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기 전, 내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가?
-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친구, 선한 목자, 구세주, 선생님으로만 생각한다.
- 그런데 예수님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제자 요한이 밧모섬에서 요한계시록을 쓰기 위한 환상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은 그저 선하고 친구 같던 선생님이 아니라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셨다.
- 우리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너무 친근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20250413
우리가 만약 평생 꿈꿔왔던 장소로 여행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 여행으로 주어진 시간이 단 한 주밖에 없다면 우리는 결코 허투루 일정을 세우지 않을 것이다.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가장 의미 있는 일정으로 그 한 주를 채우고자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서 보내시는 마지막 한 주를 앞두고 계셨다. 이 한 주를 위해 예수님은 그토록 오랫동안 걸으시고 기다리셨다. 우리는 이 기간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르고, 그 시작을 알리는 오늘이 바로 ‘종려주일’이다.
놀랍게도 복음서의 약 3분의 1이 예수님의 이 마지막 한 주에 집중되어 있다. 오늘 성경본문이 있는 마가복음도 예수님의 생애가 1장에서 10장까지에 증거 되었고, 11장부터 마지막 장인 16장까지가 이 마지막 한 주에 할애되었다. 그만큼 이 한 주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주일 (막11:1-10) 예루살렘 입성; 성전을 둘러보심
월 (막11:12-19) 무화과나무 저주, 성전 청결 사건
화 (막11:20-13:37)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수 (막14:10-11) 가룟 유다의 배신
목 (막14:12-42) 최후의 만찬, 겟세마네 동산 기도, 예수님의 체포
금 (막14:43-15:39) 예수님의 재판, 십자가에 못 박히심
토 (막15:42-47) 고요한 시간
주일 (막16:1-8) 예수님의 부활
오늘 종려주일을 맞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세 가지 메시지가 있다.
1.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을 직접 준비하셨다.
특별히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막 11:3)
이 말씀은 이상한 명령처럼 보였지만, 제자들은 순종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나귀의 주인 역시 기꺼이 순종하여 나귀를 내어주었다.
이 짧은 대화 안에 놀라운 은혜와 순종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그 어떤 묶인 것도 풀려난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 안에 아직 묶여 있는 무엇이 있는가? 죄책감, 두려움, 상처, 혹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 말이다. 이 한 주간,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며 선포해 보면 어떨까?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나의 묶인 것이 주님께 쓰임 받을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2. 종려나무 가지가 아닌 십자가를 붙들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했다. 종려나무 가지는 유대인들이 독립과 승리를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정치적, 군사적 독립을 이루어 주시길 기대했다. “호산나!”라는 외침 또한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달라는 정치적 구호였다.
🔥 배경: 헬레니즘 제국의 통치와 유대인의 저항
예수님 이전 시대, 팔레스타인은 알렉산더 대왕 사후 여러 헬레니즘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습니다. 특히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유대교에 대한 심각한 탄압을 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제단 위에서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등 유대인의 신앙을 철저히 모욕했습니다. 토라를 읽는 것도,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금지되었고, 유대교 자체가 말살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 마카비 혁명과 종려나무의 상징
이에 대항하여 일어난 것이 마카비 가문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 유다 마카비를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은 게릴라 식 전투로 셀레우코스 군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였습니다.
- 이 성전 정화 사건이 바로 훗날 수전절(Hanukkah)의 기원이 됩니다. (수전절은 매년 유대인들이 성전의 재헌신을 기념하는 축제) 이때 마카비 가문의 상징이 종려나무였고, 이때 유대 민족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쟁취한 것을 축하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드는 행위가 사용되었습니다.
종려나무 = 민족 독립, 군사적 승리, 하나님이 주신 해방의 상징
이 종려나무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이뤄졌다”는 승리의 상징으로 뿌리 깊게 인식되었습니다. 실제로 마카비 왕조 시대에는 동전에도 종려나무가 새겨질 정도로, 정치적 해방과 종교적 회복을 의미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종려나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던 날,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막 11:9~10)
여기에서 "호산나"는 원래 히브리어로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환호가 아닌, 간절한 구원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대한 구원은 마카비 시대처럼 로마로부터의 정치적 해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새로운 유다 마카비처럼 오해하고, 그분이 로마를 무너뜨리고 다윗 왕조의 영광을 회복해 줄 정치적 메시아가 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수전절의 상징이었던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길이었다. 군사적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가 아니라 자기 부인과 희생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진정한 길이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가? 나의 욕망과 기대를 이루어 줄 왕으로서의 예수님인가, 아니면 십자가를 지시고 희생과 섬김의 길을 가신 진짜 예수님인가?
이 고난주간,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승리를 의미하는 ‘종려나무’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3.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면서, 사람들은 축제처럼 기뻐하고 있었지만 정작 예수님은 성을 보시고 우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1)
성경은 이때 예수님이 단지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울부짖듯 우셨다는 의미의 단어(에클라우센)를 사용하고 있다. 그분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셨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백성들의 영적 무지를 보시며 통곡하셨다.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모습을 보시고 안타까워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신 이유는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도시와 백성을 향한 깊은 애통과 안타까움, 그리고 그들의 불신앙과 다가올 심판을 향한 예언적 통찰에서 나온 눈물이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19장 41~44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눅 19:41~42)
아래에서 예수님의 눈물의 이유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평화의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눅 19:42)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참된 평화의 길을 몰랐다는 사실에 슬퍼하셨습니다.
이들이 지금 눈앞에 계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때(카이로스)를 놓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정치적 메시아만을 기대했으며, 죄와 죽음에서 자유케 하시는 참된 평화의 왕을 거부했습니다.
- 예수님은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영적 무지를 탄식하셨습니다.
2. 다가올 심판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눅 19:43~44)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미리 보셨습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자식들을 네 가운데서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눅 19:43~44)
이 말씀은 약 40년 후인 주후 70년,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파괴된 사건을 예고한 것입니다.
- 무려 110만 명이 학살되었고, 성전은 불타고 돌무더기로 변했습니다.
- 예수님은 이런 미래의 비극을 내다보시며, 도시를 향해 애통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돌보심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눅 19:44 하)
예수님은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 여기서 '보살핌 받는 날’은 헬라어로 카이론(καιρόν), 즉 '하나님의 정한 때, 은혜의 때'를 의미합니다.
-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시려는 이 결정적인 기회를 그들은 무시하고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그 기회는 바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지금, 이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어두워져 그날을 인식하지 못했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한 채 멸망의 길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 예수님의 눈물은 지금 우리를 향한 눈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되는 인간의 불신과 무지에 대한 경고이자 사랑의 표현입니다.
-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에는 관심 없는 우리의 모습,
- 자신의 생각과 방식으로만 예수를 바라보는 태도,
- 하나님의 은혜의 때를 놓치고 지금 이 순간을 허비하는 삶...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는가? 혹시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축제만 즐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돌처럼 굳어버린 우리의 마음, 십자가의 감격이 사라진 우리의 모습을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며 회개해야 할 때다.
한 주간, 오직 십자가만 붙잡읍시다
이제 고난주간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한 주를 보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따라 우리도 깊이 묵상하고 기도하며 보내면 좋겠다.
-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나의 모든 묶인 것들을 풀어 주께 쓰임 받자.
- “종려나무가 아닌 십자가를 붙잡자.” 우리의 욕망과 기대가 아닌, 예수님의 뜻과 길을 붙들자.
-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자.” 무지와 완악함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자.
이렇게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를 마음 깊이 품고,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감격과 은혜로 가득 채우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고난주간, 우리 모두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 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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