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환목사
성경 본문 : 레 25:8~13
안식년을 일곱 번 세우라. 7년을 일곱 번이면 안식년이 일곱 번으로 49년이 끝납니다.
일곱째 달 열흘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뿔나팔을 크게 불어 네가 사는 온 땅에 울려 퍼지게 하여라.
이는 희년입니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입니다.
50년이 시작되는 해는 너희 이스라엘이 지켜야 하는 해입니다. 그 해에는 씨를 뿌리지 말고, 저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도 말며,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됩니다. 그 해는 거룩한 해이니, 너희는 그 한 해를 거룩하게 보내야 합니다.
너희는 밭에서 난 것을 먹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희년이 되면 너희는 저마다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본문 한 구절을 더 읽고 시작하겠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입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거주자일 뿐이다."
희년 -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시작
여러분, 영화 ‘인셉션(Inception)’을 보셨습니까?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가 생각을 훔쳐내는 ‘코브’라는 요원이 등장하죠. 디카프리오가 연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는 생각을 빼내는 것이 아니라 ‘인셉션’, 즉 생각을 심는 작전을 시도합니다. 이 영화에 아주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제가 시작하자마자 말씀드리려 했는데, 여러분이 대신 읽어 주시겠습니까?
An idea is like a virus. Resilient, highly contagious. The smallest seed of an idea can grow. It can grow to define or destroy you.
생각이라는 것은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와 같아서, 한 번 심기면 우리 안에서 자라나 우리를 정의하거나 파괴할 수 있다.
돌이켜 보면, 어릴 적 제게 누군가 ‘인셉션’을 시도한 것이 분명합니다. “너는 귀엽다.”
‘워터십 다운(Watership Down)’이라는 책을 아십니까?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이 책에서 헤이즐과 파이버라는 두 마리 토끼가 동료들과 함께 대재앙을 피해 다른 타운으로 모험을 떠납니다. 수많은 어려움을 맞이하지만, 그때마다 놀라운 지혜와 용기로 이를 헤쳐 나갑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들이 어릴 때부터 들었던 ‘토끼 영웅 라’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화에 의하면, 프리스라는 신이 영웅 라에게 복을 주어 적을 교란시키는 꼬리, 적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 그리고 꾀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토끼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릴 적부터 들었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모험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인셉션’과 ‘워터십 다운’은 비슷한 주제를 갖습니다. 우리 마음에 심긴 이야기가 얼마나 힘이 센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생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것이 씨를 뿌리고 자라 우리를 형성하고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품고 사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저를 임신하셨을 때부터 들려주신 이야기가 제 정체성을 형성했습니다. 저는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는 크고 빛나고 귀여울 거야.” 이야기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일마다 영향을 미칩니다. 이야기 하나가 한 사람의 삶에 끼치는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어떤 인생을 사느냐는 어떤 이야기를 품고 사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제임스 브라이언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삶을 맡길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는 몇 가지 간단한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이야기가 아름다운가, 선한가, 진실한가?” 누군가가 간직한 이야기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다면, 그 이야기가 그 사람을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야기가 문화로 형성되면, 그 문화도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어떨까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진리를 강조해 왔고, 하나님은 선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어떨까요? 정호승 시인은 “밥은 밥그릇에 있어야 아름답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무언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아름답다’라는 말에 들어 있는 ‘아’라는 고어가 ‘나’를 뜻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니 ‘아름답다’는 말은 곧 ‘나답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남처럼 되고 싶어 하고 남의 자리를 욕망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나다운 것이 아름답고, 내가 나의 숨을 쉴 때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습니다. 그 ‘보기에 좋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품으셨던 뜻대로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그 뜻대로 움직이며 조화를 이루는 ‘샬롬’의 상태였습니다. 그 아름다움은 언제 깨질까요? 인간이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로 가려고 할 때,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며 그 위에 서려고 할 때,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더럽힐 때, 세상은 태초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립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사람아, 네가 어디 있느냐?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느냐?’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너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부끄러워하며 숲 뒤에 숨은 너의 모습은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물품의 가격이 품질에 비해 저렴하면 우리는 ‘가격이 착하다’라고 말합니다. 몸매에도 ‘착하다’라는 말을 씁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이청준 작가는 이를 두고 ‘말이 제 집을 잃고 헤매고 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착하다’라는 말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데 붙어 다니는 것입니다.
