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요약:
제목: 정치적 갈등의 시대,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 바울의 ‘아디아포라’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신약성서, 특히 사도 바울의 '아디아포라(adiaphora)' 개념을 중심으로 이 질문에 답을 살펴봅니다.
‘아디아포라’는 복음의 본질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 즉 성경이 명확히 명령하지 않은 영역으로, 신앙인의 자유와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디아포라'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같은 핵심 교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세속 권력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하되, 복음의 본질은 단호하게 수호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권력에 복종하라고 권면한 것도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지, 권력 자체를 신성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정치적 침묵과 편향된 정치 개입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에 대한 방조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특정 이념이나 정파적 견해에 종속시키는 문제를 낳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 윤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배제가 아닌 환대, 우월이 아닌 평등, 분열이 아닌 연합의 원리입니다. 교회는 이 원리에 따라 사회 속에서 정의와 사랑, 화해의 실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아디아포라 사상은 오늘날 교회가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비본질적인 사안에는 사랑과 지혜로 유연하게 대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된 시대에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이자 교회의 공적 책임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아디아포라 (adiaphora, 그리스어: ἀδιάφορα, 무관심한 것)는 스토아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 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신약 성서에서도 이용되어 기독교의 개념으로도 논의되게 되었다.
- 아디아포라(indifferent) vs. 디아포라
교회에는 수많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는 기독교라는 큰 틀에서 정해놓은 것과 각 교회에서 개교회의 정통에 따라 나름대로 정해진 것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딜레마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학적 용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라는 말의 신학 개념은 “대수롭지 않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상대적 신학 개념”입니다. 성서에서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즉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아서, 사람의 형편에 따라 임의로 결정하고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아디아포라’의 정반대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용어가 ‘디아포라(Diaphora)'입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반드시 해야만 하고, 있어야만 하는”의 의미로 그 어떤 것에도 양보되거나, 변형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사항을 지칭하는 “절대적 신학 개념”입니다.
진리에 대한 문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이 문제에 양보하지 않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외의 다른 것으로 구원 얻을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다이포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아디아포라’는 성경에서 뚜렷한 한계를 정해 놓지 않아서 우리의 신앙 양심에 따라 행하도록 허락하신 문제입니다.
-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디까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부모를 공경해야 되는데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되는가? 신앙생활 중에는 ‘아디아포라’에 속한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참 신앙인은 올바른 분별력과 선한 신앙 양심을 가지고 이해와 사랑, 관용과 겸손한 마음으로 남에게 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에서의 임무와 책임, 참여해야 할 모든 모임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올바르고 선한 신앙 양심의 여부입니다.
- ‘디아포라’보다는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싸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자라온 환경과 교육 등에 의해 형성된 신념을 자신의 잣대로 삼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댑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義)인 줄 착각합니다.
- 참 신앙인은 올바른 분별력과 선한 신앙 양심을 가지고 이해와 사랑, 관용과 겸손한 마음으로 남에게 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에서의 임무와 책임, 참여해야 할 모든 모임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올바르고 선한 신앙 양심의 여부입니다.
초록 (Abstract)
현대 한국 사회는 이념과 진영 간의 정치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성서는 어떤 현실적 목소리를 내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본 논문은 신약성서, 특히 사도 바울의 '아디아포라'(adiaphora) 개념에 주목하여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아디아포라는 구원이나 복음의 본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신앙인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영역을 뜻합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 치하에서 복음의 핵심이 아닌 문제들에 실용적으로 대처하면서도, 결코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로마서 13장 등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에게 절대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십자가와 부활)이며 세상 권력은 일시적인 “덧없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과 무관한 사안엔 유연하게 대응하되 그것이 침묵과 방조의 핑곗거리가 돼선 안 된다”고 역설하며, 하나님 나라의 정치 질서를 “배제가 아닌 환대, 우월이 아닌 평등, 분열이 아닌 연합”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 교회는 바울의 이러한 아디아포라 정신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정치적 침묵이나 편향된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이러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대안적 정치윤리를 모색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가 세속 권력에 대해 맹목적으로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특정 이념에 복음을 결부시켜 편향되는 것도 모두 경계하며, 대신 복음의 가치(정의, 사랑, 화해)에 근거한 적극적 참여를 촉구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약성서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치 원리는 오늘의 현실 정치에도 적용 가능한 대안임을 제시합니다. 이는 배제 대신 환대, 불의에 대한 침묵 대신 예언자적 목소리, 우월 추구 대신 평등과 섬김, 분열 조장 대신 화해와 연합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적 정치관은 현실의 갈등을 치유하고 교회의 공적 책임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할 것입니다.
서론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 세대와 계층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겪고 있습니다. 언론과 광장의 담론은 날카롭게 분열되어 있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격화된 정치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성서는 현실 정치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이는 신앙 공동체 내부에서도 논쟁적인 질문이며, 동시에 한국 교회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입니다. 일부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나 침묵을 미덕으로 삼아 사회 현안에 거리를 두려 하고, 다른 한편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지지하여 신앙을 정치와 강하게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로부터 때로는 방조와 동조로, 때로는 분열과 갈등의 주체로 비춰지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연구는 신약성서 특히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현대 교회가 취할 수 있는 통찰을 얻고자 합니다. 주목하는 개념은 바로 '아디아포라'(adiaphora)입니다. 아디아포라는 원래 스토아 철학 등에 기원을 둔 용어로서, 선이나 악과 같이 본질적 차별을 낳지 않는 "무관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후 기독교 신학에서도 사용되어,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들 혹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영역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믿음의 핵심 교리와 직접 관계없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항들을 뜻하며, 이에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와 유연성이 인정됩니다. 반대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핵심 교리는 디아포라로서 (아디아포라에 해당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로 간주되었습니다.
