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성경은 여러 곳에서 “권세”(권위, authority)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며, 신자들에게 권위에 순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흔히 로마서 13장 1절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에 비추어, 이러한 권위는 국가나 정부 권력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권위 개념은 이에 국한되지 않으며, 교회, 가정, 학교, 사회 단체 등 다양한 공동체와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권위 구조를 모두 포괄합니다.
신자는 이러한 여러 형태의 권위에 순종하되, 동시에 분별력을 가지고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은 때로 악을 용인하거나 부조리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으며, 반대로 권위를 무조건 거부하는 태도는 공동체의 질서와 하나님께서 주신 구조를 무너뜨릴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 소논문에서는 성경 본문(특히 로마서 13장 등)의 주해를 바탕으로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모색하고, 교회사 속에서 루터, 칼뱅, 칼 바르트,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이러한 문제에 어떻게 답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교회·가정·학교 등 각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권위의 부패나 왜곡에 대해 신자들이 성경적으로 취해야 할 태도와 대응 방안을 논의한 후, 결론에서는 오늘날 신자가 권위에 대해 가져야 할 구체적인 자세를 제언하겠습니다.
📖 성경은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권세에는 순종을 거부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본론
1. 성경의 권세에 대한 가르침: 순종의 원칙과 그 한계
신약 성경에서 권위에 대해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본문 중 하나가 로마서 13장 1~7절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고 말하며(롬 13:1), 정부를 포함한 권위 제도는 결국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가르칩니다. 바울은 통치자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로까지 부르며(롬 13:4), 그들이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함으로써 사회에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맡았음을 강조합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신자는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납부하며, 두려움과 존경으로 권위자들을 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롬 13:7).
실제로 바울은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롬 13:2)라고까지 말하면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국가 권력에 대한 복종은 신자의 양심의 의무임을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권위 순종의 교훈은 오용될 위험도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로마서 13장은 부당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이나 그에 협력하는 이들에 의해 자주 오용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로마서 13장”은 때때로 부정한 법이나 정책을 정당화하는 면죄부 텍스트(prooftext)로 악용되곤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이러한 구절이 남용될 수 있음을 경고하듯, 이 본문을 정확히 이해해야 함을 암시합니다.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은 모든 정부의 모든 행위가 선하다거나 신자가 무조건적 복종을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본문 바로 앞장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고 가르쳤으며, 동일한 맥락에서 권세에 대한 논의를 전개합니다. 결국 로마서 13장은 정부의 이상적인 역할과 신자의 일반적인 태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예외 상황(예: 정부가 악을 행하거나 신앙을 억압하는 경우)까지 모두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님을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권위에 대한 순종의 원칙에도 예외가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5:29에서 베드로와 사도들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명령에 정면으로 거절하며 선언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인간의 명령에는 불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신앙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 구절은 루터가 지적했듯이, 세속 권세의 한계를 분명히 규정해 줍니다: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 자체가 없다면, 세속 권세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다 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겠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순종을 위해 인간 권위에 불복종한 여러 모범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예컨대 출애굽기 1장에서 애굽 왕 바로가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남아를 죽이라고 명령했으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아이들을 살린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산파들의 불복종, 곧 시민 불복종을 오히려 축복하셨습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도 왕의 우상 숭배 명령을 거부한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불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고, 그들의 믿음으로 인해 왕이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다니엘서 6장의 다니엘 역시 기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다 사자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살아났습니다.
신약에서도 사도행전 4장과 5장에서 사도들이 복음 전파 금지령을 따르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모든 예들은 권위에 대한 일반적 순종의 원칙과 더불어, 하나님 명령에 반하는 권세의 요구는 거부해야 할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증언합니다. 요약하면 성경적 원칙은 이렇습니다: “신자는 국가를 비롯한 모든 합당한 권위에 순종하되, 그러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초래하는 지점에 이를 경우에는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
존 스토트 목사도 현대적 표현으로 이 원칙을 요약했는데, *“국가에 대한 복종은 우리가 하나님께 불순종하지 않는 한도까지이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명령하거나,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금한다면, 그때는 복종이 아니라 저항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의무이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신구약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맥을 같이하는 해석으로서, 오늘날 복음주의 권위론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기도 합니다.