제자리로 돌아가는 아름다움 - 희년을 통한 공동체의 회복
이제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린 것들을 하나님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돌려놓으시는 이야기가 바로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가장 강력하고 급진적으로, 가장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이 오늘 본문 레위기 25장에 나오는 희년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7년마다 안식년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는 사람이 쉬는 것이 아니라 땅이 쉬는 것입니다. 사람이 7일마다 안식일에 쉬듯, 땅은 7년에 한 번 1년 동안 쉬어야 합니다. 안식년에는 땅을 경작하거나 거두지 말아야 했습니다. 코로나 기간에 사람이 일을 멈추고 공장이 돌지 않자, 일시적이지만 망가진 땅과 강이 회복되고, 동물들이 돌아오는 일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안식년을 일곱 번 지키면 49년이 됩니다. 그다음 50년이 되는 해, 하나님께서는 속죄일에 뿔나팔을 크게 불라고 하셨습니다. 뿔나팔을 뜻하는 히브리어 ‘요벨’에서 영어 ‘주빌리(Jubilee)’가 나왔습니다. 희년이 되면 크게 두 가지를 해야 했습니다.
첫째, 노예를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레위기 25장 10절을 보면 “너희는 50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주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어떤 사람이 살다가 너무 가난해져 빚을 지거나, 해결할 수 없어 자기 땅을 팔거나, 스스로를 종으로 팔아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그러나 희년이 되면, 그 사람이 빚을 다 갚지 못했더라도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기 땅과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땅도 돌아갑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다만 나그네이며 나에게 거주자일 뿐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땅을 사고파는 것이 당연합니다. 땅이 많으면 대대로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땅을 사고팔 수 있었지만,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쩔 수 없어 땅을 팔았다 해도, 50년이 되면 땅은 원래 분배받았던 이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시인과 촌장이 부른 ‘풍경’이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간 풍경.”
희년이 되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사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나 인간됨을 잃고 노예로 살았던 그 사람이 고향 땅과 가족에게 돌아갑니다. 살기 힘들어 땅을 팔았더라도, 희년이 되면 그 땅을 돌려받습니다. 땅도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사람도, 땅도, 동물도, 식물도,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나팔소리와 함께 펼쳐집니다.
제가 어릴 적 부잣집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사업 부도로 하루아침에 파산했습니다. 2층 양옥집에 정원이 있던 우리 집은 순식간에 월세방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장님이라 불리시던 아버지와 사모님이라 불리시던 어머니는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평생 그때를 회복하지 못하셨고, 술에 의존하셨습니다. 아버지 나이가 고작 44세였습니다. 열심히 사셨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인생에 단 한 번이라도 빚을 청산할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살다가 원치 않은 실패로 무너진 가정이 한둘이겠습니까? 그러나 사회는 이를 인정하거나 돕지 않습니다. 가난과 실패는 대물림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희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는 사회적 제도였습니다. 50년마다 돌아온다는 말은 대부분 살아 있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희년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빚이 많아도,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일찍 죽더라도 그 실패와 가난이 자식 때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과거의 실패를 극복하려 해도 안 되고, 그날의 잘못을 후회하지만 돌이킬 방법이 없다고 느끼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인생에 ‘리셋 버튼’이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다시 출발하고 싶은 분도 있겠지요. 그렇게 희망의 끈을 놓고 싶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희년을 통해 보여주신 아름다운 이야기,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땅도 온 우주 만물이 본래 자리,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 이야기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키시고, 우리가 떠났던 본래 자리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취임 설교’라 불리는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주님은 “이 말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곧 주의 은혜의 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예수께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죄로 인해 뒤틀린 세상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선교 이야기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예수께서 오셔서 억눌리고 압제받는 모든 이를 해방하고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이 실제로 실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종을 자유케 하는 일은 있었지만, 땅을 돌려주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왜였을까요? 간단합니다.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도 최근 어렵사리 집을 샀습니다. 만약 희년이 되어 나팔이 울리고 집을 돌려주라고 한다면, 저도 선뜻 내놓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엄청난 부동산을 가진 이들이야 어떻겠습니까?
