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들에게 회개를 강조하지만 실제 행동에서 공식적 회개가 없는 한국 기독교
가장 절실하게 신도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회개 아니겠습니까? 항상 회개하라, 회개해야 이제 용서받고 죄 사함을 받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죠. 그렇게 회개를 강조하는 한국 교회가 왜 자신의 과오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회개한 적이 없는가?
들어보셨습니까? 한국 교회가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에 대해서 회개했다든가, 한국전쟁 전후 시기에 서북청년단이나 이런 단체들을 만들어서 반인륜적인 행위를 벌였던 일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회개했다든가, 군사독재 시절에 본문에 등장하는 어떤 사람들의 행위나 이처럼 정권의 부당한 권력에 협조하고, 무슨 전두환 대통령을 위한 찬양을 했던 일에 대해 회개한 적이 있는지를 말입니다.
회개 없는 한국 교회의 역사가 한국 교회 자체의 문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 역사 전체가 일그러지는 데 굉장히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잘못 끼워진 단추가 바로 일제강점기 친일 행위에 대해 회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충분히 회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 당시 상황을 본다면, 회개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기독교의 초기 역사와 선교 전략
왜 한국 기독교는 친일 행위를 했을까요? 사실 이건 질(質)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여기 ‘친일 행위’라는 이름을 붙여놓았습니다만, 저는 친일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시내에 나가보면 광화문 거리나 큰 교차로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계신 분들을 봅니다. 그럴 때마다 저런 현수막을 보고 제 발로 교회를 찾아가는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혹시 있을까요. 저렇게 겁을 주는 문구를 보고 갈 수도 있겠지요. 몸이 아프거나 곧 죽을 것 같아서 ‘죽어서라도 천국에 가야겠다’ 싶어 그걸 보고 가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왜 저런 방식을 택할까, 어떻게 해야 전도가 잘될까, 그런 고민들을 아마 본인들도 하셨을 겁니다. 전도, 곧 믿지 않는 사람을 예수 믿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참 어렵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한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를 바꾸는 일이니까요. 어려서부터 모태신앙이라 부모에게 교회 다니는 것을 아예 습관으로 배우고 자란 아이들이 아니라면, 이미 다 커서 살아온 사람들의 인생 전체를 뒤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전도라고 하는 것은, 아무도 없었던, 한국 사회에 기독교인이 아무도 없었던 그 시점에서 시작된 거잖습니까?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말씀’으로 전도를 했던 것이죠. 그런데 150년 전, 대략 1880년대쯤 우리 조상들이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기에 바로 반응해 “그래, 교회 나가야겠다”라고 생각했을까요. 사실 좀 멀리 따져보면, 한국 기독교계가 선교 초창기에 보였던 모습에는 굉장히 이질적이거나, 달리 표현하면 ‘순수하지 않은 동기’들이 어쩔 수 없이 개입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요.
예를 들어 제 아는 분이 강남 어딘가에서 학원을 운영합니다. 학원 문을 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근방에 있는 교회 신자분들이 여러 명 오셔서 “우리 교회에 나오십시오. 그러면 우리 교회 아이들에게 선생님 학원을 홍보해서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더랍니다. 이것이 선교인지, 전도인지, 비즈니스인지 좀 헷갈리는 문제지요. 그분도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교회 아이들은 학원에 오고, 학원은 수강료를 받아 돈을 벌고, 또 그 돈으로 헌금을 하고, 이러면서 안에서 사이클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말입니다. 본인은 이게 비즈니스인지 전도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그런 방법도 있겠지요. 전도의 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도 다들 모르지 않습니다. 다 그렇게들 하고 있으니까요.
19세기말,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은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가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다고 믿으며, 이를 한국에도 적용하려 했습니다. 주요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 교육과 의료를 통한 복음 전파: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여 한국인들에게 접근했습니다. 예를 들어, 언더우드와 스크랜튼 같은 인물은 각각 교육과 의료 선교에 기여했습니다.
- 다양한 동기 부여: 일부 한국인은 영적인 이유로 교회에 가입했으나, 많은 이들은 교육 기회나 의료 서비스를 얻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이는 교회 성장이 빠르지만, 신앙의 순수성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 양반자세 현상: 일부 한국인은 외국인과의 연계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세금을 회피했습니다. 이는 "양대인자세"로 불리며, 기독교가 실리적 목적으로 이용된 사례입니다.