루터, 칼뱅, 바르트,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권위에 순종하되 비판적 분별력을 갖춰야 한다는 신학적 원칙을 발전시켰습니다.
2. 교회사 속 권세에 대한 신학자들의 이해: 루터, 칼뱅, 바르트,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
성경의 가르침을 토대로, 교회 역사상 많은 신학자들이 권세에 대한 신학적 원리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개혁자들인 마르틴 루터와 존 칼뱅, 20세기 신학자 칼 바르트, 그리고 다양한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견해를 살펴보면, 신자가 권위에 순종하되 분별해야 한다는 원칙이 시대를 넘어 어떻게 강조되고 적용되어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1483-1546):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당시 부패한 교회 권위에 도전한 인물이지만, 동시에 사회의 세속 권세에 대해서는 일정한 순종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두 왕국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교회(영적인 왕국)와 국가(세속적 왕국) 두 영역에서 다스리신다고 보았습니다. 세속 정부는 하나님께서 세상 질서를 위해 세우신 것이므로 신자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하지만, 그 권세는 영혼의 문제나 신앙의 영역을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루터는 그의 글 「세속 권세:얼마나 순종해야 하는가」(1523)에서, 세속 권력이 만일 신앙 문제에 간섭하여 하나님께 불복종하게 만들 경우 신자는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단호히 주장했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5:29의 말씀을 인용하며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명제를 강조했고, 이를 통해 세속 권세의 한계를 분명히 선을 그었습니다. 루터는 세속 권력자에게 “나는 당신께 내 몸과 재산에 관해서는 복종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 양심과 신앙을 명령하려 든다면, 그것은 당신 권한 밖의 일이며 내가 따를 수 없습니다”라는 태도를 취하라고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통치자가 성경 책을 없애라고 명령한다면 신자는 이에 불복종해야 하며, 그로 인해 재산이나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루터는 이러한 불복종이 폭력적인 반란으로 이어지는 것은 경계했습니다. 신자는 악한 명령을 따르지 않고 고난을 받을지언정 직접 칼을 들고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부당한 폭정의 폭력 자체를 똑같이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분노는 견디되 죄에 동참하지 말라”는 원칙을 제시하며, 악한 권세의 탄압은 인내로 받아들이되 결코 동조하거나 순순히 가담하지는 말라고 역설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당시 독일 농민전쟁 등 혼란 속에서 무정부적 폭력을 억제하고 사회 질서를 지키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동시에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은 균형 잡힌 권위관이라 평가됩니다.
존 칼뱅(1509-1564):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며 『기독교 강요』를 통해 체계적인 신학을 정립한 개신교 신학자입니다. 칼뱅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정부 권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고히 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심지어 폭군일지라도 “가능한 한도까지”는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칼뱅의 표현에 따르면, “통치자를 거스르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심지어 부패한 통치자들도 때로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죄를 징계하기 위해 허용하시는 것일 수 있으므로 섣불리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무질서 (혼란) 상태가 폭정보다 더 해로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회 질서를 지키기 위한 복종의 의무를 강하게 설파했습니다. 하지만 칼뱅도 권위에 대한 복종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인식했습니다. 그는 “정치 권위에 대한 순종이 결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언급하며, 만일 세속 권위가 우리를 죄로 이끈다면 우리는 순종을 중단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한편, 칼뱅의 독특한 기여는 합법적인 저항권에 대한 개념이었습니다. 그는 개인이 제멋대로 정부에 맞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죄악으로 간주했지만, 대신에 합법적 권한을 가진 하위 통치자들(예: 지방 관료나 귀족)의 경우 폭군을 견제하거나 저항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 훗날 “ lesser magistrate(하위치안판사) 이론”으로 발전하여,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도들이 폭군에 맞서 의인(義人)의 혁명을 정당화하는 사상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칼뱅은 *“만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임명된 어떤 관리들이 있다면, 그들이 폭군의 횡포를 견제하고 맞서는 것은 그들의 의무이다”*라고 밝히며, 공공의 자유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제한된 저항을 허용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저항은 어디까지나 합법적 질서 내에서 이루어져야 했고, 칼뱅 자신은 일반 성도가 자기 판단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엄격히 금했습니다. 요약하면, 칼뱅은 “순종하되,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순종은 하지 말라”는 원칙 아래, 사회 혼란을 피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의 권위 저항을 신중하게 논의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균형 잡힌 입장은 이후 개신교 전통의 정치 신학과 시민 윤리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칼 바르트(1886-1968):
