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장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 절대 윤리인가 선교적 전략인가?
서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라고 가르치며,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겉보기에는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 규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기 교회가 로마 제국 하에서 박해를 받던 상황을 고려하면, 바울의 이 권면이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적·상황적 전략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둘러싸고 “절대 윤리 대 상황적 순응”이라는 긴장 속에서 다양한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본 소논문에서는 이러한 논쟁을 중심에 두고, 루터, 칼뱅, 본회퍼, 바르트, 무디,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서 13장의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교훈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 비교하겠습니다. 각 인물의 시대적 맥락과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윤리 원칙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상황에 따른 전략으로 이해했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제언하고자 합니다.
마르틴 루터: 세속 권세에 대한 순종이라는 질서의 원리
시대적 맥락: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 시대에 살면서 교회의 개혁뿐 아니라 세속 권위와의 관계도 고민했습니다. 당시는 교황권과 제후국가의 권력 다툼, 농민전쟁 등으로 사회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기독교인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강조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신학적 입장:
루터는 “두 왕국” 사상을 발전시켜 영적 권세와 세속 권세의 영역 구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 유지를 위해 세속 정부(칼)가 필요함을 아셨기에, 세속 권력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당한 통치 영역이라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속사람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자유롭지만, 겉사람으로는 세상 질서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고에서 로마서 13장은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루터는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를 모든 세속 통치자들로 이해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표현대로 “모든 혼은”) 국가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이 복종은 무조건적인 맹종이 아니라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순종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통해 사회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경계했는데, 당시 재세례파 등 과격 분파들이 “그리스도인이 세속 권세를 폐지해야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생각으로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여 세상 정부를 멸시하는 태도를 교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루터에게 로마서 13장의 순종 교훈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절대적인 윤리 원칙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는 세속 정부가 다소 부패하고 통치자가 악할지라도 그 지위 자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므로, 일반 신자는 “통치자의 인품과 상관없이”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통치자가 불의할 때에도 개인적으로 폭력 저항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금지했습니다. 루터는 “너와 네 것에 관해서는, 복음을 따라 불의를 참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아라”라고 하여 악한 통치자 아래서도 십자가를 지는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예외 조항도 명확히 했습니다. 만약 세속 정부가 신앙의 문제에 간섭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을 명령하거나(예: 우상 숭배),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금할 때(예: 복음 전파 금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도들의 원칙(행 5:29)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루터 자신의 저작(성경 번역서 등)을 압수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양심상 협력할 수 없으며 불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왕이 교황 편을 들게 하거나, 특정 신앙을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어떤 책을 없애라고 명령하면, ‘나는 몸과 재산에 있어서만 당신께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당신은 권한을 넘어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까지 적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적극 무력으로 저항하지 말고 통치자가 강압적으로 집행하면 그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권면했습니다. 실제로 루터는 “부당한 법령에 저항하되, 그 불복종의 대가(처벌)는 기꺼이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하여, 불복종하더라도 권세에 대한 순종적인 마음가짐은 유지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정리하면, 루터는 로마서 13장을 신자들의 사회윤리에 대한 절대적 지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국가의 통치 권한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므로 존중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은 착한 시민으로서 세속 법에 순종하고 조세를 납부하며, 통치자를 “존귀와 두려움”으로 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현실적인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참여하는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순종한다는 전제를 달았고,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명령 앞에서는 양심적 불복종을 허용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전면적인 폭력 저항은 불가, 개별 이슈에서는 양심 따라 거부”로 요약되며, 이는 절대 윤리와 예외 상황을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터에게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은 항구적인 질서 원리였지만, 동시에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한 예외적 상황 대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존 칼뱅: 합법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주권
시대적 맥락:
존 칼뱅(1509-1564)은 루터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을 심화시킨 인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신정정치적인 개혁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칼뱅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종교전쟁과 정치적 혼란이 빈번했고, 개신교 군주와 가톨릭 군주들이 충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칼뱅은 개혁신학을 체계화하면서 국가 권력의 정당성과 그 한계를 신학적으로 규명하려 했습니다.
신학적 입장:
칼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자였고, 세속 권세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정부가 필요해졌으며, 하나님께서 죄의 억제를 위해 통치자들을 세우셨다고 이해했습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와 로마서 주석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논하면서, “통치 권세 자체는 선한 것”이나 “통치자의 권한 남용(폭정)은 악한 것”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또한 칼뱅은 합법적인 통치와 불의한 명령을 구별했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정부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칼뱅은 로마서 13:1-7을 주석하면서, 바울이 이 주제를 길게 다룬 것은 당시 유대인 및 열심당원들 중에 로마 권력을 멸시하거나 전복하려는 경향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이방 통치 아래 굴복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고, 또한 많은 통치자들이 우상숭배자이며 교회를 박해하니, “그리스도의 왕국이 왔는데 왜 여전히 세상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에 답하여 바울이 세속 권세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 칼뱅의 견해입니다.
칼뱅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통치자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려는 “호기심”을 경계하면서, 권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이 어떻게 권좌에 올랐는지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그 자리에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뱅은 군주나 정부의 형태를 불문하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현존하는 통치 체계에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 보았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칼뱅도 로마서 13장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윤리 원칙(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규범)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이 순종의 범위에 묵시적인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성경은 때로 일반적인 원칙을 제한 없이 진술하지만, 전체 계시를 종합해 보면 자연스러운 한계가 드러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즉 바울이 이 대목에서 “복종하라”라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의한 명령이나 폭정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뱅 주석에 따르면, 바울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통치 행위만을 염두에 두고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한 것이지, “폭군의 억압까지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다 복종하라”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뱅은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만, 권세의 남용은 인간의 악에서 온다. 사도는 정당하게 행사되는 권세만 말한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자가 본분을 벗어나 부당한 일을 명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됩니다. 칼뱅의 이러한 이해는 순종의 조건부적 성격을 함축합니다. 즉 정부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한에 있어서 신자는 복종해야 하지만, 정부가 그 역할을 정면으로 배반하여 선을 억압하고 악을 조장한다면 그때의 복종 의무는 당연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뱅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 4항에도 영향을 준 사상인 “합법적 명령에 대한 복종”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말은 정부의 일부 법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면 그 법은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닭고기는 손으로만 먹으라”는 우스꽝스러운 법을 제정한다고 할 때, 포크로 먹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므로, 그것까지 신앙 양심의 문제로 여기며 지킬 필요는 없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류의 법들은 그저 질서 유지를 위한 행정명령에 불과하며, 신자는 웬만하면 지키겠지만 그것이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칼뱅은 말했습니다. 결국 “정부의 명령이 합법적인 권위 범위 안에 있을 때에만 양심상 절대복종이 요구되고, 그 범위를 넘어설 경우 신자는 판단할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뱅은 개인이 제멋대로 정부에 불복종하거나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경고했습니다. 그는 무질서한 저항은 더 큰 악을 부른다고 보았고, 만약 참지 못할 폭정이 있을 경우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른 합법적 권위(예: lower magistrates, 하급 관원이나 의회 등)”가 나서서 폭군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소명받은 신민의 저항권” 또는 “하위직 권력자의 폭군 저항권”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칼뱅 자신은 이러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과 개신교 정치사상가들(예: 위그노의 폭군에 대항하는 합법적 권리 논증서, 1579 등)이 칼뱅의 사상을 바탕으로 폭군에 대한 제한적 저항을 옹호하게 되죠. 즉 일반 백성의 무질서한 반란은 반대하지만, 합법적인 구조 내에서의 폭군 통제는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칼뱅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부인하거나 죄를 짓게 하는 명령에는 명백히 따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부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서 교회의 신앙을 지배하려 들면, 그때는 양심을 위해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라고 인정했습니다. 가령 정부가 복음 전파를 금지한다면, 사도들처럼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국가법이라고 복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칼뱅에게 명문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의 전체 신학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입니다.