본 논문은 먼저 아디아포라의 개념과 바울이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했는지를 이론적 배경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문 분석에서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 13장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의 정치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고찰합니다. 바울이 당시 로마 제국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권면한 의도를 아디아포라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그것이 복음전파를 위한 실용적 선택이었음을 논의할 것입니다. 이어서 적용과 성찰 부분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국 교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구체적으로, 현대 한국 교회 내에 나타나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 - 하나는 정치적 침묵이나 중립을 표방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하는 태도 - 를 살펴보고, 이것들이 어떻게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과 어긋나는지 분석할 것입니다. 아울러 최근의 사례들, 예컨대 2024년 말의 12.3 비상계엄 사태 전후 교계의 반응이나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행사에서 드러난 종교-정치 간 유착 논란 등을 언급하여 논의를 구체화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학'이라는 대안을 모색하면서, 교회가 현실 정치 속에서 취해야 할 책임 있는 자세와 목소리를 제언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정치적 갈등이 격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성서가 줄 수 있는 통찰과 도전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이론적 배경: 아디아포라 개념과 바울의 신학
아디아포라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
'아디아포라'(adiaphora)는 본질적이거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들, 즉 신앙의 핵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들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어원상 '아디아포라'는 "구별되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이며,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 덕(德)이나 악(惡)처럼 결정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중간적 가치를 가진 사물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 도입되어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분명한 계명을 주시지 않은 영역이나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관습과 규례들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의 형식, 음식 규정, 절기 준수 방식 등은 신학적으로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것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신앙인 각자가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지며, 교회 전통 안에서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실천이 허용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디아포라 개념은 종교개혁 시대에 중요한 논쟁으로 부각된 바 있습니다. 종교개혁 직후 개신교 내부에서도 교회의 전통의 어떤 요소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고, 이를 두고 아디아포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16세기 독일에서 루터의 동역자였던 멜란히톤은 카톨릭과의 타협안인 아우구크스부르크(Augsburg) 임시협정에서 이신칭의 교리만 지켜진다면 나머지 전례상의 요소들은 아디아포라로서 양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반면 플라키우스 등의 급진파는 박해나 스캔들의 상황에서는 아디아포라도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며 반대했지요. 이는 “아디아포라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가 걸려 있거나 악한 세력이 강요하는 경우에는 단순한 아디아포라로 남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포합니다. 결국 대부분의 루터파는 지나친 양쪽 극단을 배격하면서, 성경에 명시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한 비본질적 전례는 교회의 자유 영역으로 인정하되, 복음의 핵심이 위협받는다면 그때는 양보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en.wikipedia.org)
요컨대 아디아포라의 개념에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첫째, 신학적/도덕적 상대성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흑백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성경이 명령하거나 금지하지 않은 수많은 사안들은 신앙인의 재량과 지혜에 맡겨져 있습니다. 둘째, 절대적 진리와 본질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전제입니다. 곧 복음의 핵심 교리나 하나님의 분명한 계명이 타협 불가능한 절대적 범주로 존재하며, 아디아포라 논의는 이 핵심이 확고히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교회사에서 순교자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우상숭배나 그리스도 부인의 강요 등 본질적 신앙 고백에 관한 한 목숨을 걸고 거부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상당한 문화적 적응과 관용을 보인 사례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 신학에서의 아디아포라와 자유
사도 바울은 신약성서에서 명시적으로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서신 곳곳에서 아디아포라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과 지엽적인 문제를 명확히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융통성과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에 나타나는 우상 제물 고기 섭취와 특정한 날 준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다 시장에 나온 고기를 먹는 문제로 교회 내에 논쟁이 있을 때,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고기 자체는 본질적으로 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여, 자신의 자유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자매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절제할 것을 권면하지요 (고전 8:1, 8:9-13 참조). 이는 어떤 행위 자체는 신앙에 절대적이지 않은 중립 영역일 수 있으나, 사랑과 공동체의 덕이라는 더 중요한 원칙에 비추어 조절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바울은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을 더 귀하게 여긴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 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며 (롬 14:2, 5) 신앙인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서로 정죄하지 말고 각자 양심을 따라 행하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결정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선언합니다 (롬 14:17). 이 말씀은 음식이나 절기 준수와 같은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아니므로, 그런 것들로 다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며, 음식 규례나 날자 엄수는 그 핵심에 비해 부차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아디아포라의 원리를 적용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복음 전도의 상황에서도 상당한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한다”고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밝히며 (고전 9:20-22)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문화적 관습을 탄력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는 그의 선교사역에서 아디아포라적 태도를 잘 나타냅니다. 예컨대, 디모데의 할례 문제에 있어서 (행 16:3)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였지만,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려 할 때는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갈 5:2-3). 할례 자체는 구원과 직접 관련 없는 아디아포라로 볼 수 있으나, 복음의 진리(이신칭의)를 훼손하는 조건으로 강요될 때에는 더 이상 아디아포라로 취급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와 아닌 문제를 분별하며, 비본질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유를 주되 본질이 걸린다면 단호히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정리하면, 바울 신학에서의 아디아포라 개념은 복음의 핵심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자유 영역으로 이해됩니다. 그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하여 자유의 원칙과 공동체의 유익 원칙을 함께 제시하고, 비본질적 문제를 절대화하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을 섬긴다”(엡 4:5-6)는 선포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선언을 통해 복음이 만들어낸 새로운 평등과 연합의 가치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당시 사회의 인종·계층·성별 장벽을 넘어서는 radical한 정치사회적 함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은 겉보기에는 정치참여에 소극적인 듯하면서도,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 기존 사회질서를 변혁시키는 대안적 사회 비전을 제시한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다음 장에서는 바울의 가르침 중 직접적으로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다룬 로마서 13장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분석: 로마서 13장의 맥락과 바울의 정치인식
신약성서에서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본문 중 하나가 바로 로마서 13:1-7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겉보기엔 매우 권위순응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로 시작하는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로 인정하고, 신자들에게 세금 납부와 복종을 촉구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순응주의 혹은 왕권신수설적인 논리로 읽히기도 하며, 실제로 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근거로 오남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바울 서신 전체의 맥락과 그의 선교적 동기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문맥상 로마서 13장은 12장에서부터 시작된 윤리교훈 부분에 속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원수 갚지 말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라(롬 12:19-21)는 가르침을 주었고, 바로 이어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언급합니다. 이는 개인적 원수 갚음의 금지와 사회적 질서 유지라는 주제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폭력이나 반란의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주후 50년대 후반) 로마에 사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몇 년 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등으로 소요와 의심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의 지속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체제전복적 세력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조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울이 “억압적 정권 아래서도 질서 유지를 위해 신앙인이 취한 실용적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로마의 통치 자체를 신적 권위로 절대화하거나 황제숭배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생존과 복음의 전진을 위한 현실적 처신으로서 복종을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동일한 로마서 13장에서 통치자에 대하여 일정한 조건부 수용의 뉘앙스를 남겨둡니다. 그는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라 부르며(롬 13:4), 그 역할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이는 만일 통치 권력이 본분을 망각하고 선을 징벌하거나 악을 장려한다면 그 권세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는 함축적 한계를 지닙니다. 바울이 명시적으로 반란이나 불복종을 조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술 구조상 권력에 대한 복종은 권력이 정의를 수행한다는 조건 아래 있는 셈입니다. 실제 신약 다른 부분을 보면, 베드로나 요한 등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며 복음 전파를 금지하는 당국의 명령을 거부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제국을 짐승의 제국으로 상징화하며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불사하는 저항의 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바울의 로마서 13장 권면은 절대 복종의 원리가 아니라, 당시 구체적 정황에 따른 목회적 조언으로 이해해야 타당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신학적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로마서 13장 이후에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다른 서신들의 진술과 로마서 전체의 논지를 통해 유추됩니다. 바울에게 있어 최고의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Kyrios)이십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도 결국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고, 그 권력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차정식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바울은 “세상의 권력은 결국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덧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v.daum.net)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7:31에서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고 말하며 현 세상의 제도와 질서가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영원한 구원의 사건으로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 제국의 권세에도 적당히 순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충성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복음 전파를 방해받지 않고자 하는 자유의 활용이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목적의 한도에서 세속 권력에 대해 취한 유연한 자세였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바울의 정치인식은 변혁의 전략으로서의 비저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상 권력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일시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통해 오히려 복음이 퍼져나갈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절대 영역(예: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상대 영역(예: 세금 납부나 행정 질서)에 대한 구분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바로 앞서 논의한 아디아포라 개념과 직결되며, 바울은 국가 권력에의 복종 문제를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위치시킨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즉,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행위나 통치 질서에 협조하는 것 자체는 구원 문제와 직접 관련 없는 비본질적 사안이므로, 신앙 양심에 크게 저촉되지 않는 한 협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권력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본질을 침해하려 든다면(예컨대 황제숭배 강요), 바울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가 주”라는 복음 선포로 암묵적으로 황제는 주가 아니다는 정치적 함의를 전달했고, 결국 그 이유로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은 바울이 어떤 선을 넘는 타협은 하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보여준 태도는, 복음의 전진을 위한 전략적 유연성이자 아디아포라의 원칙 적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의 핵심에 관계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갈등을 피했지만, 교회의 정체성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반하는 요구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관점은 이후 교회사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할 때 중요한 준거가 되어 왔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주는 시사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현대적 적용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적용과 성찰: 현대 한국 교회에의 교훈과 대안적 정치참여 모색
한국 교회의 현실: 정치적 침묵 vs. 정치적 편향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정치적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극명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사회·정치적 현안에 대해 극도로 신중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입장이 존재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적 신념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특정 이념이나 세력을 지지하는 행동을 취하는 입장입니다.
