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주경훈목사님 #HBD #HappyBlessingDay #새가족초청예배 #주일설교
성경 본문 -누가복음 24:13-20
[요약]
1.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 죄와 죽음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그 결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를 단순한 행위가 아닌 하나님과의 단절로 정의합니다. 이러한 죄의 대가로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과학이나 부, 권력으로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2. 텅 빈 십자가와 무덤: 부활의 증거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그분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는 고난과 죽음을 넘어선 승리와 소망의 상징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핵심입니다.
3. '토요일을 살아가는 사람들': 믿음과 현실 사이에서
예수님의 죽음(성금요일)과 부활(주일) 사이의 시간인 '토요일'은 매우 암울했던 날이지만 또한 슬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시기입니다. 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살아가며, 현실의 고통 속에서도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4. 영적 눈의 열림: 성령의 역사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눈이 닫혀 있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눈은 성령의 역사로만 열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날마다 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십자가의 구원, 믿음으로 받는 선물
현재의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은 그분의 부활을 증거하며, 이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과 희망을 약속합니다.
십자가는 선물로서 죄의 값을 다 치루었다는 해방의 의미이며, 부활은 하나님 자녀가 되었다는 소속 변경의 확실한 보증입니다. '다 치루었다' 우리의 대속을 단번에 이루셨음의 확실한 영수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사탄의 어떤 참소에도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담대하십시오.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능력과 기쁨이 여러분 삶 속에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1.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인생의 근원이 되는 문제 : 죄와 죽음
이 세상 모든 것에는 그 시작, 그 근원이 있습니다. 저 거대한 한강도 태백의 작은 검룡소, 불과 2미터 남짓한 샘에서 시작됩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85미터 높이의 자이언트 세쿼이아 나무도 처음에는 4밀리미터의 작은 씨앗에서 출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 이 세상 모든 사람의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 사람은 다 죄인이다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세상의 법은 죄를 판단할 때 겉으로 드러난 행동, 타인에게 피해를 준 결과만을 따지지만,
하나님의 법은 우리 마음 깊은 곳의 생각과 동기까지도 살피십니다.
탐심, 시기, 미움, 교만… 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죄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가장 근원적인 죄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 그분과의 단절된 상태 그 자체입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이 땅 위에 죄인 아닌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만일 '사람은 다 죄인이다'라는 명제가 거북하게 느껴지는 분은 다음의 제 다른 블로그 글 (김학철 교수 글)을 읽어 주세요.
https://governance.tistory.com/394754
죄(罪)인가 빚인가? 그리고 부활의 새로운 해석 - 김학철 목사
죄의 개념과 빚기독교에서의 죄와 죄인의 개념은 종종 비기독교인에게 혼란을 주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입니다. 김학철 교수는 죄를 빚으로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governance.tistory.com
둘째, 사람은 다 죽는다.
죄인인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3절은 선언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세상의 모든 물건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듯, 우리가 지은 죄에도 반드시 치러야 할 값이 있습니다. 그 값은 바로 '죽음'입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투탕카멘은 11kg의 황금 마스크와 110kg이 넘는 황금 관 속에 수천 년간 보존되는 미라 상태로 누워있었지만, 그는 불과 19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황금도 그의 생명을 연장시키지 못했고, 오히려 도굴꾼들의 탐욕을 자극했을 뿐입니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아 온 세상을 헤맸지만, 영생을 갈망하며 마셨던 수은에 중독되어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과학의 힘을 맹신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구글의 레이 커즈와일 이사는 2030년이면 과학이 죽음을 정복할 것이라고 공언하며 매년 13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약값으로 쏟아붓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역시 언젠가는 죽음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죽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리고 '죽음 이후를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세 가지를 알지 못합니다.
1) 언제 죽을지, 2) 어떻게 죽을지, 3) 어디서 죽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긴 밧줄의 한쪽 끝 아주 작은 부분을 빨갛게 칠하고, 나머지 칠해지지 않은 긴 부분을 영원이라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땅에서의 삶이 그 빨간 부분이라면, 죽음 이후의 영원한 시간은 그보다 훨씬 깁니다. 우리는 그 영원한 시간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까?
2. 텅 빈 십자가, 텅 빈 무덤 : 대속과 부활의 증거
여기에 두 개의 강력한 형상, 두 개의 텅 빈 공간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와 무덤입니다.
천주교의 십자가, '십자고상(苦像)'에는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매달려 계십니다. 이는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예수님의 처절한 고난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개신교의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그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더 이상 저주와 고통, 죽음의 상징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부활을 통해 생명과 소망의 상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분의 무덤 안에도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맞이한 첫 번째 토요일, 그날은 제자들에게 역사상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날이었을 것입니다. 스승을 잃은 슬픔, 로마와 유대 지도자들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그들을 짓눌렀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 11절은 여인들이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들은 사도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바로 곁에서 목격했던 그들이었기에, 무덤이 비었다는 것, 그분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그날에" 즉, 부활의 소식이 처음 전해진 바로 그날, 두 제자가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루살렘에서 25리, 약 10km 떨어진 거리입니다. 걸어서 두세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 길을 그들은 왜 내려가고 있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 보았고, 무덤이 비었다는 놀라운 소식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믿지 못하고 슬픔과 낙심에 잠겨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토요일을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았습니다. (전성민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요일의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위의 죽음이라는) 절망과 공포는 경험했지만, 아직 부활의 주일 아침을 맞이하지 못한, 어둠과 혼돈의 토요일 속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토요일을 사는 사람들
금요일(예수님의 죽음)과 일요일(부활) 사이의 시간인 토요일을 현재를 살아가는 신자의 삶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 토요일은 고난과 애통의 현실이지만, 동시에 희망을 품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신자는 죽음의 권세가 끝났음을 알지만, 아직 부활의 완전한 영광을 누리지 못한 긴장 속에서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며, 심지어 기도 중에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 장면들은 예수님이 인간의 감정을 온전히 경험하신 참 사람이자, 동시에 공감의 능력을 지닌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하나님의 감정도 무관심하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공감은 해결보다 더 큰 능력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문제 해결자이시기도 하지만, 더 깊이 있는 공감자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또 다른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할 수 있듯이, 신자는 토요일의 삶 속에서 공감의 능력을 통해 세상과 이웃을 품을 수 있습니다.
