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청년다니엘기도회
강사 - 정학영 대표, (주)캐더 대표이사
성경 본문 -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Rapport: 정철 선생을 닮지 않고 어머니를 닮아 비주얼이 괜찮은 아들입니다^^
정학영입니다. 정철 선생님을 전도한 큰아들입니다. 반갑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전도한 뒤 본의 아니게 이렇게 귀한 자리에 불려―혹은 끌려―나와 전도 이야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늘처럼 청년 모임에서는 잘 묻지 않으시겠지만, 나이가 지긋하신 권사님들 모임에 가면 꼭 받는 질문이 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원래 ‘비주얼’로 알려진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이름만 아시는 분도 많습니다만, 제가 “아버지를 전도했다”라고 소개하면 얼굴까지 알고 계신 분들이 종종 놀라며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은 늘 “친아들이 맞느냐”입니다. 나중에 찾아보시고 혼란스러우실까 미리 말씀드립니다. 저는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사춘기 때는 저도 혼란스러웠습니다만, 어머니께서 “맞다”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
얼마 전 저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스팸 전화인가 싶어 받지 않으려다가 왠지 받아야 할 것 같아 미팅 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분이 “다니엘, 기도회입니다”라고 하셨는데, 그 음성이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때가 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그다음부터 고통, 아니 은혜 가운데 몇 달을 보내고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덕분에 그동안 저는 참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밥을 먹는데 돌 맛이 나고, 일부러 기도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낙타처럼 무릎이 꿇어져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내용은 대부분 “하나님, 큰일 났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이튿날엔 “살려 주시옵소서”, 또 그다음 날엔 “차라리 죽여주시옵소서”였습니다. 고난주간이 되자 기도가 쌓여 예수님을 닮아가는 기도로 변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옵소서.” 어제 귀한 말씀을 전하신 김강 대표님과 통화하며 서로 “우리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데, 회사 일 하다가 왜 이런 자리에 섰을까” 하며 위로하고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제는 은혜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 찬양하는 모습을 보니 한 분 한 분 예사롭지 않으십니다. 주일 저녁 예배까지 드리고 또 이 자리까지 나오신 여러분은 세상 눈으로 보면 조금은 ‘정상’이 아닙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난 몇 달 동안 경험한 감사함을 저만 간직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 사람에게 “다음은 너야”라고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신반의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같이 귀한 날 우리를 부르셨다면 그 자체가 예사롭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머리털까지 세신 분이십니다. 아멘.
이제 이야기를 이어가도 되겠습니까? 시간이 짧으니 청년 여러분께 맞춰 핵심만 말씀드리고 기도 시간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희 집은 예수님을 믿는 집안이 아니었습니다
저희 집은 원래 믿지 않는 집이었습니다. 제 아버지, 즉 정철 선생님은 어렸을 때 ‘도사’가 되는 것이 꿈이셨습니다. 산에서 수행하는 도사를 꿈꾸셨지만, 엉뚱하게 ‘영어 도사’가 되셨습니다. 그것도 영어 자체가 좋아서가 아니라, 강의실 앞에 앉아 있던 한 아리따운 여학생, 그러니까 저희 어머니께 마음을 빼앗겨 쫓아다니다가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득도(得道)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지는 새벽 5시면 일어나 두 시간 정도 기(氣) 수련을 하셨습니다. 목청이 워낙 좋으셔서 그 소리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중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아버지는 저와 두 살 어린 남동생을 불러 “유학을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갑자기 영국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항에 섰습니다. 어머니는 옆에서 우시며 “어떡하니” 하셨고, 아버지는 여권에 비행기표를 탁 꽂아 주시며 그저 “가라”라고 하셨습니다. 단, “비행기가 중간에 한 번 선다”는 말만 남기셨습니다. 직항도 있는데 굳이 네덜란드 경유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제 유학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영어도 못 했기에, 저 같은 처지의 학생들을 모아 영어를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외국 학생이 많았습니다. 3개월 뒤 어느 학교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다시 2개월을 더 공부해 총 5개월이 지났습니다. 한 번 떨어지고 나니 자존감이 바닥이었습니다.
