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교회는 들포도 수준을 넘어, 섭취하는 모두를 죽이는 독포도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독을 오래전부터 알아보고 내적으로 우리를 탄핵했습니다.
한국 주류 개신교회는 이제 그 자체로 시민 사회의 재앙입니다. 우리도 그 일부입니다.
이 글은 사랑누리교회 김정태 목사님이 대통령 파면을 촉구하는 연합 기도에서 전하신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시민들이 내적으로 기독교를 탄핵했고, 시민 사회의 재앙이 되었다는 지적에 반박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권력자와 기득권을 옹호하고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는 교회는 말 그대로 독포도와 같아 보입니다.
루터중앙교회 최주훈 목사 대담 글에서
안녕하세요, 중앙루터교회의 최주훈 목사입니다. 뉴스앤조이 이사장으로 선임이 되었습니다.
루터교회가 어떤 교회인가?
개신교라고 할 적에, 개신교회의 시작은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통 말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95개조 논제라고 하는 것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고 이야기하죠. 거기에서 시작한 교단이 루터파라고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개신교 안에서 루터파 세례 교인 수가 대략 8,50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정확한 자료로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성공회와 루터교회가 가장 큰 세례 교인 수를 갖고 있다고들 합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1958년도에 선교가 시작되었고, 가장 중요한 선교 정책이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되자’라는 캐치프레이즈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 교인을 빼앗지 않기, 교회 이름을 크게 내세우지 않기 등으로 시작되었고요. 교단 운영 체제는 개교회주의가 강한 장로교나 한국의 다른 개신교회, 그리고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체제 중간쯤에 있는 혼합형태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루터교 예배에서는 매주 성찬을 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은 예배를 드린다고 말하지만, 종교개혁 당시 가장 중요한 예배 이해는 “하나님이 일하신다”입니다. 즉,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일의 도구가 바로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가지 은총의 도구라고 합니다. 일주일 동안 각자의 일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하나님께서 말씀과 성찬으로 위로해 주시고 힘을 주셔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 루터교회의 예배 이해입니다. 그래서 성찬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교회 역사를 보면, 예배의 시작은 성찬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 전통에 대한 감각과 이해, 그리고 신뢰를 가지고 예배를 구성하는 것이 루터교회 예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3 내란 사태를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볼까?
사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문제라고 봅니다. 간단하다는 것은 12월 3일 그날 저녁에 국민 모두가 TV로 다 봤다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려야 할 수 없는 현실이었고, 그 이후로도 속속들이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누구라도 “이건 잘못됐다”고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고, 탄핵이 되는 것이 맞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 문제는 탄핵에 반대하는 쪽의 논리와, 교회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부분입니다.
2024년 10월 27일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해서 보수 개신교계가 거대한 집회를 열었죠. 그게 지금 ‘세이브코리아’라는 단체로 이어지고 있는데, 전광훈이 이끄는 광화문과 손현보 목사가 이끄는 여의도에서 탄핵 반대 운동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본인들은 나치 시대의 본회퍼에 자신들을 비유하면서 “교인들이 불의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쟁점이 있습니다.
첫째, 정말 이들이 종교개혁의 연장선상에 있는가?
먼저 종교개혁 정신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종교개혁 정신은 본래 교회 내부의 신앙 순수성을 위해 일어난 ‘내부 운동’이었는데, 지금 세이브코리아나 전광훈 같은 단체 모습은 자기 내부의 갱신이나 신앙의 정화를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이용해 정치적 욕망을 극대화하려는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타당성과 노선과는 전혀 다릅니다.
둘째, 이들이 말하는 ‘불의’란 도대체 무엇인가?
둘째, 이들이 말하는 ‘불의’가 성서에서 말하는 불의와 같은 맥락인지 의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불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지칭하기도 하고, 인간의 죄를 다루지만, 이들이 말하는 불의는 사회적 불의나 법 체계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개인적으로 극단화하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회가 세속 정부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셋째, 정말 본회퍼의 정신을 잇고 있는가?
셋째, 본회퍼 이야기를 꺼내는데, 본회퍼가 목숨을 걸었던 이유는 특정 정파에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독일은 히틀러 정부의 악행을 비판하면 실제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이었고,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보던 절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본회퍼가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들이 하는 주장은 전혀 그런 상황이 아니죠. 우리 사회는 다양한 목소리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입니다. 이들이 본회퍼 이야기를 꺼내면서 히틀러 정부 시절처럼 희생하는 척하지만, 사실상 그 맥락이 완전히 다릅니다.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는 하나님 이름으로 세속적 이익을 얻고자 하는 것을 지적합니다. 지금 이들이 보네퍼를 언급하는 것은 오히려 그 ‘값싼 은혜’를 본인들이 보여 주고 있는 것이죠.
‘이단몰이’와 ‘마녀사냥’
과거에도 타자를 혐오하고 악마화하는 정서가 강력하게 작동했는데, 오늘날에도 그런 흐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중세시대 이단 심문과 마녀사냥으로 당대 시민들이 받았던 고통과 폐해가 컸습니다.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에서 마녀사냥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종교개혁자들도 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루터나 칼뱅조차 시대의 아들들이었기 때문에, 그 당대의 사회상을 온전히 거부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성서에 입각해 “이건 잘못됐다”고 한 부분들도 있지만, 그걸 아주 강하게 막아내지는 못했죠.