이 두 입장은 표면적으로 상반되어 보이지만, 모두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바울의 가르침과 비교해 볼 때 극단적인 균형 상실을 드러냅니다. 각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치적 침묵 또는 중립 노선: 이는 교회가 세속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흔히 “정치 문제는 구원과 상관없는 아디아포라이니, 교회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보이나, 실제로는 사회적 불의와 고통에 대한 침묵과 방관으로 이어질 위험이 큽니다. 예컨대 군사독재 시절 일부 대형교회와 보수 교단들은 “정치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맡기고 교회는 기도만 한다”며 로마서 13장을 절대화한 나머지, 인권 유린과 폭력에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결과적으로 부정한 권력에 동조하거나 적어도 묵인하는 효과를 낳았고, 훗날 교회의 윤리적 책임에 큰 흠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사례로도, 2024년 12월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이른바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많은 교회들이 사태의 추이에 입을 닫고 있었고, 일부 보수 교계 인사들은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식으로 정권의 행위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 아디아포라를 가장한 침묵과 방조”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아디아포라 정신이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자유와 유연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를 현실 참여에 대한 면죄부로 왜곡하여 정의에 대한 무책임으로 흘러가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적용입니다. 정치적 중립을 취한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현실에 침묵해버리면, 교회는 세상의 양심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 특정 정치세력과의 결합 및 편향: 반대로, 어떤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시도해왔습니다. 이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오해하여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곧 하나님의 뜻인 양 동일시하는 오류로 이어지곤 합니다. 특히 일부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반공 이념이나 우익 정치노선을 기독교 신앙과 결부시키면서, 이를 수호하는 것을 신앙의 일부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집회들에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태극기와 십자가를 함께 들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대통령 탄핵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과거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일부 목회자가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지도자들을 미화하고 현직 대통령을 “하나님의 뜻에 세워진 지도자”로 칭송한 일도 있었습니다. 2014년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에서 한 원로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탁월한 지도자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하나님이 세운 고레스와 같다”며 노골적으로 찬양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맹목적 지지가 권력자의 과오나 불의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교회를 정치권력의 홍보 도구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그 설교에 대해 “나라를 위한 기도회라면서 실상은 특정인을 미화하고 무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자리가 되었다”, “권력자의 불의한 행위에 침묵하면서 동조하는 모임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교회를 사회로부터 크게 불신받게 했을 뿐 아니라, 복음의 초월성과 보편성을 훼손시켰습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 정치이념에 예속될 수 없는 초월적 진리인데, 그것을 편향된 이념의 포장지로 전락시키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차정식 교수도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특정 정치 노선을 신앙과 결합해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흐름”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본래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은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자유였건만 오늘날 오히려 정치적 책임 회피나 편향의 명분으로 왜곡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침묵과 정치적 과잉개입은 얼핏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듯하지만, 둘 다 복음의 본질과 세속 권력의 관계를 잘못 설정한 결과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전자는 복음의 사회적 함의를 지나치게 축소하여 정의와 사랑이라는 핵심 가치까지도 부차화한 오류이고, 후자는 복음의 초월성을 간과하여 세상의 권력을 절대시한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아디아포라 개념과 그의 삶을 돌이켜볼 때, 이 두 극단은 모두 성경이 가르치는 균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대안적 태도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라는 개념이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질서: 배제 아닌 환대, 우월 아닌 평등, 분열 아닌 연합
신약학자들은 신약성서가 단순히 세속정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적 정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정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영적 세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이 땅의 인간 공동체에 새로운 원리를 도입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 통치의 원리는 세상의 통치 원리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디아포라의 논의에서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가를 구분해야 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를 말할 때도 세상의 정치와 구별되는 가치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대비시켜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 질서 하나님 나라의 정치 질서
갈등과 적대, 그리고 이에 따른 배제 | 환대(歡待)와 포용 – 원수마저 사랑하고 껴안음 |
지배와 우월 추구 (계층화, 특권 구조) | 평등과 섬김 –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 |
파당과 분열 (분열과 정쟁을 통한 권력 다툼) | 연합과 화해 – 서로 용납하고 하나 되게 함 |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5:22-23에서는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덕목들을 열거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속한 가치들입니다. 이를 사회적 차원에 적용하면, 배제 대신 환대, 불의 대신 의로움, 폭력 대신 평화, 차별 대신 사랑, 분열 대신 화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고 (마 5: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방인 원수까지 이웃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식탁교제로 환대하신 행위 등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힘과 폭력, 배제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질서에 대한 거룩한 반역이었습니다.
예수 공동체, 곧 초대 교회가 보여준 모습도 하나님 나라 정치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를 이루고,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형제로 받아들여지며,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를 가족으로 대하며 재산을 나누는 장면(행 2:44-47 등)은 당시 사회의 통념을 뒤엎는 파격적인 평등과 연대의 실현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연약함으로 완전하지 못했지만, 신약의 이상은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4-15에서 그리스도께서 “원수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다”고 선언하며, 서로 다른 집단이 하나로 화해된 새 인류를 지향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치 모델입니다.
차정식 교수가 말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적대를 환대로, 우월을 평등으로, 배제를 포용으로 바꾸는 원리”이며,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사회에서도 실현 가능한 대안입니다. 교회가 이 원리를 따라 살아갈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향을 몇 가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환대와 포용의 실천: 이주민 노동자, 난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몇몇 교회들은 난민 구호와 다문화 가정 지원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환대정신을 실천하고 있는데,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거나 불편해하는 시선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이름으로 혐오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 정치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오히려 교회는 앞장서서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마 25:35)을 실천함으로써, 분열과 배제의 사회풍조에 도전해야 합니다.
- 정의와 평등의 옹호: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정의(justice)를 선포하고,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는 곧 예언자적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아모스와 같은 구약 예언자들은 종교적 의식에만 몰두하고 사회 정의에는 눈감은 당시의 종교인들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눈앞의 권력에 불의가 있을 때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부정부패, 인권 침해,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교회가 윤리적 입장을 표명하고 시정 요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특정 정당의 논리에 예속되기보다는, 성경적 가치에 근거한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는 모든 신자의 평등을 실현하여, 교회가 자체적으로 권위주의나 성차별, 빈부격차에 오염되지 않도록 늘 개혁해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먼저 평등과 섬김의 문화를 보여줄 때, 사회에 대한 설득력도 갖게 될 것입니다.
