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금 - 십일조 ... 김학철 목사
십일조는 우리가 자기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바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득이 있으면 그중 10분의 1을 떼어서 헌금을 하고, 이를 십일조 헌금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십일조가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어떻게 쓰여 있는지를 자세히 보면,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조금 해 드리고, 그다음에 십일조 정신이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날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다소 의외일 수 있지만, 우리 한국 교회에서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만큼 성경에는 십일조에 관한 이야기가 많지는 않습니다.
가장 먼저 십일조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창세기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이라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그 대목에서 처음 십일조가 등장합니다. 또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베델이라는 곳에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립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십일조의 의미는 “내가 얻은 재산이 내 능력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 증거로 십일조를 드리는 모습이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십일조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십일조 정신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지금 십일조를 누구에게 드리며, 또 십일조를 받은 이들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분이므로 먹을 것도, 입을 옷도, 집도 필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린다고 해도, 그분에게 필요한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십일조가 필요하지 않으시고, 십일조가 필요한 존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사람에게 십일조가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구약성경 전체적으로 볼 때, 11조의 정신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헌신을 향한 십일조’, 혹은 ‘헌신하는 사람을 위한 십일조’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민수기 18장 21절에서 29절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회막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이 시기는 아직 성전이 있기 전이므로), 제사장에게 재물을 바칩니다. 제사장은 그 재물을 관리하고, 그 일부를 통해 생활을 이어 나갑니다. 하나님께 바칠 것은 바치고, 남은 재물을 가지고 사역자들이 먹고삽니다. 대신 제사장과 레위 지파 사람들은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십일조가 쓰이라고 민수기는 말해 줍니다. 이것은 그들의 헌신에 대한 보수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는 구약의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 사람들이 아닙니다. 종종 자신이 구약의 제사장이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있지만, 큰 오해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구약의 제사가 아니고, 따라서 예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목회자도 구약의 제사장이 아닙니다. 흔히 자신이 다닌 신학대학을 높여 “선지동산”이라고 부르는 예는 있어도, “제사장의 동산”이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개신교 목회자는 제사장이나 레위 지파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짚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헌신을 향한 십일조’는 누굴 위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가치를 공적·공공 영역에서 구현하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의미로 보면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자비·신의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 등을 공적 영역에서 구현하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사람들, 곧 이런 분들을 위해 십일조가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헌신을 향한 십일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두 번째로는 ‘축제를 향한 십일조’입니다. 신명기 14장 22절에서 27절 말씀에 그것이 잘 나옵니다. 많은 분이 이 본문을 잘 모르시기에, 제가 조금 길지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새번역 성경 기준으로) “당신들은 해마다 밭에서 거둔 소출의 십분의 일을 드려야 합니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 소나 양의 처음 난 새끼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름을 두려고 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서 주님 앞에서 먹으십시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여기서 ‘경외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야레’인데, “두려워하다”라는 말보다 “공경하다”라는 뜻이 더 가깝습니다. 즉 십일조를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서 먹음으로써,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이 택하신 그곳이 너무 멀어서 가져가기 어렵다면, 그 십일조에 해당하는 곡식이나 재물을 돈으로 바꿔서, 그곳에 가서 다시 내가 먹고 싶은 것을 사서 가족과 함께 즐겁게 먹으라”라고 나옵니다. 소든 양이든 포도든 독한 술이든, 마음에 드는 것을 사서 하나님 앞에서 가족과 함께 즐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성 안에 사는 레위 사람들을 저버리지 마라. 그들은 유산이 없고, 차지할 몫도 없다”라고 이어지는데, 십일조로 마련한 음식 중 일부를, 축제의 자리를 가능하게 해 준 레위인들을 위해 떼어 주라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축제를 향한 십일조’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중요한 정신은,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기쁨과 행복을 통해 하나님을 공경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축제가 가능해지도록 헌신한 레위인들을 기억하고, 그들에게도 몫을 주는 따뜻한 배려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공경”과 “즐거움” 그리고 “헌신자에 대한 기억”이 어우러진 자리가 바로 ‘축제를 위한 십일조 정신’입니다.
세 번째로는 ‘돌봄을 향한 십일조’입니다. 신명기 14장 28절에서 29절에 보면, “3년마다 그해 소출의 십분의 일을 따로 모아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성 안에 사는 레위 사람, 그리고 나그네(경제적 난민, 정치적 난민 등), 고아, 과부 등 대표적 약자를 불러모아 그들을 배불리 먹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이 곧 십일조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십일조가 신앙의 핵심 중 하나로 거론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돌봄을 향한 십일조’의 정신입니다.
