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 김기석 목사
내 삶이 흐트러져 있거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연약함 속에 있거나 낙담 속에 있는 까닭은 어쩌면 아침 기도의 소홀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나면,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하며 살 수밖에 없는데,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유한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 밖으로 쫓겨나잖습니까? 그래서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에덴의 동쪽 땅 이름을 영어로는 ‘Nod’라고 얘기하는데, 그 의미가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땅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의 어떤 기본 조건, 즉 불안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으며 마음에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다 불안과 공허함을 내면 속에 간직하고 삽니다. 불안하다고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안식이 없다는 것이고, 안식이 없다는 것은 일정한 결핍이 있다는 말입니다. 뭔가가 결핍되어 채워지지 않는 상태이고, 그 결핍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이 기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기도라는 것이 꼭 형식을 갖춰서 하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기도합니다. 예를 들면, 갓난아기가 막 울 때도 그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지만, “내가 배가 고픕니다” 하고 자신의 필요를 누군가에게 호소하는 것이니까요. 또 자연재해를 만나서 살던 집이 물에 휩쓸려 가고, 비바람으로 과일들이 모두 떨어져 버린 것을 볼 때, 농부들은 망연자실(茫然自失)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잖습니까. 그 하늘을 바라보는 ‘빈 시선’도 기도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마음으로 예배당에 들어가 엎드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 들고 옵니다”’라고 드리는 기도 역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기도는 없느냐 하면, 분명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있습니다. 흔히 기도를 두고 “기독교인의 호흡과 같다”라고들 합니다. 들숨과 날숨이라는 것이죠. 다시 말해 숨을 쉬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으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뜻이 그 표현 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핵심은, 어떻게 보면 박하기 이를 데 없는 현실 속에서 내 영혼의 중심이신 분을 찾아가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내 삶이 불안하고, 기약할 수 없고, 안식이 없는 상태인데, 그 현실의 가장자리로 떠밀리고 있는 내 마음을 영원한 평화가 있는 곳에 ‘붙들어 매기’ 위한 일체의 행위가 기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는 언제냐 하면, 인생이 어려울 때입니다. 사업이 어려워지면 새벽기도회를 시작하고, 병에 걸리면 철야기도를 시작합니다. 이는 기도를 문제 해결을 위한 도깨비방망이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내가 호출하기만 하면 언제나 달려와 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처럼 여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농담처럼 “하나님은 비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해결사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만,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가 바라는 것에 응답해서 문제를 해결해 주셔야 한다”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고 기뻐하고,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왜 내 절박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느냐”라고 원망하고 믿음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일제 시대에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쓰셨던 김교신 선생님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정확한 해수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1943년 무렵으로 추정됩니다. 그해 섣달그믐날, 김교신 선생님이 자기 일 년을 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지난 1년 동안 나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 부족한 것이나마 하나님 앞에 바친 기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런 말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더욱더 감사한 것은, 제 기도를 기각해 주신 것입니다.” 라고요.
절박함 속에서 드렸던 기도를 하나님께서 거절하신 것이 더 고맙다고 하니,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만약 내가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면, 세상이 과연 아름다울까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각자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 기도가 전부 응답된 세상을 상상해 보면, 그 세상이 정말 좋을까 의문스럽습니다. 김교신 선생님은 그 기각된 기도 덕분에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졌고,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삶의 지혜도 배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기각된 기도가 오히려 복일 수도 있다는 얘기를 김교신 선생님은 그 글 속에 담아낸 듯합니다.