요약하면, 칼뱅에게 로마서 13장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통치 권세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신학적 원리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정의에 순응하는 한’이라는 묵시적인 조건이 붙은 절대성입니다. 칼뱅은 이 본문을 영구적 윤리 규범으로 보되, 그 적용에 있어서는 통치의 목적과 한계를 고려하는 현실감각을 발휘했습니다. 이는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칼뱅 쪽이 통치자의 의무(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것)에 충실할 때만 권위가 정당하다는 점을 좀 더 이론적으로 언급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칼뱅은 로마서 13장의 순종 교훈을 하나님의 주권질서에 대한 존중(윤리)으로 이해하면서도, 정부가 부당한 일을 명할 때는 예외적으로 불복종할 수 있음(상황적 적용)을 인정한 셈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나치 정권 아래에서 다시 묻는 순종의 의미
시대적 맥락: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20세기 초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 독일 정권 아래에서 활동했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교회는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정부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고, 실제로 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히틀러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지도자로 미화하며 맹종했습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흐름에 맞서 고백교회(참된 교회) 운동을 이끌며,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거부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히틀러 제거를 위한 저항 운동(첩보 및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순교하였는데, 이 극단적인 결단은 그가 로마서 13장을 재해석하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학적 입장:
본회퍼는 루터 전통에 선 신학자였지만, 그리스도 중심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를 강조하며 이전 세대와 다른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저서 '윤리학(Ethics)'에서는 교회와 국가,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나오는데, 그는 정부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마련) 중 하나로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권위는 그 자체로 절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국가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대리자 역할을 할 때 정당성을 가지며, 통치자들도 하나님께 청지기적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정부의 기원을 “창조의 본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임시적 조치”로 설명했는데, 인간의 죄악 때문에 악을 제어하기 위해 하나님이 칼의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루터/칼뱅적인 생각을 이어받았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본회퍼는 로마서 13장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불의한 정부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섬기게 된다고까지 언급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빌라도 총독의 행동조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데 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본회퍼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매우 크게 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 정부가 반(反) 그리스도적으로 보여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상 그 권위의 자리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직분(ordinance)”이라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정부 관료들은 하나님의 사역자(ministers of God)다”라는 로마서 13:4의 표현을 인용하며,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해서 정부의 권위가 자동으로 상실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윤리적 실패가 있다고 해서 정부의 신적 위엄이 eo ipso (그 자체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본회퍼의 말은, 상당히 정부 권세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본회퍼가 정부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국가에 대한 복종은 결코 무조건적일 수 없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의 원칙은 루터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정부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도록 강요할 때는 더 이상 정부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본회퍼는 “신자의 복종 의무는 정부가 직접 신적 계명을 범하도록 강요할 때까지 유효하다. 그 시점에 정부는 자신의 신적 사명을 공개적으로 부인한 것이 되어 권위 주장을 포기하게 된다.”라고 썼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교회에게 특정 신앙을 강요하거나 복음을 못 전하게 간섭한다면 (나치 정권이 “아리안 조항” 등을 통해 교회 인사에 개입하고 성서를 왜곡하려 한 것처럼), 신자는 그 조치에 대해 양심 때문에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정확히 “오직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행 5:29)는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런 경우라도 그 정부의 다른 합법적 요구들까지 모두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특정 사안에서의 불복종을 전체에 대한 반항으로 일반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어떤 한 법령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하더라도, 그렇다고 그 정부 자체를 전복시키거나 모든 법질서를 무시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본회퍼는 부분적인 시민 불복종과 전면적인 체제 부정을 구분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회퍼 자신이 나치 정권에 적극 저항하여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는 그의 원칙 (정부의 다른 영역에 대한 복종은 유지)을 벗어난 급진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의 행적을 이해하려면, 나치 정부가 이미 하나님의 위임을 스스로 포기한 상태라고 그가 판단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이 노골적으로 악을 행함으로써 아예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세 가지 대응 방식을 말하면서, 세 번째 단계로 “국가가 선을 악이라 규정하고 악을 선이라 규정하며 무고한 이들을 체계적으로 희생시킬 때, 교회는 국가의 바퀴에 쐐기를 박아 그 폭주를 막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유명한 비유(“바퀴에 말뚝을 박는다”)는 본회퍼가 정부에 대한 극단적 저항도 도덕적 책임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결국 본회퍼에게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에게 일반적으로 정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이면서도,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정부를 비판적으로 식별해야 함을 보여주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는 초기 저술에서는 꽤 전통적인 해석(정부에 순종하되 신앙침해 시 거부) 범주 안에 있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그 한계를 넘은 폭정을 마주하자 순종 교훈의 상황적 적용을 과감하게 재해석한 셈입니다. 요컨대, 평상시에는 로마서 13장을 절대윤리로 따르되, 비상시에는 선교적 전략(나아가 윤리적 책임)으로 전환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희생적 실천은 오늘날에도 “과연 어디까지 정부에 순종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물음을 던져줍니다.
칼 바르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국가 – 복종하되 우상화는 금지
시대적 맥락:
칼 바르트(1886-1968)는 스위스 출신의 개신교 신학자로, 20세기 전반 유럽의 혼란을 겪으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과 교회의 나치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로마서 주석(Römerbrief)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주석에서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과 인간 제도의 상대성을 강력히 설파했습니다. 바르트는 1930년대에 독일로 건너가 신학을 가르치던 중, 히틀러의 등장과 독일 교회의 타락(국가주의에 오염됨)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1934년 바르멘 선언을 주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주”임을 선포함으로써, 로마서 13장을 오용하며 국가 권력을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신학적 입장: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과 은혜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자(신정통주의)였습니다. 그는 어떤 피조물도, 제도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에, 국가도 하나님의 피조 질서의 일부이지 절대선이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무정부적 혼돈 역시 하나님 뜻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즉, 국가는 필요악처럼 존재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제거해서도 안 된다는 식의 변증법적 균형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해석할 때, 이 부분만 떼어내어 보면 오해하기 쉽다고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로마서 13장 주석을 시작하면서 “로마서 전체의 맥락 없이 13장을 읽으면 왜 더 말하지 않고 덜 말하지 않는지 이해 못 할 것이다”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는 바르트 자신이 이 본문을 단순한 통치권 옹호 구절 그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통해 두 가지 극단을 모두 배격하려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한쪽 극단은 “정통주의적 합법주의(Legitimism)”로서, 정부에 대한 무조건 복종만을 강조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한쪽 극단은 “혁명주의(Revolutionism)”로서, 정부 권위를 부정하고 반역을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바르트는 이 둘을 그리스 신화의 괴물에 비유했는데, 하나는 스킬라(맹목적 복종으로 빠지는 함정)이고 하나는 카립디스(무분별한 반란으로 빠지는 함정)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 13장 가르침은 이 두 위험 사이의 길을 제시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가 권위 옹호자들이 바라는 대로) 합법주의 원칙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역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혁명 원칙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13장에서 혁명에 대한 직접적 부정과, 동시에 합법주의에 대한 암묵적 부정을 모두 발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바르트는 국가의 권위는 상대적 정당성을 가지며 일정 부분 하나님의 질서에 기여하기 때문에, 그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복시키려는 태도(혁명)는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간 정부는 불완전하고 죄성에 오염되어 있으므로, 현존 체제를 절대시 하여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려는 태도(맹목적 충성)도 그릇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현존 질서(국가, 법, 사회 등)는 항상 하나님의 원질서(Primal Order)와 긴장 관계에 있다”면서, 혁명을 하더라도 결국 또 다른 인간 질서를 세우는 것일 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므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혁명은 그저 괄호 안에 있는 +를 -로 뒤집는 것에 불과하고(한 세속 질서를 다른 질서로 바꿈),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괄호 밖의 –)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그의 비유는, 인간의 정치 변혁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하나님의 심판주권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로마서 13장의 “복종”은 우선적으로 질서의 하나님을 향한 복종입니다. 그는 “통치자들의 권세 요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기에 우리의 양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주님을 위한 마음으로) 복종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복종은 조건부입니다. 바르멘 선언(바르트가 기초한 신앙선언문) 5조를 보면, “국가의 정당한 임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정의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그 임무 영역에서 교회와 별개의 질서를 가진다. 그러나 국가가 이 범위를 넘어 교회의 신앙이나 양심을 침해하면 우리는 거부한다”라고 천명합니다. 이는 바르트의 사상을 잘 요약한 것으로, 국가는 하나님 뜻대로 치안과 정의를 수호할 때 섬겨야 할 대상이지만, 복음을 침해하면 ‘다른 주인을 섬기려는’ 우상 권세가 되기에 복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르트는 히틀러 치하에서 이 입장을 지켰고, 결국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다가 독일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을 내세워 나치 정권을 신적 권위로 미화하던 독일 교회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다른 권위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바르멘 선언의 주제는 곧 로마서 13장 해석의 경계선을 제시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칼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했지만, 그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상대화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순종은 절대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복종의 산물”이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복음 전도의 맥락에서 상황적 지혜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법적 안정과 평화를 통해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때문에, 가능한 한 국가와 충돌을 피하는 것이 선교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바르트 본인이 직접 “선교”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그의 제자적인 삶은 복음을 위해 국가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전략을 잘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바르트에게 로마서 13장은 “국가도 하나님 권위 아래 있다”는 선언이자, 그 전제 하에서 신자가 질서에 순응하는 책임을 가르치는 구절이었습니다. 이는 맹목적 복종도, 무분별한 반항도 아닌 제3의 길로서, 오늘날까지 기독교 윤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드와이트 L. 무디: 경건한 시민으로서의 순종과 복음증거
시대적 맥락:
드와이트 L. 무디(1837-1899)는 미국의 부흥사이자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남북전쟁 이후 급변하는 미국 사회에서 사역했습니다. 무디는 정치가나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사역은 도시 빈민 구제, 주일학교 운동, 부흥집회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세기말 미국은 노예제 폐지 이후 사회도덕의 재건과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교회는 금주 운동이나 사회복음 운동 등의 형태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디는 전통적인 복음 전도에 집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도덕성과 사회 책임을 강조한 인물이었습니다.
