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생이 되는 길은 없습니다. 여러분, 어제에 비해서 오늘 좀 새롭게 시간을 사용하셨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산 것입니다. 내가 새로워져 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새롭게 시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1초 1초, 지금 손목시계에서 한 걸음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그 1초 1초가 바로 인생입니다. 그 1초 1초가 쌓여서 한 시간이 되고, 그 1초 1초가 하루가 되고, 그 1초 1초가 한 해가 되고, 그 1초 1초가 우리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1초 1초를 새롭게 사용하는 사람이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시간을 새롭게 사용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절로 시간을 새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을 새롭게 사용해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성경 말씀처럼 시간을 ‘새롭게 가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장 15절부터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중략)…세월을 아끼라…(중략)…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이 말씀을 쉽게 설명하면, “무엇을 하든지 지혜롭게 처신하는 사람이 되라.”라는 뜻입니다. 내가 지금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지혜롭게 분별하지 않으면 시간을 새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엑사고라조’인데, “건져 올리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영원한 진리의 말씀으로 건져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욕정과 욕망으로 흘려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하루 중 몇 시간, 몇 분, 몇 초를 건져 올렸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서 “이해하라”는 말은 ‘깨달아라’라는 뜻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세월을 보내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이 주님의 뜻일까?”를 깨닫고자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한평생 시간을 새롭게 가꾸면서, 새로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세월을 아끼라.”라는 말(시간을 건져 올리라는 말)을 중심으로, 앞에는 “어떻게 처신할지 지혜롭게 분별하라.”가 있고, 뒤에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라.”가 있습니다. 즉, 믿음의 의지를 다해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분별하고, 동시에 “이 상황에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시간을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건져 올릴 때, 우리는 그 시간을 새롭게 사용하고, 새로운 인생, 새로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 4장 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여기서 ‘외인’은 주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를 의미합니다. 세상에는 믿는 사람보다 믿지 않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믿지 않는 사람과 관계하는 시간이 훨씬 많은데, 그럴 때 지혜롭게 그들을 대해야 합니다. 만약 지혜가 없으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시간에 내가 그대로 동화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시간만큼 허공에 날려버리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외인에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골로새서 본문에서 “세월을 아끼라.”로 번역된 헬라어는 ‘카이론 엑사고라조’가 아닌, “기회를 사라.”(카이론 엑사고라조)라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 그 기회를 선용하라는 것이죠. 내가 불신자를 만날 때, 내가 그의 시간에 통째로 끌려 다니는 대신에, 그 사람이 내 시간에 동화될 수 있도록 기회를 살려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시간을 새롭게 가꾸는 방법이었습니다.
- 자기가 스스로 무슨 일을 할 때는,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지혜롭게 분별하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 불신자를 만날 때는, 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오히려 그 사람을 내 시간 안으로 초대하기 위해 기회를 선용합니다.
시간은 이렇게 ‘경작’해야 합니다. 경작하지 않으면, 우리는 죄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그 시간이 더욱더 욕망에 오염되어 버립니다. 경작하지 않은 시간은 내 노화와 쇠퇴, 죽음과 소멸을 앞당길 뿐입니다.
작년 8월, 제가 살고 있는 시골 집 뒷산에서 개를 데리고 산책을 갔다가, 왼쪽 발목에 골절상을 입었습니다. 기브스를 해야 하는 기간만 9주였고, 그 후 재활에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제 나이에 9주 동안 기브스를 하고, 집 안에서도 화장실을 갈 때 목발을 짚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겁니다. “아, 내가 왜 이렇게 됐나. 짜증만 나네.” 하고 속상해했다면, 70이 넘은 제 나이에 그 시간은 그냥 허무하게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평생 하나님께서 내 삶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는데, 내가 지금 이렇게 9주 동안 밖에도 못 나가게 되었다면, 이 시간을 통해 내게 주시려는 은혜가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그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하고요.
그래서 제가 예전에 쓴 책(설교집을 제외한 제 저작물) 12권을 전부 정독했습니다. 사실, 제가 제 책을 그렇게 정독한 적이 한 번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 책을 제가 읽는데, 그 책을 쓰던 때의 상황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는 겁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 그때 어떻게 말씀으로 내 마음을 파고드셨는지,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폭포수처럼 쏟아졌는지, 아주 생생하게 기억이 났습니다.