그렇다면, 맨몸으로 들어왔던 외국인 선교사들은 초창기에 어떻게 전도를 했겠습니까. 배경 및 분위기를 먼저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개신교가 들어오도록 만든 사람들은 주로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초창기였지요. 거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는데, 감리교와 장로교가 각각 어떻게 우리나라로 선교사를 보내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에 앞서, 미국에서는 ‘대각성 운동’이라는, 기독교의 대각성 운동이 벌어집니다. 일반적으로 미국 기독교 대각성 운동은 보통 4차에 걸쳐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중 제1차가 미국 독립전쟁 직전, 제2차가 1800년대 초반, 그리고 제3차가 우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직전인 1850년대 전후부터 1860년대까지, 곧 미국 남북전쟁 중이거나 끝난 직후였습니다. 이때 기독교의 대부흥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미국은 전 세계에서, 특히 유럽과 달리 가톨릭 세력이 비교적 약하고, 개신교도들이 만든 국가였습니다. 이른바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라고 부르는, 백인·앵글로·색슨·프로테스탄트가 미국에 굉장히 많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제3차 대각성 운동은 그 이전의 각성 운동들이 주로 국내에서 ‘민주주의 의식을 확산’시키는 성격이었다면, 이번에는 “미국적 가치가 바로 기독교적 가치의 핵심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 미국적 가치를 세계에 확산시키겠다는 뜨거운 열정으로 무장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래서 1882년에 조선이 미국과 수교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마자, “저 나라에 선교하러 가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젊은 기독교인들이 줄을 이을 만큼 열정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은 미국적 가치, 곧 미국 문화·미국 정치·미국 경제 체제·미국인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가장 성경적이고 복음적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전파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책무이자 미국인의 책무라고 확신하게 된 사람들이 조선 땅으로 온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장로회든 감리회든, 선교사를 파견할 때는 기본적으로 두 분야의 전문가를 골랐습니다. 선교사가 되려면 두 분야 중 하나는 전문성을 지니도록 했지요. 하나는 교육, 하나는 의학입니다. 물론 기독교 신학은 기본이고요. 그래서 장로회(미 북장로회)에서는 의료선교사로 알렌(Horace Newton Allen)을, 교육 담당 선교사로 언더우드를 보냈고, 감리교회에서는 의료선교사 스크랜턴과 교육 담당 선교사 아펜젤러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각각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1880년대 후반쯤에 비로소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가능해지는데, 예를 들어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도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의 경우, 아버지가 고종의 비밀 밀명을 받고 (스파이?) 활동하다가 실종되어 버렸습니다. 청나라 쪽에 잡혀서 죽었다고들 짐작하는데,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시니 6살에 고아가 되었지요. 친척들도 청나라를 상대하는 위험한 일을 하다 잡힌 집안이라며 양자로 들이거나 거둬 키우길 꺼려해서, 결국 마침 언더우드가 운영하던 고아원에 맡겨집니다. 거기서 영어를 배우고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요.
고아원·학교 같은 것도 그렇습니다. 의료 선교사들이 세운 병원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겐 무료 진료를 하고, 실비만 아주 약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술을 앞둔 환자에게 “수술 후 교회에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같은 서약서를 쓰게 하는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화학당도 교육받지 못한 버림받은 아이들을 받아서 문을 열었지 않습니까. 이렇게 복음을 직접 들이대기보다, 교육과 의료로 접근한 것이 첫 번째였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그래서 ‘순수한 동기’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종교가 병을 고쳐주는 능력, 치유 능력을 보여주는 것은 성경에서도 예수님이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눈먼 이를 보게 하는 기적과 연결되듯 중요한 부분이니까요. 또 새로운 교육과 문물을 접하면서 미국적 가치를 함께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藉勢하다 (자세하다) → Take advantage of one's power, Rely on one's influence, Use authority arrogantly
藉 - 깔개 자. 핑계할 자 cf) 빙자(憑藉)
“양대인 자세(洋大人藉勢)”라는 말이 대략 1890년대부터 1900년대 무렵에 우리나라 공문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곧 ‘서양 대인, 곧 서양의 권력자에게 빌붙어 호가호위한다’라는 뜻이지요. 예를 들어 당시 천주교·개신교 선교사들은 제국주의 불평등조약으로 인해 치외법권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들은 현지에서 큰 범죄를 저질러도 현지 법으로 재판받지 않고, 자국 영사재판을 받을 수 있었지요. 물론 대부분의 선교사나 신부들은 범죄와 무관했지만, 문제는 그들을 따라다니던 통역이나 마부 등이었습니다. 이들 중 몇은 지방관의 명령을 우습게 알고 민간인을 협박하고 돈을 뜯거나 사기를 쳤고, 만일 잡히면 선교사에게 “조선 관리가 서양인을 싫어해서 내가 괴롭힘을 당한다”라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선교사는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지방관에게 항의합니다. 하급관리들을 잡아다 구타하는 등 무법적 행위가 벌어져도, 조선 정부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일을 제주도나 황해도, 경성 등 곳곳에서 벌어졌는데, 이를 “양대인 자세”라고 했습니다. 또 세금을 안 낸 뒤 “나는 기독교인이므로 영국 영사에게 재판받겠다”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요컨대 교회가 영혼의 문제를 다루기보다, 서양이라는 거대한 백그라운드로 ‘실리’를 얻으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던 것이지요.
