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상이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 세상만 망가진 게 아니라 나도 부서지고, 내 앞에서 내가 사랑한다는 너도 깨어지고. 왜 세상은 이렇게 망가지고, 나와 너는 부서지고 깨어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제가 히브리어 중에 아주 좋아하고 또 여러분과 같이 나누고 싶은 히브리어 문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티쿤 올람’(tikkun olam)인데,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세상의 치유’라는 뜻입니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 ‘티쿤 올람’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 바로 '우상'을 넘어서는 일을 ‘티쿤 올람’이라는 말로 사용합니다.
우상이란 뭘까요. 우상이란 것은 참 하나님 되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비슷한 것’입니다. 생명 대신에 생명 비슷한 것, 사랑 대신에 사랑 비슷한 것, 자유 대신에 자유 비슷한 것, 진리 대신에 진리 비슷한 것, 평화 대신에 평화 비슷한 것, 이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 비슷한 것’.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번영을 준다고 약속하며,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마음이 흔들리고 유혹받게 만드는 것, 그것이 우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이 우상이 주는 매력은 상당해서, 우리가 자칫하면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생명과 번영을 주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티쿤 올람’이라는 말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망가진 세상, 깨어진 나, 부서진 너, 이것이 참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 비슷한 것에 매혹된 결과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래서 세상을 치유한다는 일은 우상을 넘어서는 일인데요. 우상을 넘어서려면 나 자신도 넘어서야 하고, 깨어진 나 자신과 부서진 너도 회복시켜야 하며, 나아가 이 세상이 이렇게 엉망이 되었으니 이 세상을 다시 건설하고, 이 세상에 다시 질서를 부여하고, 이 세상에 다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열망이 있어야 하죠.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바로 이 열망을 ‘티쿤 올람’이라고 표현해 줍니다. 세상을 치유한다, 나를 치유한다, 부서진 너를 돌본다.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나 같은 소시민이, 내가 특별한 재능도 없고 학식도 없는데, 내 삶 살아가기도 바쁜데 그런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우리가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던져 보게 됩니다.
가끔 교회에서 우리에게 거대한 사명을 말하죠. 우리가 이 세상을 구원할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할 사람들이다, 라고 말하고, 거기에 우리가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화답하지만, 실상 집에 돌아와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 집안도, 아니 나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모습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그때 저는 한 그림을 여러분과 같이 나눠 보고자 합니다.
이 그림은 사무엘 박, Samuel Bak이라는 분이 그린 그림인데, 박(Bak) 씨이지만 우리나라 분이 아니라 리투아니아계 유대인이었습니다. 1933년생인데, 아주 어린 시절에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갇혀 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분이죠. 이분이 그 나치의 유대인 포로 수용소 내에서도 어린 나이에 그림에 재능이 있어서, 유대인들이 그 수용소에 모여 있으면서도 “이 아이에게 재능이 있으니 전시회를 해주자” 했다고 해요. 사무엘 박은 그렇게 어린 시절에 그림 전시회를 열었던 사람인데, 어렸을 때 겪은 ‘쇼아(Shoah)’, 곧 유대인에게 닥친 그 재앙을 아주 깊고 깊은 트라우마로 품고 있었고, 이것을 평생 그림으로 극복해 내려고 했던 분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이 그림은 한 ‘독자(讀者)’에 관한 그림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머리가 깨진 사람입니다. 붕대를 감고 있죠. 그리고 머리는 빡빡 깎인 채 있습니다. 이것은 사무엘 박이 어렸을 때 수용소에서 보았던, 어디서나 흔히 보였던 유대인 남자의 모습입니다. 그의 머리 대부분이, 그려진 화면 왼편과 그의 왼쪽 귀가 있는 화면 오른편이 구겨지고 찢겨 있어요. 마치 이렇게 접어 놓았던 걸 펴 놓은 것 같은데, 하도 오래 접어 놔서 부식이 됐는지, 완전히 펴지지도 않았고 얼굴이 아래쪽 부분에서 구겨졌던 자국이 선명합니다. 둘은 제대로 봉합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은 이 독자, 즉 그림의 주인공이 처한 처지를 암시하죠. 어떨 때 우리 스스로를 보면, 우리 얼굴이 제대로 펴지지도 못한 채인 것 같고, 내 마음속에 구겨졌던 부분이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참 예술가들은 우리 마음속 트라우마를 아주 잘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거의 힘을 잃은 듯한 이 독자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 독자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라, 주위의 도움을 받는데요. 화면 왼쪽에 있는 천사가 독자의 얼굴이 그려진 천을 펼쳐 냅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하는 일이 뭐냐 하면, 구겨지고 망가지고 또 접힌 이 독자의 얼굴을 마치 그림처럼 간신히 펴 주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이 천사는 서양화 속 전형적인 천사처럼 위엄 있고 장엄한 모습이 아니라, 천사 자체도 아주 힘든 일을 겪은 듯 보입니다. 천사의 오른쪽 날개는 중간이 부러진 듯 크게 벌어져 있고 간신히 붙어 있습니다. 왼쪽 날개 역시 마찬가지죠. 천사는 마치 고통을 견디듯이 가까스로 눈을 떠서 바깥을 보고 있는 듯합니다.
