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 둘 곳 없는 예수님과 그분을 맞아들인 집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의식주는 기본입니다. 특히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공간이 아니라 안전과 가족, 미래를 상징합니다. 신혼부부에게도 내 집 마련은 가장 현실적이고 무거운 고민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근에는 대통령이 직접 ‘부동산정책 국민 대토론회’를 주재할 만큼, 집 문제는 개인의 고민을 넘어 우리 사회 전체의 핵심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집은 어땠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 마태복음 8장 20절
이 말씀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집 없이 떠도신 분으로 기억합니다. 실제로 복음서의 예수님은 여러 마을을 다니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다른 사람들의 집에서 식사하고 머무셨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기록합니다(마 4:13). 가버나움은 이후 예수님의 ‘본동네’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마 9:1).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시자 사람들이 그분이 ‘집에 계시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합니다(막 2:1).
그렇다면 예수님께 집이 있었던 것일까요? 아니면 정말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것일까요?
거처는 있었지만, 안정은 없었습니다
두 기록은 반드시 모순되지 않습니다.
가버나움에 머무실 장소나 사역의 거점이 있었다는 것과,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자기 소유의 안정된 집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집을 직접 소유하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자나 친척, 후원자의 집에 머무셨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집을 소유하셨다고도, 전혀 소유하지 않으셨다고도 명시하지 않습니다.
최근 신약학 연구에서도 의견은 갈립니다. 일부 학자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 예수님 자신의 가버나움 집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반면 다른 연구자는 마가복음의 거점을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보고, 마태는 가버나움에 정착한 예수님을, 누가는 여러 집을 방문하는 순회 교사 예수님을 강조한다고 분석합니다. 아직 하나의 결론으로 합의된 문제는 아닙니다.
고고학도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오늘날 가버나움에는 ‘베드로의 집’으로 불리는 유적이 있지만, 고고학으로 그 집의 실제 소유자를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장소가 베드로의 집으로 끊임없이 기억되어 왔다는 전통적 설명에도 최근에는 신중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자료에 가장 충실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는 가버나움에 머무실 장소나 사역의 거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이 예수님의 소유 주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 한 번도 지붕 아래에서 주무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의 집, 바리새인의 집, 마르다의 집,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고 머무셨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은 부동산 소유 여부를 밝히는 문장이라기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대가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는 오늘 머문 집에서 내일도 환대받으리라는 보장이 없었습니다. 어떤 마을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지만, 어떤 마을은 거부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환대에 실제로 의존했습니다.
따라서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잠자리가 한 번도 없었다는 뜻보다, 안정된 거처가 권리처럼 보장되지 않았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약속받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주거 불안정을 낭만화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환대에 의존하는 삶에는 자유만 아니라 취약성과 위험도 따릅니다. 예수님은 가난과 불안정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 안정과 소유를 절대적인 가치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들
복음서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예수님의 집 주소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시몬과 안드레의 집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는 열병으로 누워 있던 시몬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시자 그 여인은 일어나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저녁이 되자 온 마을 사람들이 병자들을 그 집 문 앞으로 데려왔습니다(막 1:29-33).
한 가족의 사적인 공간이 마을 사람들을 위한 치유의 공간으로 열렸습니다.
레위의 집, 혹은 예수님의 집
마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과 세리와 죄인들이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가 레위를 가리키는지 예수님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이 누구였든, 그 식탁에서 일어난 일은 분명합니다. 사람들에게 비난받던 이들이 예수님과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서기관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 마가복음 2장 17절
예수님은 죄를 정당화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죄인이라는 이유로 사람을 부르심의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으셨습니다.
야이로의 집
야이로의 집에는 죽은 딸을 위해 우는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녀가 일어나자 예수님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막 5:35-43).
기적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녀는 다시 가족과 함께 먹고 살아가는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죽음을 애도하던 집이 다시 생명의 일상을 회복했습니다.
삭개오의 집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 누가복음 19장 5절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고,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 있다면 갚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9:9).
구원은 마음속 감정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삭개오의 돈과 관계, 삶의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쳤습니다.
중요한 것은 집의 소유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 자기 집을 가지고 계셨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가 분명히 보여 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집은 이전과 같은 집으로 남지 않았습니다.
병든 사람이 돌봄을 받았습니다.
죄인이라 불리던 사람이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죽었던 아이가 다시 가족의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재산과 관계를 바로잡는 결단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집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닙니다. 가족관계와 식사, 재산과 권력이 실제로 움직이는 삶의 공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집에 맞아들인다는 것은 손님 한 사람에게 잠자리를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큰 의미를 가집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면 그 집이 누구를 돌보고, 누구를 식탁에 앉히며, 돈과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질문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 집에 머무신다면
성경이 왜 예수님의 정확한 주소를 남기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집이 그 빈자리를 채우도록 일부러 주소를 생략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인 집에서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환대는 집의 문을 누구에게나 무조건 열어 두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의 안전과 사생활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책임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집과 자원이 오직 우리 가족의 안락만을 위해 존재하는지 돌아볼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에는 외로운 사람을 위한 자리가 있습니까?
병들고 지친 가족과 이웃을 돌볼 시간과 공간이 있습니까?
사람에 대한 익숙한 평가를 예수님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까?
우리의 재산과 관계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정확한 집 주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머무신 집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정말 중요한 질문은 “예수님의 집은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 집에 머무신다면,
우리의 식탁과 재산과 관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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