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학과에 입학했을 때, 과 T의 왼쪽 가슴에는 'Economic, Change the World!'라는 글이 써져 있었습니다. 새내기 경제학도에게는 가슴 뛰는 구절이기도 했고, 과연 내가 이 학문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 이 'change'가 단순한 변화일지, 혁명이어야 할지 등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나던 글귀였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은 당신에게: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자리란?
영화배우 이영애 씨가 '친절한 금자 씨'라는 영화에서 했던 얘기를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을, 부모가 자녀를 반드시 변화시키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대부분 가정은 긴장과 갈등에 휩싸일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겠다는 생각 자체가 어렵고 무거운 일입니다.
이 질문을 교회로 확장하면 더 복잡해집니다. 교회는 과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아니, 변화시켜야만 할까요?
변화에 대한 강박이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먼저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법적으로 흠 없이 살면 되지 않겠냐?”
하지만 이마저도 종종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듭니다. 왜일까요? 그 모습이 종종 ‘바리새인’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열매가 윤리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기독교는 윤리 운동이 아닙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열의는 때때로 아이러니와 비극을 낳습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이나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열정보다, 자신의 교만을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 참여가 실패하는 이유는 '교만'이다.
교회의 사회 참여 방식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종교 혁신이든 언제나 결과는 실패였는데, 그 이유는 언제나 '교만'이었습니다.
누군가를 변화시키겠다는 마음에는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는 전제가 담겨 있습니다.
신실한 현존: 진짜 변화를 위하여
'신실한 현존(Faithful Presence)’은 거창한 운동이나 프로젝트가 아니라, 내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변화는 목적이 아니라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지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삶에서 배우다
아브라함은 제국을 세우지 않았고, 기적을 행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등 수십억 명이 그를 존경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날마다의 삶을 신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성경은 ‘세상을 변화시켜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브라함에게는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겠다”라고 하셨고,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이 되는 방식은 말이 아닌 삶입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 하나님의 나라는 조용히 자란다
마가복음에는 ‘남몰래 자라는 씨’ 비유가 나옵니다. 씨가 자라는 동안, 뿌린 사람은 어떻게 자라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식으로, 눈에 띄지 않게 자라납니다. 복음은 삶 전체의 가치관과 문화로 나타날 때 진짜 영향을 줍니다.
말보다 삶, 전도는 초대입니다
전도는 논쟁이나 지적이 아닙니다. 아이가 “엄마, 이리 와 보세요! 여기에 싹이 돋았어요!”라고 말하는 순수함처럼, 내가 만난 하나님과 신앙을 나누는 초대여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도 말합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
초기 교회는 로마 제국의 주류로 편입되는 데 300년이 걸렸습니다. 비결은 프로그램이 아니었습니다. 인내였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낸 시간들이 결국 발효하는 것처럼 사회를 바꿨습니다. 변화는 인내에서 나옵니다.
정치와 교회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정치에 과몰입되어 있습니다. 좌우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맞고 우리는 틀렸다”는 자각입니다. 교회가 정치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하면 오히려 반감을 사고 망가질 수 있습니다.
공동체: 개인과 사회를 잇는 다리
신앙의 변화는 혼자 일어나지 않습니다. 가정, 교회, 이웃 공동체 안에서 진지하게 살아갈 때, 그 신실함이 사회 정의와 평화로 연결됩니다. 교회는 세상을 가르치기보다, 예수를 믿는 공동체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교회는 이미 세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과 분리된 성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 속에서 '고민과 갈망을 품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공동체의 힘이 필요합니다. 공동체는 외로움을 치유하고,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진짜 변화는 조용히, 깊이 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향한 외침이 아니라, 신실한 삶입니다. 때로는 정의를 위해 고난도 감수해야 하며, 그때 필요한 건 용기와 지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십니다.
미디어 리터러시와 건강한 감각도 중요합니다. 특히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디어를 분별하는 능력도 필수입니다. 교회는 복음의 진리와 시민 상식을 바탕으로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훈련장'이 되어야 합니다.
따뜻한 공동체가 해답이다
고립과 외로움은 전염병보다 무섭습니다. 교회는 따뜻한 공동체로 외로운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친구가 되어 주고,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몸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세상을 가르치려 하기보다, 변화된 공동체의 삶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말씀을 믿고, 묵묵히 사랑하고 인내하는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 만화 구성안 (4컷 X 6화 구성)
🌱 1화: 변화를 꿈꾸는 소녀
- 1컷: 어두운 도시, 뉴스를 보는 루미 ("세상은 왜 이래?")
- 2컷: 사람들과 부딪히는 루미 ("내가 바꿔야 해!")
- 3컷: 벽에 부딪히는 루미 ("아무도 안 바뀌잖아...")
- 4컷: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시골 기차역에 선 루미
🌾 2화: 조용한 마을, 하마리
- 1컷: 작은 마을 풍경, 지브리 풍의 부드러운 배경
- 2컷: 낡은 세탁소에서 빨래를 개는 할머니
- 3컷: 인사하며 스윽 지나가는 주민들
- 4컷: "이 사람들은... 이상하게 편안해"라고 생각하는 루미
🍙 3화: 말 없는 친절
- 1컷: 아침마다 쓰레기를 줍는 초등학생
- 2컷: 농부 아저씨가 루미에게 갓 따온 감자 한 봉지를 줌
- 3컷: 아무 말 없이 웃는 얼굴
- 4컷: “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하지…?”
🕯️ 4화: 빛처럼 사는 사람들
- 1컷: “당신들은 왜 이렇게 착한 거예요?”라고 묻는 루미
- 2컷: “그냥, 주신 하루를 감사히 살아가는 거지” (할머니)
- 3컷: 교회 십자가 아래 조용히 기도하는 장면
- 4컷: "이건... 가르침이 아니라, 살아있는 삶이야"라고 깨닫는 루미
🐾 5화: 나도 누군가의 빛이 될 수 있을까
- 1컷: 마을 아이가 울고 있음
- 2컷: 조심스럽게 손을 내미는 루미
- 3컷: 아이가 웃음
- 4컷: 루미도 미소 지으며 생각함 "나도 변했구나"
✨ 6화: 조용한 변화의 시작
- 1컷: 도시로 돌아가는 루미, 마을 사람들의 배웅
- 2컷: 지하철에서 옆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루미
- 3컷: “작은 친절도 누군가의 마음을 바꿀 수 있어”
- 4컷: 루미의 눈빛에 빛이 스며들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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