토요일을 사는 신자는 희망을 품고 있으나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슬픔도 함께 느낍니다. 이 시간은 우는 하나님을 닮아가는 영적 훈련의 시간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슬픔과 희망, 현재와 미래, 인간과 신성을 아우르는 긴장 속에서 공감이라는 능력으로 완성되어 갑니다.
토요일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슬픕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일요일에 펼쳐질 것을 알지만, 여전히 어그러진 세상 속에서 나의 죄악과 이웃의 억울함과 고통에 슬퍼합니다.
미래에 있을 위로가 현재의 슬픔을 완전히 덮지는 못합니다.
예수님도 우시고 하나님도 탄식하십니다. 그래서 토요일을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는 세상의 슬픔 가운데 함께 우시는 하나님을 알아 가고 닮아 갑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경계를 넘어가 죽음에 매인 사람들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우시는 하나님을 닮아 가며 경계 너머의 사람들과 연대하며 토요일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결국 부활의 여명을 만날 것입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현재의 어려움 자체라기보다 희망의 부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복된 삶과 번영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뒤집으며 무엇이 희망의 진짜 근원인지를 확인시켜 줍니다.
위로의 약속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약속입니다.
3. 토요일을 살아가는 사람들
토요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할까요?
첫째, 진리 안에 거하지 못한다
아는 것이 우리 인생을 바꿉니다.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에서 사고와 사건의 차이를 말합니다.
길을 가다 개에게 물리는 것은 '사고'이지만, 만약 사람이 개를 문다면 그것은 '사건'이 됩니다. 잊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일이 되는 것이죠. 단순한 사실(fact)에 의미가 부여되고, 그것이 내 인생을 변화시킬 때 '사건'이 됩니다.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끔찍한 '사고'였으나, 아직 부활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기에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구원의 '사건'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진리의 밖에 있었습니다.
둘째, 눈이 감겨 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16절은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이라고 말씀합니다. 육신의 눈은 뜨고 있었지만, 영적인 눈, 영안이 감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곁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순간, 주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말씀하시지만 영안이 어두워 알아보지 못하고 방황할 때가 많습니까? "오, 주님! 우리의 영안을 열어 살아계신 주님을 보게 하소서! 성령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우리의 눈을 뜨게 하소서!"
그러나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31절,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눈이 밝아지다', '눈을 뜨다'는 헬라어 원문에서 수동태로 쓰였습니다. 그들 스스로 눈을 뜬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즉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눈이 열린 것입니다.
교회의 예배에서도 설교자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단어와 문장과 글로써 진실되게 전달할 뿐입니다. 설교자가 여러분의 영안을 뜨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기도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그 선포되는 말씀이 여러분의 인생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줄 믿습니다!
4. 텅 빈 십자가와 텅 빈 무덤: 우리 대속의 확실한 영수증
이제 십자가는 더 이상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된 비극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 사함을 위한 위대한 '사건'이 됩니다!
우리를 위해 그 누가 (부모나 배우자, 연인) 대신 죽는다 해도,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다릅니다. 그분의 죽음은 부활로 말미암아 온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여는 놀라운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천국으로 향하는 아름다운 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은 젊은 시절, 처음으로 장례식 설교를 맡게 되었을 때 큰 고민에 빠졌다고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장례식을 집례 하신 사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곧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가시면, 죽음이 죽고 사람들이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살아났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으며,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 또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다? 바로 텅 빈 십자가와 텅 빈 무덤입니다!
영수증 예화
유명한 '영수증 예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고 계산을 마치면 영수증을 받습니다. 그런데 만약 계산하지 않은 물건을 가지고 나가려다 도난방지 태그 때문에 경고음이 울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황스럽고 창피할 것입니다.
그때 점원이 다가와 묻습니다. "손님, 영수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만약 우리가 정당하게 값을 지불했고 영수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당당하게 영수증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값을 치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그 값을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으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부활하심으로, 그 지불이 완료되었음을 확증하셨습니다.
텅 빈 십자가와 텅 빈 무덤은 바로 우리가 죄의 값을 완전히 치렀다는 영수증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참소합니다. "너는 죄인이야. 너는 여전히 부족해. 너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어."
마치 도난방지 태그의 경고음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때 우리는 담대하게 외칠 수 있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여기 나의 영수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바로 그 증거다! 그분께서 모든 값을 치르셨다!"
예수님께서 누우셨던 돌무덤은 이제 마침표가 되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지불 완료!"
결론: 십자가의 구원, 믿음으로 받는 선물
십자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선물은 우리가 그저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의 것이 됩니다.
마치 선물 증서에 서명하듯,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이 영수증에 적으십시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영접합니다. 이제부터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겠습니다."
텅 빈 십자가, 텅 빈 무덤은 절망이 아니라 가장 위대한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며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이 부활의 능력과 기쁨이 오늘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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