보호자(가디언)께서 두 번째 학교로 데려가셨는데, 너무 아름다운 학교였습니다. “이번에 떨어지면 삼수야”라는 말까지 듣고 시험을 봤습니다. 수학은 한국 학생이라면 100점을 못 맞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영어 시험은 종이가 희고 글씨가 검다는 것만 확인하고 느낌대로 답안지를 채웠습니다. 수학을 잘 보니 ‘얘, 똑똑하네’라는 시선이 있었고,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전략은 ‘선생님이 무슨 질문을 해도 나는 내 말을 하리라.’ 20분 내내 제가 말해 버려 질문할 틈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학교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배경이 된 이튼스쿨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명문 기숙학교였습니다. 영국 왕들이 별장으로 쓰던 곳으로, 해리 왕자의 전 여자친구 두 명도 우리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저는 ‘살아남아 대학까지 가자’라는 목표로 미친 듯이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런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런던에서의 삶은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영국 대학은 3년제라 입학보다 졸업이 어렵습니다. 날씨는 하루에 열두 번 비가 내렸습니다. 9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계속 비가 내립니다. 물가는 비싸고, 비는 우울하고, 결국 우울증이 시작되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담배를 배웠습니다. 술은 체질에 안 맞았지만 모임엔 참석했습니다. 어느 날 게임을 하다 걸려 술을 마셨습니다. 중간쯤에 탁자에 머리를 박고 기억을 잃었습니다. 친구들이 저를 기숙사 방으로 옮겨 놓았는데, 열이 나고 상태가 심각했습니다. 친구들이 “정말 죽을 뻔했다”라고 하며 어렵게 구한 하얀 가루 약을 잇몸에 넣어 주었습니다. 본능적으로 ‘싫다’며 그것을 쳐 버렸습니다. 카펫에 가루가 쏟아지자 친구들은 “비싼 건데”라며 주워 담았습니다. 저는 비참함에 울었습니다.
전환점 - 성령 체험과 삶의 변화
대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저보다 두 살 많은 한국 형이 있었습니다. 열정적인 분인데, 열정의 방향이 늘 “교회 가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유학길에 주신 지침이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금발(노란 머리) 여자 절대 데려오지 마라. 둘째, 서양 신 절대 믿지 마라. 그러니 교회 이야기는 피해야 했습니다.
제가 카펫 위에 약을 쏟고 울고 있을 때 그 형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에 떡볶이 파티 하는데 올래?” 저는 떡볶이를 좋아했습니다. ‘죽더라도 떡볶이는 먹자’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윔블던역 옆의 작은 영국 교회를 빌려 쓰는 한인 교회였습니다. 교인은 열 명뿐이고, 모두 형제였습니다. 그 열 명뿐인 척박한 환경에서 저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저희 집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이든 시작하면 끝까지 꾸준히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태권도장을 도장이 없어질 때까지 다녔고, 웅변학원도 이사 갈 때까지 다녔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다니기 시작했으니 꾸준히 다녔습니다. 세 달이 지나 세례를 받았고, 또 세 달이 지나 학년이 끝날 무렵 목사님께서 “한국 가기 전에 공기 좋은 곳에서 사진도 찍고 쉬었다 가라”라고 하셔서 따라나섰습니다.
렌터카를 타고 갔는데 리조트가 아니라 영국의 ‘동산’―텔레토비 동산 같은 언덕―에 나무집 한 채가 있었습니다. 낡은 하얀 페인트가 벗겨진 그 집에서 형들은 수련회를 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나오셔서 “너희는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청년의 때에 하나님께서 너희를 우연히 이곳에 보내신 것이 아니니 하나님을 구하라. 그리하면 만나 주시리라”라고 외치셨습니다. 저는 시험에 들어 도망가고 싶었지만 갈 데가 없었습니다.