신학적 입장:
무디는 조직신학적 글을 많이 남기진 않았지만, 그의 설교와 일화에서 평신도들이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복음 중심이었고, 사람들의 영혼 구원이 최우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선한 시민(good citizen)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무디는 종종 세상과 천국 시민권의 관계를 말하곤 했는데, “우리는 하늘 시민이지만 지금은 땅의 공동체 일원이다”라는 식의 균형 잡힌 태도를 보였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및 적용:
무디는 로마서 13장을 따로 주석으로 남긴 바는 없지만, 그의 삶과 가르침은 바울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체현한 것과 같았습니다. 한 일화에 따르면, 무디가 시카고에서 어떤 사회적 도덕 이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당신은 하늘나라 시민임을 기억하라. 세속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라고 충고했습니다. 무디는 이에 “맞습니다, 나는 하늘 시민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투표하는 곳은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입니다”라고 응수했습니다. 이 일화는 무디가 기독교인의 세상 속 책무를 무시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신앙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세상 일에도 신자의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무디가 가르친 바를 제자들이 정리한 내용을 보면, 그는 정부를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신 제도로 인식했습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사사기 시대처럼) 아수라장이 되므로, 하나님은 권위 있는 정부를 통해 죄를 억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한 종류의 정부만 정하신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이든 정부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셨다. 심지어 무신론 정권(공산주의 같은)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존재를 허용하신 것”이라는 언급은, 정치 체제와 상관없이 기독교인은 정부에 순종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상은 무디가 몸담은 복음주의 일반의 가르침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므로 신자는 법을 지키고, 위정자를 존경하며, 세금도 성실히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터나 칼뱅과 똑같이, 무디 또한 디도서 3:1이나 벧전 2:13-17 같은 구절을 인용하며 신자는 법을 어기는 무질서한 자가 아니라 법을 지키는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무디도 예외 상황을 인정했습니다. “정부를 순종하되,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원칙은 복음주의의 기본 윤리였고 무디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정부가 우상숭배나 신앙포기를 강요한다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거부해야 하고, 정부가 복음 전파를 금지한다면, 베드로처럼 계속 전도하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무디 시대의 미국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친화적인 법질서였기에, 이런 극단적 충돌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최우선 순종할 것과 그다음에 세상 권세에 복종할 것을 함양시켰습니다. 무디 성경연구원 등에서 발간된 교재를 보면, “법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지 않는 한 지켜라. 만약 정부가 죄를 명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가르침이 뚜렷합니다. 결과적으로, 무디에게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은 복음전도에 방해되지 않는 한, 충실히 따라야 할 일반 도덕률이었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어떤 선교적 전략으로서 계산했다기보다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당연히 보여줘야 할 자세로 이해했습니다. 정부를 대적하거나 조롱하는 대신, 기도로서 정부를 도우며 법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디는 교회의 영적 부흥이 결국 사회 개혁의 지름길이라고 믿었고, 복음을 통해 사람이 변화되면 범죄율이 낮아지고 가정이 바로 서며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는 로마서 13장이 말하는 “권세에 복종하여 선을 행함으로 칭찬을 받는다”는 원리와도 통합니다. 무디와 그가 대표하는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정부 순종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정부에 대한 맹신이라기보다 복음 증거를 위한 선한 행실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무디는 절대 윤리로서의 순종과 선교적 목적 모두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윤리적 원칙으로서의 순종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는 그가 처한 상황이 루터나 본회퍼처럼 정부와 신앙이 극한으로 충돌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면도 있습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해석과 적용: 균형 잡힌 순종과 책임 있는 저항
시대적 맥락: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 정부와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 기독교인은 인권, 종교자유, 정치참여 등에 적극적입니다. 한편으로 과거에 로마서 13장이 악용된 역사(예: 나치 독일,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미국의 노예제 옹호 등)를 교훈 삼아, 이 본문을 신중히 해석하려는 경향도 강합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정교분리 원칙 아래 국가 권세를 존중하면서도, 예언자적 역할로서 국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함께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입장: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대체로 루터와 칼뱅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므로 필요하고 선한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법치와 권위 존중은 기본적인 덕목으로 가르칩니다. 동시에, 모든 인간 제도는 타락 가능성이 있으므로 맹신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경의 최고 권위를 늘 우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제정하신 국가”와 “타락한 인간이 운용하는 국가”를 구분하고, 전자에 대한 존중 때문에 후자의 오류를 눈감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복음주의자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다니엘, 사도들 등의 예시를 자주 인용하며, 국가에 대한 순종과 신앙 양심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현대 복음주의 해석자들은 로마서 13장을 볼 때 로마서 12장(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과 로마서 13장 후반부(이웃 사랑의 윤리)가 함께 읽혀야 함을 강조합니다. 즉, 국가 권세에 대한 복종도 “악을 이기는 선”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많은 복음주의 주석가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가 초기 교회를 잠재적 반역 집단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바울이 의도적으로 정부에 대한 협력을 권면했다고 봅니다. 이를 흔히 “선교적 또는 변증적 동기”라고 하는데, 바울은 복음이 아직 뿌리내리기도 전에 괜한 정치적 소요로 탄압받는 것을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복음주의 학자는 로마서 13장에 대해 “바울은 이 교훈을 통해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영적 사명을 더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하려 했다”라고 분석합니다. 존 스토트 같은 복음주의 거장은 “정부가 존재함으로써 혼란이 줄고, 그 평화로운 환경에서 교회는 복음을 전한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로마서 13장의 목적론적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결국 순종 교훈의 선교적 유익을 부각한 것입니다. 물론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이 가르침을 단순히 상황적인 전략으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 말씀으로서 로마서 13장을 받아들이며, 그 영원한 진리성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권세에 순복 하라는 명령 역시 하나님 뜻의 일부로서, 오늘날도 유효한 윤리 규범이라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는 신자들에게 법을 준수하고, 세금 보고를 정직하게 하며, 교통법규를 지키고, 투표와 같은 시민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어떤 설교자는 “우리가 정부에 복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배후의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 로마서 13장은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존중’이라는 보편적 윤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이 말씀의 오용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정부에 다 순종하라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십중팔구 “아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어느 복음주의 목회자는 “로마서 13장은 이상적인 경우를 전제한 것이지, 모든 폭군에게까지 복종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컨대, 정부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무효”라는 해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습니다
.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토론이 활발합니다. 어떤 이는 “누가 정부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권한이 있는가? 스스로 판단해서 불복종하면 무질서가 된다”라고 우려합니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처럼, 선명한 죄짓는 명령이 아닌 이상 가급적 복종하는 편이 낫다는 쪽과, 정부가 정의를 심각하게 저버리면 시민 불복종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쪽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순종할 수 없다”는 원칙에서는 동의합니다.
사도행전 5:29는 여전히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최후 보루입니다. 실제로 “신자의 무조건적 정부 복종은 비기독교적이다”라는 말에 반대할 복음주의자는 거의 없습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적용 지혜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시민 불복종(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한 이들도 있고, 반대로 질서 유지를 이유로 비판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정부의 예배 제한 조치에 대해, 어떤 교회들은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정부 지침을 순종했고, 다른 교회들은 히브리서 10:25 등을 들어 예배 강제 중단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예배는 하나님 명령이니 정부가 제한할 수 없다며 소송까지 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명령이 합법적 권위 범위 안에 있는가에 대한 해석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칼뱅주의 전통과 침례교 전통의 차이처럼, 복음주의자들도 국가의 공익적 명령(예: 공중보건 조치)은 웬만하면 따르되, 교회의 고유한 사안을 간섭하면 거부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국가는 예배의 시간, 방식, 빈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없다”라고 선언했고,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적 전통(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 신앙자유)에 서 있습니다.
한편,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로마서 13장을 개인 윤리 차원뿐 아니라 구조 악에 저항하는 신앙의 근거로도 읽습니다. 국가가 부정을 저지르거나 소수자를 탄압할 때, 교회는 침묵하지 않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도 로마서 13장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통치자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집행하기 위해 세움 받았다”(롬 13:3-4)는 정부의 목적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 “만일 정부가 선을 장려커녕 악을 행한다면, 이미 하나님이 주신 직무를 저버린 것이므로 시민은 그 행위를 따를 의무가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을 어디까지 적용할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명백한 부당행위 (예: 대량학살, 종교자유 억압 등)에 대해서는 교회가 거부권 행사를 정당화합니다. 본회퍼와 바르트의 이야기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그들이 국가 권세를 상대화한 모범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로마서 13장의 순종 교훈을 ‘원칙적으로는 절대 윤리, 적용에 있어서는 선교적·상황적 지혜’의 문제로 봅니다. 원칙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은 법을 지키고 국가에 협력하는 모범적인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예외가 필요합니다: 정부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면 양심적 불복종과 저항도 필요합니다. 이런 균형 잡힌 시각 덕분에,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는 한편으로는 경찰, 군인, 공무원 등으로 봉사하는 신자들을 독려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낙태나 동성혼, 부패 같은 사회 현안에 대해서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심지어 법률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예: 친생명 시위 등). 로마서 13장은 이러한 공적 신앙의 밑바탕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되 그 권위 남용에는 항거한 다니엘처럼 살아가도록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
바울의 로마서 13장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교훈을 둘러싸고 전개된 여러 신학자의 해석을 비교해 볼 때, 이 말씀은 그 자체로 명료하면서도 적용에 있어서는 복잡한 윤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루터와 무디 같은 인물은 사회 혼란을 막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질서 유지를 강조하며, 이 본문을 항구적인 윤리 원칙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존중하라”는 명령을 상황 불문하고 가르쳤고, 다만 정부가 명백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때는 불복종하되 폭력적 저항은 삼가는 선을 그었습니다. 이는 절대 윤리로서의 순종에 방점을 두면서 예외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 접근입니다.
