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살 때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제대로 믿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믿는다는 것은 아마 우리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가 이 공간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만약 5분 뒤에 이곳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면 저는 여기 앉아 있지 못하고 뛰쳐나갈 것입니다. 이 공간에 앉아 있는 것이 저에게 위험이 된다면 앉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식당에 가서도, 별다른 의심 없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습니다. 그런데 만약 숟가락에 독이 묻어 있거나 음식에 나쁜 것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지하철이나 택시를 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은 ‘믿음’을 바탕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 없이는 우리 삶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가장 밑바탕에서 삶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살아가는 사람에게 믿음은 기본적인 삶의 태도이자 습관이며, 삶의 방식입니다. 믿음 없이는 어떤 사람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대로 믿는다’고 할 때,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점은 ‘제대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아이가 야구공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아, 저 아이는 야구공을 제대로 던질 줄 아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야구공을 던지는 표준적이고 기능적인 방식을 충족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숟가락질을 ‘제대로’ 한다고 말할 때도, 그 방법을 정확히 실천했을 때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그 믿음의 방식이 기대할 수 있는 수준, 곧 기준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 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는가?
첫 번째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한다면,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 사회적 관계, 국가나 민족, 심지어 교회조차도 하나님 자리에 올 수 없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오직 그분만 따라 사느냐 살지 않느냐가 중요한데, 여기 다른 무엇이 끼어 있다면 ‘제대로 믿는다’고 볼 수 없는 것이지요.
그 ‘다른 무엇’이 곧 우상입니다. 십계명 제1 계명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고 하지 않습니까. 히브리어 원문에 따르면 ‘나 외에’는 ‘내 얼굴 앞에, 내 얼굴 곁에, 내 얼굴과 나란히’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 하나님 곁에, 하나님과 나란히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른 신을 옆에 두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서 스스로를 점검해 보실 때, “내가 정말 하나님께 절대적인 신뢰를 두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신뢰를 둔다고 하면서도 그 곁에 무언가를 두고 있지는 않은가?”를 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만약 다른 것을 함께 신뢰한다면, ‘제대로 믿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앎과 동의가 있는가?
두 번째로는 ‘믿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그 하나님에 관한 것이 참이라는 사실에 동의하고 수용하는가’입니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그분에 대해 전해지는 바를 ‘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 하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 베드로 사도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설교에서 “너희가 못 박은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 그런데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라고 전했습니다. 이를 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형제들아, 그러면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베드로의 말씀, 즉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라는 고백이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나중에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주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예수가 주이시고 그리스도이시며, 곧 하나님이시라는 이 고백이 우리의 믿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믿는가, 누구를 믿는가’를 생각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거기에 동의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그저 역사적으로 “주” 혹은 “그리스도”라고 불렀다고만 생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분이 나의 주이시며, 나의 그리스도이시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무신 중보자이심을 알고 받아들이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있는가?
세 번째가 사실상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그 ‘믿음의 열매’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믿음의 열매가 구체적으로 삶 속에서 나타나는지, 이웃과의 관계나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지가 중요합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베드로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권유하였습니다. 이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을 ‘믿는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결과가 나타난 것은...., 사도행전 2장 44절 이하를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었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으며,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또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음식을 나누며 하나님을 찬미하였더니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의 첫 교인들은 '다 함께 있었습니다'. 오직 자기 삶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서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둘째,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습니다. 내 것, 네 것을 굳이 따지지 않고 나누었습니다. 자기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셋째,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며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넷째,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고, 함께 예배드리며 함께 성찬과 애찬을 나누었습니다.
그 결과로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주변 사람들이 “저 사람, 예수를 제대로 믿는다더니 정말 제대로 사네. 나도 예수를 믿어보고 싶다”라고 할 정도로 삶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지, 그것을 통해 우리가 ‘정말 제대로 믿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세기에 활동한 아테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아리스티데스가 주후 150년경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이는 기독교 신앙을 변증한 가장 초기 사례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아리스티데스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렇게 썼습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모든 과부를 돕고, 자신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었던 자들의 고아된 자녀들을 돌봅니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외쳤던 고아와 과부, 가난한 자, 낯선 이(나그네)를 돌보라는 말을 그리스도인들이 실제로 실천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일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무엇이 있으면, 이들은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값없이 줍니다. 나그네를 발견하면 마치 그가 친형제인 것처럼 집으로 데려와 함께 행복해합니다. 이들은 서로를 통상적 의미의 형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성령을 통해 얻게 된 형제로 여깁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결국 ‘사랑’입니다. 사랑을 보이는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요한복음 13장부터 16장까지 나오는 이른바 ‘고별 설교’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이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있는가 없는가, 특히 고통받는 이웃들, 소외된 사람들, 소수자들, 멸시받는 사람들, 사람들이 버린 사람들, 비난받는 사람들을 품고 수용하는 모습이 지금의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 개인에게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제대로 믿는가, 믿지 않는가’를 점검할 수 있는 좋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만 신뢰하나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동의하나요?