여섯 달 동안 교회를 다녔으니 궁금증도 쌓여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이길래?’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수련회는 3박 4일이었고 마지막 날이 주일이었습니다. 형들 앞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면 창피할 것 같아 숨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성령 충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정말 계시면 만나 주시옵소서.” 제 장점은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밤새 기도하다 지쳐 새벽 2시쯤 불을 끄고 잤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 주일 점심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짐을 싸서 앉았는데 너무 피곤했지만 곧 출발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담당 교육자이신 전도사님께서 나오셔서 “차량 배정을 하고 출발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더니, 막상 차량 배정은 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이어 가셨습니다. 아쉬운 마음이 크셨던 것 같습니다. 형, 동생, 자매들이 반원으로 둘러앉았고 저는 맨 끝자리에 앉았습니다.
“어차피 집에 가도 할 일 없잖아요. 수련회가 어땠는지 소감을 들어보고 갑시다.” 전도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니 느닷없이 저를 지목하셨습니다. “학생, 나와서 있었던 일 좀 잠깐 얘기하고 들어가세요.”
정말 나가기 싫었습니다. 인생 최악의 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나가기 싫으면 몸이 먼저 반응하듯 손사래를 치며 버텼지만, 양옆에 앉아 있던 두 형이 제 두 손목을 당기며 “나와, 나와. 원래 교회에서 이런 거 하는 거야. 네가 소감 안 나눠서 그래”라며 끌어냈습니다. 결국 끌려 나가 앞에 섰습니다.
‘솔직히 말하고 빨리 끝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말을 꺼냈습니다. “사실 저는 떡볶이 때문에 왔습니다. 어제 ‘주여!’ 했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습니다.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면 다시 교회를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문장을 “저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라고 마무리하려는 순간, 누군가 제 입을 막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말이 멈췄고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지붕도 없는 맑은 날인데, 머리 위에서 무언가 ‘톡’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곧 그 ‘무언가’가 양이 많아져 제 위로 흘러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고, 가슴까지 내려온 그 뜨거움이 다시 위로 솟구쳐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습니다. 영국 아이들 앞에서 약해 보이기 싫어 울지 않았던 저는,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눈물과 콧물을 쏟아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도 창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속에서, 제가 말한 건지 들은 건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누구십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속으로 울부짖는데,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나다. 네가 구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는 살아 있는 여호와라.”
저는 더욱 울며 “주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 정말 계셨군요!”라고 외쳤습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이해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 복음의 진리가 한꺼번에 마음에 밀려왔습니다. 저는 엎드려 울면서 고백했습니다. “오늘 세상을 다 준다 해도 하나님을 만난 이 순간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다리가 풀려 카펫 위에 엎드렸고, 울면서 카펫 청소를 다 했습니다.
두 형이 저를 안아 옆으로 옮겨 앉히자 전도사님이 나오셔서 “할렐루야! 하나님 살아 계십니다! 다음 사람 나오세요!”라고 외치셨습니다. 옆에 있던 그 형이 나가더니 “제가 사실 신학생이었습니다. 요나처럼 도망쳤지만 하나님이 오늘 저를 지명하여 부르셨습니다”라며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그 뒤 이야기는 기억이 흐릿합니다.
우리는 렌터카로 이동해야 했는데, 돌아오는 10시간 동안 저는 내내 울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노래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를 만난 피조물이 본능적으로 올려 드리고 싶은 것이 찬양이라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여섯 달 교회 다니며 배운 찬송가 선율이 제 스타일이 아니어서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즉석에서 불렀습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찬양합니다.” 운전하며 울며 노래했습니다.
찬양이 너무 사모되어 찬양팀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저를 전도한 형이 “열 명밖에 없어서 한 명 더 들어오면 썰렁하다”며 꺼렸습니다. 그래도 사모함이 커지자 결국 형이 받아 주었습니다. 연습 첫날, 형이 이사야 43장 21절을 펴서 읽게 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그 말씀을 듣고 저는 울었습니다. ‘왜 우리를 만드셨을까?’라는 오랜 의문이 해결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 온전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생각난 사람이 아버지였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반야심경을 외우시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기도할 줄도 몰랐지만 오직 한 가지 제목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부모님을 만나 주시옵소서.” 만나는 목사님들마다 부탁드렸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정철 선생님이신데, 기도해 주세요.”