20세기 스위스의 개신교 신학자인 바르트는 세계 2차 대전을 전후로 전체주의 국가 권력에 맞서 싸운 고백교회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로 유명합니다.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깊이 연구하여 주석을 남겼는데, 그의 해석은 나치 독일의 폭압적 정권 하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태도를 모색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바르트는 먼저 로마서 13장을 문자적으로 오해하여 악한 정부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반대로 이 말씀을 아예 폭력 혁명의 근거로 삼으려는 두 가지 극단을 모두 경계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은 악한 통치자의 악행을 정당화하지도, 그렇다고 폭력을 통한 혁명을 조장하지도 않는다”고 분명히 주장했습니다. 바르트에 따르면, 맹목적인 합법주의(legitimism)와 무법한 혁명주의(revolutionism)라는 두 개의 낭떠러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자는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하되 그것을 맹목적으로 신격화하지 말아야 하고, 동시에 부당한 권력이라고 해서 함부로 폭력으로 전복시키려는 혁명적 태도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오히려 로마서 13장의 이중성을 강조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신자들에게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명할 뿐 아니라, 권세를 가진 자들도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해야 함을 내포한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모든 인간 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며, 하나님의 “원초적 질서”(Primal Order)에 부합하게 통치할 때 정당성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정부나 그 밖의 어떤 권위도 하나님의 정의와 질서를 벗어나 무제한적 권력을 휘두를 수 없으며, 만일 그렇게 할 경우 스스로 정당성을 잃는다고 보았습니다.
흥미롭게도, 바르트는 권세의 범주를 국가에만 한정하지 않고 “국가, 교회, 법, 사회” 등 다양한 윤리적 질서의 영역으로 확장해서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네 가지 영역의 권세가 모두 세상의 무질서를 억제하기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신 것이라 보았지만, 동시에 이들 모두가 죄로 인해 때로 권한을 남용하거나 책무를 소홀히하는 양면성을 지닌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바르트 자신이 주도적으로 참여한 1934년의 바르멘 선언은, 국가 권력이 교회 영역을 침범하여 유일한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자리를 차지하려 할 때 교회는 이를 양보하지 않고 저항해야 함을 천명한 문서입니다. 이 선언에서 바르트 등 신학자들은 *“국가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의 영역이지만,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선언하며 세속 권세의 한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정리하면, 칼 바르트는 권위에 대한 비판적 순종의 태도를 주창했습니다. 신자는 국가를 비롯한 질서의 권세들을 인정하고 순종하지만, 그 권세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음을 망각하고 절대화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No라고 말할”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No”는 불법적인 폭력이 아닌 신앙적 양심 선언이어야 함을 바르트는 강조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입장은 훗날 인권 탄압 정권 아래에서 교회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견인하는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
현대의 복음주의권 신학자들과 목회자들도 성경에 기초한 권위에 대한 원칙을 다양하게 가르쳐 왔지만, 그 핵심은 이미 살펴본 성경의 가르침과 종교개혁자들의 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체로 복음주의자들은 정부와 법에 순종하고 사회의 선한 질서를 지키는 것을 신자의 의무로 강조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말씀이나(마 22:21), 바울과 베드로가 거듭 권면한 시민으로서의 덕목(딤전 2:1-2, 벧전 2:13-17 등)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은 권위 남용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필요시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정당함을 강조합니다. 앞서 인용한 존 스토트(John Stott)의 말처럼,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국가의 법이 하나님의 법과 충돌할 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를테면, 복음주의 신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챠얼스 콜슨(Charles Colson)은 기독교인의 시민 불복종은 “정부에 대한 반항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복종심”에서 우러나와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또한 민주사회에서의 합법적 권리 행사를 통해 부당한 권위에 대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컨대 평화적인 시위, 청원, 선거 참여 등을 통해 잘못된 정책이나 지도력을 교체하는 것이 신자의 사회적 책임의 일부라고 봅니다.