정리하자면, 헌신을 향한 십일조, 축제를 향한 십일조, 돌봄을 향한 십일조가 모두 잘 살아날 때,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드리는 십일조도 정말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거둔 십일조를 어떻게 사용해야 십일조의 정신이 잘 구현되느냐 하는 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일조가 남용되거나 오용되는 것을 크게 걱정하셨습니다. 아모스서나 말라기 등 구약의 예언자들도 “너희가 십일조를 자랑하긴 하나, 그 본래 정신을 잊었다”라고 꾸짖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가 박하와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도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더 중요한 것을 버렸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42절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잊은 채 십일조만 드리는 것”을 비판하십니다. 즉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작 정의·자비·신의를 실천하지 않으면, 그 십일조는 본말이 전도된 것이고, 전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정의란 사람을 올바르게 대하는 것이고, 자비란 굳이 청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의 처지를 살펴보는 마음입니다. 신의란 서로를 향해 진실하게 행동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 곧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도 함께 품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바로 이 정의·자비·신의·사랑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강의하면서 나름대로 십일조를 다시 정리해 봤는데, 그 정신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헌신을 위한 십일조, 축제를 위한 십일조, 돌봄을 위한 십일조라는 세 가지 정신을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잘 살려 낼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 십일조가 정말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려지고, 그 사용도 합당해질 것이라 믿습니다.
성경이란 무엇인가? ... 김기석 목사
그리고 성경 66권(구약 39권, 신약 27권)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을 찾아오시는 하나님”과, 반대로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인간”이 만나는 현장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만남 속에서 참된 삶의 길이 무엇인지, 사람은 누구이며 하나님은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통찰들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 보면, 먼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면에서 일어난 사건을 언어로 표현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려고 했을 때, 그 기록이 쌓여서 성경이 된 것입니다. 즉 문자(성경)보다 먼저 일어난 것은 하나님 체험이고, 그 체험을 내면화한 성찰의 과정입니다. 이후 그 체험을 전하기 위해 텍스트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읽고 머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그 안에 담긴 ‘하나님 체험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성서 문자주의에 매이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선행, 자비, 자기비움... 결국 종교는 다 똑같은가? ... 김학철 목사
그러면 “결국 종교가 다 같은 것 아닌가, 궁극적으로는 똑같은데 가는 길만 다른 것 아닌가”라는 말이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교나 유교, 이슬람 등을 공부해 보면, 기독교 신앙이 얼마나 독특한지 알게 됩니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공유하는 가치(선행, 양심, 긍정의 힘 등)도 많지만, 기독교만의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종교학적으로 볼 때, 기독교는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중 하나로, 유대교·이슬람교와도 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단순한 예언자나 랍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자 참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그리스도)이시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완성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고유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사역을 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시고, 불의를 꾸짖으시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 형을 당해 죽으셨지만,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사건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도 빌립보서에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라고 고백하며, 이미 예수님이 단순한 사람이 아니시라고 찬양했습니다. 마태복음 역시 동방 박사들의 경배(2장)와 제자들의 경배(28장)로 시작과 끝을 맺으며,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제시합니다. 요한복음에 이르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셨으며, 예수님이 그 말씀(로고스)으로 이 땅에 오셨다고 선언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의 전통에서, 인간 예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이들이 그분을 경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독특한 종교임을 보여 줍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리합니다. 저는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분들께 감히 예수 그리스도를 한 번 만나 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만남 속에서 “아, 기독교란 이런 것이구나. 참 매력 있고 아름다운 신앙이구나” 하고 느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학교에서 비(非)기독교인 학생들(약 80~85%)에게 기독교 관련 강의를 하면, 학기 말에 서너 명의 학생은 저를 찾아와 눈물을 보이며, “전에는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라고 말하거나, 교회를 다니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강의실에서 전도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기독교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해 줄 뿐인데도, 학생들이 예수님 이야기를 접하면서 새로운 눈이 열리고, 자기 삶에 또 다른 진리 체험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아, 예수님은 정말 매력 있는 분이구나. 기독교는 우리 삶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 힘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만약 기독교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두 교회나 한두 사람의 말만 듣고 “이것이 기독교”라고 단정 짓기보다는, 관련 자료를 접하면서 차근차근 알아가 보시길 권합니다. 성경도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 역사적 예수나 기독교 사상에 대해 소개해 주는 책이나 강의를 들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기독교라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종교인지, 또 삶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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