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02 주일예배 설교
“얕잡아보다가 큰코다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큰코다친다’는 말은 크게 망신이나 창피를 당한다는 것이지요. 작은 일을 가볍게 여기거나,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오만한 마음을 품는 순간 우리 안에 영적 구멍이 생기게 됩니다.
1918년 무렵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은 약 5,000만 명이라는 엄청난 사망자를 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초기에는 이 스페인 독감을 일반 감기쯤으로 얕잡아보고 제대로 된 방역과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힘들 만큼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세계가 공포에 떨었습니다. “설마 이것쯤이야” 하고 방심한 결과가 얼마나 큰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경에도 비슷한 예가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믿음으로 함락시키고 크게 고무된 이스라엘 백성이, 비교적 작은 성인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사건입니다.
아이 성 전투의 패배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승리의 기억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도록’ 만들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힘과 전략으로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교만으로 이어졌습니다.
정탐꾼들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은 작은 성이니,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치시지요. 모든 백성을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라고 보고했습니다(수 7:3). 전투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자신들의 군사력과 경험만을 의지한 것입니다. 심지어 지도자인 여호수아까지도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패배하게 되었습니다. 36명의 전사자가 생겼고, 이스라엘 전체가 두려움에 떨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가나안 여러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하고 있었는데(수 2:11, 수 5:1), 이제는 이스라엘이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아이 성에는 노인과 아이를 포함하여 12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구가 적어서 작은 성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리고 성 인구는 아이성보다 적은 1500명~2000명 정도였습니다. 일시적 인구를 포함해도 5000명 이내였으리라고 추정됩니다. 여리고 성이 크기와 규모, 견고함에서 큰 성이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은 60만 명의 거대한 무리였습니다.
아이 성 전투의 패배가 주는 교훈
까닭 없는 고난은 있을 수 있으나, 이유 없는 영적 전쟁에서의 패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까닭 없는 고난은 있을 수 있으나"
성경적으로 볼 때,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욥기의 욥은 특별한 죄를 짓지 않았지만 극심한 고난을 당했습니다(욥기 1~2장).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지만, 이는 단순한 인간적인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이사야 53:5).
"이유 없는 영적 전쟁에서의 패배란 있을 수 없다"
영적 전쟁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우연이나 운이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서는 영적 패배의 원인으로 죄(신명기 28장), 불순종(사무엘상 15:22-23), 믿음 부족(마태복음 14:31), 기도 부족(마가복음 9:29) 등을 언급합니다.
에베소서 6:11-13에서는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해 전신 갑주를 입으라”라고 권면합니다. 대비 없이 싸우면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은 있을 수 있지만, 영적 전쟁에서의 패배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뜻입니다.
첫째, 한 사람의 죄가 공동체의 죄가 될 수 있다
여리고 성 전투 때, 하나님은 “어떤 전리품도 취하지 말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전쟁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한 사람이 탐심을 품고 그 명령을 어겼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범하였나니…(수 7:1)”라고 말씀합니다. 단 한 사람이 저지른 죄악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언약 공동체’ 전체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고 보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단순히 혈연으로 연결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맺어진 ‘영적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며,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고전 12:26~27).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생명의 공동체입니다. 한 지체의 아픔이 곧 몸 전체의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지체의 죄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잠언 16장 18절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경고합니다.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아이 성이 작은 성이니 쉽게 이길 것이라 여겼고, 전쟁의 승리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어버렸습니다. 기도의 간절함도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전쟁을 어떻게 치러야 합니까?”라며 묻지도 않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고 위험한 마음입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거나 간절한 소망이 있을 때 기도에 더욱 열심을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거나 원하는 것을 성취하면, 간절함이 줄어들고 기도를 쉬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유지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기도의 목적을 성취에만 두기 때문에, 목표가 이루어지면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기도를 생활의 일부로 지속적으로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누가복음 18:1)
"기도는 성취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영적 호흡이다."
성취 후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고, 더 깊은 감사와 사명으로 기도를 지속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교만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내 노력과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다”, “내 자녀 양육도 내가 알아서 하면 된다”, “하나님이 없어도 나는 괜찮다”라는 마음이 곧 교만입니다. 결국, 아간의 죄와 이스라엘의 교만이 어우러져 영적 방심이 되었고, 패배로 이어진 것입니다.