동시에, 복음주의자들은 교회 내 권위나 가정 및 공동체 내 권위에 대해서도 성경적 원칙을 적용합니다. 교회 지도자는 성도들의 순종을 요구하기 전에 섬기는 종의 자세로 목양해야 하며 (막 10:43-44), 교인들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하되 그들이 성경적 권위를 벗어날 경우 분별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권위 관계를 성경은 말하지만(엡 5:22, 6:1), 이것이 학대나 불의를 용인하는 면죄부가 아님을 복음주의 권면자들은 강조합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은 특히 권위의 남용과 폭력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교회나 선교 단체 내에서 일어나는 영적/도덕적 권위 남용 사례들을 고발하고 바로잡는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입장은 성경적 원칙(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반하면 불복종) 위에 서 있으며, 이를 현대 사회의 맥락 속에서 구체적이고 책임있는 방식으로 적용하려고 애쓴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교회, 국가, 가정, 사회에서의 권위가 부패하거나 왜곡될 때 신자는 사랑과 진리로 바로잡고, 언제나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3. 권세의 영역별 부패와 왜곡에 대한 신자의 반응
앞서 살펴본 성경과 신학자들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이제 국가, 교회, 가정, 학교 등 각각의 권위 영역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고찰해 보겠습니다. 각 영역마다 권위 구조의 성격이 다르고, 부패하거나 왜곡될 수 있는 양상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공통 원칙은 있습니다. 곧 어떠한 권위도 절대적이지 않고 하나님 아래 제한적이며, 신자는 권위를 존중하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 원칙하에, 각 영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살펴보고 성경적으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바람직한지 논의해보겠습니다.
3.1 국가 권세: 정부와 법 앞에서의 신앙인의 자세
국가는 하나님께서 질서 유지를 위해 세우신 가장 보편적인 권위 구조입니다. 성경은 로마 제국 치하의 신자들에게 조차 정부에 복종하고 세금을 바치며, 통치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것을 명령했습니다(롬 13:1-7, 딤전 2:1-2). 예수님께서도 빌라도 앞에서 십자가 형을 언도받으실 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다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라”라고 하셔서, 심지어 부당한 재판을 행하는 통치자의 권한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인정하셨습니다(요 19:11). 따라서 원칙적으로 신자는 국가의 법을 준수하고, 통치자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성실한 시민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단지 소극적 복종이 아니라, 적극적(積極的)으로 사회의 안녕과 정의를 위해 기여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7절에서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인들에게 그 포로된 도시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하며 힘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신자는 자신이 속한 국가나 사회의 번영과 공의를 위해 노력함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역시 한계 상황을 맞을 수 있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 권력이 본래의 하나님 주신 역할(선한 자에게 상 주고 악한 자를 처벌함)을 거꾸로 행하거나(롬 13:3-4의 원리를 반대로 어기는 경우), 신자들에게 죄를 강요하는 경우입니다. 전체주의나 권위주의 독재 하에서 종종 정부가 부정과 악을 자행하고도 로마서 13장을 들이밀며 교회와 시민들의 복종을 요구했던 사례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 교회사에서도 일제 강점기나 독재 정권 시절에 일부 교계 지도자들이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니 현 정권에 순복하라”는 식으로 성도들을 호도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맹목적 순종 요구는 성경 본래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입니다. 부패한 권력에 대해 예언자적 비판과 정의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오히려 성경의 전통에 부합합니다.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왕들의 부패와 불의를 꾸짖었고(예: 나단 선지자는 다윗 왕을 책망, 엘리야는 아합 왕을 정면으로 비판), 신약에서도 세례 요한은 헤롯 왕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러한 예언자적 전통은 국가 권력이 하나님의 정의에 반할 때 신자가 침묵해서는 안 됨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 역시 권력자의 눈치를 살피며 복음을 타협하지 않았고, 불의한 법 집행으로 매를 맞을 때에는 로마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며 항의하기도 했습니다(행 16:37). 따라서 현대 민주사회에서 신자들은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사회 정의를 수호할 책임이 있습니다. 평화적 시위나 의견 표출, 투표 등을 통해 악한 정책이나 지도자에 반대하는 것은 성경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폭력이나 불법적인 수단은 피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대로, 권세에 대한 저항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칼 바르트의 해석처럼 로마서 13장은 무질서한 혁명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신자들은 무정부주의적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정리하자면, 국가 권세에 대한 성경적 자세는 “존중하되 우상시하지 말고, 순종하되 양심을 팔지 말라”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일반적으로는 국가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하지만, 국가가 하나님의 법과 충돌할 때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충성을 우선해야 합니다. 