왼편에 천사가 있다면, 오른편에는 거울을 비춘 듯한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붉은 계통의 천을 끌어당겨 이 독자의 몸을 덮어 줍니다. 이제 겨우 생존할 만큼, 자기 얼굴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한 사람을 위해 천사가 얼굴을 펴 주고, 한 여인은 천을 끌어당겨 추위에 떨고 있을 이 독자의 몸을 덮어 준다는 거죠. 천사가 독자의 머리를 들어 올린다면, 여인은 독자의 몸을 보살펴 주는데, 이 여인 역시 단테의 베아트리체처럼 이상화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라, 아마도 유대인 수용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일상의 고통 속에 노출되어 있던 한 유대인 여성 같습니다.
이 여인이 책을 바쳐 든 오른손은 푸른 계통의, 아주 창백한 손입니다. 거의 ‘시체의 손’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창백하고 푸른 기가 도는 손이죠. 책을 바치는 다른 손은 분명 왼손인데, 그 왼손은 오른손의 주인과 달라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 유일하게 건강한 빛이 도는 손인 것 같아요. 그 왼손이 바로 낮은 자세로 앉아서 책을 받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걸 볼 때, 이 그림의 주인공인 한 독자가 ‘책을 읽는 사람’이 되기까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상처 입은 천사가 펴 주는 얼굴, 하루하루가 힘겨운 여인이 덮어 주는 천, 그리고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손이지만 책을 붙잡아 주고,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책을 받쳐 주는 손. 그 손들이 모여서 이 독자는 책을 읽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보고 “이 사람을 어떻게 도울까?”라고 물으면, 당장 이 사람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 놓을 생각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무엘 박은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거의 잃어버리고 생존의 위협을 받는 이 사람에게, 책을 펼쳐 보여 줍니다. 며칠 굶은 듯한 마른 얼굴에 힘겹게 뜬 눈이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책을 읽으려 하는 거예요. 책을 읽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밥을 먹으라고 하는 대신 책을 읽으라고 할까? 아마 유대인 포로가 수용소에서 읽는 책이라면, 성경을 뜻할 가능성이 크겠죠.
무슨 장면을 펴서 읽을까요? 그림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저는 몇몇 성경 구절을 생각해 봅니다. 아마 이사야서 40장 1절부터 9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죠. “너희는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위로하여라. 예루살렘 주민을 격려하고 그들에게 일러주어라. 이제 복역의 기간이 끝나고 죄에 대한 형벌도 다 받았으며, 지은 죄에 비해 갑절의 벌을 주님에게서 받았다고 외쳐라.” 이사야서 40장의 구절을 펴 놓고, 자기가 남은 모든 힘을 모아서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를 읽는 듯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이 말씀을 읽으며 힘을 얻으려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내가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라는 물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죠.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을 뿐이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이것이 정말 ‘티쿤 올람’이죠. ‘하나님 비슷한’ 모든 것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에 먼저 두는 것. 거기로부터 우리가 인간됨을 회복하고, 거기로부터 부서진 나, 깨어진 너, 망가진 세상에 치유의 첫걸음이 있다고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또 이 그림은 신약에서 마태복음 4장에 있는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던 장면을 떠오르게 합니다. 그때 악마가 예수님께 나와 말하죠. “그렇게 줄였으니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시나요?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빵 자체가 우상은 아니지만, “빵이 정말 중요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 비슷한 것’—다시 말해 우상—에게 뺏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도 예수님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라고 하시죠.
