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찬수목사
지난 설교에서 저는 예수님께서 두 가지 종류의 공격을 받고 계심을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서기관들의 악한 공격입니다. 마가복음 3장 2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그가 바알세불이 들렸다” 하며 “귀신의 왕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모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엄청나고 놀라운 일들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없이 “마귀의 힘을 빌린 것”이라고 공격한 것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 공격, 곧 예수님의 친족들이 가한 공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이라.” 사실 예수님의 친족들은 악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 마리아도 그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은 서기관들의 악한 소문을 그대로 믿고 예수님을 오해한 데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족들의 잘못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귀가 얇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귀신이 들렸다”는 말이 떠돌 때,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지치셔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선한 의도로 예수님을 모셔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악한 소문을 믿고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이 문제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에베소서 4장 14절 말씀이 떠오릅니다.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본문의 친족들은 악한 사람들은 아니었으나 영적으로 미숙했습니다. 시편 1편 4절의 “악인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는 말씀도 떠오릅니다. 누가 소문을 퍼뜨리면 귀가 솔깃해지고, 교회에 대한 누군가의 비난에 마음이 흔들리는 미숙함이 문제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조종하려는 태도였습니다.
본문 21절에서 “붙들러”라는 헬라어는 체포하다, 붙잡다는 강한 표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하고 이끌려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조는 소위 ‘샌드위치 구조’입니다. 20‑21절에서 친족들의 이야기를 하다가 22‑30절에서 서기관들의 모함과 예수님의 응수를 기록하고, 다시 31절부터 친족들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서기관들의 악한 의도와 친족들의 미숙함이 같은 뿌리에서 나온 문제라는 점을 마가는 강조합니다.
이제 본문 31‑32절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쭈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친족들 입장에서 보면 당황스러웠습니다. 33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선언은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 공동체 탄생을 알리는 신학적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서로를 “형제님, 자매님”이라 부르고, 실제 가족 못지않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이 말씀 때문입니다.
이 새로운 가족 공동체의 특징을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을 무한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는 말씀은 매우 풍성합니다. 산상수훈의 “듣고 행하는 자”도,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행함”도 모두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행함의 근원은 요한복음 6장 29절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무한히 신뢰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가능케 합니다.
무한 신뢰는 거대한 에너지를 줍니다. 가나안 정탐 후 백성이 절망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무한 신뢰 때문이었습니다. 저도 사역 가운데 지칠 때마다 주님께 대한 무한 신뢰를 고백하며 힘을 얻습니다. “천년에 한 번 우는 새가 있습니다. 그 새의 눈물이 바다를 이룰 때까지 주님은 저의 영원한 스승이십니다. 그 바다가 마를 때까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으로 무한 신뢰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2. 묵묵히 일하는 자의 가치를 인정받는 공동체입니다.
31‑32절에서 예수님을 둘러앉은 무리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무명의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라 하셨습니다. 세상은 1등만 기억하고 주인공만 주목하지만, 주님은 이름 없이 묵묵히 섬기는 ‘언성 히어로(un‑sung hero)’를 주목하십니다. 교회는 이런 분들의 눈물과 헌신으로 세워집니다. 교회는 수많은 무명의 성도들의 헌신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는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들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3. 먼저 주시는 사랑을 공급받는 공동체입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자격이 있어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먼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합니다. 어느 소설의 문장처럼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부어 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에스겔 47장 환상에서 성전에서 흘러나온 작은 물줄기가 강이 되어 사해까지 생명을 살렸습니다. 출발은 하나님께 있었고, 처음은 작았지만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이름 없는 작은 물줄기 같은 우리의 헌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강물에 합쳐져 세상을 살립니다.
무한신뢰의 힘으로 다시 일어납시다
오늘날 지친 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강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가뭄 속에서도 손바닥만 한 구름을 보고 큰 비를 확신했듯, 우리도 하나님께 대한 무한 신뢰로 작은 구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대로 조종하려는 태도를 내려놓고, 이름 없는 우리의 작은 섬김을 귀히 여기시는 주님을 의지합시다. 그때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는 무한 신뢰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 세상을 살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 자, 우리 주님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시는지 기억하십시오. 살아 계신 주님을 향한 무한 신뢰가 우리의 힘입니다. “천년에 한 번 우는 새의 눈물이 바다를 이룰 때까지, 그리고 그 바다가 마를 때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며 나아갑시다.
'Jesus Christ > 주님과 함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치적 갈등이 격화되는 시대, 성서는 현실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바울의 '아디아포라' 개념을 중심으로 한 신약성서적 접근 (3) | 2025.05.05 |
---|---|
내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내 생각보다 큽니다 (2) | 2025.05.04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 (3) | 2025.05.03 |
자녀를 위한 40일 작정 기도 - 극동 방송 (3) | 2025.05.01 |
헌신예배에 대하여 (3) | 2025.05.01 |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계획. 정학영 대표 (3) | 2025.04.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