군 입대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을 때, 어머니와 아버지와 셋이 식탁에 마주 앉았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순두부찌개를 내놓으셨습니다. 용기를 내서 말했습니다. “엄마, 예수 믿으세요. 이렇게 살다 지옥 가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순두부찌개를 탁 내려놓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아, 내가 널 낳고 널 사랑하는 거 알지? 목숨도 내어 줄 수 있어. 그런데 널 보고 누가 예수를 믿겠니?”
그 충격적인 말을 듣고 저는 방에 가서 펑펑 울었습니다.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목숨보다 사랑하시는 어머니도 저를 보고 예수를 못 믿겠다 하십니다.” 문밖에서 “밥 먹어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다시 기도했습니다. “제가 부족하지만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부모님께 꼭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방문을 열고 나와 모든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가장 먼저 표정을 바꾸었습니다. 밝게 웃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를 껴안고 “엄마, 사랑합니다. 영국까지 보내 주셔서 감사해요. 저, 예수님을 만났어요”라고 속삭였습니다. 아버지께도 같은 방식으로 다가갔습니다.
군 입대 전 1년 동안, 새벽기도를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붙잡고 있는 어둠은 물러갈지어다!”라고 매일 기도했습니다. 집안일도 도왔습니다. 이기적이던 제가 상상할 수 없던 모습으로 변하자 1년쯤 지나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주일에 네 엄마랑 나도 교회에 같이 가 보기로 했다. 네가 이렇게 변한 걸 보면 하나님이라는 분이 정말 계신 것 같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사도행전의 말씀이 오늘도 살아 있음을 체험했습니다. 가정 전도를 위해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 될 때까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소망이 있기에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 기쁨이 얼굴에 흐르고, 사람들이 궁금해할 때 예수님을 전할 기회가 열립니다.
청년 공동체와 교회 개척
아버지와 함께 일터 선교를 시작했지만, ‘지금 내 삶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지?’라는 고민이 찾아왔습니다. 회사 일은 잘되었지만 주일 예배만 겨우 드리는 삶이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영국으로 돌아가 복학했을 때도 교회는 여전히 열 명이었습니다. ‘이건 아니다’ 싶어 동생과 자매(여성들)를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자매들을 많이 전도해 1년 만에 100명 모임이 되었고, 그중 90명이 자매였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영국에서 함께 신앙생활했던 자매 둘이 영국에서의 부흥이 그립다고 해서 아버지의 학원 지하가 비는 주말 토요일 시간에 모임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G-12 즉 12명이 하나의 셀 cell을 구성하는 모임으로 진행했습니다. 셀 모임이 여섯 개로 분가했고, 부흥이 이어져 7개월 만에 100명이 되었습니다. “주일에도 예배를 드려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예배를 시작했는데, 목사님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신학교 교수님들이 매주 와서 3년 동안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갈등도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모임 수는 줄어만 갔습니다. 책임은 모두 제게 돌아왔고, 기도와 눈물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3년이 지나 아이들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며 영국에서 전도사님을 모셔와 잠실의 학교 강당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제2의 개척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년 반 만에 출석 인원이 2,200명이 되었습니다. 교회 성장의 독특한 측면이 있었습니다.
