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예수님을 믿기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내가 옳다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나는 회개를 말하면서도 오히려 남의 회개를 요구하는 데 익숙하고, 내 잘못이 드러나면 인정하기보다 설명하려 합니다. 십자가를 고백하면서도 손해와 낮아짐은 비켜 갑니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복음을 믿는 것일까요? 아니면 복음 가운데 나를 위로해 주는 부분만 골라 믿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복음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내 문제는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은혜와 용서, 사랑과 섬김을 저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그 복음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대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필터링하고 관리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나는 은혜를 받고 싶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하고, 용서는 원하지만 책임은 피하고 싶습니다.
섬김을 말하지만 알아주지 않고 인정받지 못하는 섬김은 꺼립니다.
때로 나는 내 자신의 죄 자체보다도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지는 것보다 사람들에게 괜찮은 신앙인으로 보이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다른 사람의 모순에는 분명한 기준을 적용하면서도, 내 모순에는 사정과 이유를 붙입니다.
이것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 무엇으로 내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가. 바로 그 문제입니다.
은혜는 나를 숨게 하지도, 변명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나를 죄책감이나 자기혐오 속에 가두지 않습니다.
실패했으니 더 나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내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복음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함께, 하나님이 그런 나를 외면하지 않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나 자신을 미워하는 일이 아닙니다. 더 이상 숨지 않고, 변명을 멈추고, 은혜 앞으로 돌아서는 일입니다.
은혜는 내 잘못을 가볍게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면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할 필요가 없게 합니다.
이미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용서받았기 때문에 책임을 피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회개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진실한 회개는 막연히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어떤 말과 행동으로 상처를 주었는지 살펴야 합니다.
잘못했다면 변명 없이 인정하고, 사과해야 한다면 용서를 재촉하지 않은 채 사과해야 합니다.
되돌릴 수 있는 것은 되돌리고, 책임져야 할 것은 책임져야 합니다.
특히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이제 그만 용서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는 가해자가 요구할 권리가 아닙니다. 회개는 상대방의 빠른 용서를 얻어 내는 일이 아니라, 결과를 감당하면서 잘못된 관계와 행동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내 의지로 완벽하게 고치려 해서도 안 됩니다.
회개의 진실성은 한 번도 다시 실패하지 않는 데 있지 않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변명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진실과 순종의 방향으로 돌이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을 내 신앙의 수단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전도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아야 합니다.
그의 고통은 내가 복음을 설명할 기회가 아니며, 그의 질문은 내가 이겨야 할 논쟁도 아닙니다. 그는 내 전도 실적을 위한 사람이 아니라, 이미 존엄을 가진 이웃입니다.
그가 내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관계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먼저 듣고, 쉽게 판단하지 않으며, 그의 고통 앞에서 성급한 해답을 내놓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침묵하고, 곁에 머물며, 실제적인 짐을 나누어 지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상대를 굴복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받은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 사랑으로 건네는 일입니다.
삶은 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반복되는 선택에서 드러납니다
내 신앙은 특별한 순간이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나는 사람을 직업과 재산, 학력과 정치적 견해로 평가하지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게 유익한 사람에게만 친절하지 않은지, 약자의 고통보다 관계의 편안함을 우선하지 않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진영의 잘못에도 반대편과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내 편의 불의에는 침묵하면서 다른 편의 잘못에만 분노한다면, 그것은 신앙적 분별이라기보다 편파성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정직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섬기며, 내게 보상이 없는 사람에게도 친절해야 합니다. 정의를 말한다면 나에게 손해가 될 때에도 정의를 선택해야 하고, 은혜를 믿는다면 실패한 사람을 쉽게 낙인찍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는 혼자 이루는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사람 곁에서, 공동체 안에서
그러나, 우리는 결심만으로 이러한 오래된 교만과 두려움, 탐욕과 자기중심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동시에 나를 정직하게 비추어 주고, 잘못을 말해 주며, 넘어졌을 때 다시 일으켜 줄 공동체가 필요합니다.그러나 공동체도 나의 책임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되 내 선택의 책임을 떠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되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을 믿음이라고 불러서도 안 됩니다. 은혜는 수동성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내가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헛된 노력을 멈추게 하면서도, 사랑과 정의를 향한 실제적인 순종으로 나를 이끕니다.
내가 끝내 물어야 할 질문
내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내 말을 믿게 할 것인가?”가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믿으라고 권하는 복음을, 내 삶의 실제 기준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나의 문제는 단지 복음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보다 내 체면과 안락함, 성공과 자기확신을 더 사랑해 왔습니다. 은혜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은혜가 내 관계와 돈, 권리와 판단을 바꾸는 것은 거부해 왔습니다.
그러나 답은 더 심한 자기비난도, 완벽한 신앙인이 되려는 결심도 아닙니다.
답은 은혜 앞에서 더 이상 숨지 않고, 구체적으로 회개하며, 성령과 공동체의 도움 속에서 오늘 해야 할 작은 순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 자체가 나의 삶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의 삶은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바라보는 창이 되기도 하고,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바라보는 창. 사람들 앞을 가로막는 벽.
나는 완전함으로 복음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으로서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며, 다시 사랑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내 신앙의 진실성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데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넘어졌을 때 숨지 않고 빛으로 나아가며, 용서받은 사람답게 다시 진실과 사랑의 길을 선택하는 데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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