습니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보여주는데, 왜 나쁘겠습니까. 즐기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그 시간에 굳이 성경을 보라고 강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푹 매몰되지 말고, 내 삶 전체를 어떤 지향점으로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중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놀 때는 충분히 놀되,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삶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말라”라고 할 때, 그 ‘세대’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이온(αἰών)’입니다. 이 아이온이라는 말은 굉장히 긴 시간, 장구한 시간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는 주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기를 싫어하는 세대”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즉 사람들을 죄로 이끄는 세대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받지 말라”라고 하지요. 헬라어 원문을 좀 더 직역해 보면 “길들여지지 말라”는 뜻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길들여지지 말아라.”
세상은 우리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을 계속 제시합니다. “이렇게 해야 행복해진다”라고 말이죠. 그러다 보면 우리는 거기에 길들여져서, 원래는 “이 정도로도 충분히 누리고 살면 된다”라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세상이 “그건 불행한 인생이야”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아, 내가 불행한 거구나” 하고, 불행을 학습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큰 슬픔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길들여져 생기는 두 가지 병이 있습니다. 하나는 ‘남과 같아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병’입니다. 남들이 누리는 것은 나도 다 누리고 싶어 합니다. 음악도 들어야 하고, 영화관도 가야 하고, 맛있는 음식 있으면 찾아가서 먹고, 블로그나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어 합니다. “나도 똑같이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거지요. 왜냐하면 이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욕망 속에 동시에 정반대의 욕망도 있습니다. 바로 ‘남들이 할 수 없는 걸 내가 하고 싶다’는 욕망입니다. 남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이지요. 그런데 구별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돈이 우리 시대에만이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가장 큰 우상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어떡합니까. 세상은 “괜찮아, 카드가 있잖아. 신용카드로 쓰면 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빚을 권하는 사회’ 속에서 삽니다. 빚을 져서 내가 원하는 것을 누릴 때는 좋지만, 그다음 순간엔 고통이 찾아옵니다. 빚을 갚아야 하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자기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음악을 좋아하고, 영화를 보고, 이런 일들이 다 나쁜 건 아닙니다. 그런 욕망도 충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우울하게 살기를 원하시는 게 아니고, 우리가 행복하기를 바라십니다. 제 친구 시인 고진하 목사의 시구절에 “쉴 새 없이 명랑하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삶을 충분히 누리도록 허락하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우울해지거나, 자기 삶을 비관하게 되면 자유가 없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 들판의 꿩은 귀하게 여기지만 집안의 닭은 하찮게 여긴다
- ‘흔한 것이 귀하다!’이다. 흔한 것의 익숙함에 속아, 멀리 있는 드문 것만 귀하게 여기는 어리석음을 경계하자.
- 언어가 상생과 소통의 아름다운 ‘금실’(한강 작가 표현)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를 통제하고 고통을 안겨주는 매개가 될 수도 있다.
- 고진하 시인의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라는 책의 목차에 1장 제목이기도 하고, 두 번째 글의 제목이기도 한 표현이 '쉴 새 없이 명랑하자'이다.
그래서 저는 “능히 누릴 수 있고, 능히 내려놓을 수도 있는 자유”가 내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것들로 누릴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하고, 만약 누리지 못한다고 해도 “오케이, 여기까지만 누리자”라고 쿨하게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내적 자유’입니다. 즉 세상을 충분히 누리되, 누릴 수 없다고 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 삶, 이런 삶이 기독교인들이 현실 속에서 갖춰야 할 자유로움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믿음과 의심에 대하여
“아니, 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야 하지? 하나님이 정말 선하신 분이라는 게 맞는가? 하나님이 정말 전능하신 분이고 믿을 만한 분인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많은 것들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인가?”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해, 인식, 경험에 한계가 있고, 하나님은 그것들을 넘어서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계를 넘어선 일에 대해서 “저게 정말이야? 진짜인가?” 하고 되묻습니다.