저는 이 그림의 제목이 ‘책 읽기’지만, ‘티쿤 올람’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습니다. 세상의 회복, 나와 너의 회복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그것은 우리가 모든 힘을 다해서 ‘우상’, 곧 하나님 비슷한 것을 멀리하고, 우리에게 번영과 생존을 약속하는 그 우상의 본질을 깨닫고, 남은 인간적인 모든 힘을 모아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는 데서 비롯됩니다. 저는 세상을 치유하고 회복하고 우리 자신이 회복되며, 너와의 관계가 회복되는 그 일이 결코 나 자신을 돌보는 일과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 세상을 치유하는, 우상을 넘어서는, 그리고 깨어진 나를 잘 돌보는… 천사가 우리의 얼굴을 펴 주고, 고통받는 다른 사람이지만 우리의 몸을 덮어 주고, 시체와 다를 바 없는 손이지만 우리 앞에 성경을 붙잡아 주고, 또 누군가 성경을 받쳐 주는 그 손을 통해 우리가 회복되고 이 세상도 회복되는 길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희망이 없다”라고 생각할 때, “죽기 살기로 읽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것은 처절하게 매달려서 성경을 읽고, 거기서 내 어려운 상황에 직접적인 답을 얻으려고 하는 태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사무엘 박이 그린 ‘책 읽기’는 그런 것을 의도하는 건 아닌 듯합니다. 생존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있으려는 그 의지 자체가,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이사야 40장에 나오는 “모든 풀은 마르고, 모든 꽃은 시들어도, 영원히 하나님으로서 계신 그분을 의식한다”는 태도,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려고 하는 자세 자체가 우리를 놀랍게도 이 상황으로부터 구원하고 회복시키고 치유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라” 하면, 어려운 상황에서 내 상황에 직접적인 답을 성경으로부터 끌어내고 싶죠.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말씀이지만, 2,000년 전 혹은 2,500년 전, 3,000년 전 특정인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2,000년 전 누구에게 주신 대답을 바로 오늘 우리의 대답으로 삼기 전에, 먼저 “나는 하나님 앞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가치를 둔 삶을 살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믿는다. 나는 주님 앞에 절망하지 않겠다”라는 마음을 다지며, 그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또 내 마음과 몸 속에 깊이 체화하는 과정입니다.
고통스러울 때 많은 분들이 시편을 읽습니다. 어떤 분들은 욥기를 읽기도 하고, 또 다른 구절을 찾기도 하죠. 특히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도 있고, 하나님의 지혜를 높이는 시도 있지만, 하나님께 원망하는 시도 있고 하나님께 따지는 시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따진다고 해서 즉각적인 해결책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건 뭐냐면, ‘하나님께 따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듯이 굴지 않고, 하나님을 내 인생에서 삭제된 존재로 방치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께 따지는 자세이죠.
성경을 읽는다고 해서, 예를 들어 유대인 수용소에서 탈출할 수 있는 매뉴얼이 나오진 않습니다. 그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가스실로 갈 때, 성경을 읽는 나는 가스실로 가지 않을 방법을 성경에서 얻을 순 없죠. 그러나 하나님께 따지고 하나님께 항의하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있을 수는 있습니다. 바로 거기로부터 우리의 회복이 시작된다는 의미에서의 성경 읽기인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조급한 마음에,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해법이 성경 어딘가에 있으리라 기대하며, 특정 본문을 자꾸 내 상황에 맞춰 읽고 싶어 하는 유혹이 생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내가 사는 동안 하나님과 함께하겠다. 항의를 하더라도 그분께 하겠다. 원망을 하더라도 그분께 하겠다. 내 인생을 탓하더라도 하나님께 탓하겠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 그분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 읽기입니다. 다시 말해, 성경 읽기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거짓 생존과 번영을 약속하는 우상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거죠. 40일 금식하고 줄이신 예수님께 악마가 “이 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셨습니다. 그것이 사무엘 박이 그린 ‘책 읽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가장 줄인 순간에도 빵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가장 깊은 차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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