그 열매가 삶에서 나타나고 있나요?
우상이란?
‘우상’이라는 말은 ‘아이돌(idol)’이라는 말인데, 이는 그리스어에서 온 것으로 본래 ‘이미지(image)’를 뜻합니다. 우상 비판이란 ‘이미지 비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힘을 약속하고, 풍요를 약속하고, 번영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힘과 풍요, 번영을 약속한다’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것이 돈일 것입니다.
종교를 배운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정말 돈이 힘을 주는가, 돈이 정말 풍요를 주는가, 돈이 정말 번영을 주는가?”라고 근본적으로 묻는 것입니다. 모두가 믿고 동의하는 그 세계관에 도전하며 “정말 그런가?” 하고 물어보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농경과 다산, 풍요를 주관하는 신은 바알인데, 바알은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황소를 타고 나타나 힘과 풍요, 번영을 약속한다는 상징을 가집니다. 오늘날에는 그것이 돈이나 자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저녁까지 애쓰며 살아갑니다. 누군가 “어떻게 살면 좋겠냐?”라고 물으면, 복권이 당첨되거나, 투자한 주식이 폭등하거나, 암호화폐가 천 배로 오르는 상상을 하곤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렇게 ‘돈을 얻게 되면 어떻게 살까?’를 그려보지요. 그런데 여기서 묻는 것입니다. “정말 돈이 너에게 생명을 주느냐, 너를 구원하느냐, 너를 풍요롭게 하느냐?” 세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돈은 수단입니다. 내가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그 수단일 뿐이지요. 돈 자체를 절대적으로 추구하는 행위를 현대적 표현으로는 ‘변태’라고도 말합니다. 이를 학술적으로는 ‘페티시즘(fetishism)’이라고 부르는데, 페티시즘은 원래 종교학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페티시즘은 어떤 사물 자체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막을 건널 때는 물이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다이아몬드 없이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이 든 병 하나를 꼭 붙들고 사막을 벗어난 뒤에도, 그 물을 과도하게 신성시(집착)한다면 그것은 페티시즘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5만 원짜리 지폐 그 자체를 바라보고 “참 좋다”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지폐로 무엇인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지요. 그 ‘무엇’이 무엇인지 파고들면, 결국 ‘잘 사는 것(웰빙, eudaimonia)’과 관련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유다이모니아(유:좋다 + 다이모니아:정신... 좋은 정신)’도 결국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돈이 필요한 것이지,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기독교는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근원적으로 “풍요가 왜 필요하지? 힘이 왜 필요하지?”라고 묻고, 그 답을 성서와 역사 속에서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페티시즘과 마찬가지로) 특정 대상을 절대화하고 고정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막에서 물이 중요하듯, 그것이 사막 밖에서도 늘 똑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는데도 고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상이라고 부릅니다. 기독교 전통에는 이러한 우상을 비판하는 정신이 날카롭게 흐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에서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고 믿었고, 그래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신 숭배) 그러나 실제로 성전이 무너지고, 유대인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가 흩어집니다. 그때 “신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 답은 “신은 모든 곳에 계신다”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신 줄 알았는데, 바빌론 곳곳에서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성전을 극복하게 하신 것이 바빌론 유수가 아니었을까요?)
이런 태도가 오늘날에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중요하다고 여기에 쏠리고, 저것이 중요하다고 저기에 쏠릴 때, 기독교인은 “정신을 차리고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자”라고 말합니다. 뒤집어 봅니다. 이러한 자세가 대량 정보가 쏟아지는 사회에서 더욱 필요하다고 봅니다. 너무나 많은 정보에 노출되면, 그것만이 사실이라고 믿게 되기 쉽습니다. 그럴 때, 자기 생명과 공동체, 그리고 이웃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읽어내고 성찰하며, 무엇이 진짜 유익한지 가려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기독교 안에는 이러한 능력의 원천이 되는 ‘우상 비판 정신’과 날카로운 시선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기독교의 우상 비판 전통은 유효한 교양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천국은 정말 있나요?