성경을 보면 믿음을 격려하기도 하고, 의심을 꾸짖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믿음이 핵심이라고 말하지요. 또 “아무것도 의심하지 말고 구하라.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물결과 같고, 두 마음을 품은 불안정한 사람”이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여기서 의심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형을 찾아보면 ‘두 마음(두 생각)’을 뜻하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결국 의심의 반대말은 한마음, 한 생각으로 결연하게 행동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믿음은 좋은 것이고, 의심은 경계해야 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성경을 다른 각도에서 읽어보면, 의심이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늘 우리 곁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6~17절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산에서 뵙고 경배하는데, “그중에 몇몇은 의심하였다”라고 번역된 문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법적으로는 “경배한 그들 모두가 의심했다”로 번역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는데 어떻게 의심을 할 수 있나?” 싶지만, 마태복음을 보면 “믿었지만 의심했고, 의심했지만 또한 믿었다”라는 장면이 있습니다(마태복음 14장 31절 참고). “무서워하면서도 기뻐했다”(마태복음 28장 8절)라는 모순되는 감정도 나타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감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100% 온전하게 경험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리도 솔직하게 고백해 보면, 예배하며 하나님의 크심을 생각하는 순간에도 잡념이 끼어 있고, 우리가 안 좋은 일을 하거나 생각할 때도 그 와중에 도덕적이고 선한 생각이 스쳐 가기도 합니다. 즉 인간은 복합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다시 읽으면, 우리가 흔히 ‘믿음장’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영웅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물들, 예를 들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두 번이나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의심한 것이지요. 다윗이나 모세도 마찬가지로 늘 믿음 충만했던 것이 아닙니다. 실패하고 좌절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삼손의 생애를 보면, 믿음으로 산 장면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도 그 이름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보면, ‘믿음’이라는 말과 ‘신앙의 상태’라는 말을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의 상태란,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신앙 상태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상태 안에 있는 의심은 불가피하고, 어떤 경우에는 필요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이해와 인식,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에서 말하는 여러 가지 진리도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부분이 있기에 우리는 “저게 정말이야? 맞는 말이야?”라고 의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심은 우리의 신앙을 더 깊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그냥 들었을 때는 그 뜻이 막연하지만, 의심의 단계를 거치고 나면 “아, 정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고백이 훨씬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거나, 어떤 분들은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런 고백도 의심을 거친 뒤에는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정말 하나님이 나의 부모가 되신다”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의심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 뼘의 빛 밖에 없을 때 우리가 더듬어 가며 사용하는 지팡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둠 속을 지팡이로 툭툭 짚어보면서, 돌이 있는지 물이 있는지를 확인하듯, 의심이라는 지팡이가 우리의 믿음이 나아갈 길을 확인해 주는 선한 역할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심한다고 해서 곧바로 벌을 주시거나 무서운 표정을 지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지어 그것이 배교의 상황이라 해도 말이지요.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을 보면 ‘기치치로’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이 인물은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조금만 위협이 찾아오면 바로 배교해 버립니다. 그러고 나서는 곧바로 고통스러워하면서 회개하고, “내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왜 이렇게 쉽게 배교했나” 하고 후회합니다. 배교와 회개를 반복합니다. 엔도 슈사쿠는 이 모습을 통해, 믿음과 배교를 반복한다 해도, 그 사람은 여전히 신앙의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건강한 신앙’에 대한 통찰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문제는, 더 이상 ‘믿음’에 대해서도, ‘의심’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는 상태, 즉 하나님을 묻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를 ‘냉담자’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보면, 의심하는 상태보다 더 위험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떤 시기에는 누구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전혀 묻지 않고, 진지함을 잃어버리고 살기는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는 뭘까요. 그것은 (의심이 아니라) ‘좌절’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정말 보잘것없고, 믿음의 실패자이고, 의심하는 자고, 실망스러운 존재야”라고 자기 자신을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생각납니다. 그 순간에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예수님도 그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너는 정말 완벽한 실패자”라고 최종 판결을 내리시지 않으십니다. 우리 역시 스스로에게 최종 판결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악이 번성하고 주님이 내 고통에 침묵하실 때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의심'이 들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으로 나타나신 사건’을 기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고, 우리를 만나주셨던 그 사건” 때문에 하나님이 계심을 압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이나, 하나님이 없는 듯 보이는 사건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허용된 의심이며,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외치셨습니다. 예수님조차 하나님의 부재를 고스란히 겪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하나님은 의심하는 우리를 함부로 타박하지 않으십니다.
결국,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있다”라고 경험한 사건을 근거 삼아 믿을 것이냐, 아니면 “없는 듯하다”는 사건을 보고 전체를 부정할 것이냐, 그 결단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믿음과 의심이 모두 신앙의 상태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을 묻는 사건’이라면 말입니다.
