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정윤선 대표
윤선디자인 대표
「포토샵 + 일러스트레이터 작업의 기술」 외 다수 저작
크리스천 캘리그라퍼로 활동 중
나는 윤선디자인이라는 기독교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전문 강연자가 아니다. 한국 교회에 기독교 디자인을 제공하며 작은 개척교회들을 섬기는 것이 내 본분이다. '2020 다니엘 기도회' 도안의 글씨를 내가 썼다. 그것은 내 디자인 초기 작품이었다. 그런데 다니엘 기도회에서 전화가 왔다길래 글씨를 다시 써 달라는 요청인 줄 알았는데 강사 요청이어서 무척 놀랐다. 나는 부족하지만 오늘 내 간증이 단 한 분에게라도 울림이 있으면 좋겠다.
<평탄하지 않았던 성장기>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다. 엄마가 내 목에 빨간 목도리를 둘러 주실 때 이별을 예감했다.
대전에 있는 작은 집으로 동생과 함께 가서, 사촌 오빠와 사촌 여동생과 함께 자라게 되었다. 부모님의 사랑을 온전히 받는 사촌들이 부러웠다. 부모님의 사랑이 그리웠다. 할머니는 근처에서 순두부 식당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 식당에 자주 가서 시간을 보냈다.
얼마 후에는 아버지가 초혼인 여성과 재혼을 하셨다. 친정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아빠와 결혼한 (새) 엄마가 내게 처음 가르쳐준 것이 성경이었고, 그때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엄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나와 내 동생을 때리기 시작했고 조금씩 악해졌다. 심지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내 머리를 넣었다 뺐다를 하셔서 나는 지금도 물에 대한 공포가 심하다.
어느 날 친엄마와 친외할머니가 학교에 찾아오셔서 만났다가 동네 아줌마가 그 모습을 보시는 바람에, 하교 후에는 캄캄한 방에 갇혀서 벌을 받아야 하기도 했다.
엄마에게 혼나서 힘들 때마다 교회당으로 가서 강대상을 쓰다듬으며 하염없이 울었는데, 그 작은 교회의 사모님이 나를 보듬어 주시고 안아 주셨다. 그 교회당 모든 구석에 그 사모님의 손길이 닿았다. 그 개척교회 사모님이 내 role model이 되었다. 나도 어른이 되면 사모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엄마는 그때는 이미 하나님을 떠나서 교회를 다니지 않으시고 있을 때이었기 때문에 반대하셨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어느 찬양 사역자의 제작 제의를 통해 CCM 앨범을 내게 되었다. (앨범명:친구여 들어보았나요. 1997년 6월 국제음반) 그리고 찬양 사역도 다니며 사례도 받아 저축도 했다. 사모가 되기 위해 신학과를 가고 싶었다. 그런데, 도대체 사모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상가 개척교회의 수요예배를 다녀오신 아버지가 그 초라함에 놀라서 내가 신학교를 가려면 아버지는 지원을 할 수 없다고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1998년도에 성결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했다. 저축해 놓은 돈으로 2학년까지 마쳤으나 돈이 떨어져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여러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특히 엄마와 함께 새벽 2시까지 호프집에서 술장사를 했다. 내 별명이 작은 사장, 또는 안양 골뱅이었다. 골뱅이를 잘 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손님들이 술을 권하면 함께 먹어야 했다. 엄마가 강권하셨기 때문이었다. 나를 좋아하는 손님과 만나주기도 해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5백만 원을 모을 수 있었고 복학하려던 참에, 어머니의 폭력과 강권으로 아버지의 차를 바꾸는 데 그 돈을 써야 해서, 나는 학교를 그만두었고 내 최종 학력은 대학 중퇴가 되었다.
(새) 엄마에 대해 나눈다. 내 동생은 엄마에게 대적하는 성향이었고, 나는 엄마와 화합해야 한다는 성향이었다. 내가 엄마와 술집 아르바이트를 한 것도 엄마와 우리 가족 간의 연결고리가 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내가 맞는 것을 동생이 말리다가, 마침 귀가하신 아버지께 엄마에게 대드는 아이로 보여 뺨을 맞았다. 동생은 엄마에게 쫓겨나 고시원에서 독립했다가 아픈 후에는 나와 자취를 하게 되었다가, 나중에 내가 온누리 교회에서 일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후에는 집으로 다시 들어가 살면서 엄마와 자주 싸웠다고 한다.
엄마가 변했던 이유를 잘 몰랐으나 동생 이야기에 의하면, 엄마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신 후에 많이 외로워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고 스스로 미쳐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내게는 엄마가 전부였기 때문에 그것이 비록 학대였다고 하더라도 나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5년 전에는 엄마가 두 사위 앞에서 사과를 하셨고 우리 관계는 회복되었다. 사랑의 문자도 보내신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우리의 모든 선택을 하나님은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결혼, 남편의 투병, 은혜를 깨닫고 캘리그래피>
학교를 그만둔 후, 안양의 선교원 교사에 지원해서 3년간 6세 아동들을 가르쳤다. 나중에 사모가 되려면 선교원 교사 경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5년 2개월간 서울 온누리 교회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행정을 보면서 3부 예배 찬양단 Singer가 되었다. 그리고, 내게 깊은 관심을 보인 교회 방송반 간사였던 남성과 1년 반 동안 CC (Church Couple)로 교제 후에 결혼했다. 남편은 간사를 그만두고 작곡을 시작했다.