정말로 천국이 있느냐, 하늘나라가 있느냐? 당연히 있습니다. 너무나 명백하고 분명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하늘나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에 불과합니다.
‘천국(天國)’을 풀어보면 하늘(天)의 나라(國)입니다. 성경에는 크게 두 가지 하늘이 있습니다. 하나는 새가 날고 바람이 불며 햇빛이 비치고 구름이 떠다니는 물리적 하늘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계신 공간으로서의 하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 하나님께서 물리적 하늘(Sky)에 계시다는 말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보편적인 의미의 ‘하늘(Heaven)’이라는 메타포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란,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몸을 갖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Sky 하늘’ 같은 곳에 계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물질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시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여기 있으면서 동시에 저기 있을 수 없고, 지금 이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처럼 시공간 안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굳이 어떤 물리적 공간 안에 ‘계셔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디 계시다”라고 표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사용하는 은유가 바로 ‘하늘’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떠오르나요? 보편적이고, 여기서도 볼 수 있고 저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넓고 높아서 모든 것을 다 포괄하고, 어디에나 두루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실에 계시다”라고 말하면 어색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라고 하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하늘’이 주는 높음, 광활함, 초월, 무소부재(어디든지 계심) 같은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늘’에 이어서 ‘나라’라는 말을 설명해야 할 차례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나라’라고 하면 주권·영토·국민 같은 요소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나라’라고 할 때 가장 중요한 핵심은 ‘주권’이었습니다. 왕이 다스리는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바로 그 왕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혹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직역하자면,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늘나라’가 실제로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우주 어딘가에 있는 ‘sky’ 같은 곳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는 그 자리, 하나님의 영향력이 미치는 그 자리가 하늘나라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이곳에 앉아 방송을 찍고 있다고 합시다. 저는 이 일을 무슨 사리사욕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제작하시는 분도 단순히 돈만을 위해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함께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이름과 가치를 드러내며, 그 사랑과 눈물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바로 그곳이 하늘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정말 있느냐, 없느냐” 하고 묻는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너무나 명백하게 “여기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혀 체험할 수 없는 상태가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심지어 교회 안에 있어도 하나님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곳이 곧 지옥의 현장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조금 서운하게 느끼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은 분이 궁극적으로 “죽어서 하늘나라에 갈 수 있느냐”를 묻기 때문입니다. 즉, 내세의 문제, 사후 세계에 관한 질문인데,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에게 사후에 대한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이 곧 하늘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티켓을 끊고 들어가는 놀이공원이나, 죽은 후에만 갈 수 있는 어떤 궁전이 아닙니다. 성경이 하늘나라를 설명할 때 금과 보석으로 가득한 궁전 같은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진 언어의 한계 때문에 비유적으로 그렇게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좀 더 적절하게 바꾸면, “우리가 죽은 뒤에도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느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명백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 우리가 부활 후 어떤 모습이 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부활 후의 상태를 두고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천사와 같이 된다”라고 하셨고, 바울 사도도 “그 무엇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심지어 사망도 우리를 그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육체적 생명의 한계가 곧 하나님의 사랑의 종말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하는 천국의 삶을 이미 누릴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네 육체적 삶이 끝난 후에도 나의 사랑 안에 너는 머물 것이다”라고 약속하신다고 믿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육체적 삶이 끝나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기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천국이 있느냐, 하늘나라가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너무나 당연하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을 하늘나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사실 그것은 하늘나라라는 개념 중에서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에 불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후 세계에 대해 말씀하신 부분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이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삶, 마치 잔치와 파티 같은 공동체적 삶”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부터 이미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병상에 있거나, 인생의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고통받고 계신 분들이라 할지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하늘나라의 기쁨과 안식,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희망이자 위로입니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독교 기본 2 - 헌금, 성경, 기독교의 차이점 (0) | 2025.01.13 |
---|---|
기독교 기본 3 - 예수님은 누구신가? '제한 없는' 성탄의 기쁨 (0) | 2025.01.13 |
기독교 기본 4. 믿음과 의심, 우리는 왜 모두 죄인인가? (0) | 2025.01.13 |
기독교 기본 0.... 잘잘법에서 요약편 (0) | 2025.01.13 |
사지선다 (0) | 2025.01.12 |
불완전한 인간을 부르시는 완전하신 하나님... 주경훈 목사님 주일설교 (0) | 2025.01.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