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청년다니엘기도회
강사 - 김선교 선교사; 다윗의열쇠 미니스트리 대표
성경 본문 - 요한복음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실패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
저는 다윗의 열쇠라는 단체를 섬기고 있는 김선교 선교사입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주제는 “실패가 자격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실패를 싫어하며, 실패에 대한 뚜렷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실패를 이야기할 때 흔히 “실패를 경험 삼아 마침내 성공하라”라고 말하지만, 정작 실패한 사람에게 내어 줄 구체적인 해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끼고 다시 일어날 힘마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내 인생은 완전히 끝났다”는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신앙의 실패
크리스천에게 정말 힘든 점은 세상에서도 살기 어렵고 수많은 실패를 겪는데, 거기에 신앙에서까지 실패를 경험하면 어려움이 두 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도 잘되지 않는데 신앙생활도 만족스럽지 않으면 어려움이 배가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라는 한 인생을 여기 세우신 이유는 제가 무언가를 이루어 낸 영웅적인 간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제 실패 자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고, 저는 그 은혜를 간증하고자 합니다.
믿음 하나만 제대로 있어도 살아갈 만한데, 이 영역에서도 여전히 힘들고 어렵다고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믿는다” 하면 곧장 내려놓아야 할 것부터 떠올리고, 포기해야 할 것이 먼저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삽시다”라고 하면 기대감보다는 보이지 않는 압박이 느껴집니다.
어느 청년이 제게 와서 믿음으로 살기가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살려면 이것도 못 하고 저것도 못 한다”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대부분은 실제로 믿음 생활에 도움 되지 않는 것들이었지만, 그는 믿음 때문이 아닌 일까지 믿음 탓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믿음으로 살면 연애도 못 하고 결혼도 못 한다”라고 불평했기에, 제가 단호히 말했습니다. “연애를 못 하는 것은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못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안쓰러우셔서 하와를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또 다른 청년은 믿음이 자라나는 것이 오히려 무섭다고 했습니다. “이러다 순교할까 봐 두렵다”는 그의 걱정에 저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순교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아닙니다. 믿음이 충분히 자라고 순교를 영광으로 여기는 자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믿음 수준으로는 무병장수를 할 것 같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얘기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면 곧장 포기와 내려놓음을 떠올리지만, 사실 믿음은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나만 믿어”라고 말할 때, 그것이 안심과 위로가 되어야 정상이지 불안과 두려움을 일으켜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절대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은 ‘믿어 주는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믿으려는 대상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저절로 믿어집니다.
어떤 사람을 믿는다고 해 보십시오. 제가 의지가 강해서 그를 믿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믿을 만하므로 믿습니다. 나의 성품이나 의지와 상관없이 대상이 믿을 만하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 믿음의 대상과 무관하게 내 감정 상태, 내 의지 상태에 따라 믿음을 좌우하려고 합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정말 그러한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제게 “이 자매는 참 착하다”라고 소개하면, 처음에는 ‘착하다더라’ 정도로 말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실제로 착한 모습을 경험하면 “그 자매는 정말 착하다”라고 확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원래 쉽습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에서는 어려울까요? “믿음으로 했는데도 왜 안 되지?”라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저는 역으로 묻습니다. “무엇이 어떻게 되기를 기대했습니까?” 대부분은 “믿음으로 했더니 갑자기 상황이 풀리고, 없는 열정이 생기고, 소심하던 사람이 대범해지길 바랐다”라고 대답합니다. 요컨대 ‘믿음으로 했으니 내가 이렇게 변해야 한다’는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단순히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믿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믿었으니 이렇게 변한다’는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열매는 맺어지는 것입니다. 씨앗에 생명이 있고 땅이 좋으면 열매는 자연스럽게 맺힙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고 하시며, 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과실을 많이 맺을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열매에 집착하지 말고 붙어 있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실패한 자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라고 평가받는 기준을 떠올려 보십시오. 새벽기도, 봉사, 금식, 방언, 찬양, 헌금, 모태신앙 등입니다. 그러나 이 기준으로 성경에서 믿음 좋은 사람을 찾으면 바리새인이 가장 적합합니다. 예수님도 그들의 열심을 인정하셨지만, 믿음으로 보시지는 않았습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 혹은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받은 사람들은 바디메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 나병환자, 수로보니게 여인, 백부장 등 모두 ‘우리 기준’과 맞지 않는 이들이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서 있었습니다. 둘째, 모든 방법을 다 해 본 끝에 예수님만이 유일하고 마지막 소망임을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문제를 안고 태어났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은혜도, 믿음도 풀리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데, 내가 죄인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이틀 동안 머릿속을 스치는 모든 생각을 빠짐없이 적어 보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인간의 죄성을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죄성은 상황과 조건만 갖춰지면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법이라는 울타리가 없어지면 인간의 추악함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살인을 가능하게 하는 분노 또한 죄로 보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절망 앞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외쳤습니다.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내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가 상상하는 깨끗하고 경건하고 탁월한 모습이 아닙니다. 해 볼 것은 다 해 봤지만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해 완전히 실패한 상태로, “예수님밖에 없습니다”라며 매달린 태도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태도를 보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베드로의 실패와 회복 이야기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을 훈련하신 과정을 보겠습니다. 저는 베드로를 특히 좋아합니다. 베드로를 보면 “나도 사도 할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깁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후에도 종종 실수를 했습니다.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났을 때, 어울리지 않는 자리임에도 끼어들어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장막 세 채를 짓겠다고 했습니다. 성경 기자조차 이 사건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라 접속사처럼 한 구절이 적혀 있더군요. “베드로가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더라.” 아무 말 대잔치였다는 뜻입니다.