- 화해와 연합의 중재자 역할: 한국 사회의 분열된 지형 속에서 교회는 화해의 중재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셨고 (마 5:9),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고후 5:18).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의 갈등 현장에 빛과 소금으로 참여하여, 대립하는 집단 사이의 대화와 이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실제로 과거 민주화 운동 시기나 지역 사회 갈등 현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재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유산을 이어 받아, 이념 갈등, 세대 갈등, 노사 갈등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정하고 사랑에 근거한 중재자로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무관심과는 구별되는, 적극적인 평화 만들기(peacemaking) 사역입니다. 정치적 쟁점에 대해 무조건 한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가치에 비추어 옳은 방향을 제시하고 서로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복음의 평화 메시지를 실제로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대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비본질에는 관용을, 본질에는 충성을”이라는 옛 격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현안들 가운데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존엄, 정의, 평화, 사랑 등 복음의 본질적 가치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그 가치를 옹호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회 스스로가 성서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정파의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바를 깊이 성찰하며 창조적 대안을 상상해야 합니다.
차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는 그동안 “중립이나 중도라는 이름으로 비판 없이 수용되던 성서 해석의 관성”에 안주해 온 면이 있습니다. 이제는 성서 본문이 오늘의 현실에 어떤 도전과 위로, 대안을 제시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을 때입니다. 바울의 아디아포라 개념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복음의 본질(디아포라의 영역)을 지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외의 모든 영역에서는 사랑을 가지고 유연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균형 잡힌 가르침을 통해, 교회는 현실 도피적 영성과 세속 예속적 활동이라는 두 함정을 모두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정치적 극단과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모색하면서, 본 논문은 신약성서 특히 바울의 아디아포라 사상을 중심으로 고찰을 진행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최우선시하면서도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관용과 실용을 택했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 아래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했지만, 그것은 복음 증언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지 결코 불의한 권력을 절대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만이 절대적 진리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수단화될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디아포라 정신은 한국 교회에 깊은 시사점을 줍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 교회가 보이는 정치적 침묵과 맹목적 정치 개입이라는 두 극단은 각각 복음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침묵은 세상의 아픔과 불의에 대한 교회의 책임 방기를 초래하고, 반대로 정치에 매몰된 편향은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 둘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 곧 성서적 원칙에 따른 참여와 비판적 성찰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뿌리내린 참여입니다. 교회는 세상 권력에 대해서는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충성함으로써, 때로는 권력을 인정하고 협력하지만 때로는 과감히 비판하고 거부하는 예언자적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공적 역할은 구원과 무관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원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세상 가운데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 영혼의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총체적 치유와 해방을 지향하기에, 교회는 그 복음의 등불을 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그 등불이 특정 이념색으로 착색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끝으로, 성서는 현실에 침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 역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용기 있게 적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고 했듯이, 이제 한국 교회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그 능력을 드러낼 때입니다. 그것은 배제 대신 환대, 우월 대신 평등, 분열 대신 연합의 실천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회에 흘러갈 때, 교회는 비로소 오늘의 혼란한 현실 속에서 예언자적 목소리와 치유적 역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성서는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그 말씀을 받드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바울의 가르침에 입각한 오늘날의 비판적 성찰과 적용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기대합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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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2014). 「국가 위한 기도회인가, 특정인 위한 기도회인가?」 2014년 3월 12일자ohmynews.comohmynews.com.
- 차정식 (2025). 「로마서 13장과 아디아포라: 초기 교회의 정치적 실용주의 재해석」. 한국신약학회 봄학술대회 발표 논문. (내용은 손동준 2025 기사 통해 인용).
- The Holy Bible, Romans, 1 Corinthians, Galatians, Ephesians (개역개정 및 NIV 영어판 참조).
- John Howard Yoder (2003). 예수의 정치학 (신원하/권연경 옮김). IVP. (원저 The Politics of Jesus,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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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2020). 「한국 교회의 사회선교 백서」. (교회의 사회참여 역사와 반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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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요약:
제목: 정치적 갈등의 시대, 성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 바울의 ‘아디아포라’를 중심으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교회는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할까요? 신약성서, 특히 사도 바울의 '아디아포라(adiaphora)' 개념을 중심으로 이 질문에 답을 살펴봅니다.
‘아디아포라’는 복음의 본질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 즉 성경이 명확히 명령하지 않은 영역으로, 신앙인의 자유와 양심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합니다. 반면에 '디아포라'는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같은 핵심 교리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세속 권력에 대해서는 유연하게 대처하되, 복음의 본질은 단호하게 수호했습니다. 로마서 13장에서 권력에 복종하라고 권면한 것도 복음 전파를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지, 권력 자체를 신성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는 정치적 침묵과 편향된 정치 개입이라는 두 극단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에 대한 방조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복음을 특정 이념이나 정파적 견해에 종속시키는 문제를 낳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 윤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배제가 아닌 환대, 우월이 아닌 평등, 분열이 아닌 연합의 원리입니다. 교회는 이 원리에 따라 사회 속에서 정의와 사랑, 화해의 실천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바울의 아디아포라 사상은 오늘날 교회가 복음의 본질은 지키되, 비본질적인 사안에는 사랑과 지혜로 유연하게 대응할 것을 가르칩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치적 갈등이 격화된 시대에 성서가 우리에게 주는 통찰이자 교회의 공적 책임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아디아포라 (adiaphora, 그리스어: ἀδιάφορα, 무관심한 것)는 스토아주의에 의해서 형성된 개념으로, 선도, 악도 아니고, 명령 받지도 않고, 금지되지도 않은 것. 신약 성서에서도 이용되어 기독교의 개념으로도 논의되게 되었다.
- 아디아포라(indifferent) vs. 디아포라
교회에는 수많은 ‘해야 될 것’과 ‘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에는 기독교라는 큰 틀에서 정해놓은 것과 각 교회에서 개교회의 정통에 따라 나름대로 정해진 것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딜레마에서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지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것은 시학적 용어로 ‘아디아포라(Adiaphora)'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라는 말의 신학 개념은 “대수롭지 않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가치중립적인”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들”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상대적 신학 개념”입니다. 성서에서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즉 성경이 명백하게 말하지 않아서, 사람의 형편에 따라 임의로 결정하고 자유롭게 선택 할 수 있도록 남겨진 영역을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아디아포라’의 정반대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용어가 ‘디아포라(Diaphora)'입니다. 이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반드시 해야만 하고, 있어야만 하는”의 의미로 그 어떤 것에도 양보되거나, 변형되거나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사항을 지칭하는 “절대적 신학 개념”입니다.
진리에 대한 문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이 문제에 양보하지 않고 목숨을 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외의 다른 것으로 구원 얻을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다이포라’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아디아포라’는 성경에서 뚜렷한 한계를 정해 놓지 않아서 우리의 신앙 양심에 따라 행하도록 허락하신 문제입니다.
-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어디까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부모를 공경해야 되는데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되는가? 신앙생활 중에는 ‘아디아포라’에 속한 문제 때문에 어려움을 많이 겪습니다.참 신앙인은 올바른 분별력과 선한 신앙 양심을 가지고 이해와 사랑, 관용과 겸손한 마음으로 남에게 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에서의 임무와 책임, 참여해야 할 모든 모임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올바르고 선한 신앙 양심의 여부입니다.
- ‘디아포라’보다는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싸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자라온 환경과 교육 등에 의해 형성된 신념을 자신의 잣대로 삼아 다른 사람에게 들이댑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義)인 줄 착각합니다.
