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은 당신에게도 기쁨입니다.... 김학철 목사
크리스마스라고 하는 것은 단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에게도 기쁨의 소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모든 사람, 곧 인류를 향해 전달해 주신 진리가 있기 때문이고, 그 진리를 우리가 깨우칠 때 비록 그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예수님이 전하신 진리를 묵상하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답변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우주에 태어나서 막막함과 두려움 속에서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고, 허무와 허탈에 시달릴 때가 있으며, 고통에 넋을 놓고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삶의 본질, 곧 우주의 본질을 말씀해 주십니다. 이 우주의 본질에는 제한없는 사랑이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알려 주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오늘날만 하는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 생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사역을 하시고 선포하시며 기적을 베푸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시자, 제자들은 “예언자다, 선생님이다”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다시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면, 예수님은 보통의 인간이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으며, 하나님처럼 경배받으실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시라는 이른바 정통 견해가 신약성서에서 가장 지지받는 견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그분이 참 하나님이고 참 인간이라는데, 그게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이유가 되나요?”라는 의문이 들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크리스마스라는 것은 단지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도 기쁨의 소식이 된다고 답변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모든 인류를 향해 전달해 주신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우리가 깨우칠 때 삶을 더 아름답게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그분이 한 생각의 ‘고갱이’가 무엇인지, 그것이 곧 그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저에 대해 “저 사람 누구야?” 하고 제 직업이나 성별, 나이, 외모를 말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분은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야”라고 말해 준다면, 저는 그 말이 훨씬 더 고맙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사회적 지위나 외모, 육체로 나타난 저도 저 자신이지만, 저의 정체성의 핵심에는 제가 가장 깊이 믿고 생각하며 동의하고 실천하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의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가장 핵심적인 생각, 곧 그분 생각의 ‘고갱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위대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을 잘 압니다. 파스칼이 남긴 글 가운데, “이미 지나간 시간들과 앞으로 지나갈 시간들에 비하면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시간은 매우 제한적이고 작은 시간인데, 왜 하필이면 나는 이 순간, 여기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우주의 광대함을 생각하면 나라는 존재가 너무나 미미하게 느껴집니다. 파스칼은 이 어마어마한 우주를 생각할 때 두려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거대한 우주를 가능케 하신 분, 그분의 핵심에는 제한없는 사랑이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그 사랑을 가장 길게 보여 주는 비유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며, 흔히 ‘돌아온 아들’ 또는 ‘두 아들의 아버지 비유’라고 부릅니다. 잘 아시다시피 두 아들이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재산을 미리 나눠 주세요”라고 요청하는데, 중동 문화권에서는 이는 “아버지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뜻과 다를 바 없는 무례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이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재산을 내어 줍니다.
게다가 그 재산은 보통 아버지가 죽은 후에나 처분할 수 있는 것인데, 둘째 아들은 그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팔아 버리고 먼 나라로 떠납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있기 싫고, 아버지의 재산만 필요하다”라는 태도였죠. 그리고 돈을 흥청망청 쓰고 난 뒤 그 나라에 엄청난 기근이 들었고, 그는 유대인들이 혐오스러워할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조차 얻기 어려운 지경이 됩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 집에는 먹을 것이 많아서 종들도 풍족히 먹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생겼구나”라는 말을 제일 먼저 합니다. 이것을 보고 전통적으로는 ‘탕자가 회개했다’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회개라면 “내가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라는 고백이 먼저 나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탕자가 처음으로 떠올린 것은 “먹을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데, 그때 아버지는 먼 곳에 있는 둘째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달려 나갑니다. 가부장적 문화에서 아버지가 달려가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던 행동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아들을 맞이해 주고, 종들에게는 “아들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라”라고 명령합니다. 그건 아들로서의 모든 권리를 회복시켜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큰아들이 밭에서 돌아오다가 집 안에서 들리는 잔치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라고 묻습니다. 종이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하는 겁니다”라고 대답하자, 큰아들은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또다시 밖으로 나가서 큰아들에게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니 함께 기뻐하자. 그리고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었으니 내 것이 네 것이 아니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큰아들은 “저는 아버지와 여러 해 같이 지냈는데,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도 잡아 주신 적이 없습니다”라고 불평합니다. 결국 큰아들도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친구들과 즐기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에나 지금이나 매우 낯설고 충격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아버지의 모습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바로 그 분이 우리에게 “우주의 본질에는 제한없는 사랑이 있다”라고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 크리스마스를 기뻐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제한없는 사랑이 우리에게 왔고, 우리가 그 사랑을 받으며, 우리 또한 제한없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옷까지 빼앗긴 채로 죽게 된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옷을 보고 그 사람의 신분, 인종, 계급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이 사람은 옷이 벗겨졌기에 누군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갔지만 그냥 지나친 것은 그 사람의 신분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이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 도움을 줍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혼혈로 보고, 신앙을 왜곡한다고 생각하여 혐오했지만, 그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처럼 서로를 구분 짓는 장벽을 뛰어넘어 서로에게 제한없는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크고 위대한 분이라 짧은 시간에 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성탄절을 맞아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왜 그분의 탄생을 기뻐합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본질, 곧 이것을 창조하신 분의 본질이 제한없는 사랑임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그 제한없는 사랑을 받으며, 우리 또한 제한없는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예수님의 이 생각을 가장 잘 담은 시가 우리 모두가 좋아하고 외우는 윤동주의 시라고 생각합니다. 윤동주의 시 「서시」 첫 구절에서 “하늘을 우러러”라고 할 때, 이것은 단순히 하늘을 올려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태초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우주의 본질, 인간을 넘어서는 거대한 실재를 우러러본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구절도, 단순히 밤하늘의 물질적 별을 노래한다기보다,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제한없는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는 구절이 이어지는데, 하늘과 별을 우러르는 마음이 죽어가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잘 아시다시피 기독교 신앙이 깊었던 분인데, 그의 「서시」가 기독교 신앙이 없는 분에게도 성탄의 의미를 이해시키는 데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늘 특별할 것 없이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릴 것 같고, 가족들의 대소사에 대해 결과가 어찌 되었든 감사하며, 다시 다짐할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굳이 어려운 시기와 장소, 그리고 그 신분을 택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기억하고, 다시금 마음을 새롭게 하자는 생각을 크리스마스와 함께 오는 새해에 하게 됩니다.
“주님, 오세요. 빈자리가 있습니다. 쓰러진 사람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당신의 구원을 모두에게 말하고 펼치는 빈자리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세요. 빈자리가 있습니다. 힘없는 사람의 편이 되어 함께 싸워 줄 주님의 구원을 살아갈 용기가 넘치는 빈자리가 있습니다. 보세요. 빈자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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