이사야 5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 홀로 거주하려는 자들은 화가 있다.”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주신 것을 내 것이라 움켜쥐며 내려놓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아름다운 풍경은 온전히 펼쳐지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남은 부분을 아름답게 채우는 일, 그 풍경을 끝까지 아름답게 그려내는 일입니다. 몇 년 전, 마지막 인디 코스타에서 했던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라디오에서 들었던 사연입니다. 퇴근 시간에 비가 갑자기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이 건물 처마 밑으로 뛰어들었는데, 이미 한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들어오자 청년은 자리를 비켜 드렸습니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들어오더니 청년을 옆으로 밀어냈습니다. 청년은 비를 맞으며 황당했지만, 주위 사람들은 모른 척했습니다. 그때 할아버지가 청년에게 말했습니다. “젊은이, 세상이 다 그런 거야.”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그런데 이 청년은 빗속으로 달려가 비닐우산 다섯 개를 사 와서 서 있던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어르신, 세상은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그때 할아버지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우산을 내려놓은 채 빗속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세상은 그런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원래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면 안 된다고,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여 지구를 병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야기에 뛰어드는 사람입니다. 희년을 과거의 이상적 이야기로만 두지 않고, 오늘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할 희년
저는 ‘이민자 보호 교회 네트워크’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소수 이민자들을 돕기 위해 목회자, 변호사, 시민 활동가들과 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얼마 전 멕시코 국경 도시 엘패소와 후아레스를 다녀왔습니다. 그곳 국경 장벽 앞에서 김기석 목사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천국에 가면 없을 것 같은 것을 제거하며 살라.” 천국에 플라스틱 쓰레기가 있을까요? 천국에 장벽이나 철책이 있을까요? 없다면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이 땅에서부터 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천국에 없을 장벽과 철책을 거두고, 본래 한 동네였던 그 땅을 되돌려 놓을 때,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상적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현실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경 양쪽에서 파티를 열고, 장벽 사이에 시소를 만들어 함께 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상상력으로 본래 모습을 회복시키려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습니다.
어릴 적, 아이들이 잠들 시간이 되면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 개미와 베짱이, 흥부와 놀부, 그리고 성경 이야기까지. 어떤 이야기가 가장 좋은 이야기일까요? 내가 등장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 이야기에 우리가 등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아름다움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만들어 가는 일에 초청하십니다.
희년이 한 번도 이루어진 적 없다고 하지만, 희년의 정신을 살아낸 사람들이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열왕기상 21장에서 나봇은 아합왕에게 포도원을 팔라는 요구를 여호와께서 금하셨다며 거절했습니다. 예레미야 34장에서 시드기야는 전국적으로 노예 해방을 단행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고, 억압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희년을 실제로 살아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국의 ‘주빌리 2000’ 운동이나 미국에서 시작된 ‘롤링 주빌리’ 운동은 갚을 수 없는 빚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빚을 탕감해 주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부동산 문제 해결을 위해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희년 정신을 사회·경제 제도로 적용해야 한다고 움직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구체적 방안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희년을 옛날이야기로 치부하지 않고 이 땅에서 실현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상상해 보십시오. 아버지의 집을 떠나 먼 나라로 갔던 둘째 아들이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그를 품에 안고 잔치를 엽니다. 이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입니까? 그러나 탕자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첫째 아들이 잔치 안으로 들어올 때 더 온전해집니다. “왜 나의 수고로 번 돈으로 저 사람이 혜택을 받아야 합니까?”라고 묻지 않고, 은혜로 받았으니 나누는 것이 마땅하다며 잔치에 함께 기뻐할 때, 이야기는 진정 아름다워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 일에 부르십니다.
파커 파머가 쓴 『다시 집으로 가는 길』 서문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대평원의 농부들은 눈보라가 오면 헛간과 집 사이에 밧줄을 묶습니다.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얼어 죽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삶의 눈보라 속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이야기도 압니다. 거친 눈보라 속에서도 ‘예수’라는 밧줄을 굳게 잡고 본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정채봉 시인의 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 떠오릅니다. “하늘나라에 간 엄마가 하루 휴가를 받아 나온다면, 아니 반나절, 아니 5분만이라도…” 주님이 오시는 그날, 억울했던 모든 일을 주님께 털어놓고 엉엉 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우리를 품에 안고 집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저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모든 것이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죄짓기 이전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비교할 수 없이 더 좋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결말에서 우리는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선함, 진실함, 아름다움을 모든 피조물과 함께 누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제자리로 돌아와 눈을 맞추고, 정의와 평화가 돌아와 입을 맞추는 그 풍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름다운 이야기를 마음에 품고 사십시오. 모든 것을 돌이키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품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눈보라 속에서도 아름다울 것이며, 우리의 삶의 터전과 이 땅과 세상도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결국 아름다운 이야기가 세상을 구원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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