개인적으로 저도 루터교 목사이지만, 종종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부분은, 16세기 종교개혁 때 제세례파를 이단 취급하고 마녀사냥하듯이 잡아죽인 참담한 역사입니다. 루터파나 장로교회(칼뱅)도 당시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사실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타자를 악마화하지 않고 평화를 주장했던 쪽은 장로교나 루터파가 아니라 제세례파였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을 무조건 옳다고만 볼 수 없고, 그런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은 타자를 혐오하고 대적자로 설정해 공격하는 걸 굉장히 조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도 조선족이나 외국인 노동자, 성소수자 등을 혐오 대상으로 삼고 폭력을 조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거기에 극우 개신교가 강하게 결합된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일종의 가짜 뉴스를 기반으로 선동을 하고 있는데, 왜 극우 개신교가 이런 혐오를 주도하고 있을까요?
사람의 욕망이 만들어 내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죄의 속성을 “모든 것을 자기 자신에게 구부러뜨리는 힘”이라고 표현했는데, 목사들에게서 그 욕망이 크게 드러납니다. 사실 목사들은 가장 앞장서서 사람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인데, 목사가 잘못된 생각이나 말을 하게 되면 교인들도 그대로 따라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자기 직분을 권력의 자리로 착각하는 거죠. 교회 규모가 곧 자기 권력 규모이고, 자기 말 한 마디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런 권력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 앞에서 겸손히 봉사하고, 세상의 평화와 조화를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을 선동해 정치적 이익을 노리는 순간, 이미 소명자로서는 끝났다고 봅니다. 전광훈 씨 같은 분들도 저는 목사로 보지 않고, 자연인으로 봅니다.
당분간 극우 세력이 줄어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들이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공론장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교계 언론도 건전한 저널리즘을 통해, 폭력·배제·혐오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해악이 되는지를 계속해서 다루어야 합니다. 교회들은 목사님들이 설교를 통해 “성서의 정신은 혐오나 배제가 아니라 사랑과 포용”임을 분명히 말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이신 길과, 우리가 어떤 본을 받아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각 교회 연합체도 세미나나 교육을 통해 옳고 그름에 대해 명확히 알리고, 보편적이고 바른 길이 무엇인지 계속 이야기해야 합니다. 이런 공론장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선과 악, 정의와 불의를 더 잘 알고, 더 잘 판단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이런 오만에서 비롯된 저항은 결코 옳지 않다.”
교회는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
루터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치세력을 이루려 하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글이 있는데, 1523년에 쓴 「세속 권력에 어디까지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글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제 우리는 기독교인이니 법이나 정부는 더 이상 우리에게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오직 성경의 가르침만이 우리를 다스릴 수 있다. 이제 우리가 나서서 온 세상을 기독교로 만들어 복음으로 다스리자.’
이러한 주장은 매우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누군가가 ‘이제 이 동물들은 순해졌으니 괜찮다’고 말하면서, 사나운 맹수들의 족쇄를 풀어 광장에 풀어 놓는 것과 같다. 그러나 풀려난 맹수들은 여전히 위험하고, 사람들을 물어뜯고 해칠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악당들은 ‘우리는 기독교인이니 법이나 권력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라는 그럴듯한 말로 복음의 자유를 악용하고 교인들을 선동한다.”
주석에 이런 내용이 덧붙습니다. “세상에는 죄를 범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기독교인도 세상 안에서 살아가므로, 여전히 국가와 각 공동체의 법과 질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것이 루터의 두 왕국설 통치 이론입니다. 기독교인이 복음 안에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에서 살아갑니다. 따라서 세상 법과 질서를 인정하고, 조화와 순종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속 권력자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 즉 세상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겸손하게 낮아지는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때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완전히 정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자기 욕망을 위해 선동하고 있잖습니까. 종교개혁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 인용글에서 핵심은 교회가 공동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입니다.
저는 “소명론”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루터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소명이라는 말을 성직자에게만 썼지만, 루터는 “모든 사람에게는 혈연 공동체, 정치‧사회 공동체, 그리고 영적 공동체 등 세 가지 ‘삶의 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혈연 공동체는 가족, 정치‧사회 공동체는 직장이나 국가, 영적 공동체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 영역에 모두 속해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해도 보통 하나 이상은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소명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루터 소명론의 핵심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왜 이런 삶의 자리를 주셨는지를 질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 혼자 잘살라고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라는 겁니다. 이웃을 위해 부름받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로 이웃을 이롭게 하고, 선을 이루고,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 진정한 소명이라고 봅니다.
만약 목사라도 자기 욕망만 추구하고, 사람들을 자기 욕망대로만 선동한다면, 루터가 말한 진짜 소명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것이죠. 루터의 말대로라면, 그런 주교나 목사는 천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지옥으로 직행한다고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이 시대에 우리가 루터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공동체성, 이웃을 위한 삶, 타자를 위한 삶입니다.
그렇군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를 분별하면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네요. 삶의 자리… 지츠 임 레벤(Sitz im Leben) 독일어로 '삶의 자리' 또는 '생활의 정황'을 뜻하는 신학적 용어입니다. 성경 연구에서 본문이 기록된 당시의 사회적·문화적 맥락을 이해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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