그렇게 30년에 걸쳐서 쓴 책의 내용을 9주 동안 매일 되새기며, 주님이 30년 동안 얼마나 큰 은혜를 베푸셨는지 재확인하니,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 9주가 없었다면, 지나온 시간을 다시금 돌아볼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겁니다. 그 시간 덕분에 저는 앞으로 남은 노년의 인생을 더욱 영성 깊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아, 이 발목 부상이 앞으로 남은 내 삶을 더욱 주님 안에서 풍성하게 하시려는 은총이었구나.” 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시간을 경작하는 예입니다.
날마다 의지를 다해 시간을 경작하는 것은, 자기의 가치와 수준을 극대화하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가 있는데, 태권도 국가대표가 되고 싶은 꿈이 있다고 합시다. 힘없던 그 아이의 주먹이 그저 꿈만 꿔서는 국가대표가 되지 못합니다.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가 되기 위해 날마다 시간을 경작하고, 의지를 쏟아부으면, 벽돌 한 장, 두 장, 열 장, 나중에는 스무 장도 깰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만약 시간을 경작하지 않는다면, 그 가능성은 영영 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매일 선물로 주시는 시간을, 내 의지를 다해 경작하면서, 내 삶이 주님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극대화되어 가는 걸 본다는 것은 정말 큰 감격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자기 시간을 경작하지 않아 ‘황금 같은 시간’을 오히려 자기 생명을 갉아먹는 데 쓴 이들도 등장합니다.
전도여행을 마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에베소에서 온 유대인이 바울을 알아보고 “바울이 하나님을 모독한다.”며 선동했습니다. 그 선동에 성전에 있던 유대인들이 쉽게 선동당해, 바울을 잡아 돌로 치려 했습니다. 그때 천부장 루시아가 출동해 바울을 진정(眞定) 내 감옥에 투옥시켰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것, 로마 제국의 실정법을 어긴 적이 없는 무고한 자라는 것, 그리고 바울을 죽이기 위해 결사적으로 달라붙는 암살단이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호위를 붙여 바울을 가이사랴로 보냈습니다.
그러자 대제사장 무리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24장 1절을 보면, 그들은 변호사 더둘로까지 대동해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발합니다. 모두 거짓말이었죠. 그들은 자기 기득권, 즉 종교 권력과 경제적 이익을 지키려다 보니, 어떻게든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겁니다.
시간이 흘러 총독이 바뀌어 베스도가 부임했습니다. 사도행전 25장 1절부터 3절을 보면, 베스도가 부임한 지 3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을 때, 또다시 대제사장 무리가 바울을 고소합니다. 이번에는 “가이사랴에 있는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면, 오는 길에 매복했다가 죽이겠다.”라고까지 합니다. 무려 2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동일하게 혹은 더 악랄하게 바울을 죽이려는 음모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2년이면 인간이 얼마든지 자기 시간을 경작해 새로워질 기회가 있는데, 그들은 그러지 않았고 오히려 더 악해졌습니다. 시간을 경작하지 않으면 죄성이 더 강해지고, 인간은 점점 더 악해집니다.
바로 이 대제사장 무리들은, 예나 지금이나 타락한 종교 권력자의 대명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시간을 경작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왕조든 초대 왕은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초대 왕이 된다는 것은 그 개인과 가문에 엄청난 영광이죠. 사울은 겸손한 청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제비가 뽑혔는데, 사람들은 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여쭈니, “짐 보따리 사이에 숨어 있다.”고 하실 정도로 겸손했고, 그의 외모도 준수하고 큰 키를 자랑했습니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이 시간을 경작하지 않고, 자기 욕심과 아집으로 오염시키자, 다윗을 죽이려고 3천 명의 특공대를 조직해 끝까지 쫓아다니는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사무엘상 31장에 보면, 블레셋과의 전투 중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되고, 더 이상 회생 불가능이라 판단하자 무기를 든 부하에게 “나를 죽여 달라.”고 명령합니다. 부하가 감히 할 수 없으니, 스스로 칼 위에 엎어져 자결했습니다. 사랑하던 세 아들,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 전 군대가 그날 전멸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시간을 불의와 욕망으로 오염시킨 결과가 본인뿐 아니라 주변까지 다 파멸로 몰아넣은 겁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시간을 제대로 경작하지 않고 낭비하며 욕망에 사로잡혀 살면, 삶의 의미조차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내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경작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지금 이 상황에서 지혜롭게 처신할 길은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을 내 시간으로 초대해, 함께 진리를 맛보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으로 매일의 시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건져 올릴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운 인생,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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