이때에도 그 방법은 다니엘이나 그의 세 친구처럼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믿음을 지키는 것이며, 베드로와 요한처럼 담대하지만 정중하게 진리를 증언하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우리는 권력자들의 구원과 회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딤전 2:1-4). 로마 제국의 박해 한복판에서도 초대교회가 황제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들도 위정자들이 하나님 뜻에 맞게 공의를 행하도록 중보하면서, 필요하면 바른 말을 하는 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2 교회 권위: 영적 지도력의 올바른 사용과 신자의 대응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신앙 공동체로서, 세속 국가와는 구별된 권위 구조를 가집니다. 신약성경은 장로들과 감독(목회자)에게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칠 권위를 부여했고, 성도들에게는 그런 영적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할 것을 권면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고 말하며, 교회 지도자들의 권위를 인정합니다. 이러한 교회 권위는 교회의 질서 유지와 성도의 양육을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목회자의 성경적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교회의 치리와 권면에 순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지만, 교회 권위 역시 남용되거나 타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중세 교황권은 세속 왕들을 능가하는 절대 권력을 휘둘러 많은 부패를 낳았고, 이는 종교개혁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근래에도 교회 내 영적 권위 남용(spiritual abuse)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는데, 일부 목회자나 지도자들이 권위를 앞세워 성도들을 통제하거나 착취하는 일들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권면을 빙자하여 헌신을 강요하거나, 사생활을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비성경적인 가르침에 맹종하도록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어 일부 이단적 집단에서는 지도자가 절대 권위를 주장하며 신도들의 삶을 완전히 지배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권위 남용은 성경의 본취지에 어긋납니다. 베드로전서 5장 3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맡겨진 자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시며 (막 10:44),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권위를 섬김의 도구로 사용해야지, 지배의 도구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교회 내 권위의 부패나 왜곡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먼저,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에서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지도자의 권위보다 복음의 진리가 우선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라도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거나 행하면, 성도들은 순종을 거부하고 바로잡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조차도 성경을 상고하며 확인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 지도자의 권위는 성경의 절대 권위 아래 평가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만약 교회 지도자가 명백한 죄를 범하거나 권위를 남용한다면, 성도들은 성경적 교회 규율에 따라 그 문제를 다뤄야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15-17절은 죄 지은 형제를 책망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두세 증인을 대동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라고 가르칩니다. 이 원리는 지도자에게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단에는 목회자에 대한 징계 절차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정당한 절차를 통해 문제를 제기하고 해결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있다고 싸움이나 분열로 치닫기보다 질서 있는 방식으로 진리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런 공식적인 절차가 통하지 않거나, 공동체 전체가 심각하게 병들어 있을 경우, 때로는 그 공동체를 떠나거나 외부의 권위(교단, 사법 당국 등)에 호소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내 성범죄나 재정비리가 은폐될 경우 세속 법정에 고발하는 것이 옳은 일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 하였으며(눅 12:2), 하나님의 공의는 교회 안에서도 실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현대 복음주의 교회들은 “권위를 존중하되, 불의에는 침묵하지 말라”는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교회 권위가 남용될 때 신자는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잘못을 지적하고,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회개와 개혁을 촉구해야 합니다.