- 참 신앙인은 올바른 분별력과 선한 신앙 양심을 가지고 이해와 사랑, 관용과 겸손한 마음으로 남에게 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교회에서의 임무와 책임, 참여해야 할 모든 모임에 있어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올바르고 선한 신앙 양심의 여부입니다.
초록 (Abstract)
현대 한국 사회는 이념과 진영 간의 정치적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첨예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와 성서는 어떤 현실적 목소리를 내야 할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본 논문은 신약성서, 특히 사도 바울의 '아디아포라'(adiaphora) 개념에 주목하여 이 물음에 답하고자 합니다.
아디아포라는 구원이나 복음의 본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들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신앙인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영역을 뜻합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 치하에서 복음의 핵심이 아닌 문제들에 실용적으로 대처하면서도, 결코 복음의 본질을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로마서 13장 등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에게 절대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사건(십자가와 부활)이며 세상 권력은 일시적인 “덧없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복음의 본질과 무관한 사안엔 유연하게 대응하되 그것이 침묵과 방조의 핑곗거리가 돼선 안 된다”고 역설하며, 하나님 나라의 정치 질서를 “배제가 아닌 환대, 우월이 아닌 평등, 분열이 아닌 연합”으로 요약하였습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 교회는 바울의 이러한 아디아포라 정신을 오해하거나 왜곡하여, 정치적 침묵이나 편향된 정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본 논문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이러한 태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대안적 정치윤리를 모색합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교회가 세속 권력에 대해 맹목적으로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도, 특정 이념에 복음을 결부시켜 편향되는 것도 모두 경계하며, 대신 복음의 가치(정의, 사랑, 화해)에 근거한 적극적 참여를 촉구합니다.
결론적으로, 신약성서적 관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치 원리는 오늘의 현실 정치에도 적용 가능한 대안임을 제시합니다. 이는 배제 대신 환대, 불의에 대한 침묵 대신 예언자적 목소리, 우월 추구 대신 평등과 섬김, 분열 조장 대신 화해와 연합을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적 정치관은 현실의 갈등을 치유하고 교회의 공적 책임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지침을 제공할 것입니다.
서론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 세대와 계층 간 갈등이 고조되면서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를 겪고 있습니다. 언론과 광장의 담론은 날카롭게 분열되어 있고,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불신과 적대감도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격화된 정치 갈등의 시대에 교회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며, 성서는 현실 정치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이는 신앙 공동체 내부에서도 논쟁적인 질문이며, 동시에 한국 교회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입니다. 일부 교회는 정치적 중립이나 침묵을 미덕으로 삼아 사회 현안에 거리를 두려 하고, 다른 한편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노골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지지하여 신앙을 정치와 강하게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사회로부터 때로는 방조와 동조로, 때로는 분열과 갈등의 주체로 비춰지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의식 하에, 본 연구는 신약성서 특히 사도 바울의 신학에서 현대 교회가 취할 수 있는 통찰을 얻고자 합니다. 주목하는 개념은 바로 '아디아포라'(adiaphora)입니다. 아디아포라는 원래 스토아 철학 등에 기원을 둔 용어로서, 선이나 악과 같이 본질적 차별을 낳지 않는 "무관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이후 기독교 신학에서도 사용되어, 구원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들 혹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규정하지 않은 영역을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믿음의 핵심 교리와 직접 관계없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사항들을 뜻하며, 이에 대해서는 신앙의 자유와 유연성이 인정됩니다. 반대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핵심 교리는 디아포라로서 (아디아포라에 해당하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할 진리로 간주되었습니다.
본 논문은 먼저 아디아포라의 개념과 바울이 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했는지를 이론적 배경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문 분석에서는 바울 서신 중 특히 로마서 13장 본문을 중심으로, 바울의 정치 공동체에 대한 태도를 고찰합니다. 바울이 당시 로마 제국의 권위에 대한 복종을 권면한 의도를 아디아포라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그것이 복음전파를 위한 실용적 선택이었음을 논의할 것입니다. 이어서 적용과 성찰 부분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한국 교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조명합니다. 구체적으로, 현대 한국 교회 내에 나타나는 두 가지 상반된 경향 - 하나는 정치적 침묵이나 중립을 표방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정치세력과 결탁하는 태도 - 를 살펴보고, 이것들이 어떻게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과 어긋나는지 분석할 것입니다. 아울러 최근의 사례들, 예컨대 2024년 말의 12.3 비상계엄 사태 전후 교계의 반응이나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행사에서 드러난 종교-정치 간 유착 논란 등을 언급하여 논의를 구체화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학'이라는 대안을 모색하면서, 교회가 현실 정치 속에서 취해야 할 책임 있는 자세와 목소리를 제언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정치적 갈등이 격화된 오늘의 현실에서 성서가 줄 수 있는 통찰과 도전을 밝혀보고자 합니다.
이론적 배경: 아디아포라 개념과 바울의 신학
아디아포라의 의미와 역사적 맥락
'아디아포라'(adiaphora)는 본질적이거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들, 즉 신앙의 핵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사안들을 의미합니다. 헬라어 어원상 '아디아포라'는 "구별되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이며, 고대 스토아 철학에서 덕(德)이나 악(惡)처럼 결정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중간적 가치를 가진 사물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 도입되어서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분명한 계명을 주시지 않은 영역이나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관습과 규례들을 일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의 형식, 음식 규정, 절기 준수 방식 등은 신학적으로 아디아포라에 속하는 것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부분들은 신앙인 각자가 자유로운 양심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문제로 여겨지며, 교회 전통 안에서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양한 실천이 허용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디아포라 개념은 종교개혁 시대에 중요한 논쟁으로 부각된 바 있습니다. 종교개혁 직후 개신교 내부에서도 교회의 전통의 어떤 요소를 유지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고, 이를 두고 아디아포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16세기 독일에서 루터의 동역자였던 멜란히톤은 카톨릭과의 타협안인 아우구크스부르크(Augsburg) 임시협정에서 이신칭의 교리만 지켜진다면 나머지 전례상의 요소들은 아디아포라로서 양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반면 플라키우스 등의 급진파는 박해나 스캔들의 상황에서는 아디아포라도 더 이상 중립적일 수 없다며 반대했지요. 이는 “아디아포라라 할지라도 복음의 진리가 걸려 있거나 악한 세력이 강요하는 경우에는 단순한 아디아포라로 남지 않는다”는 주장을 내포합니다. 결국 대부분의 루터파는 지나친 양쪽 극단을 배격하면서, 성경에 명시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한 비본질적 전례는 교회의 자유 영역으로 인정하되, 복음의 핵심이 위협받는다면 그때는 양보해선 안 된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en.wikipedia.org)
요컨대 아디아포라의 개념에는 두 가지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첫째, 신학적/도덕적 상대성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가 흑백처럼 절대적인 것은 아니며, 성경이 명령하거나 금지하지 않은 수많은 사안들은 신앙인의 재량과 지혜에 맡겨져 있습니다. 둘째, 절대적 진리와 본질의 영역이 따로 있다는 전제입니다. 곧 복음의 핵심 교리나 하나님의 분명한 계명이 타협 불가능한 절대적 범주로 존재하며, 아디아포라 논의는 이 핵심이 확고히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초기 교회사에서 순교자들의 태도에서도 드러나는데, 우상숭배나 그리스도 부인의 강요 등 본질적 신앙 고백에 관한 한 목숨을 걸고 거부했지만, 그 외의 부분에서는 상당한 문화적 적응과 관용을 보인 사례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 신학에서의 아디아포라와 자유