칼뱅과 바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의 역할과 한계를 신학적으로 성찰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서 13장이 정부의 이상적 모습을 전제한다고 보았기에, 정부가 불의를 행할 경우 신자는 그 특정 불의에 저항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칼뱅은 질서유지라는 법의 목적에 주목하며 “정부의 합법적 명령” 개념을 통해 맹목적 복종을 경계했고, 바르트는 하나님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맹종과 반란 둘 다 아니다는 독특한 길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상황에 따른 신학적 전략에 무게를 둔 해석으로, 로마서 13장을 교회의 선교와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한 지침으로 활용했습니다.
본회퍼의 경우는 이 둘의 교차점에 서 있습니다. 그는 루터의 전통 안에서 시작하여 극한 상황 속에서 말씀의 참 의미를 실존적으로 씨름했습니다. 결국 그는 절대 윤리로 배운 순종의 계명을, 선교적·상황적 책임 윤리에 따라 초월해야 했던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성경의 문자적 명령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행하려는 용기로 평가되며, 이는 곧 로마서 13장이 절대윤리냐 전략이냐 하는 논쟁에 깊은 통찰을 더해줍니다. 즉,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서 단순한 문자적 순종이 오히려 불의를 용인하게 될 때, 참된 순종은 하나님의 궁극적 뜻(정의와 사랑)을 따르는 것일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로마서 13장을 “악을 선이라 하며 무조건 굴종하라”는 뜻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모든 신학자는 국가 권세 위에 하나님 권세가 있음을 전제했고, 신자의 궁극적 충성은 하나님께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또한 국가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데 있으며, 이 창조질서적 사명을 벗어나면 권세 남용이라는 점도 인식했습니다. 반대로 교회와 신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기에, 현실의 정부가 불완전해도 아예 순종을 팽개치고 혼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데에도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결국 로마서 13장의 교훈은 “질서를 통한 선교”와 “양심을 통한 순종” 사이의 균형으로 이해됩니다. 순종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가 될 수도 있고 (질서 있는 삶의 간증), 불복종이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법에 대한 저항으로 진리를 증언).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정부와 공공질서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구약 예레미야도 포로 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했듯이, 우리도 속한 나라와 도시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합법적 세금 납부, 투표 참여, 법률 준수, 이웃에 대한 선행 등은 모두 신자가 국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것 역시 로마서 13장의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양심을 따라 복종하라”라고 했는데, 이는 남이 보든 안 보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권위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라”라고 가르칩니다(딤전 2:1-2). 초대교회는 박해하는 황제를 위해서도 기도했듯이,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하고 그들의 직분을 존중하는 언행을 보여야 합니다. 비판이 필요할 때도 품위 있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해야지, 혐오나 조롱으로 일관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신자들은 특히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궁극적 충성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국가가 하나님께 거역하는 일을 명령할 때는, 겸손하지만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바람직한 태도는 본회퍼나 다니엘처럼 “나는 당신을 섬기길 원하고 법을 존중하지만, 이 부분에서만은 신앙 때문에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회사나 국가가 비리를 지시한다면, 크리스천은 양심상 거부하고 설령 승진이나 고용에 불이익이 와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정부 정책이 성경적 가치(생명, 정의)를 심각히 훼손한다면, 평화로운 시위나 법적 절차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시정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때 로마서 13장의 정신은 폭력이 아닌 평화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넷째로, 교회는 항상 예언자적 사명을 띠고 세상을 비춰야 합니다. 순종이 미덕이지만, 불의에 눈감는 것은 미덕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손에는 로마서 13장을 들고 다른 손에는 요한계시록 13장을 든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이 “정부에 순복 하라”면, 계시록 13장은 “정부가 짐승처럼 행할 때 우상숭배를 거부하라”라고 경고합니다. 두 말씀 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교회는 시시때때로 권세자들을 향해 바른말을 해야 합니다. 부정부패, 불의한 전쟁, 구조적 폭력 등에는 목소리를 높여 권세자들이 하나님이 맡긴 직분을 바로 수행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3:4의 “선을 행하는 이에게 칭찬”을 현실에서 이루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사랑의 법을 최고로 삼아야 합니다. 로마서 13장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그러므로 우리가 국가에 순종하는 것도 이웃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어야 하고, 우리가 불의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도 더 큰 사랑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신 말씀도(막 12:17)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속 정부가 맡은 몫(질서 유지를 위한 법 집행 등)은 존중해 주되, 경배와 절대적 복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신자의 본분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3장의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교훈은 절대 윤리와 상황적 전략의 양 측면을 모두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지켜야 할 기본 윤리이지만, 그 윤리를 지킴으로써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보호되는 선교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루터, 칼뱅, 본회퍼, 바르트, 무디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통찰을 종합하면, 우리는 “법을 존중하는 순종”과 “양심을 따르는 용기” 둘 다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균형을 지키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선을 행하는 시민이 되되, 언제나 하늘의 시민권을 최우선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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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3장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 절대 윤리인가 선교적 전략인가?
서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라고 가르치며,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가르침은 겉보기에는 정부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윤리 규범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초기 교회가 로마 제국 하에서 박해를 받던 상황을 고려하면, 바울의 이 권면이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적·상황적 전략이었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을 둘러싸고 “절대 윤리 대 상황적 순응”이라는 긴장 속에서 다양한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본 소논문에서는 이러한 논쟁을 중심에 두고, 루터, 칼뱅, 본회퍼, 바르트, 무디,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로마서 13장의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교훈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했는지 비교하겠습니다. 각 인물의 시대적 맥락과 신학적 입장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바울의 가르침을 절대적인 윤리 원칙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상황에 따른 전략으로 이해했는지 구체적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는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이 이 본문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제언하고자 합니다.
마르틴 루터: 세속 권세에 대한 순종이라는 질서의 원리
시대적 맥락: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종교개혁 시대에 살면서 교회의 개혁뿐 아니라 세속 권위와의 관계도 고민했습니다. 당시는 교황권과 제후국가의 권력 다툼, 농민전쟁 등으로 사회 혼란이 있었기 때문에, 루터는 기독교인이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떻게 기여해야 할지 강조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신학적 입장:
루터는 “두 왕국” 사상을 발전시켜 영적 권세와 세속 권세의 영역 구분을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질서 유지를 위해 세속 정부(칼)가 필요함을 아셨기에, 세속 권력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정당한 통치 영역이라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기독교인은 속사람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자유롭지만, 겉사람으로는 세상 질서에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사고에서 로마서 13장은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루터는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를 모든 세속 통치자들로 이해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표현대로 “모든 혼은”) 국가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다만 이 복종은 무조건적인 맹종이 아니라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심 어린 순종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통해 사회 무정부주의적 혼란을 경계했는데, 당시 재세례파 등 과격 분파들이 “그리스도인이 세속 권세를 폐지해야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생각으로 소요를 일으키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여 세상 정부를 멸시하는 태도를 교정하려 했던 것입니다.
루터에게 로마서 13장의 순종 교훈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절대적인 윤리 원칙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는 세속 정부가 다소 부패하고 통치자가 악할지라도 그 지위 자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므로, 일반 신자는 “통치자의 인품과 상관없이”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심지어 통치자가 불의할 때에도 개인적으로 폭력 저항이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금지했습니다. 루터는 “너와 네 것에 관해서는, 복음을 따라 불의를 참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아라”라고 하여 악한 통치자 아래서도 십자가를 지는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예외 조항도 명확히 했습니다. 만약 세속 정부가 신앙의 문제에 간섭하여,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을 명령하거나(예: 우상 숭배),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금할 때(예: 복음 전파 금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사도들의 원칙(행 5:29)에 따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컨대 루터 자신의 저작(성경 번역서 등)을 압수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양심상 협력할 수 없으며 불복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왕이 교황 편을 들게 하거나, 특정 신앙을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어떤 책을 없애라고 명령하면, ‘나는 몸과 재산에 있어서만 당신께 복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한 당신은 권한을 넘어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라고까지 적었습니다. 다만 이러한 경우에도 적극 무력으로 저항하지 말고 통치자가 강압적으로 집행하면 그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권면했습니다. 실제로 루터는 “부당한 법령에 저항하되, 그 불복종의 대가(처벌)는 기꺼이 받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라고 하여, 불복종하더라도 권세에 대한 순종적인 마음가짐은 유지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정리하면, 루터는 로마서 13장을 신자들의 사회윤리에 대한 절대적 지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국가의 통치 권한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므로 존중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은 착한 시민으로서 세속 법에 순종하고 조세를 납부하며, 통치자를 “존귀와 두려움”으로 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현실적인 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참여하는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순종한다는 전제를 달았고, 하나님 뜻을 거스르는 명령 앞에서는 양심적 불복종을 허용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전면적인 폭력 저항은 불가, 개별 이슈에서는 양심 따라 거부”로 요약되며, 이는 절대 윤리와 예외 상황을 조화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루터에게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은 항구적인 질서 원리였지만, 동시에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한 예외적 상황 대응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존 칼뱅: 합법적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주권
시대적 맥락:
존 칼뱅(1509-1564)은 루터의 뒤를 이어 종교개혁을 심화시킨 인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신정정치적인 개혁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칼뱅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종교전쟁과 정치적 혼란이 빈번했고, 개신교 군주와 가톨릭 군주들이 충돌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칼뱅은 개혁신학을 체계화하면서 국가 권력의 정당성과 그 한계를 신학적으로 규명하려 했습니다.
