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청문회 모두冒頭발언 정리
존경하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김도읍 위원장님 그리고 위원님 여러분,
다양한 의정 활동으로 바쁘신 가운데 귀중한 시간을 내어 오늘 청문회를 준비해 주신 위원장님과 위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헌법재판관 후보자로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청문회는 국민의 대표이신 위원님들께서 헌법재판관으로서 저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하는 자리입니다. 저는 헌법재판관이 가지는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항상 명심하면서, 여러 위원님들의 질의에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답변하겠습니다.
성장 배경과 가족 이야기
저는 전북 정읍에서 2남 4녀 중 넷째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까지 정읍에서 살다가, 이후 전주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하였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정읍에서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실 때까지 근무하셨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저는 비교적 무난하게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91년에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는데, 둘째가 자폐성 장애 1급 진단을 받았습니다. 유난히도 잘생기고 순한 아이였던 둘째가 자폐성 장애 진단을 받은 뒤, 우리 가족의 생활은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자고 싶을 때 마음대로 잘 수 없고, 쉬고 싶을 때 편히 쉴 수 없었으며, 둘째와 함께 외출을 할 때면 다른 사람들의 특별한 시선을 받아야 하는 고단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 처는 천직으로 생각하던 교사직을 포기하고 둘째를 돌보는 일에 전념해야 했고, 첫째는 같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자폐성 장애를 가진 아이의 형’이라는 시선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제 처와 제 몸에는 둘째에게 맞거나 물려서 생긴 상처와 흉터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최선을 다해 사랑으로 둘째를 키워 왔으며, 둘째는 가족들로부터 누구보다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루 종일 둘째를 돌봐야 하는 힘겹고 고단한 생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힘겨운 삶의 경험들은 “세상에는 나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고, 우리 가족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많으며, 내 처지가 아무리 힘들어도 더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저로 하여금 세상을 좀 더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했으며, 법관으로서의 자세와 시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법관으로서의 소명과 경험
저는 1993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판사로 임명된 이래, 지금까지 30년 동안 각종 재판 업무와 다양한 사법행정 업무를 담당해 왔습니다. 법관으로서 저의 생활은 매일이 반성과 후회의 연속이었습니다. 어제 법정에서 재판하며 있었던 일이 오늘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면서, “내가 좀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더 나은 해결책은 없었을까” 하는 고민을 늘 하였습니다. 그 고민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1998년에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1년간 연수를 하며 도산법을 연구하였습니다. 귀국 후에는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리나라 도산 제도를 개선하고, 통합도산법을 정비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연구 작업에 참여하게 되어, 2000년에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에서 6개월간 다시 연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미국과 일본의 실제 재판 현장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각 나라의 재판 모습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체감하였습니다.
어떤 방식의 재판이 바람직한지 늘 고민했기 때문에, 해외 출장이나 학회가 있을 때마다 각 나라의 재판을 직접 방청하며 개선점을 찾고자 노력하였고, 선진 사법제도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부에서 재판장으로 근무할 때에는, 형사소송법이 기초로 삼고 있는 공판중심주의와 집중심리주의 원칙을 실제 재판에서 구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공판중심주의의 충실한 구현과 집중심리주의만으로도 법관이 편견 없이 사건의 실체에 도달하고, 피고인의 방어권 역시 보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깨달았고, 공판중심주의가 강화되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다른 법관들보다 재판을 더 잘한다고 말씀드릴 수는 분명히 없습니다. 저 역시 법관으로서 능력이 많이 부족함을 느끼며, 주변 사람들에게서 배우고 또 배워서 제 재판을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작은 소망입니다.
헌법재판소의 역할과 다짐
존경하는 위원장님, 그리고 위원님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으로 1987년에 탄생한 현행 헌법은 헌법재판을 담당하는 독립된 헌법 기관으로 헌법재판소를 두었습니다. 그동안 헌법재판소는 우리 사회가 지키고 추구해야 할 헌법적 가치를 선언하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내는 결정을 내리는 등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헌법 질서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로 굳건히 자리 잡았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 사회는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변화에 직면해 있고, 세대·지역·이념 간 갈등, 빈부 격차, 저출산·고령화 문제, 환경 문제 등 여러 변화와 갈등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헌법재판소는 헌법 가치를 수호하고 진정한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한 중추적 역할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만약 저에게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헌법재판소가 담당해야 할 소임을 저버리지 않고, 헌법의 이념이 어떠한 형태로 구체화되어야 하는지를 항상 고민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수자와 약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실질적 평등의 원칙을 구현하며, 헌법이 존중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성심껏 임하겠습니다.
위원님들께서 주시는 모든 고견과 당부의 말씀을 국민의 목소리로 여기고 겸허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해 주신 위원장님과 여러 위원님들, 그리고 지켜봐 주시는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깊은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경청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김형두
- 1965년 10월 17일 전북 정읍 생
- 전주 남중학교, 동암고(1회.81년3월 개교)
- 서울대 법대
- 1987년 29회 사법시험 합격
- 1991년 결혼 (배우자 이계은), 자녀 : 2남
- 1993년 판사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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