사도 바울은 신약성서에서 명시적으로 "아디아포라"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서신 곳곳에서 아디아포라적인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과 지엽적인 문제를 명확히 구분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융통성과 자유를 허용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고린도전서 8~10장과 로마서 14장에 나타나는 우상 제물 고기 섭취와 특정한 날 준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다 시장에 나온 고기를 먹는 문제로 교회 내에 논쟁이 있을 때,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므로 고기 자체는 본질적으로 정하거나 부정하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여, 자신의 자유가 믿음이 연약한 형제자매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절제할 것을 권면하지요 (고전 8:1, 8:9-13 참조). 이는 어떤 행위 자체는 신앙에 절대적이지 않은 중립 영역일 수 있으나, 사랑과 공동체의 덕이라는 더 중요한 원칙에 비추어 조절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14장에서도 바울은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어떤 날을 더 귀하게 여긴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 하고, 믿음이 약한 자는 채소만 먹는다”며 (롬 14:2, 5) 신앙인들 사이에 의견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을 나열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서로 정죄하지 말고 각자 양심을 따라 행하되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결정적으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선언합니다 (롬 14:17). 이 말씀은 음식이나 절기 준수와 같은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아니므로, 그런 것들로 다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치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며, 음식 규례나 날자 엄수는 그 핵심에 비해 부차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아디아포라의 원리를 적용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바울은 복음 전도의 상황에서도 상당한 유연성을 보여줍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는 유대인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처럼 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한다”고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밝히며 (고전 9:20-22)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 한 문화적 관습을 탄력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는 그의 선교사역에서 아디아포라적 태도를 잘 나타냅니다. 예컨대, 디모데의 할례 문제에 있어서 (행 16:3)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였지만,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려 할 때는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갈 5:2-3). 할례 자체는 구원과 직접 관련 없는 아디아포라로 볼 수 있으나, 복음의 진리(이신칭의)를 훼손하는 조건으로 강요될 때에는 더 이상 아디아포라로 취급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복음의 본질에 속하는 문제와 아닌 문제를 분별하며, 비본질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유를 주되 본질이 걸린다면 단호히 수용을 거부했습니다.
정리하면, 바울 신학에서의 아디아포라 개념은 복음의 핵심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자유 영역으로 이해됩니다. 그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고전 10:23)라고 하여 자유의 원칙과 공동체의 유익 원칙을 함께 제시하고, 비본질적 문제를 절대화하지 말 것을 가르쳤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한 하나님을 섬긴다”(엡 4:5-6)는 선포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갈 3:28)라는 선언을 통해 복음이 만들어낸 새로운 평등과 연합의 가치를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당시 사회의 인종·계층·성별 장벽을 넘어서는 radical한 정치사회적 함의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은 겉보기에는 정치참여에 소극적인 듯하면서도,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구현되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통해 기존 사회질서를 변혁시키는 대안적 사회 비전을 제시한 셈입니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고, 다음 장에서는 바울의 가르침 중 직접적으로 국가 권력과의 관계를 다룬 로마서 13장 본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 분석: 로마서 13장의 맥락과 바울의 정치인식
신약성서에서 교회와 세속 권력의 관계를 논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본문 중 하나가 바로 로마서 13:1-7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겉보기엔 매우 권위순응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로 시작하는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당시 로마 제국의 통치권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질서로 인정하고, 신자들에게 세금 납부와 복종을 촉구합니다. 이러한 권면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순응주의 혹은 왕권신수설적인 논리로 읽히기도 하며, 실제로 역사의 여러 시점에서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는 근거로 오남용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을 해석할 때에는 바울 서신 전체의 맥락과 그의 선교적 동기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먼저, 문맥상 로마서 13장은 12장에서부터 시작된 윤리교훈 부분에 속합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원수 갚지 말고 오히려 악을 선으로 이기라(롬 12:19-21)는 가르침을 주었고, 바로 이어서 13장에서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언급합니다. 이는 개인적 원수 갚음의 금지와 사회적 질서 유지라는 주제가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 제국의 박해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폭력이나 반란의 방식으로 대응하지 말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주후 50년대 후반) 로마에 사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몇 년 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등으로 소요와 의심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의 지속과 공동체의 안녕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체제전복적 세력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조언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울이 “억압적 정권 아래서도 질서 유지를 위해 신앙인이 취한 실용적 태도”를 보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로마의 통치 자체를 신적 권위로 절대화하거나 황제숭배를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생존과 복음의 전진을 위한 현실적 처신으로서 복종을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동일한 로마서 13장에서 통치자에 대하여 일정한 조건부 수용의 뉘앙스를 남겨둡니다. 그는 통치자를 “하나님의 사역자”라 부르며(롬 13:4), 그 역할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것이라고 전제합니다. 이는 만일 통치 권력이 본분을 망각하고 선을 징벌하거나 악을 장려한다면 그 권세는 정당성을 잃게 된다는 함축적 한계를 지닙니다. 바울이 명시적으로 반란이나 불복종을 조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진술 구조상 권력에 대한 복종은 권력이 정의를 수행한다는 조건 아래 있는 셈입니다. 실제 신약 다른 부분을 보면, 베드로나 요한 등이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5:29)며 복음 전파를 금지하는 당국의 명령을 거부한 사례도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에서는 로마 제국을 짐승의 제국으로 상징화하며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불사하는 저항의 태도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을 볼 때, 바울의 로마서 13장 권면은 절대 복종의 원리가 아니라, 당시 구체적 정황에 따른 목회적 조언으로 이해해야 타당할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신학적 신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로마서 13장 이후에 직접 나오지는 않지만, 다른 서신들의 진술과 로마서 전체의 논지를 통해 유추됩니다. 바울에게 있어 최고의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Kyrios)이십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도 결국은 피조물에 지나지 않았고, 그 권력은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차정식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바울은 “세상의 권력은 결국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덧없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v.daum.net)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7:31에서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라”고 말하며 현 세상의 제도와 질서가 영원하지 않음을 상기시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영원한 구원의 사건으로 절대적 의미를 지닌다고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로마 제국의 권세에도 적당히 순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충성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복음 전파를 방해받지 않고자 하는 자유의 활용이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목적의 한도에서 세속 권력에 대해 취한 유연한 자세였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로마서 13장에 나타난 바울의 정치인식은 변혁의 전략으로서의 비저항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상 권력을 최종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일시적으로 순응하는 태도를 통해 오히려 복음이 퍼져나갈 공간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신앙의 절대 영역(예: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과 상대 영역(예: 세금 납부나 행정 질서)에 대한 구분 의식이 분명했습니다. 이러한 구분은 바로 앞서 논의한 아디아포라 개념과 직결되며, 바울은 국가 권력에의 복종 문제를 아디아포라의 영역에 위치시킨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즉,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행위나 통치 질서에 협조하는 것 자체는 구원 문제와 직접 관련 없는 비본질적 사안이므로, 신앙 양심에 크게 저촉되지 않는 한 협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권력이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앙의 본질을 침해하려 든다면(예컨대 황제숭배 강요), 바울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예수가 주”라는 복음 선포로 암묵적으로 황제는 주가 아니다는 정치적 함의를 전달했고, 결국 그 이유로 순교당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것은 바울이 어떤 선을 넘는 타협은 하지 않았다는 방증입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서 13장에서 보여준 태도는, 복음의 전진을 위한 전략적 유연성이자 아디아포라의 원칙 적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앙의 핵심에 관계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의 법과 질서를 존중하며 갈등을 피했지만, 교회의 정체성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반하는 요구에는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관점은 이후 교회사 속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고민할 때 중요한 준거가 되어 왔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이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주는 시사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현대적 적용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적용과 성찰: 현대 한국 교회에의 교훈과 대안적 정치참여 모색
한국 교회의 현실: 정치적 침묵 vs. 정치적 편향
오늘날 한국 교회의 정치적 태도는 크게 두 부류로 극명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교회는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며 사회·정치적 현안에 대해 극도로 신중하거나 아예 침묵하는 입장이 존재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신앙적 신념을 앞세워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특정 이념이나 세력을 지지하는 행동을 취하는 입장입니다.