신학적 입장:
칼뱅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자였고, 세속 권세도 하나님의 섭리 아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인류의 타락으로 인해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해 정부가 필요해졌으며, 하나님께서 죄의 억제를 위해 통치자들을 세우셨다고 이해했습니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와 로마서 주석 등에서 정부의 역할을 논하면서, “통치 권세 자체는 선한 것”이나 “통치자의 권한 남용(폭정)은 악한 것”으로 구분하였습니다. 또한 칼뱅은 합법적인 통치와 불의한 명령을 구별했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정부 명령에는 복종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칼뱅은 로마서 13:1-7을 주석하면서, 바울이 이 주제를 길게 다룬 것은 당시 유대인 및 열심당원들 중에 로마 권력을 멸시하거나 전복하려는 경향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인데 이방 통치 아래 굴복하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고, 또한 많은 통치자들이 우상숭배자이며 교회를 박해하니, “그리스도의 왕국이 왔는데 왜 여전히 세상 왕에게 복종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에 답하여 바울이 세속 권세의 권위를 확립하려 했다는 것이 칼뱅의 견해입니다.
칼뱅은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라는 말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통치자의 정당성 여부를 따지려는 “호기심”을 경계하면서, 권세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그들이 어떻게 권좌에 올랐는지 묻지 말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그 자리에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뱅은 군주나 정부의 형태를 불문하고 (왕정이든 공화정이든) 현존하는 통치 체계에 순종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의무라 보았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칼뱅도 로마서 13장을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윤리 원칙(모든 시대의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규범)으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이 순종의 범위에 묵시적인 한계가 있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성경은 때로 일반적인 원칙을 제한 없이 진술하지만, 전체 계시를 종합해 보면 자연스러운 한계가 드러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즉 바울이 이 대목에서 “복종하라”라고 했다고 해서 그것이 불의한 명령이나 폭정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뱅 주석에 따르면, 바울은 합법적이고 정당한 통치 행위만을 염두에 두고 권세에 복종하라고 권면한 것이지, “폭군의 억압까지도 하나님이 세우셨으니 다 복종하라”라고 말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칼뱅은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만, 권세의 남용은 인간의 악에서 온다. 사도는 정당하게 행사되는 권세만 말한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자가 본분을 벗어나 부당한 일을 명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질서’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 됩니다. 칼뱅의 이러한 이해는 순종의 조건부적 성격을 함축합니다. 즉 정부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선을 장려하고 악을 징벌하는 한에 있어서 신자는 복종해야 하지만, 정부가 그 역할을 정면으로 배반하여 선을 억압하고 악을 조장한다면 그때의 복종 의무는 당연히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칼뱅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3장 4항에도 영향을 준 사상인 “합법적 명령에 대한 복종”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말은 정부의 일부 법이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면 그 법은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닭고기는 손으로만 먹으라”는 우스꽝스러운 법을 제정한다고 할 때, 포크로 먹는 것이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건 아니므로, 그것까지 신앙 양심의 문제로 여기며 지킬 필요는 없다는 식입니다. 이런 부류의 법들은 그저 질서 유지를 위한 행정명령에 불과하며, 신자는 웬만하면 지키겠지만 그것이 양심을 속박해서는 안 된다고 칼뱅은 말했습니다. 결국 “정부의 명령이 합법적인 권위 범위 안에 있을 때에만 양심상 절대복종이 요구되고, 그 범위를 넘어설 경우 신자는 판단할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칼뱅은 개인이 제멋대로 정부에 불복종하거나 폭력으로 맞서는 것은 경고했습니다. 그는 무질서한 저항은 더 큰 악을 부른다고 보았고, 만약 참지 못할 폭정이 있을 경우 “하나님께서 세우신 다른 합법적 권위(예: lower magistrates, 하급 관원이나 의회 등)”가 나서서 폭군을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소명받은 신민의 저항권” 또는 “하위직 권력자의 폭군 저항권”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칼뱅 자신은 이러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전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제자들과 개신교 정치사상가들(예: 위그노의 폭군에 대항하는 합법적 권리 논증서, 1579 등)이 칼뱅의 사상을 바탕으로 폭군에 대한 제한적 저항을 옹호하게 되죠. 즉 일반 백성의 무질서한 반란은 반대하지만, 합법적인 구조 내에서의 폭군 통제는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한편, 칼뱅도 루터와 마찬가지로 신앙을 부인하거나 죄를 짓게 하는 명령에는 명백히 따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정부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서 교회의 신앙을 지배하려 들면, 그때는 양심을 위해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라고 인정했습니다. 가령 정부가 복음 전파를 금지한다면, 사도들처럼 하나님께 순종해야지, 국가법이라고 복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칼뱅에게 명문화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의 전체 신학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결론입니다.
요약하면, 칼뱅에게 로마서 13장은 기본적으로 절대적입니다. 왜냐하면 통치 권세의 제정자이신 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해야 한다는 신학적 원리가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절대성은 ‘정의에 순응하는 한’이라는 묵시적인 조건이 붙은 절대성입니다. 칼뱅은 이 본문을 영구적 윤리 규범으로 보되, 그 적용에 있어서는 통치의 목적과 한계를 고려하는 현실감각을 발휘했습니다. 이는 루터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칼뱅 쪽이 통치자의 의무(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것)에 충실할 때만 권위가 정당하다는 점을 좀 더 이론적으로 언급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결국 칼뱅은 로마서 13장의 순종 교훈을 하나님의 주권질서에 대한 존중(윤리)으로 이해하면서도, 정부가 부당한 일을 명할 때는 예외적으로 불복종할 수 있음(상황적 적용)을 인정한 셈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나치 정권 아래에서 다시 묻는 순종의 의미
시대적 맥락: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는 20세기 초 독일의 루터교 목사이자 신학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 독일 정권 아래에서 활동했습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교회는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정부에 순응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았고, 실제로 많은 “독일 그리스도인”들이 히틀러를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지도자로 미화하며 맹종했습니다. 본회퍼는 이러한 흐름에 맞서 고백교회(참된 교회) 운동을 이끌며, 국가가 교회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거부했습니다. 나아가 그는 히틀러 제거를 위한 저항 운동(첩보 및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순교하였는데, 이 극단적인 결단은 그가 로마서 13장을 재해석하게 된 배경이 되었습니다.