결국 기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흐트러지기 쉬운 내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중심에 잇기 위해 드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는 것이죠. 사실 ‘연결한다’라고 해도, 저는 ‘조율한다’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기타를 칠 때, 줄이 너무 느슨해도, 너무 팽팽해도 제소리를 내지 못하듯, 일상을 살면서 내가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반대로 늘어져 버리면 하나님의 선율을 연주할 수 없는 악기가 되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그 마음에 따라 나의 마음과 지향을 조율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음악인이 있는데,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분들입니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기타 한 곡을 다 치고 나면, 곡이 끝나는 순간에 틀림없이 기타를 다시 조율하더군요. 기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준으로 삼고, 내 마음을 조율하는 것이 바로 기도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오는 행복감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으로만 살았을 때는 지극히 협소한 시각으로만 세상을 보았는데, 이제 하나님의 마음과 연결되면서 나 자신을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내가 처해 있는 현실 역시 새롭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시인이 “내 삶이 왜 이렇게 힘드냐, 정말 많은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더 이상 견딜 힘이 없다”라고 고백하다가, 문득 지난날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를 기억하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결국 자신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달라진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면서 현실이 주는 억압감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애절한 탄식으로 시작한 시편이 마지막에는 찬양으로 귀결되는 까닭이, 객관적 상황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는 시인의 ‘입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청해야 하는데, 그것만 해야 합니까?” 아닙니다. 정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조율되고 나면, 우리는 확신할 수 있습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주신다”라는 믿음이 내게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말씀이 있는데, 요한복음 15장 7절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 구절을 읽을 때, 끝부분인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에 밑줄을 긋습니다. 그래서 “아,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다”라는 말만 좋아하죠. 그러나 그 부분만 붙들고 소비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그 앞에 있는 말,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라는 존재론적 차원의 말씀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즉, 정말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것, 그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늘 말씀하셨잖습니까.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이런 존재론적 일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는 모습은 제멋대로이면서, 하나님께 힘만 빌려 내 욕망을 이루려 한다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이라는 것은 곧 ‘존재’를 말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속에 자리 잡고 있을 때, 세상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고, 귀신 들린 사람을 보면 귀신을 내쫓아 온전하게 해 주고 싶어 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든 그 사람의 생을 긍정해 주고 싶어 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에 깃들어 있다면, 그다음에 우리가 청하는 것은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아 속상해하는 분이 계시다면, “왜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과의 깊은 일치를 내가 진정으로 소망하고 있는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속에 머물러 있는지를 먼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부분을 다시 회복하고, 다시금 기도한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부끄럽게 낭비한 시간, 이기지 못한 유혹들, 연약함과 낙담, 다른 사람과의 교제나 우리 생각 속에 나타나는 무질서와 방종은 종종 아침 기도의 소홀함에서 비롯됩니다.” 내 삶이 흐트러져 있거나,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거나, 연약함 속에 있거나, 낙담 속에 있는 까닭은,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연결하고 조율하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기각된 기도 때문에 속상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속상해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부터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리라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몇 마디 하고 나면 할 말이 없어요.
어느 분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기도할 때 저는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가 “아니, 예배당에 와서 아무것도 안 하십니까?” 하고 물으니, 그분이 대답하기를 “아니요, 저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느냐”고 물으니, “하나님도 저를 바라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게 정말 중요한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도 나를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마음의 일치가 일어났을 때 비로소, “제가 원하는 것이 이렇습니다. 제가 이것 때문에 속상합니다. 누군가가 정말 밉습니다. 혹은 해결되지 않는 문제 때문에 마음이 찢어질 듯합니다”라고 내어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 문제가 이렇게 해결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중요한 것은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고 재빨리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 털어놓은 뒤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애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속에 어떤 형식으로 들릴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늘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한다면, 성령께서 그 말씀을 떠오르게 하실 수 있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이 될 수 있습니다. “아, 네가 정말 힘들었구나. 네 마음, 네 심정을 내가 안다. 그러나 나는 네가 그 미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너를 신뢰한다.” 이런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도 필요하고, 하나님께 청하는 시간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려고 마음을 여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매일 아침 몸 기도
아침에 일어나면 누구나 세수도 하고 정신도 차리곤 합니다. 그때 영혼의 샤워를 하듯,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를 두고 기도하는 겁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나님, 오늘 제가 생각하는 바가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합니다. 눈을 두고는 “하나님, 오늘 제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보셨던 그 눈빛으로 바라보게 해 주십시오. 혹시 남의 허물만 찾아내는 미움의 눈이 되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귀를 두고는 “하나님, 달콤한 말만 골라 듣지 않게 해 주시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시고, 또 오늘 누군가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는 아픔이나 어려움을 알아들을 수 있게 제 귀를 열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코를 두고도 “제가 사람들 앞에서 오만하게 콧대를 세우지 않게 해 주시고, 들숨과 날숨 사이에 하나님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내쉬게 해 주십시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하나님의 생기가 제 속에 채워지고, 숨을 내쉴 때마다 제 속의 부정적 감정이 사라지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입을 두고는 “오늘 제가 먹는 음식이 내 육체에 활력이 될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되게 해 주십시오. 또 제가 말할 때 누군가를 해치는 말이 아니라 세워 주는 말, 격려하는 말이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손을 두고는 “제가 누군가와 악수를 나눌 때, 제 손을 통해 주님께서 그를 붙잡아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고, 발을 두고는 “제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몸 전체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쭉 훑으며 기도하고 나면, 조금은 더 나은 하루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도 늘 그렇게 기도하는 편입니다.