이 두 입장은 표면적으로 상반되어 보이지만, 모두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바울의 가르침과 비교해 볼 때 극단적인 균형 상실을 드러냅니다. 각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정치적 침묵 또는 중립 노선: 이는 교회가 세속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도와 영혼 구원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당화됩니다.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 흔히 “정치 문제는 구원과 상관없는 아디아포라이니, 교회가 굳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겉보기에는 매우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보이나, 실제로는 사회적 불의와 고통에 대한 침묵과 방관으로 이어질 위험이 큽니다. 예컨대 군사독재 시절 일부 대형교회와 보수 교단들은 “정치는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에 맡기고 교회는 기도만 한다”며 로마서 13장을 절대화한 나머지, 인권 유린과 폭력에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침묵은 결과적으로 부정한 권력에 동조하거나 적어도 묵인하는 효과를 낳았고, 훗날 교회의 윤리적 책임에 큰 흠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최근의 사례로도, 2024년 12월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이른바 '12.3 비상계엄 사태' 당시 많은 교회들이 사태의 추이에 입을 닫고 있었고, 일부 보수 교계 인사들은 사회 혼란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식으로 정권의 행위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정치적 아디아포라를 가장한 침묵과 방조”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말한 아디아포라 정신이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자유와 유연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를 현실 참여에 대한 면죄부로 왜곡하여 정의에 대한 무책임으로 흘러가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적용입니다. 정치적 중립을 취한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현실에 침묵해버리면, 교회는 세상의 양심과 소금의 역할을 상실하고 말 것입니다.
- 특정 정치세력과의 결합 및 편향: 반대로, 어떤 교회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시도해왔습니다. 이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오해하여 특정 정당이나 이념을 곧 하나님의 뜻인 양 동일시하는 오류로 이어지곤 합니다. 특히 일부 보수 개신교 지도자들은 반공 이념이나 우익 정치노선을 기독교 신앙과 결부시키면서, 이를 수호하는 것을 신앙의 일부처럼 여기는 태도를 보여왔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집회들에서 일부 대형교회 목회자들은 태극기와 십자가를 함께 들고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대통령 탄핵 반대 운동을 주도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또 다른 사례로, 과거 국가조찬기도회와 같은 공식 석상에서 일부 목회자가 역대 권위주의 정권의 지도자들을 미화하고 현직 대통령을 “하나님의 뜻에 세워진 지도자”로 칭송한 일도 있었습니다. 2014년 국가조찬기도회 설교에서 한 원로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탁월한 지도자였고, 박근혜 대통령은 하나님이 세운 고레스와 같다”며 노골적으로 찬양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맹목적 지지가 권력자의 과오나 불의에 대한 비판을 차단하고, 교회를 정치권력의 홍보 도구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당시 그 설교에 대해 “나라를 위한 기도회라면서 실상은 특정인을 미화하고 무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자리가 되었다”, “권력자의 불의한 행위에 침묵하면서 동조하는 모임이 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습니다. 이러한 행태는 교회를 사회로부터 크게 불신받게 했을 뿐 아니라, 복음의 초월성과 보편성을 훼손시켰습니다. 복음은 어느 특정 정치이념에 예속될 수 없는 초월적 진리인데, 그것을 편향된 이념의 포장지로 전락시키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차정식 교수도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이 특정 정치 노선을 신앙과 결합해 현실 정치에 개입하는 흐름”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본래 바울의 아디아포라 정신은 복음의 본질을 지키기 위한 자유였건만 오늘날 오히려 정치적 책임 회피나 편향의 명분으로 왜곡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침묵과 정치적 과잉개입은 얼핏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듯하지만, 둘 다 복음의 본질과 세속 권력의 관계를 잘못 설정한 결과라는 공통점을 갖습니다. 전자는 복음의 사회적 함의를 지나치게 축소하여 정의와 사랑이라는 핵심 가치까지도 부차화한 오류이고, 후자는 복음의 초월성을 간과하여 세상의 권력을 절대시한 오류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아디아포라 개념과 그의 삶을 돌이켜볼 때, 이 두 극단은 모두 성경이 가르치는 균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대 교회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대안적 태도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신약성서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의 정치'라는 개념이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치질서: 배제 아닌 환대, 우월 아닌 평등, 분열 아닌 연합
신약학자들은 신약성서가 단순히 세속정치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대안적 정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의 정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영적 세계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라, 이 땅의 인간 공동체에 새로운 원리를 도입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합니다. 그 통치의 원리는 세상의 통치 원리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아디아포라의 논의에서 우리는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가를 구분해야 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정치를 말할 때도 세상의 정치와 구별되는 가치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대비시켜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 질서 하나님 나라의 정치 질서
갈등과 적대, 그리고 이에 따른 배제 | 환대(歡待)와 포용 – 원수마저 사랑하고 껴안음 |
지배와 우월 추구 (계층화, 특권 구조) | 평등과 섬김 –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 |
파당과 분열 (분열과 정쟁을 통한 권력 다툼) | 연합과 화해 – 서로 용납하고 하나 되게 함 |
바울은 로마서 14:17에서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였고, 갈라디아서 5:22-23에서는 성령의 열매로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덕목들을 열거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에 속한 가치들입니다. 이를 사회적 차원에 적용하면, 배제 대신 환대, 불의 대신 의로움, 폭력 대신 평화, 차별 대신 사랑, 분열 대신 화해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팔복에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선언하시고 (마 5:9),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방인 원수까지 이웃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을 식탁교제로 환대하신 행위 등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정치적 성격을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힘과 폭력, 배제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의 질서에 대한 거룩한 반역이었습니다.
예수 공동체, 곧 초대 교회가 보여준 모습도 하나님 나라 정치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교회를 이루고, 남자와 여자가 동등한 형제로 받아들여지며, 부자와 가난한 자가 서로를 가족으로 대하며 재산을 나누는 장면(행 2:44-47 등)은 당시 사회의 통념을 뒤엎는 파격적인 평등과 연대의 실현이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연약함으로 완전하지 못했지만, 신약의 이상은 분명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14-15에서 그리스도께서 “원수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셨다”고 선언하며, 서로 다른 집단이 하나로 화해된 새 인류를 지향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보여주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정치 모델입니다.