동시에 이것이 개인적인 분노나 복수가 아닌 교회의 거룩성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어야 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등에서 교회의 징계를 말할 때도, 최종 목적은 죄인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세우는 데 있었습니다(고전 5:5). 결론적으로, 교회 안에서 신자는 성경의 권위에 순복하며 지도자들을 존중하되,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제한된 권위임을 인식하고 진리에 반하면 순종을 중단해야 합니다. 권위에 순종하라는 말씀 자체를 잘못 이용하여 성도들을 억압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그 말씀의 오용 자체가 폭력”임을 지적하며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결국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입니다.
3.3 가정의 권위: 부부와 부모-자녀 관계에서의 순종과 한계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최초의 공동체이며, 여기에도 권위 구조가 존재합니다. 성경은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으며(엡 5:23), 부모에게 자녀를 양육하고 다스릴 책임과 권위를 주셨습니다(엡 6:1-4). 이러한 가정 내 권위는 질서와 화평을 위한 것이며, 올바르게 행사될 때 가정은 사랑과 존중의 공동체가 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장과 6장은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가르치고, 자녀들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가정에서 권위에 대한 순종의 미덕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이 본문들은 남편들에게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 아버지들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여, 권위의 책임과 한계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엡 5:25, 6:4). 즉, 성경이 말하는 가정 권위는 일방적 지배가 아니라 상호적 사랑과 책임 속에 행사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가정의 권위가 왜곡되어 학대로 나타나는 안타까운 일들이 벌어지곤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폭력이나 남편의 전제적 태도, 부모의 지나친 통제와 폭언 등은 가정 권위의 심각한 남용 사례입니다. 어떤 경우 남편이 아내에게 성경구절을 들이대며 무조건 복종만을 요구하거나, 부모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내세워 자녀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성경의 의도를 심각하게 벗어난 것입니다. 성경적 복종은 의(義)와 사랑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지, 죄나 폭력을 용인하는 도구가 되어선 안 됩니다. 아내의 복종에 대해 언급하는 바로 그 문맥에서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고 말합니다. 즉 부부 모두가 상호적 복종의 태도를 가져야 하며, 특히 남편은 권위를 희생적 사랑으로 사용함으로써 아내의 복종에 합당한 환경을 조성해야 합니다. 만일 남편이 아내를 학대하거나 비인격적으로 대하면서 복종만을 강요한다면, 그는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남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아내는 그 남편의 부당한 요구에 그대로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안전 확보와 문제 해결을 위해 주변에 알려 도움을 청하거나, 심각하다면 법적 보호를 구하는 것도 성경에 반하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부 관계의 언약은 폭력을 용납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는 구절이 가정폭력이나 학대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현대 교회에서도 널리 인식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관계에서의 덕목이지, 죄악된 행위에 대한 묵인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는 부모-자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해야 하지만, 부모가 범죄를 강요하거나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한다면 그때는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거짓말을 시키거나,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폭력적으로 막는다면, 자녀는 (특히 성인이 된 자녀라면) 양심적 거부를 해야 합니다. 물론 미성년 자녀의 경우 그 한계가 있지만, 가능한 한 교회 공동체의 도움이나 사회적 보호 장치를 통해 부당한 권위행사를 제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신자는 가정의 권위에 대해서도 이중적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한편으로, 세상이 점점 권위 구조를 무시하고 가정을 경시하는 풍조 속에서 성경적 가정질서를 수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로 존중과 헌신이 오가는 건강한 권위 관계를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는 가정의 행복뿐 아니라 다음 세대의 신앙 계승을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가정 내 어떤 형태의 폭압이나 학대도 용납되지 않음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약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가정폭력이 발견된다면, 교회는 이를 죄로 규정하고 적극 개입하여 피해자를 보호하고 가해자가 회개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때로는 세속 당국에 신고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지, 악을 숨기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특별히 가족이라는 이유로 죄를 눈감아주는 것은 결코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 권위가 왜곡될 때 신자는 기도와 사랑의 마음으로 문제와 맞서되, 필요한 경우 단호하게 조치를 취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이 지닌 인격의 존엄과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일이기도 합니다.