요한계시록의 144000명. 나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 김기석 목사
구원받는 방법을 정말 알려 드릴까요? 14만 4천 명 얘기하잖습니까. 구원받은 사람 수가 14만 4천 명이라고. 그런데 그 14만 4천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두세 가지 자격 시험을 봐서 커트라인을 정하고, 성적순으로 사람이 구원받는 그런 세계가 전혀 아니지요. 제 친구 시 중에 “천국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없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아라비아 숫자는 사람을 서열화하고 계량화해서 줄 세우잖습니까. 그러니 14만 4천에 들어가려면 노력하고 점수 따고 시험 봐야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정신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지금 전 세계 인구가 70억 명이 넘는데, 그중에서 딱 14만 4천 명만 구원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대실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은 이야기지요. 사실 요한계시록이 14만 4천을 얘기한 까닭은, ‘악마의 수’라고 흔히 말하는 사탄의 세력, 즉 로마 제국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꿈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상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에서 3은 하나님을 상징하고, 4는 세상의 완전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이를 더하면 7, 곱하면 12가 되고, 여기에 12 × 12 해서 10의 3승을 곱해 14만 4천이라는 숫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완전하다’라는 의미일 뿐, 어떤 특정인을 제한하는 ‘커트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많은 분이 “내가 구원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궁금해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 이단 집단은 “구원받았느냐, 그게 몇 년 몇 월 며칠이냐”고 집요하게 묻습니다. 뚜렷한 날짜로 답하지 못하면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인가” 하고 불안해합니다. “내가 구원받았나요?”라고 물어볼 때, 우리가 도리어 그분께 “어떤 구원이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이라는 말을 매우 다양한 의미로 쓰거든요. 병 들었다가 치유받은 것도 구원이라고 하고, 분열됐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로 회복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하고, 더러움에 빠져 있다가 깨끗한 삶을 지향하게 되는 것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총체적 구원이라 함은 “하나님의 큰 생명 안에 내가 속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구원받았는지 알고 싶다”고 한다면, 제가 아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독일의 18세기 작가이자 사상가인 레싱(Lessing)이 쓴 희곡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에서 나오는 ‘반지 이야기’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손에 넣었는데, 이 반지를 낀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래서 그 반지를 낀 사람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반지가 자식들에게 전해질 때는, 아들 중 가장 반지에 합당한 삶을 사는 이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죽기 전에 세 아들 모두 훌륭하니 누구에게 반지를 줘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솜씨 좋은 세공사를 찾아가 똑같은 반지를 두 개 더 만들게 했습니다. 구별이 안 되게 만들었지요. 그리하여 아버지는 세 아들에게 하나씩 건네줬습니다. 세 아들은 각자 “아버지가 내게 반지를 주셨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보니, 형제들이 똑같은 반지를 끼고 있으니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재판관에게 간청하지만, 재판관도 도무지 알 수 없어서 말합니다. “저 반지를 소유한 이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했으니, 너희가 진짜 반지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도록 해라. 누가 진짜 반지를 가진 사람인지, 삶으로 증명해 보이라.” 이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자기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욕심 많고, 배타적이고,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이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진정한 구원이란, 일그러진 생명을 온전하게 하고, 깨졌던 마음을 사랑으로 녹여 하나 되게 하고, 그로써 순수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삶의 지향이 그렇게 바뀌었다면,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구나” 하고 확신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렇게 살아 보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삶’입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넌 구원받지 못했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삶으로,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며 구원받은 사람”임을 입증해 보이면 되는 것이지요.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빛이 세상에 왔는데 세상이 어두워서 빛을 영접하지 않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영접한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내 안에서 작동한다면, 세상이 뭐라 해도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생명 속에 들어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시간을 무한히 연장해서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에 접속하여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이 나타나는 모습이 감사이고, 경탄이며 감탄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간 중요한 능력 중 하나가 ‘감탄하는 능력’이라고 봅니다. 끊임없는 경쟁 속에 몰아놓아, 옆 사람을 경쟁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불행해집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지 안다”라는 마음으로 삽니다. 내가 형편없어 보이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고맙고, 내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곁에 있는 사람 역시 고맙게 여기게 됩니다. 그런 마음이 곧 ‘영생 속에 머무는 삶’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일 성수 ... 김학철 교수