어떤 동기로든 일단 교회에 들어오면, 교회 입장에서는 “결국 동기와 무관하게, 그를 회개시키면 되는 것 아니냐”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젊은 시절 이성을 사귀기 위해, 혹은 여러 이유로 교회에 나왔다가 진정한 신앙을 갖게 되는 사례도 있으니까요. 일단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회개시키고 ‘새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일 것입니다.
실제로 회개를 통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한국 초기 기독교 대표 목사로 알려진 길선주 목사가 그렇습니다. 1907년에 한국 기독교 대부흥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일이 일어났는데, 어느 날 길선주 목사가 교회에 나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죽은 친구가 자신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잘 분배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는데, 내가 그걸 처리하면서 일부를 빼돌렸다. 잘못했다. 이제 솔직히 고백하고 돈을 돌려주겠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범죄가 들통난 것도 아니었는데, 스스로 이렇게 회개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대적인 회개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후 1908년에 국채보상운동과도 맞물렸습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 금주·금연을 강조하는 것도 사실은 기독교 교리 자체가 아니라, 당시 국채보상운동 때의 ‘금주·금연으로 나라 빚을 갚자’라는 구호에서 비롯된 것이 큽니다. 개신교가 여기에 적극 동참하면서, 그게 기독교 정체성처럼 굳어졌다는 설명입니다. 실제로 가톨릭 신부님들은 담배나 와인을 비교적 자유롭게 대하고, 불교나 타 종교도 그 문제를 교리 차원에서 그렇게까지 엄격히 다루지 않으니까요.
어쨌든 이렇게 회개에 대한 전통이 초창기에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온, 대각성 운동의 열정을 품은 젊은 목회자들이었던 한국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이, 막상 조선에 와서 만난 현실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첫째, 조선이 너무 가난해서 스스로 가난하게 살려해도 선교사들은 조선 관리나 고종·왕실 측에서 어마어마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최초로 들어왔던 개신교 선교사 홀(Hall)이 민영익을 치료해 준 뒤 받은 사례금이 100만 냥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집 한 채가 3천 냥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거액이었습니다. 왕실도 서양 선교사들에게 예우를 극진히 했습니다. 이렇다 보니 선교사들은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도 조선 상류층 이상으로 부유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목사가 왜 이렇게 부자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생길 여지가 없었습니다.
둘째, 미국이라는 나라가 자본주의를 가장 선진적으로 발전시킨 곳이라는 점과 관련해, “미국이 부자인 것은 하나님의 축복 덕분”이라는 식의 해석이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즉, “미국은 기독교 국가니까 부유하다. 예수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 조선도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 되면 미국처럼 될 수 있다”라는 믿음이 확산되었습니다. 성경에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는 구절은 없지만, 당시 사람들로서는 미국이 실제로 잘 사는 강대국이고, 가톨릭이나 불교보다 개신교가 “문명화·근대화”를 대표해 보이는 듯하니 솔깃해질 만한 논리였던 것입니다.
문제라면, 이 과정에서 복음(福音)의 ‘복’이 자꾸 세속적 ‘복’과 연결되어 “현세의 물질적 보상”으로 혼동되었다는 점입니다. 초기 선교사들이 조선 왕실로부터 너무 큰 부를 얻고, 실제 생활도 부유하다 보니, 사람이 교회에 가면 가난에서 벗어나고 뭔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겨지는 분위기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교회에 들어가면 고아원이나 학교, 병원 등에서 도움받고, 어떤 경우에는 유학 기회를 얻기도 했으니, 세속적 출세의 통로 역할도 했습니다. 이런 점들이 한국 교회의 외연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맺는말
오늘 말씀드릴 주제로 돌아가겠습니다.