신앙에서 의심은 퇴보가 아니라 전진일 수 있습니다. 의심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생동감 있는 신앙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비 기독교인들에게 인간이 죄인인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죄’, ‘죄인’이라는 말만큼 비기독교인들을 불편하게 하는 말도 없을 겁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내부에서 오랜 시간 신앙생활을 하며 자연스럽게 쓰는 용어는 기독교 내부의 '사투리'로서, 기독교 밖에서는 완전히 이해 불가능한 말로써 상대방에게 오해를 줄 수 있고 전혀 다른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 오해가 상대방의 마음을 매우 상하게 하는 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날 죄, 죄인이라는 말은 대개 윤리적, 도덕적, 법적 의미로 이해됩니다. 대개는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나는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는데, 왜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는가?”라는 반감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거짓말도 잘 안 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해 왔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돕고 싶어 한다. 그러니 내가 비윤리적이거나 무례한 사람도 아닌데, 날 죄인이라 부르면 그건 내 도덕성을 의심하는 말 아닌가”라고 반발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죄, 죄인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상태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성경 원어에서 ‘죄’라고 번역된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죄에 대해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고, 저는 그중 일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혹은 매주 드리는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 번역해 보면 “우리가 우리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해 준 것처럼, 우리의 빚을 탕감해 주십시오”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죄”라고 번역된 단어가 사실은 ‘빚’을 뜻하는 단어(옵헤일레마)이고,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번역한 말도 ‘빚을 탕감해 주다’라는 뜻이 있는 동사(압히에미)입니다.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만 달란트 빚진 종, 백 데나리온 빚진 종)도 빚과 용서가 같은 문맥에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그렇다면 죄를 빚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당신은 죄인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이 빚이라는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능력주의 혁명과 그 한계
오늘날 대부분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적인 이념은 ‘능력주의’입니다. 능력주의란 “한 사람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상이 주어져야 하며, 그런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얼핏 보면 매우 공정해 보이는 주장입니다. 봉건사회의 세습 신분 제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능력주의가 부상했고, 그것은 신분적 제약에 얽매였던 많은 이들에게 혁명적인 사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심화된 오늘날, 능력주의는 여러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에게 물려받는 능력이나 환경이 다르고, 사교육이나 가정환경 등 여러 요인 때문에 절대로 ‘공평한 출발선’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능력주의는 “네가 얻은 성취는 네 능력과 노력의 결과”라고 말하므로, 성공한 사람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실패한 사람은 “능력이 부족하다”는 낙인을 찍히게 됩니다. 그래서 능력주의가 완전히 구현된 사회를 마이클 영은 『능력주의의 출현』이라는 책에서 디스토피아(불행하고 우울한 사회)라고 묘사했습니다. 능력주의는 공평, 정의, 공정을 얘기하지만 실제로 공평, 공정, 정의로운 능력주의의 목표에 다다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죄라는 말은 ‘빚’이라는 말과 교차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빚이란, 자기 힘만으로 해결하지 못해 누군가에게 빌린 것을 말합니다. 만약 갚으면 되지만, 어떤 빚은 갚을 수 없는 수준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께 진 빚, 특히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난 우리는 그 은혜를 갚을 수가 없습니다. 사회나 역사, 자연(생태) 모두에게도 빚을 졌습니다. 내가 입는 옷, 먹는 음식, 사용하는 물건들, 도로와 전기, 수도 같은 사회 기반시설도 그 가치 이상을 내가 누리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사실 갚을 수 없는 빚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기독교가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졌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능력은 부모로부터 타고나는 것입니다. 한부모에게 태어난 여러 자녀들 중에도 어떤 자녀는 공부를 잘하고 어떤 자녀는 운동을 잘할 수 있고 어떤 자녀는 둘 다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노력'으로 그것을 얻은 것이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주어진 것입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공부를 잘할 수 있는 환경에서 사교육에 큰돈을 투자해서 아주 우수한 성적을 거둔 사람이, 재능은 더 우수하지만 사교육의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여 큰 성과를 증명하지 못한 사람보다 낫다고 볼 수 있을까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의 전제는 태어날 때부터, 태어난 후에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능력주의는 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여러 현실적 조건들을 무시하게 만들고 그로 인해 이룬 성취에 대해 고마워하거나 사회에 갚아야 할 빚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능력이 있고 노력했기 때문에 얻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능력과 노력이 부족하므로 그들이 돈을 적게 벌고 하루하루 힘들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능력주의가 아주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이념이 되고 성공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감사와 기쁨을 빼앗습니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성공한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기독교는 우리 모두가 죄인, 빚진 자라고 얘기합니다.