신학적 입장:
본회퍼는 루터 전통에 선 신학자였지만, 그리스도 중심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를 강조하며 이전 세대와 다른 길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저서 '윤리학(Ethics)'에서는 교회와 국가,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심도 있는 성찰이 나오는데, 그는 정부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마련) 중 하나로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권위는 그 자체로 절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국가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대리자 역할을 할 때 정당성을 가지며, 통치자들도 하나님께 청지기적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정부의 기원을 “창조의 본래 질서”가 아니라 “인간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임시적 조치”로 설명했는데, 인간의 죄악 때문에 악을 제어하기 위해 하나님이 칼의 권세를 허락하셨다는 루터/칼뱅적인 생각을 이어받았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본회퍼는 로마서 13장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읽었습니다. 그는 정부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심지어 불의한 정부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는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통치를 섬기게 된다고까지 언급했는데, 예를 들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준 빌라도 총독의 행동조차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수행하는 데 쓰였다는 식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본회퍼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매우 크게 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즉, 겉으로 보기에 정부가 반(反) 그리스도적으로 보여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상 그 권위의 자리 자체는 여전히 “하나님의 직분(ordinance)”이라는 것입니다. 본회퍼는 “정부 관료들은 하나님의 사역자(ministers of God)다”라는 로마서 13:4의 표현을 인용하며, 도덕적 결함이 있다고 해서 정부의 권위가 자동으로 상실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윤리적 실패가 있다고 해서 정부의 신적 위엄이 eo ipso (그 자체로) 제거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본회퍼의 말은, 상당히 정부 권세의 안정성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그렇다고 본회퍼가 정부에 대한 맹목적 복종을 지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국가에 대한 복종은 결코 무조건적일 수 없다”라고 못 박았습니다. 그의 원칙은 루터와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한 것으로, 정부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거스르도록 강요할 때는 더 이상 정부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본회퍼는 “신자의 복종 의무는 정부가 직접 신적 계명을 범하도록 강요할 때까지 유효하다. 그 시점에 정부는 자신의 신적 사명을 공개적으로 부인한 것이 되어 권위 주장을 포기하게 된다.”라고 썼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가 교회에게 특정 신앙을 강요하거나 복음을 못 전하게 간섭한다면 (나치 정권이 “아리안 조항” 등을 통해 교회 인사에 개입하고 성서를 왜곡하려 한 것처럼), 신자는 그 조치에 대해 양심 때문에 복종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정확히 “오직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행 5:29)는 원리에 따른 것입니다. 본회퍼는 이런 경우라도 그 정부의 다른 합법적 요구들까지 모두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특정 사안에서의 불복종을 전체에 대한 반항으로 일반화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어떤 한 법령이 그리스도인의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어 거부하더라도, 그렇다고 그 정부 자체를 전복시키거나 모든 법질서를 무시하는 태도를 정당화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본회퍼는 부분적인 시민 불복종과 전면적인 체제 부정을 구분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본회퍼 자신이 나치 정권에 적극 저항하여 히틀러 제거 음모에 가담했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보면 이는 그의 원칙 (정부의 다른 영역에 대한 복종은 유지)을 벗어난 급진적인 행동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회퍼의 행적을 이해하려면, 나치 정부가 이미 하나님의 위임을 스스로 포기한 상태라고 그가 판단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본회퍼는 나치 정권이 노골적으로 악을 행함으로써 아예 “국가”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여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교회에 대한 국가의 세 가지 대응 방식을 말하면서, 세 번째 단계로 “국가가 선을 악이라 규정하고 악을 선이라 규정하며 무고한 이들을 체계적으로 희생시킬 때, 교회는 국가의 바퀴에 쐐기를 박아 그 폭주를 막아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이 유명한 비유(“바퀴에 말뚝을 박는다”)는 본회퍼가 정부에 대한 극단적 저항도 도덕적 책임의 일부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입니다.
결국 본회퍼에게 로마서 13장은, 그리스도인에게 일반적으로 정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이면서도, 동시에 교회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정부를 비판적으로 식별해야 함을 보여주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는 초기 저술에서는 꽤 전통적인 해석(정부에 순종하되 신앙침해 시 거부) 범주 안에 있었지만, 실제 역사 속에서 그 한계를 넘은 폭정을 마주하자 순종 교훈의 상황적 적용을 과감하게 재해석한 셈입니다. 요컨대, 평상시에는 로마서 13장을 절대윤리로 따르되, 비상시에는 선교적 전략(나아가 윤리적 책임)으로 전환한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희생적 실천은 오늘날에도 “과연 어디까지 정부에 순종해야 하는가?”에 대한 깊은 물음을 던져줍니다.
칼 바르트: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국가 – 복종하되 우상화는 금지
시대적 맥락:
칼 바르트(1886-1968)는 스위스 출신의 개신교 신학자로, 20세기 전반 유럽의 혼란을 겪으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과 교회의 나치 저항을 이끌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에 로마서 주석(Römerbrief)을 출간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 주석에서 하나님의 초월적 주권과 인간 제도의 상대성을 강력히 설파했습니다. 바르트는 1930년대에 독일로 건너가 신학을 가르치던 중, 히틀러의 등장과 독일 교회의 타락(국가주의에 오염됨)을 목격했습니다. 이에 1934년 바르멘 선언을 주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유일한 주”임을 선포함으로써, 로마서 13장을 오용하며 국가 권력을 신격화하려는 시도를 정면으로 거부했습니다.
신학적 입장: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과 은혜의 주권을 강조하는 신학자(신정통주의)였습니다. 그는 어떤 피조물도, 제도도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보았기에, 국가도 하나님의 피조 질서의 일부이지 절대선이 아니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시에 그는 무정부적 혼돈 역시 하나님 뜻에 어긋난다고 보았습니다. 즉, 국가는 필요악처럼 존재하지만, 그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제거해서도 안 된다는 식의 변증법적 균형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해석할 때, 이 부분만 떼어내어 보면 오해하기 쉽다고 경고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로마서 13장 주석을 시작하면서 “로마서 전체의 맥락 없이 13장을 읽으면 왜 더 말하지 않고 덜 말하지 않는지 이해 못 할 것이다”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는 바르트 자신이 이 본문을 단순한 통치권 옹호 구절 그 이상으로 파악하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통해 두 가지 극단을 모두 배격하려 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한쪽 극단은 “정통주의적 합법주의(Legitimism)”로서, 정부에 대한 무조건 복종만을 강조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한쪽 극단은 “혁명주의(Revolutionism)”로서, 정부 권위를 부정하고 반역을 정당화하려는 태도입니다. 바르트는 이 둘을 그리스 신화의 괴물에 비유했는데, 하나는 스킬라(맹목적 복종으로 빠지는 함정)이고 하나는 카립디스(무분별한 반란으로 빠지는 함정)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로마서 13장 가르침은 이 두 위험 사이의 길을 제시한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국가 권위 옹호자들이 바라는 대로) 합법주의 원칙을 인정하지도 않고, (반역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혁명 원칙도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오히려 로마서 13장에서 혁명에 대한 직접적 부정과, 동시에 합법주의에 대한 암묵적 부정을 모두 발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바르트는 국가의 권위는 상대적 정당성을 가지며 일정 부분 하나님의 질서에 기여하기 때문에, 그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복시키려는 태도(혁명)는 옳지 않다고 봤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인간 정부는 불완전하고 죄성에 오염되어 있으므로, 현존 체제를 절대시 하여 신적인 권위를 부여하려는 태도(맹목적 충성)도 그릇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현존 질서(국가, 법, 사회 등)는 항상 하나님의 원질서(Primal Order)와 긴장 관계에 있다”면서, 혁명을 하더라도 결국 또 다른 인간 질서를 세우는 것일 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것은 아니므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혁명은 그저 괄호 안에 있는 +를 -로 뒤집는 것에 불과하고(한 세속 질서를 다른 질서로 바꿈), 하나님의 궁극적 심판(괄호 밖의 –)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그의 비유는, 인간의 정치 변혁에 대한 깊은 회의와 하나님의 심판주권에 대한 신뢰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따라서 바르트에게 로마서 13장의 “복종”은 우선적으로 질서의 하나님을 향한 복종입니다. 그는 “통치자들의 권세 요구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기에 우리의 양심을 통해 (궁극적으로 주님을 위한 마음으로) 복종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 복종은 조건부입니다. 바르멘 선언(바르트가 기초한 신앙선언문) 5조를 보면, “국가의 정당한 임무는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와 정의의 책무를 수행하는 것이며, 그 임무 영역에서 교회와 별개의 질서를 가진다. 그러나 국가가 이 범위를 넘어 교회의 신앙이나 양심을 침해하면 우리는 거부한다”라고 천명합니다. 이는 바르트의 사상을 잘 요약한 것으로, 국가는 하나님 뜻대로 치안과 정의를 수호할 때 섬겨야 할 대상이지만, 복음을 침해하면 ‘다른 주인을 섬기려는’ 우상 권세가 되기에 복종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바르트는 히틀러 치하에서 이 입장을 지켰고, 결국 히틀러에 대한 무조건 충성을 맹세하라는 요구를 거부하다가 독일에서 추방당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3장을 내세워 나치 정권을 신적 권위로 미화하던 독일 교회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외에 다른 권위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바르멘 선언의 주제는 곧 로마서 13장 해석의 경계선을 제시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칼 바르트는 로마서 13장을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존중했지만, 그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상대화했습니다. 국가에 대한 순종은 절대 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복종의 산물”이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그것은 복음 전도의 맥락에서 상황적 지혜이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법적 안정과 평화를 통해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 때문에, 가능한 한 국가와 충돌을 피하는 것이 선교적으로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바르트 본인이 직접 “선교”라는 단어를 쓰진 않았지만, 그의 제자적인 삶은 복음을 위해 국가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전략을 잘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바르트에게 로마서 13장은 “국가도 하나님 권위 아래 있다”는 선언이자, 그 전제 하에서 신자가 질서에 순응하는 책임을 가르치는 구절이었습니다. 이는 맹목적 복종도, 무분별한 반항도 아닌 제3의 길로서, 오늘날까지 기독교 윤리에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드와이트 L. 무디: 경건한 시민으로서의 순종과 복음증거
시대적 맥락:
드와이트 L. 무디(1837-1899)는 미국의 부흥사이자 복음주의 지도자로서, 남북전쟁 이후 급변하는 미국 사회에서 사역했습니다. 무디는 정치가나 조직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사역은 도시 빈민 구제, 주일학교 운동, 부흥집회 등을 통해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19세기말 미국은 노예제 폐지 이후 사회도덕의 재건과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교회는 금주 운동이나 사회복음 운동 등의 형태로 사회 문제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디는 전통적인 복음 전도에 집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도덕성과 사회 책임을 강조한 인물이었습니다.