한국 기독교가 일제강점기에 처음부터 친일 행위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대표였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1910~1920년대 한국 기독교는 반일 정서가 강했습니다. 3·1 운동 이후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도 감리교 신자였던 이승만이 되었고, 이로 인해 해방 후 엄청난 정치적 자산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기독교계는 “미국처럼 되고 싶다”라는 꿈을 공유했고, 제국주의이긴 해도 ‘근대화된 미국’은 본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대로 일본은 신도가 적고 기독 교세도 약하다 보니, 본받을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았고, 실제로 일본 제국 당국도 기독교계를 위험시했습니다. 3·1 운동 소식을 외신으로 알린 사람들 가운데 서양인 선교사나 기자가 많았던 까닭도 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국제연맹의 일본 제재로 미국과 일본 관계가 단절되면서 상황이 바뀌어 조선의 기독교도들은 선택을 강요받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미국은 적대국이 되었으니, 너희 조선 기독교도들도 더 이상 미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지 말고 일본 제국 신민으로 동화하라”라고 압박을 가한 것입니다. 미국 선교회로부터 들어오던 재정 지원도 끊기고, 조선총독부의 압박도 거세지니, 일부 기독교인들은 떠나거나 저항했고, 또 상당수는 체제에 협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대표적 상징이 바로 ‘신사참배’였습니다. 신사는 일본 귀신들을 모시는 종교 시설입니다. 일본은 모든 식민지·점령지 주민들을 ‘황민(皇民)’으로 동화해 전시 체제에 활용하려 했고,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기독교 교리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가 매우 중요한 계명인데, 이 명령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 신사참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8년 평양 조선노회는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국가 의례다”라는 결의까지 내렸고, 이에 미국인 선교사가 “말이 되느냐. 이건 분명 우상숭배!”라고 항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1938년부터 1940년 사이에 미국인 선교사들은 다 추방되거나 철수하고, 남아있던 조선인 목사들은 체제에 협조하는 쪽과 끝까지 거부하는 쪽으로 갈라집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옥고를 치르거나 목사 자격을 박탈당하는 일이 벌어졌고, 실제로 감옥에서 돌아가신 주기철 목사 같은 사례가 있습니다. 반면 교회를 지키겠다며 “마지못해 신사참배를 한다”에서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조한 목사들도 있었습니다. 교회 십자가 옆에 미니 신사(가미다나, 神棚, かみだな)를 설치하고 예배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전반부는 일본 귀신에게 절하고, 후반부에 기독교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신도들 중 참배를 거부하는 이들을 관청에 밀고해서 충성심을 인정받고, 일본의 전쟁 물자 마련을 위해 교회 종을 헌납하고 돈을 모아 비행기를 헌납한 사례도 있습니다. 조선장로호·감리교단호라 이름 붙여 비행기를 바쳤고, 아예 교회 부지를 팔아 헌납금으로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1938년부터 45년까지 7년 동안, 살아남은 대다수 교회들은 친일을 적극적으로 하거나 강압을 받아 협력하게 되었고, 거부파들은 감옥에 가거나 은거하거나 목사직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해방이 되었으니, 교회는 일본 군국주의에 협조했던 과거를 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실제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고를 치른 목사들은 “우리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회개해야 한다”라고 외쳤습니다. “일본 침략주의에 아부하고, 신도들을 잘못된 길로 이끈 목회자들이 회개해야 한다. 신사참배를 했던 목사들은 목사 자격이 없다. 최소한 몇 달 간이라도 자숙해야 한다”라는 요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친일 목사’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우리는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감옥에 간 사람들은 마음이라도 편했겠지만, 우리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면서 교회를 살리느라 더 힘들었다”라는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했습니다. 회개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도 대다수 교회에서는 학생들에게, 신자들에게 제대로 알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가 가톨릭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강조된 “정교분리는 지키되, 정치현상에 대해 윤리적 판단은 내려야 한다”라는 원칙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입니다.
세상이 불의하면, 교회는 그 불의함을 지적하고, 거기에 동참하거나 협조한 이들이 있으면 회개하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래야 종교가 ‘빛과 소금’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친일에 협조해 자기 동족을 괴롭히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밀고까지 했던 사람들이 바로 목회자 자신들이었다 보니, 교회는 이 문제를 입 밖에 꺼낼 수도, 제대로 다룰 수도 없었습니다.
만일, 가장 먼저 ‘잘못했다’고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강압에 굴복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동포를 해쳤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반성했더라면, 한국 사회 전체가 친일파 문제도 조금은 더 제대로 해결하고,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덮어버렸습니다. 도리어, 친일파 출신 판검사·경찰·정치인들도 “목사들도 회개 안 하는데, 우리라고 뭐…” 하면서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한국 교회와 한국 역사 전체에 큰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저는 ‘친일 행위 자체’보다, 한국 기독교 내에 ‘회개 없음’이 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친일 행위는, 신사참배를 ‘배교’로 다뤘어야 할 정도로 기독교 본질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일이었는데, 해방 후에도 이를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란 늦게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한국 교회가 집단적으로 과거사를 반성하고, 공식적으로 회개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때야말로 진정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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