어떤 분이 칠순 잔치에 갔는데, 그 어머님이 사남매를 두셨고, 젊었을 때 남편과 사별하여 30대 초반에 홀로 되었는데도 자녀들을 훌륭히 키웠다고 합니다. “너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같이 여행을 떠나자고 해서 함께 다녀왔는데,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딱 한 시간 동안. 그런데 그 한 시간이 지금의 40년을 견디게 했다.” 이런 고백을 하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 ‘손을 꼭 잡아 주었던 한 시간’이야말로 깊이로 흐르는 ‘카이로스’의 시간이죠. 크로노스라는 물리적 시간으로 보면 한 시간일 뿐이지만, 그 시간이 엄청난 두께를 가지고 40년이라는 세월을 버티게 해 준 것입니다. 안식일을 기억해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도, 이런 ‘깊이로 흐르는 시간’, ‘두께를 가진 시간’을 마련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주일에는 버스도 타면 안 되고, 음식을 사 먹으면 안 되고, 예배를 빠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고들 합니다. 물론 성경 어디에도 “일요일은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드려야 한다”라는 문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는 일요일에 예배로 모일까요. 가장 유력한 추정은 예수께서 금요일 저녁에 돌아가시고 토요일 하루를 지나, 일요일 새벽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다는 것입니다. 설득력이 있지요. 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식사를 함께 나누시고, 제자들도 예수님의 임재를 그렇게 체험했습니다. 이처럼 ‘주일 예배’는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져 온 전통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너무나 중요했으므로, 어떤 사람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하루가 특별히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박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어떤 사람에게는 어떤 날이 중요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모든 날이 다 똑같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바로 유대인의 전통에서 바울이 “안식일이 문자 그대로 안식일에 지켜지는 것은 새 신앙에서 결정적이지 않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억하고 신앙생활을 위해 하루를 떼어내는 것이 중요하지, 그것이 꼭 어느 요일이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성수’(聖守)라는 말, 즉 ‘거룩하게 지킨다’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 정신을 떠올려 보면,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에 기록된 십계명의 제4계명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으니, 너희도 쉬어라”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어 “너희도 쉬고, 아들딸도 쉬게 하고, 남종 여종도 쉬게 하고, 집짐승도 쉬게 하고, 나그네도 쉬게 해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사실 엄청나게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고대 바빌론이나 그리스 신화에서 신이란, 인간을 부려서 자신들은 쉬는 존재로 그려졌거든요. 그런데 성경은 “누구나 다 쉬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신분, 성별, 나그네, 짐승까지도 쉰다고 선언하는 것 자체가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신명기에는 또 다른 해석이 붙습니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기억하고, 내가 너희를 해방시켰으니, 너희도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 즉 안식일은 ‘종살이하던 곳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억하고 누리는 날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안식일 논쟁에서 “안식일은 생명을 구하는 날이다”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안식일 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부활이 맞물려, 오늘날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며 그 정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날을 ‘거룩하게 지킨다’라는 말은, 우리의 크로노스적 시간을 잠시 멈추고 ‘카이로스적 시간’, 즉 깊이로 흐르는 시간을 마련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일성수를 꼭 해야 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일요일 아침에 반드시 교회에 가서 예배드려야만 하느냐”라는 말이라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주일과 성수의 개념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반드시 주일성수를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공예배 시간에 참석할 수 없다면 다른 시간대라도 잡아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예배하고,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교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잘 못 지킵니다. 규칙적으로 모이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교제하는 ‘제도 교회’의 장점은 분명히 있습니다. 물론 제도 교회에 문제가 많기도 하지만, 우리가 물을 담으려면 그릇이 필요하듯이 신앙을 유지·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제도적 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교회에 실망한다고 바로 떠나 버리는 것보다는, 교회를 회복시키고 살릴 길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부부 사이에도, 형제자매 사이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어쩔 수 없이 티격태격하듯이, 교회 안에도 갈등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갈등 없는 곳을 찾아 떠난다 해도, 어디든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갈등은 또 생깁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갈등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우회하고 조절하는 법을 익히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지요. “제도 교회를 떠나겠으니 나는 구원에서 탈락인가”라고 물으신다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동지, 믿음의 형제자매와 지속적으로 만나고 교제하는 것은 꼭 필요합니다.