영어 주일학교와 JEBS
목사님은 “다음 세대를 전도해야 한다”며 영어 주일학교를 시작하셨습니다. 정철 선생이 직접 가르치는 영어 주일학교 포스터를 붙이니 아이들이 50명 모였습니다. 첫 4주간 주기도문을 영어로 암송하게 했는데, 아이들이 놀랍도록 잘 외웠습니다. 그 가운데 한 엄마가 눈물을 흘리며 “예전에 청년부 부회장이었는데, 남편과 약속을 지키지 못해 교회를 떠난 뒤 아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가족은 새 가족 교육을 받고 집사가 되었고, 외가 친척들까지 일곱 명이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오늘도 살아 움직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에도 주변 교회들을 통해 커리큘럼을 만들게 하시고, 아버지께 창세기 11장 1절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태초에 언어는 하나였으나, 바벨탑 사건으로 흩어져 고통이 시작되었다.” 다시 말해, 소통을 막아서 사고 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소통하지 못하게 하던 봉인이 해제되는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며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라고 약속하셨고, 마가의 다락방 2층에 모여 있던 120명의 제자들이 밤새 기도할 때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성령이 각 사람의 머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가장 먼저 방언이 터졌습니다. 방언이 왜 필요했을까요? 주님이 승천 직전에 주신 말씀, 곧 ‘지상 명령’ 때문입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또한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유일한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우리는 잘 지키고 있습니까? 땅끝까지 나아가 제자를 삼고 있습니까? 저는 스스로 돌아보면 부족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나고 있고, 그 사명을 콘텐츠로 만들어 가르치니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여기저기 교회에서 “우리도 해 달라”라고 요청하여 토요일마다 학원을 열어 무료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교회가 찾아왔고 각 교회가 영어 주일학교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맡기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 “내가 그냥 영어를 가르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이 일을 준비시키셨나 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아버지도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아멘으로 화답하고 돌아와, 적금 통장을 깨서 ‘정철 English Bible School’, 줄여서 Jebs(잽스)를 세웠습니다. 다음 세대 자녀들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려면, 봉인이 풀린 세계 공통어인 영어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수능 대비 영어가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영어 교육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주님 저를 동역자로 써 주세요. 저를 고용해 주세요.
저는 과거에 맡았던 회사들을 직원들에게 넘기고 내려놓았습니다. 학원도 원장님들께 맡기고 지분까지 드렸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많은 내려놓음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오늘 이후로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말로 오늘까지 만 원 한 장 주지 않으십니다. 밥도 늘 제가 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 삶이 하나님과 상관있게 해 주십시오. 저를 동역자로 써 주십시오. 저를 고용해 주십시오.”
시간이 흐르자 7,000개 교회가 사용하는 영어 주일학교가 되었고, 목회자·사모·전도사·평신도 사역자를 포함해 1만 4,000명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주중에도 학원이나 학원 밖에서 할 수 있도록 홈스쿨·공부방 프로그램을 마련했더니, 지난 10년간 6,000여 명이 동참했습니다.
최근 하나님께서 다시 부담을 주셨습니다. 복잡한 생각 대신 단순하게 기도합니다. 기도원에 가서 응답이 올 때까지 기도합니다. 맡겨 두었던 학원의 운영 기간이 끝나 5월 1일부터 다시 제가 운영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고, “주님, 이걸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크리스천 대학, 미션 스쿨, 대한학교, 영어 유치원은 있어도 ‘미션 학원’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학원을 선교 전초기지로 써라”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마침 군 복무 중 예수님을 만난 한 청년이 지방의 학원을 살리고 싶다며 찾아왔습니다. “무너져 가는 사교육을 말씀으로 바꾸고 싶다”는 그 열정을 보며, 이런 동역자가 많아지길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상업적 홍보 대신 입소문으로만 확장했지만, 하나님이 길을 여셨습니다. 앞으로도 주의 일에 사용하실 것을 믿고 그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살아갑시다
이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기 모이신 청년 여러분은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과 동역하실 계획입니까? 당장 답이 없으시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를 동역자로 삼아 주시옵소서. 왜 저를 만드셨습니까? 어떻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과의 첫사랑이 식었다면 “주님, 이 밤에 저를 다시 뜨겁게 만나 주시옵소서”라고 구하십시오.
우리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살지만, 그 어떤 데이터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확실한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여쭙고 인도받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밤에 부르셔서 계획대로 이끌어 가시도록, 지금 이 자리에서 그분께 응답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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