신학적 입장:
무디는 조직신학적 글을 많이 남기진 않았지만, 그의 설교와 일화에서 평신도들이 일상에서 신앙을 실천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철저히 복음 중심이었고, 사람들의 영혼 구원이 최우선 과제라고 보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기독교인이 이 땅에서 선한 시민(good citizen)으로 살아야 함을 역설했습니다. 무디는 종종 세상과 천국 시민권의 관계를 말하곤 했는데, “우리는 하늘 시민이지만 지금은 땅의 공동체 일원이다”라는 식의 균형 잡힌 태도를 보였습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및 적용:
무디는 로마서 13장을 따로 주석으로 남긴 바는 없지만, 그의 삶과 가르침은 바울의 이 가르침을 그대로 체현한 것과 같았습니다. 한 일화에 따르면, 무디가 시카고에서 어떤 사회적 도덕 이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당신은 하늘나라 시민임을 기억하라. 세속 문제에 관여하지 말라”라고 충고했습니다. 무디는 이에 “맞습니다, 나는 하늘 시민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투표하는 곳은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입니다”라고 응수했습니다. 이 일화는 무디가 기독교인의 세상 속 책무를 무시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신앙과 삶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고, 세상 일에도 신자의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무디가 가르친 바를 제자들이 정리한 내용을 보면, 그는 정부를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를 다스리도록 세우신 제도로 인식했습니다. 인간이 악하기 때문에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사사기 시대처럼) 아수라장이 되므로, 하나님은 권위 있는 정부를 통해 죄를 억제하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한 종류의 정부만 정하신 것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이든 정부가 존재하도록 허락하셨다. 심지어 무신론 정권(공산주의 같은)도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존재를 허용하신 것”이라는 언급은, 정치 체제와 상관없이 기독교인은 정부에 순종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상은 무디가 몸담은 복음주의 일반의 가르침으로 보아도 무방합니다. 즉,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므로 신자는 법을 지키고, 위정자를 존경하며, 세금도 성실히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터나 칼뱅과 똑같이, 무디 또한 디도서 3:1이나 벧전 2:13-17 같은 구절을 인용하며 신자는 법을 어기는 무질서한 자가 아니라 법을 지키는 모범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무디도 예외 상황을 인정했습니다. “정부를 순종하되, 그것이 하나님의 법과 충돌하지 않는 한에서”라는 원칙은 복음주의의 기본 윤리였고 무디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예컨대 정부가 우상숭배나 신앙포기를 강요한다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거부해야 하고, 정부가 복음 전파를 금지한다면, 베드로처럼 계속 전도하며 불이익을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무디 시대의 미국은 기본적으로 기독교 친화적인 법질서였기에, 이런 극단적 충돌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그의 설교에는 언제나 하나님께 최우선 순종할 것과 그다음에 세상 권세에 복종할 것을 함양시켰습니다. 무디 성경연구원 등에서 발간된 교재를 보면, “법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지 않는 한 지켜라. 만약 정부가 죄를 명하면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가르침이 뚜렷합니다. 결과적으로, 무디에게 로마서 13장의 가르침은 복음전도에 방해되지 않는 한, 충실히 따라야 할 일반 도덕률이었습니다. 그는 이 본문을 어떤 선교적 전략으로서 계산했다기보다는, 신앙인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기 위해 당연히 보여줘야 할 자세로 이해했습니다. 정부를 대적하거나 조롱하는 대신, 기도로서 정부를 도우며 법을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디는 교회의 영적 부흥이 결국 사회 개혁의 지름길이라고 믿었고, 복음을 통해 사람이 변화되면 범죄율이 낮아지고 가정이 바로 서며 사회가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이는 로마서 13장이 말하는 “권세에 복종하여 선을 행함으로 칭찬을 받는다”는 원리와도 통합니다. 무디와 그가 대표하는 19세기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정부 순종을 강조했지만, 그것은 정부에 대한 맹신이라기보다 복음 증거를 위한 선한 행실의 일부였습니다. 다시 말해, 무디는 절대 윤리로서의 순종과 선교적 목적 모두를 인식하고 있었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윤리적 원칙으로서의 순종에 무게를 두었습니다. 이는 그가 처한 상황이 루터나 본회퍼처럼 정부와 신앙이 극한으로 충돌한 환경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던 면도 있습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해석과 적용: 균형 잡힌 순종과 책임 있는 저항
시대적 맥락: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아, 정부와 교회의 관계를 새롭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20세기 중후반 이후, 특히 21세기 들어 기독교인은 인권, 종교자유, 정치참여 등에 적극적입니다. 한편으로 과거에 로마서 13장이 악용된 역사(예: 나치 독일,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미국의 노예제 옹호 등)를 교훈 삼아, 이 본문을 신중히 해석하려는 경향도 강합니다. 현대 복음주의 교회는 정교분리 원칙 아래 국가 권세를 존중하면서도, 예언자적 역할로서 국가의 잘못을 지적하고 사회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명을 함께 인식하고 있습니다.
신학적 입장:
현대 복음주의 신학은 대체로 루터와 칼뱅의 전통을 이어받아, 국가는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므로 필요하고 선한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법치와 권위 존중은 기본적인 덕목으로 가르칩니다. 동시에, 모든 인간 제도는 타락 가능성이 있으므로 맹신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경의 최고 권위를 늘 우선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제정하신 국가”와 “타락한 인간이 운용하는 국가”를 구분하고, 전자에 대한 존중 때문에 후자의 오류를 눈감아주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입니다. 실제로 복음주의자들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다니엘, 사도들 등의 예시를 자주 인용하며, 국가에 대한 순종과 신앙 양심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로마서 13장 해석:
현대 복음주의 해석자들은 로마서 13장을 볼 때 로마서 12장(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과 로마서 13장 후반부(이웃 사랑의 윤리)가 함께 읽혀야 함을 강조합니다. 즉, 국가 권세에 대한 복종도 “악을 이기는 선”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죠. 많은 복음주의 주석가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 교회의 상황을 언급합니다. 그들은 로마 정부가 초기 교회를 잠재적 반역 집단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바울이 의도적으로 정부에 대한 협력을 권면했다고 봅니다. 이를 흔히 “선교적 또는 변증적 동기”라고 하는데, 바울은 복음이 아직 뿌리내리기도 전에 괜한 정치적 소요로 탄압받는 것을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복음주의 학자는 로마서 13장에 대해 “바울은 이 교훈을 통해 사회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함으로써, 기독교인들이 영적 사명을 더 효과적으로 감당하게 하려 했다”라고 분석합니다. 존 스토트 같은 복음주의 거장은 “정부가 존재함으로써 혼란이 줄고, 그 평화로운 환경에서 교회는 복음을 전한다”는 취지로 설명하며, 로마서 13장의 목적론적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결국 순종 교훈의 선교적 유익을 부각한 것입니다. 물론 현대 복음주의자들이 이 가르침을 단순히 상황적인 전략으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 말씀으로서 로마서 13장을 받아들이며, 그 영원한 진리성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권세에 순복 하라는 명령 역시 하나님 뜻의 일부로서, 오늘날도 유효한 윤리 규범이라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복음주의 교회는 신자들에게 법을 준수하고, 세금 보고를 정직하게 하며, 교통법규를 지키고, 투표와 같은 시민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회법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행위로 여겨집니다. 어떤 설교자는 “우리가 정부에 복종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 배후의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 복음주의자들에게 로마서 13장은 (그들이 좋아하는 표현대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에 대한 존중’이라는 보편적 윤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이 말씀의 오용과 한계를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악한 정부에 다 순종하라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십중팔구 “아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어느 복음주의 목회자는 “로마서 13장은 이상적인 경우를 전제한 것이지, 모든 폭군에게까지 복종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컨대, 정부가 자기 역할을 하지 않고 국민에게 해를 끼친다면, “그들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은 무효”라는 해석을 내놓는 이들도 있습니다
.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도 토론이 활발합니다. 어떤 이는 “누가 정부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권한이 있는가? 스스로 판단해서 불복종하면 무질서가 된다”라고 우려합니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처럼, 선명한 죄짓는 명령이 아닌 이상 가급적 복종하는 편이 낫다는 쪽과, 정부가 정의를 심각하게 저버리면 시민 불복종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쪽이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둘 모두 “하나님보다 인간을 더 순종할 수 없다”는 원칙에서는 동의합니다.