부활 ... 김학철 교수
저는 성서에 기록된 부활의 증언들이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되어 있으니 그냥 믿으면 되지, 왜 다른 이야기가 필요한가”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요. 그런 분들은 그냥 믿으시면 됩니다. 하지만 “부활이 정말 역사적 사실인지”를 지적으로나 교양 차원, 역사학적 차원에서 알고 싶어 하는 분들도 계시니, 그분들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무엇이 사실이냐고 물으면, 사실에 대한 정의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전적 정의로 “사실이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 혹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학문적으로 들어가면 간단치 않습니다. 실제로 ‘있다, 없다’를 묻는 존재론은 서양 철학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분야이니까요.
여기 종이가 하나 있다고 해 봅시다. 이 종이는 관찰이 가능하고, 무게나 크기 등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은 객관적, 실증적 사실이 됩니다. 그런데 “내 마음속에 사랑이 있다”라는 말은 주관적 사실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관찰하고, 제 행동과 말이 그 사랑을 입증해 주면 ‘상호주관적 사실’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 사실과 달리 ‘반복적 관찰’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는 ‘개연성과 확률’이라는 기준이 작용합니다.
그러면 부활이 역사적 사실인지 어떻게 판단하냐 하면, 크게 두 가지 방법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더 간단히 설명되는가, 아니면 풀지 못하는 숙제가 더 많아지는가”를 따져보는 것입니다. 둘째, 그 사건을 말하는 증언이나 기록, 유물이 일관성과 적절성을 갖추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이라는 방대한 기록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특히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밝히 고백한 것처럼, “예수님이 게바(베드로)에게, 열두 제자에게, 한 번에 500명 넘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와 모든 사도에게, 그리고 마지막에 바울 자신에게 나타나셨다”라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원래 바리새파의 엘리트였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하루아침에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결국 순교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만약 부활한 예수님을 바울이 만나지 못했다면, 이러한 극적인 변화가 가능했을까요?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십자가 처형 당시에는 두려워서 도망쳤지만, 오순절이 되자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너희가 죽였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가 전승에 따르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렇게 겁 많고 평범했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외칠 만큼 강력한 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바로 “부활”이라고 제자들은 말합니다.
만약 제자들이 집단 착각을 했거나 거짓말을 했다고 해 보십시오. 거짓말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내던지는 게 과연 개연성이 높을까요. 혹은 예수님이 죽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가사 상태였다고 해도, 그분이 어떻게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고, 제자들을 그렇게 극적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요. 이러한 질문들을 따라가 보면, 부활을 실제로 믿고 증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결론처럼 보입니다.
물론 복음서들의 부활 기사가 조금씩 다른 것도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마가복음은 막달라 마리아와 또 다른 두 여성 제자, 누가복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나 등등이 등장합니다. 또한 천사를 만나는지, 청년을 만나는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곧바로 만나는지 그 서술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러나 이런 차이가 오히려 그 사건이 충격적인 ‘실제 사건’이었음을 방증합니다. 인간은 예외적이고 압도적인 사건 앞에서 세부 내용을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기 마련이니까요. 만약 복음서들이 부활 내용을 ‘판박이처럼’ 완전히 똑같이 써 놓았다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을 겁니다.
우리는 의학이나 과학의 상식으로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이고 경험입니다. 그러나 성서의 증언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으셨고, 그 시신이 없어진 뒤 예수님과 동일하면서도 다른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합니다. 제자들은 그 ‘부활 사건’을 가감 없이 기억하려 애썼고, 그 결과가 오늘 우리가 가진 복음서, 서신서 등 신약성경의 부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역사적 사실이자, 동시에 신앙적 고백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성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완벽하게 입증될 수는 없겠지만, ‘부활이 없다고 가정했을 때 설명되지 않는 많은 변화들’을 떠올리면, 부활을 믿는 편이 오히려 역사적 진실에 가까운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 부활의 과학적·의학적 검증이 가능한지 여부는 우리 지성을 뛰어넘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부활이 없었다고 해서는 제자들의 삶, 바울의 삶, 신약성경의 탄생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분명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이루는 역사적 사실이며, 신앙고백의 핵심이라고 저는 확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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