아이 성의 패배 이후
패배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해결책을 살펴보면, 우리가 실패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귀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실패를 다루는 태도에 있다"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郎) 교수는 실패학(失敗学, The Study of Failure)의 권위자로, 실패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배움을 얻는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로 유명합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실패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성공하는 사람: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삼는다
- 실패를 숨기거나 부정하지 않고 솔직하게 인정한다.
-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배움을 얻는다.
-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개선하고 실천한다.
-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도전한다.
"이 실패는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이다."
❌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 실패를 좌절로 받아들인다
- 실패를 변명하거나 타인과 환경 탓을 한다.
- 실패에서 배우지 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실패를 경험한 후 도전을 포기한다.
- 실패를 감추거나 부끄러워하며, 이를 성장의 기회로 삼지 않는다.
"이 실패로 인해 나는 끝났다. 난 안 되는 사람인가 보다."
회개와 탄식의 기도를 드렸다
아이 성 전투에서 패배한 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장로들은 옷을 찢고 여호와의 궤 앞에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며 저물도록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수 7:6).
여호수아는 기도 가운데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수 7:9)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 이후 우리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태도입니다. 바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바라보는 것입니다.
죄를 단절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이 회개하던 중, 하나님께서는 실패의 원인이 무엇인지 분명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수 7:11).
아간이 몰래 숨겨둔 전리품, 그 물건들이 바로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또한 승리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아간의 죄를 철저히 색출하고 제거했습니다. 아간뿐만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의 죄가 다시 공동체를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결단해야 할 죄, 끊어야 할 습관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패를 경험했다면, 그 원인을 깨닫고 철저히 단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다시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다시 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아이 성 전투의 패배에 낙심해 있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에게 “일어나라”(수 7:10, 8:1)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일어나라는 단어 “쿰(kum)”은 ‘일어나 달려가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예수님이 병든 소녀에게 '달리다 쿰'이라고 말씀하시던 그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의 자리, 주저앉아 눈물 흘리는 그 자리에 머무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시길 기뻐하십니다.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이유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과거의 실패를 붙잡고 끊임없이 부정적 추측과 상상을 하며 낙심에 머무릅니다. 여호수아 7장 9절에서 여호수아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끊으리니...”라며 상황을 부정적으로 추측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하니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라고 격려하십니다(수 8:1 참조).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는 기독교 작가이자 상담가로, 특히 영적 전쟁, 내면의 치유, 남성성과 여성성의 회복에 대한 저서들로 유명합니다. 그의 저서 중 《Resilient》(2022, 한국어 제목: 《그리스도인의 초자연적 회복력》)은 영적·정신적 회복력(resilience)을 다루는 책으로, 현대 사회가 우리의 영혼을 얼마나 지치게 만드는지를 설명하며, 이에 맞서 하나님이 주시는 초자연적인 회복력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제시합니다.
1. 인간의 영혼은 지치고 있다
현대 사회는 끝없는 뉴스, SNS, 스트레스,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사람들은 겉으로는 정상으로 보이지만 내면적으로 피폐해지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회복시키려 하지만, 잠시 쉬는 것만으로는 영혼의 깊은 피로를 해결할 수 없다.
정신적 회복력은 생각하는 삶을 통제할 때 형성되기 시작된다. 우리 모두가 자주 몰두하는 ‘추측’이라는 것에서 시작하라. 추측도 중독성이 있다. 추측은 제멋대로 날뛰는 야생마와도 같다. 고삐 같은 제약이 없으면 말은 미쳐서 날뛴다. 개인적인 삶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 수 있다. ‘왜 줄리는 내 문자 메시지에 답장을 안 하지? 나한테 화가 난 게 틀림없어. 내가 전화할까? 나와 절교하고 싶은 건가? 내가 지난주에 한 말 때문인가?’ …… 전 세계적 차원에서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아, 이 세상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건가? 우리 자녀와 손주는 어떤 세상을 물려받게 될까? 식량을 비축해 두어야 할까? 뒷마당에 금이라도 묻어 두어야 하나?’
