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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우리 주님의 귀한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사람은 늘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여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근원적으로 가지게 되는 가장 중요한 부정적인 감정은 두려움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이를 ‘분리 불안’이라고 합니다.
분리불안(separation anxiety)은 주 양육자나 애착 대상과 떨어질 때 과도한 불안감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자유교양경시대회에서 학교 대회, 익산시 대회를 거쳐 전라북도 대표로 선발된 후, 전주 송광사 근처의 '자유의 집'에서 보름간 합숙 훈련을 받았을 때였습니다. 태어나서 10년도 지나지 않은 나이에 부모님과 처음 헤어져서 낯선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무척 힘들었지만, 첫째는 나는 보름 후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믿음이 있었고, 둘째는 1주일이 지났을 때 휴가를 내서 일부러 찾아오셨던 아버지와의 만남 속에서 내가 분리되지 않고 가족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안심을 할 수 있었고, 세째는 원광여고 누나들의 사랑과 보살핌 속에서 그곳 생활에 점차 적응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억압이나 단체 생활의 규율이 아니라 따뜻한 보살핌이, 즉 사랑이 분리불안에는 필요한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 때문에 오는 두려움도 있지만,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이 갖는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은 늘 불안을 가져오고, 결국 그 불안을 잘 대처하지 못하면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1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이름을 넣어서, “OO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성경에 365번 등장합니다. 이는 1년 내내 두려운 마음이 우리 안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합니다. 미술 치료, 음악 치료, 상담 등 다양한 방법을 사용하지만, 근원적인 치료는 오직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늘 결핍이 있고 그것이 두려움과 불안의 근본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죄의 증상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결핍입니다. 모자람, 부족함이 바로 결핍입니다. 결핍으로 인해 만족함이 없고, 만족함이 없기에 기쁨도 없고, 그로 인해 인생이 헛헛하고 허무하며 다람쥐 챗바퀴 도는 것같은 그러한 삶을 우리가 반복해서 힘들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행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만족, 곧 영적인 만족을 통해 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방패, 내 큰 상급이시다
아브라함에게도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두 가지를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역설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에게 그때 방패와 상급이 필요했다는 설명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 걸쳐 하나님을 방패로 고백하는 표현은 89번 등장합니다. 대개는 어떤 시편 기자가, 즉 하나님을 경험했었던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하나님은 나를 보호해 주시는 방패와 같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직접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 장면이 유일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이요, 약속입니다.
직장 생활이나 일상에서 힘든 상황에 있는 우리에게도 방패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주겠다.” 이 약속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의 상급이 되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 상급은 바로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이 가정을 보호하고, 부족을 지키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산이, 특히 아들을 많이 낳는 것이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지 (15장 즈음에는) 이미 10년이 지났음에도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신에게 자식이 없으니까 고대 근동의 관습에 따라, 종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라고 얘기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상속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십니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자손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나이는 들어 육체적으로 생산 능력이 다 떨어졌고 약속을 들은 지도 10년이나 지났기에, 지금 상황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마음은 더욱 답답했을 텐데, 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믿다’는 ‘aman, 아만’이며, ‘아멘, Amen’(진실로, Verily)과 어원이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그렇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의(tsedaqah, 체다카)로 여기셨습니다. 성경에서 ‘의’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이제 네가 나와 소통하는구나, 나를 신뢰하는구나”라는 관계 형성의 선언입니다. 사람도 서로 말이 통해야 친밀해지듯 (부부가 나이들면서 힘들어지는 것도 서로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듯이),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친밀한 관계가 생긴 것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아브라함의 객관적인 상황과 주관적인 마음의 어려움들, 그 모든 현실적 상황을 다 내려놓고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그것을 ‘아멘’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가 친해지고 친밀해졌고, 그것이 ‘의롭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의’는 관계의 용어입니다.
하나님은 또 하나의 약속을 주십니다. 자손뿐 아니라 그들이 거할 땅도 주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열심에 근거한 약속 - 사랑
아브라함은 증표를 요청하고, 하나님은 언약으로 확증하십니다. 구약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이 ‘언약’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원래 언약(berith, 베리트)은 비슷한 사람들 사이의 약속입니다. 고대에는 동물의 사체를 반으로 나누고, 언약의 당사자들이 그 사이를 지나며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렇게 죽어도 좋다”는 뜻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을 할 때도 신랑과 신부가 중앙 통로를 함께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인간은 절대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하나님께서 먼저 언약을 맺자고 하십니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언약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프랑스 센 강 다리 난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약속하며 자물쇠를 걸고 열쇠를 던졌지만, 결국 그 자물쇠들의 무게 때문에 난간이 붕괴되어 지금은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그랜드 캐니언에도 똑같이 했다가 생태 환경에 어려움을 줘서 철거해야 했고, 우리나라 남산에도 자물쇠가 어마어마하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연인들이 그 약속대로 결혼을 했을까요? 그렇게 하고도 인간의 약속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인간의 약속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맺으신 약속은 끝까지 지키십니다.
하나님은 목적지를 정해놓으시고, 우리가 그 길을 빗나가더라도 반드시 그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니라”고 약속하셨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기까지 25년, 자손이 많아지기까지 400년, 땅을 차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동안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으셨습니다. 우리도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이 막힌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정확한 시간에, 가장 선한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너의 방패요, 너의 상급이니라.” 이 말씀을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암송해 보십시오. 암송하고 묵상할 때 그 말씀이 여러분의 삶을 이끌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짧은 말씀이라도 반복하여 암송하고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행복’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이 말은 단순한 감정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본질적인 만족과 생명력의 차원을 말합니다.
‘행복’은 상황에 의존하는 감정
‘행복(happiness)’이라는 단어는 영어 ‘**happen**’(일어나다)에서 어원을 가졌습니다.
즉, 어떤 일이 ‘잘 일어났을 때’, 상황이 내 뜻대로 되었을 때 생기는 감정이 행복입니다.
예를 들면:
- 시험을 잘 봤을 때
- 연봉이 올랐을 때
- 건강검진에서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이처럼 외부 조건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거나 기대에 못 미치면 곧바로 무너질 수 있습니다.
‘기쁨’은 관계에 뿌리를 둔 내면의 열매
반면, ‘기쁨(joy)’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영적인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상황과 무관하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평안, 생명의 감정입니다.
갈라디아서 5:22 (개역개정)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희락’은 기쁨(joy)입니다.
이 기쁨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거할 때 주어지는 은혜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도 기쁨은 고난 속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기쁨”을 위하여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2:2 (NIV)
"For the joy set before him he endured the cross, scorning its shame..."
이것은 말 그대로 ‘행복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그 결과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기쁨으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본질은 ‘기쁨’입니다
- 신앙생활을 조건부 행복의 수단으로 여기면,
기도 응답이 없을 때 흔들립니다.
-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누리는 기쁨의 여정으로 여기면,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믿음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신앙생활'보다 '기쁜 신앙생활'을 구해야 합니다.
행복은 얻으면 무너지고, 잃으면 흔들립니다.
하지만 기쁨은 잃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기쁨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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