사도행전 5:29는 여전히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최후 보루입니다. 실제로 “신자의 무조건적 정부 복종은 비기독교적이다”라는 말에 반대할 복음주의자는 거의 없습니다.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구체적인 상황에서의 적용 지혜를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1960년대 미국의 복음주의자들 중에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의 시민 불복종(흑인 인권운동)을 지지한 이들도 있고, 반대로 질서 유지를 이유로 비판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또 최근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정부의 예배 제한 조치에 대해, 어떤 교회들은 로마서 13장을 근거로 정부 지침을 순종했고, 다른 교회들은 히브리서 10:25 등을 들어 예배 강제 중단에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특히 미국의 보수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예배는 하나님 명령이니 정부가 제한할 수 없다며 소송까지 간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명령이 합법적 권위 범위 안에 있는가에 대한 해석 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살펴본 칼뱅주의 전통과 침례교 전통의 차이처럼, 복음주의자들도 국가의 공익적 명령(예: 공중보건 조치)은 웬만하면 따르되, 교회의 고유한 사안을 간섭하면 거부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이 “국가는 예배의 시간, 방식, 빈도를 최종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없다”라고 선언했고, 이러한 입장은 침례교적 전통(교회와 국가의 엄격한 분리, 신앙자유)에 서 있습니다.
한편,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로마서 13장을 개인 윤리 차원뿐 아니라 구조 악에 저항하는 신앙의 근거로도 읽습니다. 국가가 부정을 저지르거나 소수자를 탄압할 때, 교회는 침묵하지 않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도 로마서 13장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말한 “통치자는 선을 행하는 자에게 칭찬하고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를 집행하기 위해 세움 받았다”(롬 13:3-4)는 정부의 목적 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들어, “만일 정부가 선을 장려커녕 악을 행한다면, 이미 하나님이 주신 직무를 저버린 것이므로 시민은 그 행위를 따를 의무가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을 어디까지 적용할지는 토론의 여지가 있지만, 적어도 명백한 부당행위 (예: 대량학살, 종교자유 억압 등)에 대해서는 교회가 거부권 행사를 정당화합니다. 본회퍼와 바르트의 이야기가 복음주의자들에게 자주 언급되는 이유도, 그들이 국가 권세를 상대화한 모범으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요약하면, 현대 복음주의자들은 로마서 13장의 순종 교훈을 ‘원칙적으로는 절대 윤리, 적용에 있어서는 선교적·상황적 지혜’의 문제로 봅니다. 원칙은 분명합니다: 기독교인은 법을 지키고 국가에 협력하는 모범적인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예외가 필요합니다: 정부가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반하면 양심적 불복종과 저항도 필요합니다. 이런 균형 잡힌 시각 덕분에,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는 한편으로는 경찰, 군인, 공무원 등으로 봉사하는 신자들을 독려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낙태나 동성혼, 부패 같은 사회 현안에 대해서는 정부 정책을 비판하고 심지어 법률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예: 친생명 시위 등). 로마서 13장은 이러한 공적 신앙의 밑바탕으로서,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를 인정하되 그 권위 남용에는 항거한 다니엘처럼 살아가도록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결론
바울의 로마서 13장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교훈을 둘러싸고 전개된 여러 신학자의 해석을 비교해 볼 때, 이 말씀은 그 자체로 명료하면서도 적용에 있어서는 복잡한 윤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루터와 무디 같은 인물은 사회 혼란을 막고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질서 유지를 강조하며, 이 본문을 항구적인 윤리 원칙으로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존중하라”는 명령을 상황 불문하고 가르쳤고, 다만 정부가 명백히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를 때는 불복종하되 폭력적 저항은 삼가는 선을 그었습니다. 이는 절대 윤리로서의 순종에 방점을 두면서 예외적으로 양심의 자유를 허용한 접근입니다.
칼뱅과 바르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의 역할과 한계를 신학적으로 성찰했습니다. 그들은 로마서 13장이 정부의 이상적 모습을 전제한다고 보았기에, 정부가 불의를 행할 경우 신자는 그 특정 불의에 저항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습니다. 칼뱅은 질서유지라는 법의 목적에 주목하며 “정부의 합법적 명령” 개념을 통해 맹목적 복종을 경계했고, 바르트는 하나님과 국가 사이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맹종과 반란 둘 다 아니다는 독특한 길을 제시했습니다. 이는 상황에 따른 신학적 전략에 무게를 둔 해석으로, 로마서 13장을 교회의 선교와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한 지침으로 활용했습니다.
본회퍼의 경우는 이 둘의 교차점에 서 있습니다. 그는 루터의 전통 안에서 시작하여 극한 상황 속에서 말씀의 참 의미를 실존적으로 씨름했습니다. 결국 그는 절대 윤리로 배운 순종의 계명을, 선교적·상황적 책임 윤리에 따라 초월해야 했던 사례라 볼 수 있습니다. 그의 행동은 성경의 문자적 명령을 넘어서 하나님의 의를 행하려는 용기로 평가되며, 이는 곧 로마서 13장이 절대윤리냐 전략이냐 하는 논쟁에 깊은 통찰을 더해줍니다. 즉, 윤리적 딜레마 상황에서 단순한 문자적 순종이 오히려 불의를 용인하게 될 때, 참된 순종은 하나님의 궁극적 뜻(정의와 사랑)을 따르는 것일 수 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은 분명합니다. 어느 누구도 로마서 13장을 “악을 선이라 하며 무조건 굴종하라”는 뜻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모든 신학자는 국가 권세 위에 하나님 권세가 있음을 전제했고, 신자의 궁극적 충성은 하나님께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또한 국가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데 있으며, 이 창조질서적 사명을 벗어나면 권세 남용이라는 점도 인식했습니다. 반대로 교회와 신자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기에, 현실의 정부가 불완전해도 아예 순종을 팽개치고 혼란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데에도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결국 로마서 13장의 교훈은 “질서를 통한 선교”와 “양심을 통한 순종” 사이의 균형으로 이해됩니다. 순종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교가 될 수도 있고 (질서 있는 삶의 간증), 불복종이 오히려 하나님의 선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법에 대한 저항으로 진리를 증언).
오늘날 교회와 신자들은 이 본문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는 정부와 공공질서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여기고 감사함으로 협력해야 합니다. 구약 예레미야도 포로 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 성읍의 평안을 구하라고 했듯이, 우리도 속한 나라와 도시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합법적 세금 납부, 투표 참여, 법률 준수, 이웃에 대한 선행 등은 모두 신자가 국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생활하는 것 역시 로마서 13장의 정신을 따르는 것입니다. 바울은 “양심을 따라 복종하라”라고 했는데, 이는 남이 보든 안 보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처신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국가를 위해 기도하고 권위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경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라”라고 가르칩니다(딤전 2:1-2). 초대교회는 박해하는 황제를 위해서도 기도했듯이,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중보하고 그들의 직분을 존중하는 언행을 보여야 합니다. 비판이 필요할 때도 품위 있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해야지, 혐오나 조롱으로 일관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신자들은 특히 유념해야 할 부분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궁극적 충성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국가가 하나님께 거역하는 일을 명령할 때는, 겸손하지만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바람직한 태도는 본회퍼나 다니엘처럼 “나는 당신을 섬기길 원하고 법을 존중하지만, 이 부분에서만은 신앙 때문에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회사나 국가가 비리를 지시한다면, 크리스천은 양심상 거부하고 설령 승진이나 고용에 불이익이 와도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또 정부 정책이 성경적 가치(생명, 정의)를 심각히 훼손한다면, 평화로운 시위나 법적 절차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시정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때 로마서 13장의 정신은 폭력이 아닌 평화적이고 책임 있는 방식으로 해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넷째로, 교회는 항상 예언자적 사명을 띠고 세상을 비춰야 합니다. 순종이 미덕이지만, 불의에 눈감는 것은 미덕이 아닙니다. 교회는 한 손에는 로마서 13장을 들고 다른 손에는 요한계시록 13장을 든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서 13장이 “정부에 순복 하라”면, 계시록 13장은 “정부가 짐승처럼 행할 때 우상숭배를 거부하라”라고 경고합니다. 두 말씀 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교회는 시시때때로 권세자들을 향해 바른말을 해야 합니다. 부정부패, 불의한 전쟁, 구조적 폭력 등에는 목소리를 높여 권세자들이 하나님이 맡긴 직분을 바로 수행하도록 촉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13:4의 “선을 행하는 이에게 칭찬”을 현실에서 이루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사랑의 법을 최고로 삼아야 합니다. 로마서 13장의 바로 다음 구절에서 바울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악을 미워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그러므로 우리가 국가에 순종하는 것도 이웃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어야 하고, 우리가 불의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것도 더 큰 사랑의 실천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라고 하신 말씀도(막 12:17)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속 정부가 맡은 몫(질서 유지를 위한 법 집행 등)은 존중해 주되, 경배와 절대적 복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 신자의 본분입니다.
결론적으로, 로마서 13장의 국가 권세에 대한 순종 교훈은 절대 윤리와 상황적 전략의 양 측면을 모두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지켜야 할 기본 윤리이지만, 그 윤리를 지킴으로써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보호되는 선교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루터, 칼뱅, 본회퍼, 바르트, 무디 그리고 현대 복음주의자들의 통찰을 종합하면, 우리는 “법을 존중하는 순종”과 “양심을 따르는 용기” 둘 다를 배우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균형을 지키며,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선을 행하는 시민이 되되, 언제나 하늘의 시민권을 최우선하는 지혜로운 신앙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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