추측은 우리의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예수님도 추측을 금하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마 6:34).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다._218쪽
2. 자연적인 회복 vs. 초자연적인 회복
자연적인 회복: 휴식, 운동, 좋은 음식, 여행 등이 포함되지만, 이것만으로는 영적 회복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초자연적인 회복: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키시는 과정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해야 한다.
3. 초자연적 회복력을 기르는 방법
✅ ① 하나님과의 친밀한 시간 가지기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깊이 머물러야 한다.
성경 묵상과 예배를 통해 영혼을 새롭게 할 수 있다.
✅ ② 성령 안에서 쉼을 경험하기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추구해야 한다.
바쁘고 지친 삶에서 의도적으로 고요한 시간을 만들라.
세상의 미디어들보다 하나님의 이야기에 더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SNS를 포함해 뉴스라는 것을 소비하는 데 하루 30분을 사용하고 있다면 성경을 읽거나 기독교 팟캐스트를 듣는 데 30분 이상, 이왕이면 두 배의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쉬는 시간에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스크롤하지 말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기억하게 해 주는 것들, 이를테면 시편이나 좋은 설교, 하다못해 짧은 인용문이라도 읽으라. 명심하라. 지금 벌어지는 전쟁은 내러티브 간 전쟁이다. 누가 당신을 위해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가?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다면 뭔가에 정신이 팔려 하나님의 이야기를 망각한 것이다. 불안감이나 분노에 빠져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원수에게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옳은 방향을 찾으라.
✅ ③ 영적 전쟁을 인식하고 대적하기
우리의 영혼을 지치게 하는 것은 단순한 환경이 아니라, 영적 공격이 포함되어 있다.
불안과 두려움, 절망은 사탄이 우리를 약하게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영적 공격을 물리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원수는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든 우리 마음에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라는 태도를 심는 전술을 병행해 쓴다. 한마디로 지친 마음을 만드는 것이다. ‘그냥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아.’ 이 마음은 곧 병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 이 병은 “강한 의심, 슈퍼 의심, 메가 의심”이다. 그리고 이 마음은 우리의 진짜 마음이 아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금은 말고, 어쩌면 나중에’ 혹은 ‘다 귀찮아’라고 말하는 지친 마음은 우리의 진짜 마음이 아니라 원수가 주는 마음이다. 이것을 알면 훨씬 더 잘 대처할 수 있다. 원수가 주는 마음을 거부하겠다고 선택할 수 있다. ‘이 마음을 거부할 거야. 다 귀찮다는 마음, 싸우기도 싫다는 마음을 거부할 거야. 대신, 이기는 힘을 선택할 거야. 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아!’_77쪽
✅ ④ 마음을 지키고 내면을 정화하기
뉴스, SNS, 부정적인 정보에 너무 쉽게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네 마음을 지켜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난다”(잠언 4:23).
자신의 내면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연료가 다 닳기 전에 멈출 수 있다. 자신을 혹사시키다가 휴가를 가는 식으로 하지 않고서도, 지금 우리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많은 것들에서 떠날 수 있다. 이제부터 삶에 대한 건강한 거리 두기를 실천할 것을 강권한다. 보유고를 채워 넣기 위해, ‘일부러’ 실제 능력보다 낮은 수준으로 일정하게 가동하는 주, 달, 한 해의 리듬을 일상의 습관으로 들여야 한다. 이러한 리듬은 꼭 휴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양한 리듬을 일상에 불어넣을 수 있다. 예를 들어, 계획표에서 매주 어떤 요일의 저녁 시간을 비워 놓을 것인지 정하라. 또한 일주일에 며칠은 저녁 시간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어야 한다. 그 시간에는 휴대폰도 끄고 온전히 영혼이 쉬게 하라._213쪽
✅ ⑤ 미래의 소망을 기억하기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에만 집중하면 지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 힘을 얻는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는 것이 영혼의 회복력에 중요한 요소다.