3.4 학교와 사회 단체의 권위: 세속 사회 속 권위에 대한 성도의 책무
학교나 직장, 시민단체와 같은 사회적 조직에도 권위 구조가 존재합니다. 교사는 학생을 지도하는 권위를 갖고, 직장의 상사는 부하 직원에게 명령할 권한이 있으며, 각종 조직의 리더들은 구성원들을 이끌 책임과 권위가 부여됩니다. 비록 이러한 관계들은 앞서 논의한 국가나 가정보다 공식적이지 않을 수 있지만, 신자는 이 영역에서도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로 임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학교 언급은 없지만, 지혜 문헌과 교육에 관한 원리들(잠언 등)을 통해 볼 때 학생은 스승을 공경하고 배우는 자세를 갖추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에베소서 6장 5절 이하와 골로새서 3장 22절 등에서는 종과 상전(오늘날로 치면 직원과 고용주 또는 학생/부하와 교사/상사)의 관계를 다루며, 신자들에게 “육신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성실한 태도와 순종하는 마음가짐으로 권위에 임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학생은 교사의 지도에 순종하고, 직원은 고용주의 정당한 지시에 따라 최선을 다해 일함으로써 신앙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 18절도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신자가 세속 현장에서 쉽지 않은 상사나 권위자일지라도 존중하며 최선을 다해 섬길 것을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단순히 인간 권위자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계신 주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골 3:23: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고 주께 하듯 하라”). 하지만, 이러한 순종의 원칙도 절대적이지 않음은 앞서와 동일합니다. 학교나 직장 등에서 권위자가 부당하거나 비도덕적인 요구를 할 때, 신자는 양심에 따라 불복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교사가 학생들에게 부정을 저지르게 한다거나(시험 답안을 알려준다든지), 상사가 직원에게 불법 행위를 지시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또 현대 사회에서는 때때로 교육 현장에서 반기독교적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거나, 직장에서 신앙 때문에 차별을 겪는 일도 발생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사람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원칙은 이 세속적 권위 관계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한 복음주의 조언자는 직장 내 윤리 문제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은 직장에서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일에 가담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맞습니다. 신자는 정직과 청렴의 가치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켜야 하며, 상사의 지시라 해도 죄에 동참하는 일이라면 거부해야 합니다. 상사가 거짓보고를 지시하거나, 금전적 비리를 요구하거나, 법을 어기는 행동을 명령한다면, 그때 신자는 온유하지만 분명한 태도로 그것을 수행할 수 없음을 밝혀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했던 것처럼, 그러나 실력과 예의를 갖춰 말입니다. 만약 그러한 거부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그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의로운 고난이며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입니다(벧전 2:19-20). 또한 학교나 직장에서 권위자가 악행을 저지르는 경우—예컨대 교사가 학생을 학대하거나, 상사가 직장 내 약자를 괴롭히는 직장 내 갑질을 하는 경우—신자는 그것을 보고도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에베소서 5장 11절은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내가 당사자가 아닐지라도, 그런 잘못을 인지했다면 적절한 절차에 따라 고발하거나 시정 요청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기도와 성숙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경솔한 고발이나 잘못된 정보는 더 큰 혼란을 부를 수 있으므로, 지혜롭게 증인을 모으고 사실을 확인한 후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권위의 악용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는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요약하면, 학교와 사회 단체에서 신자는 권위에 순종하는 모범적인 구성원이 되어야 하지만, 비윤리적·비합법적 명령에는 굳건히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No"는 앞서 언급한대로 하나님께 더 큰 순종을 드러내는 예배적 행위가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권위에 아첨하거나 또는 함부로 대항하지만, 그리스도인은 필요할 땐 순교적 각오로 불의한 명령을 거부하고, 그 외에는 모든 일에 성실히 순종함으로써 도리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2절 말씀처럼 *“너희가 이방인 가운데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서 권위자들 앞에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되, 동시에 하나님의 법 앞에서 양심을 지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학교에서는 훌륭한 학생으로, 직장에서는 신뢰받는 직원으로 비치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며, 만약 부당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듯이 그것을 인내함으로써 오히려 진리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벧전 2:21 참조).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은 권세(권위)에 대해 분명한 이중적 가르침을 줍니다. 한편으로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존중하고 순종해야 할 질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권위는 타락 가능성을 지닌 제한된 것이기에, 하나님의 절대 권위 아래서 평가되고 통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국가, 교회, 가정, 학교 등 우리가 속한 모든 공동체에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권위에 대한 성경적 태도란 곧 겸손한 순종과 담대한 분별이라는 두 가지 덕목을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는 권위에 대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구체적으로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합당한 권위에 순종하고 존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법을 지키고, 윗사람을 공경하며, 사회의 규칙을 성실히 따르는 모범 시민이자 성실한 일꾼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협력하는 좋은 교인이 되어야 하고, 가정에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좋은 배우자와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순종과 존중의 태도는 개인의 미덕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향기를 세상에 전하는 간증이 됩니다.