그때부터 베드로가 사고를 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신 사건을 아시지요? 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웅장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실제로 보면 멋있다기보다 무섭습니다. 한밤중에 길을 가다가 개를 만나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더 무섭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낯선 사람이 땅 위가 아니라 물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보내시고, 사역을 마무리하신 뒤늦게 합류하셨습니다. 배는 한 척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평소에는 제자들이 노를 저었는데, 제자들이 모두 떠났으니 예수님께서 직접 노를 저어 가셔야 했습니다. “베드로를 남겨 둘걸.” 하고 후회하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다 “그냥 걸어서 가자.” 하고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는 별일 아니었지만, 제자들에게는 큰일이었습니다.
그 밤은 달빛과 별빛도 가릴 만큼 구름이 짙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걸어오실 때, 제자들은 번개가 칠 때만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 발목까지 오는 아이보리색 겉옷, 그리고 샌들을 신으셨겠지요. 밝을 때 보면 온유해 보이지만, 한밤중 바다 한복판에서는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제자들이 무서움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얘들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번개가 번쩍할 때마다 그 모습이 보이니 제자들은 귀신이라 착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자 모두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도 깜짝 놀라셨습니다. “내가 귀신이란 말인가?” 싶으셨겠지요. 그러나 곧 온유하신 목소리로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배 위에는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간이기를 싫어했습니다. 엘리야와 모세 사이에 끼어들 기회를 노렸던 사람입니다. “예수님, 저도 물 위로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며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니 실제로 물 위에 떴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가 뜬 것은 누구의 능력입니까?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발걸음도 예수님의 능력으로 내디뎌야 합니다. 파도가 높고 낮음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이 떠 있는 사실에 집중했습니다. “내가 떴어! 내가 떴어!” 하다가 파도를 보고 두려워해 물에 빠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끌어올리시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나는 주님을 위해 죽겠습니다.”라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 베드로는 몰래 뒤따라가 모닥불 곁에 있었습니다. 한 여종이 그를 알아보고 “당신도 그 제자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라고 묻자, 베드로는 두려움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라고 부인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에도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 닭이 울었고, 예수님께서 돌아보셨습니다. 베드로는 눈물이 쏟아져 밖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나러 갈 용기가 없어, 디베랴 바닷가에서 다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해변에 찾아오셨습니다. “얘들아,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 “아니요,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오른편에 던져라.” 다시 한번 배가 고기로 가득 찼습니다. 요한이 “주님이시다!”라고 속삭이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른 채 물로 뛰어들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처음에는 “나는 죄인이니 나를 떠나소서.” 했던 베드로가, 더 큰 죄인이 된 지금은 예수님을 뵙고 싶어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닥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구워 주셨습니다. 과거의 잘못을 들추지 않으시고, 단 한 가지를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주님,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세 번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시며 사도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도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길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은혜의 시작이다
저 역시 17세에 선교사로 헌신했고, 20여 년 사역하는 동안 10년 가까이 막노동과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주님 때문에 기쁜데, 주님은 나를 보며 기뻐하실까?”라는 질문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제 모습이 초라해 보였습니다. 스스로를 다그치고 몸부림쳤지만, 결국 “나는 믿음으로 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짐을 싸서 떠나려다 문턱에서 멈췄습니다.
그때 성경을 펼쳤더니 요한복음 21장이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도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주님, 주께서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때 주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준비가 다 되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실패가 끝이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 우리가 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주님께서는 은혜로 길을 여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남은 것이 믿음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 은혜의 초대 앞에 서길 바랍니다. 어떤 상태이든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함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며, 다시 주님을 따라가는 복이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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