존 엘드리지는 이 책에서 단순한 심리적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회복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 단순한 휴식과 쉼으로는 영혼의 깊은 피로를 해결할 수 없다.
✔ 우리는 초자연적인 회복력을 받아야 하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나온다.
✔ 기도, 예배, 성경 묵상, 성령의 임재 속에 머무는 것이 영적 회복의 핵심이다.
마지막 때, 회복력 없이는 견딜 수 없다
Part 1. 고통과 상실의 시절을 지나면서
: 현실 외면, 일시적 위안, 트라우마의 악순환
1. ‘하루빨리 괜찮아지고 싶은 마음’에 휘둘리다
2. 사방에서 우리의 ‘시각’에 맹공을 퍼붓다
3. ‘이기는 힘’을 받지 않고서는 승산 없는 싸움
Part 2. ‘초자연적 회복력’이 절실하다
: 더없이 목마른 시대의 생존 지침
4. 황폐해진 마음, ‘에덴의 영광’으로 충만하게
5. 풍성함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애착하다
6. 여전히 부끄러운 구석구석에 그리스도를 모시다
7. 진짜 왕이 없는 ‘가짜 에덴’ 떠나기
8. 내면의 우물로 깊이 내려가라, 그분을 만날 때까지
9. 하나님이 밀려나 있던 일상, 하나씩 제자리로
10. 버티고, 버티고, 끝까지 버티라
자신만의 보유고를 가지고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닥나면 멘붕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하나님은 없다."라며 다른 것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는 것은 내가 가진 보유고로는 이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더 나아가 자신의 힘듦을 다윗의 시편처럼 온전히 토로하며 인정하고 주의 힘을 바라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온다.
세상에 맞서 나아갈 이기는 힘은 내 보유고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계속 채움 받아야 한다.
그리고 거저 받은 은혜로만 알고 있는 크리스천들은, 다니엘이 아침, 점심, 저녁에 시간을 정해두고 하나님께 기도의 시간을 내어드린 것처럼 자신을 주 앞에 두는 노력을 해야 한다.
에덴의 아름다움과 평안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원초적 욕구가 있지만, 본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되지만 이 땅을 에덴으로 만들려는 헛된 노력은 삼가야 한다.
변화는 '즉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단번에 완전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구원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우리의 타락한 인간성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 우리의 삶이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경험합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 힘들어 보일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나 자신의 힘과 능력만 의지하면 혹시 다시 일어나더라도 결국 다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저앉아 있을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첫째,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수 8:1상)
아이 성에서의 패배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36명의 전사, 패배로 인한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이 떠나신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확신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둘째, 승리를 확신하는 말씀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왕과 그의 백성과 그의 성읍과 그의 땅을 다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수 8:1하)
하나님께서는 패배 이후에도 "이미 승리를 주었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다시 싸운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땅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승리는 이미 완전하게 확정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실패하고 낙심할 때, 우리는 더 이상 일어설 힘이 없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승리를 약속하셨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이미 승리를 주셨으므로, 믿음으로 확신하고 나아가라고 하십니다.
맺음말
혹시 우리의 삶에서 영적 전쟁, 사업, 취업, 관계, 혹은 어떤 부분에서 실패를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까? 누구나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패가 곧 끝이 아닙니다. 실패는 과정일 뿐입니다.
- 살인자였던 모세도 하나님께서 다시 쓰셨습니다.
-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교회의 기둥 같은 사도로 쓰임 받았습니다.
실패 후에 포기하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이야말로 원수 마귀가 가장 바라는 모습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개로, 그리고 다시금 일어섬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실패의 자리에서 일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얕잡아보다가 큰코다친다’는 말처럼, 작은 죄라도 방심하지 말고, 교만함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실수를 범하지 맙시다. 그런데 이미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의 회복을 방해하는 것은 과거의 실패에 대한 부정적 추측과 상상, 그리고 ‘다시 도전해 봤자…’라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이 전쟁을 이미 네 손에 넘겨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단절할 것은 단절하고, 다시금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섭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어주실 새 힘으로 담대히 도전합시다. 그때 우리는 아이 성 전투에서 결국 승리한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 자리가 하나님의 승리의 발판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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