남편이 자주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우리 아기가 6개월쯤 되었을 때, 시아버지께서 신경외과에 간 김에 남편도 검사를 받았는데 뇌에 종양이 있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뇌수술을 받았다. 남편이 하나님께 불려 갈 것 같아 두려웠다.
종양이 시신경과 언어신경이 지나가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수술 후에는 남편은 말을 잘하지 못했고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서 남편이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구해다 주어야 했다. 어느 날은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상태로 '포도'를 원하는 남편을 위해 포도를 사러 갔다가 마트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 남편이 먹고 싶던 포도도 사 가지 못했는데 심지어 귀가해 보니 도둑이 들어 온 집안이 엉망이었다. 하루에 두 번 험한 일을 겪으니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울다가 아이가 깨어서 아이를 토닥이며 재우는데, 낮에 서울대 병동에서 보았던 어린이 환자들이 생각났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내 아이를 다독여 재울 수 있는 이 상황이 '은혜'임을 깨달았다.
'병들었으나 남편을 살펴 주셨고, 내 몸이 건강하여 남편과 가족을 건사할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이, 내게 주어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다. 흙인 나를 입히시고 먹인 분이 하나님이시고,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게 거저 주어진 은혜임을 깨달았다. 감사했다. 그날이 내 인생의 turning point가 되었다.
남편은 퇴원을 했지만 투병을 해야 해서, 생계를 내가 책임져야 했다. 낮에는 아픈 남편과 아이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디자인 공부를 한 적도 없었지만 마침 집에 컴퓨터가 있어서 독학으로 캘리그래피를 공부했다. 여러 인터넷의 자료와 강의도 참고했다.
'디자이너 정윤선'이라는 명함도 만들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된다. 포트폴리오도 만들어 내 개인 블로그에 조금씩 올려 보았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10명의 직원이 있는 디자인 사무실까지 성장했다.
세상이 요구하는 스펙(specification)만으로 본인을 판단하고 재단하지 말기를 권한다. 스스로 가치 없다고 속단하지 말자. 우리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인생을 어떻게 해석하는지가 중요하다.
남들은 암을 불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가족에게 있어 남편의 종양은 가족을 하나로 이어주고 오늘날의 디자이너 정윤선과 우리 가족을 있게 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남편의 종양은 3년 전에 재발했다. X-Ray사진을 보면서 기존 수술의 흔적도 보았고 지금은 계속 경과를 지켜보며 살고 있다.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 친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서, 용산구청의 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서 찾았다. 두 딸과 함께 살고 계셨는데 지금은 연락을 끊으셨다. 그래도 잠시 다시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다.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옳으심을 찬양하다>
사모가 되려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예배자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 우리 사무실도 '디자인으로 예배하라'가 모토다.
하나님 한 분만 보고 진정으로 예배하지 못하고, 예배의 형태만 흉내 내어 예배하던 것이 예전의 내 모습이었다.
어느 날 개척교회 전도지를 후원했는데 감격하여 전도활동에 나가겠다는 전화를 받고 나도 큰 도전을 받았다. 그래서 개척교회들을 섬기겠노라고 결심하였다. 오랫동안 몸 담았던 대형교회인 온누리 교회를 떠나서 집 앞의 작은 교회를 찾았다. 교만한 마음을 경계하며 나서지 않고 예배의 자리만 지켰다. 그러다가 처음 추수감사절 현수막 요청을 받고는 너무 기뻤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가 오늘의 제목이다. 그러나 내 인생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늘 옳지는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내 인생을 평탄하게 해 주실 줄 알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은 옳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대학교 때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배우고 크게 놀란 적이 있다. 하나님은 강대상의 십자가 또는 내 필요를 위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이 세상의 가장 근본이 되는 존재, '계신 분'이시며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절대자이신 것이었다. 위대하신 분이셔서 우리가 판단하거나 '하나님은 이러해야 한다'라고 결론지을 수 없는 분이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므로, 인간이 내가 할 수 있는 고백은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가 되어야 했다. 하나님이 내게 옳다고 느껴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은 옳으시다'라고 믿기로 결정한 것이다.
최근에는 싱글 앨범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를 발표했다.( youtu.be/TFmf6TuvU_4 )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아니라고 여겨도 하나님은 옳습니다
내 맘속에 새겨진
변함없는 그 진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습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그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신다면 그 길만을 따르리라
내 맘속에 새겨진
변함없는 그 진리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옳습니다
그리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이 고백이 우리 삶을 통해 증명되기를 바란다.
우리 사무실은 해마다 2월 한 달은 사역을 쉰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것, 그것 하나만 될 수 있도록, 교만하지 않도록 기도 부탁한다.
적용 기도 :
분노로 악을 대적하는 경우가 많지만, 선으로 악을 이긴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간증이었다.
인생은 해석이 중요하다. 동일한 상황이라도 어떤 관점에서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 삶으로 드리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이다.
우리 인생의 결론도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가 되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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