차정식 교수가 말했듯이, 하나님 나라의 통치방식은 “적대를 환대로, 우월을 평등으로, 배제를 포용으로 바꾸는 원리”이며, 이것이야말로 오늘의 사회에서도 실현 가능한 대안입니다. 교회가 이 원리를 따라 살아갈 때, 세상은 비로소 교회를 통해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한국 교회가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향을 몇 가지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환대와 포용의 실천: 이주민 노동자, 난민,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등 우리 사회에서 주변부로 밀려나있는 이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몇몇 교회들은 난민 구호와 다문화 가정 지원 사역을 통해 복음의 환대정신을 실천하고 있는데, 이러한 노력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 구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거나 불편해하는 시선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이름으로 혐오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은 하나님 나라 정치와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오히려 교회는 앞장서서 “나그네 된 자를 영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마 25:35)을 실천함으로써, 분열과 배제의 사회풍조에 도전해야 합니다.
- 정의와 평등의 옹호: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십니다. 교회는 이 하나님의 정의(justice)를 선포하고, 사회의 불의한 구조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이는 곧 예언자적 전통을 잇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나 아모스와 같은 구약 예언자들은 종교적 의식에만 몰두하고 사회 정의에는 눈감은 당시의 종교인들을 강하게 책망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로, 눈앞의 권력에 불의가 있을 때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부정부패, 인권 침해,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교회가 윤리적 입장을 표명하고 시정 요구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특정 정당의 논리에 예속되기보다는, 성경적 가치에 근거한 원칙적 입장을 견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는 모든 신자의 평등을 실현하여, 교회가 자체적으로 권위주의나 성차별, 빈부격차에 오염되지 않도록 늘 개혁해가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먼저 평등과 섬김의 문화를 보여줄 때, 사회에 대한 설득력도 갖게 될 것입니다.
- 화해와 연합의 중재자 역할: 한국 사회의 분열된 지형 속에서 교회는 화해의 중재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셨고 (마 5:9),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고후 5:18).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의 갈등 현장에 빛과 소금으로 참여하여, 대립하는 집단 사이의 대화와 이해를 도모해야 합니다. 실제로 과거 민주화 운동 시기나 지역 사회 갈등 현장에서 기독교인들이 중재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유산을 이어 받아, 이념 갈등, 세대 갈등, 노사 갈등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정하고 사랑에 근거한 중재자로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정치적 중립을 가장한 무관심과는 구별되는, 적극적인 평화 만들기(peacemaking) 사역입니다. 정치적 쟁점에 대해 무조건 한쪽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가치에 비추어 옳은 방향을 제시하고 서로를 화해시키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교회는 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으며, 복음의 평화 메시지를 실제로 증명해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현대 한국 교회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자세는 “비본질에는 관용을, 본질에는 충성을”이라는 옛 격언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현안들 가운데 신앙의 본질에 속하지 않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를 존중할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서로의 양심의 자유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 존엄, 정의, 평화, 사랑 등 복음의 본질적 가치가 걸린 문제에 대해서는 한목소리로 그 가치를 옹호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교회 스스로가 성서적 세계관으로 무장하여 분별력을 기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 정파의 이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성서가 말하는 바를 깊이 성찰하며 창조적 대안을 상상해야 합니다.
차 교수의 지적대로, 한국 교회는 그동안 “중립이나 중도라는 이름으로 비판 없이 수용되던 성서 해석의 관성”에 안주해 온 면이 있습니다. 이제는 성서 본문이 오늘의 현실에 어떤 도전과 위로, 대안을 제시하는지를 진지하게 물을 때입니다. 바울의 아디아포라 개념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될 복음의 본질(디아포라의 영역)을 지키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외의 모든 영역에서는 사랑을 가지고 유연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균형 잡힌 가르침을 통해, 교회는 현실 도피적 영성과 세속 예속적 활동이라는 두 함정을 모두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책임있는 시민으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정치적 극단과 갈등이 만연한 시대에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자세를 모색하면서, 본 논문은 신약성서 특히 바울의 아디아포라 사상을 중심으로 고찰을 진행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본질을 최우선시하면서도 비본질적인 문제에서는 관용과 실용을 택했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로마 제국 아래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했지만, 그것은 복음 증언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지 결코 불의한 권력을 절대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만이 절대적 진리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수단화될 수 있는 영역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디아포라 정신은 한국 교회에 깊은 시사점을 줍니다.
오늘날 일부 한국 교회가 보이는 정치적 침묵과 맹목적 정치 개입이라는 두 극단은 각각 복음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정치에 무관심한 침묵은 세상의 아픔과 불의에 대한 교회의 책임 방기를 초래하고, 반대로 정치에 매몰된 편향은 복음의 순수성을 훼손하고 교회를 분열시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이 둘을 모두 넘어서는 제3의 길, 곧 성서적 원칙에 따른 참여와 비판적 성찰의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뿌리내린 참여입니다. 교회는 세상 권력에 대해서는 상대화하고, 하나님의 통치에 절대 충성함으로써, 때로는 권력을 인정하고 협력하지만 때로는 과감히 비판하고 거부하는 예언자적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공적 역할은 구원과 무관한 일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구원의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세상 가운데 실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 영혼의 구원에 머무르지 않고 총체적 치유와 해방을 지향하기에, 교회는 그 복음의 등불을 들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다만, 그 등불이 특정 이념색으로 착색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정의로운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합니다.
끝으로, 성서는 현실에 침묵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살아 역사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용기 있게 적용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전 4:20)고 했듯이, 이제 한국 교회가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과 실천으로 그 능력을 드러낼 때입니다. 그것은 배제 대신 환대, 우월 대신 평등, 분열 대신 연합의 실천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 사회에 흘러갈 때, 교회는 비로소 오늘의 혼란한 현실 속에서 예언자적 목소리와 치유적 역할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갈등의 한복판에서 성서는 결코 침묵하지 않습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그 말씀을 받드는 한국 교회가 되기를 소망하며, 바울의 가르침에 입각한 오늘날의 비판적 성찰과 적용이 앞으로도 지속되길 기대합니다.
참고문헌 (References)
- 강상봉 (2015). 「디아포라와 아디아포라」. 크리스천 위클리 2015년 9월 8일자cnwusa.org.
- 손동준 (2025). 「성서는 정세에 침묵하지 않는다」. 국민일보 2025년 5월 4일자v.daum.netv.daum.net.
- 오마이뉴스 (2014). 「국가 위한 기도회인가, 특정인 위한 기도회인가?」 2014년 3월 12일자ohmynews.comohmynews.com.
- 차정식 (2025). 「로마서 13장과 아디아포라: 초기 교회의 정치적 실용주의 재해석」. 한국신약학회 봄학술대회 발표 논문. (내용은 손동준 2025 기사 통해 인용).
- The Holy Bible, Romans, 1 Corinthians, Galatians, Ephesians (개역개정 및 NIV 영어판 참조).
- John Howard Yoder (2003). 예수의 정치학 (신원하/권연경 옮김). IVP. (원저 The Politics of Jesus, 1972).
- Stanley Hauerwas (2014). 교회, 하나님 나라의 정치공동체 (이종호 옮김). 복있는사람. (원저 After Christendom?, 1991).
- 윤철호 (2012).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하나님 나라 운동」. 신학과현장, 2012년 봄호. (교회의 공적 역할에 대한 신학적 성찰).
-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2020). 「한국 교회의 사회선교 백서」. (교회의 사회참여 역사와 반성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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