둘째, 모든 권위 위에 계신 최고 권위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어떠한 권위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권위자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명령할 때, 신자는 믿음의 양심을 따라 거부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때 우리의 불복종은 세속적 반항이나 아나키즘이 아니라,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충성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외하며 왕을 공경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벧전 2:17). 즉 하나님 경외가 최우선이고, 그 범위 안에서 세속 권위 공경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이것은 때로 어려운 선택을 요구하지만,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우리는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가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셋째, 권위가 남용되거나 부패할 때 이를 바로잡는 책임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신자는 권위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도록 돕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부정부패를 묵인하지 말고,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교회 내 잘못된 권위 행사는 사랑으로 권면하고 필요한 경우 공적으로 책망해야 하며,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단, 이러한 행동은 항상 성경의 원칙과 사랑의 동기에서 나와야 하며, 개인적 분노나 이기심이 섞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권위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르게 회복되도록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넷째, 자신이 권위 있는 위치에 있을 때에는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책무로 인식해야 합니다. 많은 신자들이 동시에 부모, 교사, 상사, 교회 지도자의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권위에 대한 바른 자세”는 단지 순종하는 사람에게만 요구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를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신자라면, 더욱더 겸손과 섬김으로 임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종의 리더십을 본받아, 맡은 자들을 돕고 세워주는 방향으로 권위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권위 남용으로 인한 폐해를 미연에 방지하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권위에 순종하고 분별하는 데 있어서 기도와 말씀에 뿌리내린 영성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현실의 상황들은 복잡하고, 어디까지 순종하고 어디서 거부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운 회색 지대가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자는 겸손히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약 1:5). 또한 성경 말씀을 지속적으로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양심을 바르게 훈련해야 합니다. 성경이 명령하는 바와 금지하는 바를 깊이 알아야, 막상 위기의 순간에 혼동하지 않고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권위에 대한 성경적 균형 감각은 하루아침에 형성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작은 순종을 연습하고, 작은 불의에 침묵하지 않는 훈련을 통해 길러져 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권위를 대함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세속 권력 앞에서 때로는 침묵으로 순복하시고(십자가를 지심), 때로는 담대히 책망하시며(바리새인들과 권력자들의 위선을 폭로하심),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만 절대 복종하신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모델은 예수님이시며, 그분의 Lordship(주권)만이 우리의 절대 기준입니다. 오늘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칫 둘 중 하나의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는 권위에 대한 맹목적 복종으로 비판적 사고를 포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권위에 대한 냉소와 거부로 무질서와 반항심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제3의 길, 곧 “비판적으로 순종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권세를 인정하지만 우상화하지 않고, 때로 거부하더라도 무정부적 혼란을 조장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합니다.
이 길은 쉽지 않지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실 때 가능한 길입니다. 겸손과 용기의 두 날개로 균형 있게 날아오르는 신앙인의 모습을 이루어 갈 때, 개인의 삶과 우리의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강을 더욱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신자는 모든 권위를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로 존중하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권위를 최종적으로 우선시해야 합니다. 권위가 바로 서도록 돕는 일에 책임을 다하며, 권위가 잘못 사용될 때는 사랑으로 바로잡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바로 성경적 권위관이며,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성숙한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를 존중하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절대 충성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혼탁한 시대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며(마 5:13-14), 장차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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