빚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자원을 혼자 동원하다가, 혼자 힘으로는 다 동원하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빌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빌리는 것을 자기가 갚으면 문제가 없지만, 갚을 수 없는 빚들이 있습니다. 빚을 너무 많이 갚았거나 내가 빚을 더 이상 갚지 못하는 상태가 되거나, 아니면 갚을 수 없는 종류의 빚이 생겼을 때는 빚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사실은 우리가 부모님에게 빚졌습니다. 특히 어머니에게 빚을 졌습니다. 어머니는 자기 신체를 내주었습니다. 자기 자궁 속에서 한 존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것은 갚을 수가 없는 빚입니다. 그 빚을 지고 우리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두 발로 서서 밥을 먹기 전까지 계속 빚을 지며 자랍니다. 그리고 그 부모님은 사실 사회에 빚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서 살면서 전기, 수도, 도로, 직장, 학교, 병원 등을 이용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일해서 번 것 이상의 혜택을 받고 산다고 고백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옷이나 내가 먹는 음식들, 그 안에 담겨 있는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생각하면, 과연 내가 지불하는 돈만으로 그것들을 ‘당연히’ 취할 자격이 있는지 곰곰이 따져 보면 감사할 뿐입니다. 그래서 갚을 수 없는 빚이지만, 그 일부를 상환한다는 마음으로 돈을 지불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21세기에 “우리는 죄인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한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인’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누군가에게 빚을 진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빚을 갚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라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에 빚을 졌다고 생각하면 사회의식이라는 것이 생깁니다. 내가 어렵고 힘들 때, 사회적 제도와 장치가 나를 도와주고 보완해 주었습니다. 그러면 사회의식, 공동체 의식이 생겨서 누군가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그 사람이 헤어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마련해 주고 싶어 집니다. 마땅히 그러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회의식이 생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빚진 마음에서 역사의식이 생깁니다. 역사의식이라는 것은 과거 역사로부터 내가 받은 빚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8월 15일이 되면 독립운동을 위해 자기 삶을 바쳤던 분들을 기억합니다. 그분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분들에게 빚졌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분들은 우리처럼 ‘대충 살자, 굴욕을 겪어도 그냥 살고 말지’ 하지 않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자기 삶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생각하면, 그분들에게 빚졌다는 부채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렇게 역사의 부채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생태계에도 빚졌습니다. 공기와 물, 산과 강을 생각해 보면, ‘내가 이렇게 함부로 환경에 피해를 끼쳐도 되는가? 저런 것들로 만든 물건들을 막 사서 소비해도 되는가?’ 하는 의식이 생깁니다. 그러한 의식을 우리는 ‘생태 의식’ 혹은 ‘생태 감수성’이라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연환경과 생태에 빚졌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빚을 총괄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빚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재하게 하셨고, 우리의 여러 실수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용납해 주셨습니다. 저 같은 사람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앉아서 공부하고 연구하며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 누군가 나에게 고맙다고 해주는 것을 과연 내가 감당해도 되는가? 누가 나에게 이런 편의를 베풀어 주는 것을 과연 받아도 되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모든 빚진 의식의 끝자락에 가 보면,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졌습니다.
그래서 달란트 비유에서 “만 달란트를 빚졌다”라고 표현합니다. 만 달란트 가운데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고,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이를 가령 한 데나리온을 10만 원이라고 계산하면, 만 달란트는 6조 원 정도가 됩니다. 우리가 몇백 년을 살아도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가정, 사회, 역사, 생태, 이 모든 것에 빚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갚을 수 없는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기독교가 말하는 큰 의미의 ‘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기독교인은 왜 자꾸 우리 보고 죄인이라고 하는가?”라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능력주의 사회고, 능력주의 이념이 팽배해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거기에 선뜻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빚진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을 “아주 정의로워서 죄를 조금도 봐주지 못하시는 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심지어 저 같은 사람도 누가 조금 잘못하면 봐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고 정의로우시며 완벽하시기 때문에, 조금의 죄도 못 봐주시는 분이라고만 말하면 안 됩니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빚을 진 존재이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빚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라는 큰 말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선 그 모든 내용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기독교의 ‘죄’라는 용어를 전혀 모르는 분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한 가지 측면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빚을 졌다는 이 개념을 ‘청산’ 하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안셀름이라는 신학자가 이를 ‘속전’(贖錢)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무한한 빚을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그 빚을 갚으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갚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완전히 순종하셨기 때문에 “그래, 네가 그렇게 했구나. 그러면 그 빚을 갚은 셈 치겠다” 하고 허락해 주셨다는 것이죠.
사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가 갚아야 할 빚을 예수님께서 대신 갚아 주신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은혜는 내가 가치가 없는데, 내가 아무 기여를 하지 않았는데, 무엇인가를 선물로 받은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을 주시고, 그것을 넘어서서 은혜를 베푸셨으니, 너희도 은혜의 세계 안에 살아라. 내가 너희의 만 달란트를 탕감해 준 것처럼, 너희도 서로 백 데나리온씩 탕감해 주며 살아라”라고 말씀하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빚진 자이면서 동시에 빚을 탕감해 주는 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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