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사 : 최병락 목사
강남중앙침례교회 담임목사
전) 미국 텍사스 달라스 세미한 교회 담임목사
Southwestern 신학교 졸업(M.Div)
<교회는 그의 몸이니>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를 사랑하시기를 축원한다.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보이는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다.
다메섹의 교회를 진멸하러 가는 길 위에서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왜 '교회'를 핍박하느냐고 하지 않고 '나'를 왜 핍박하느냐고 하셨다. 즉 교회와 예수님을 동일시하신 것이다.
나는 목사로서 복을 많이 받았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나는 어려서부터 유난히 교회를 사랑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부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교회를 마음을 다해 사랑했다.
<교회를 사랑하며 자라다>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 18 가구 정도의, 산촌도 농촌도 아닌 산자락의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 초등학교 때는 교회에 다니지 못했다. 논두렁 길로 30분쯤 올라가면 추자마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1889년 호주 선교사님이 세운 교회가 하나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교회에 나오라는 선배의 명령을 따라 토요일에 교회에 처음 나갔다. 뒷자리에 앉아 듣게 된 목사님의 찬송가가 나를 매료시켰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 위에"라는 찬송이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도 있구나 싶었다. 맨날 눈만 들면 보이는 하늘이었지만 왜 하나님은 찬송 가사처럼 왜 그 하늘을 떠나 이 낮은 땅을 구원하러 오셨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3절에 특히 매료되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이 땅에 온 분이 얼마나 크면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 빼곡히 써도 다 쓸 수 없을까? 그날, 교회를 다녀보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하는 결심을 했다. 예수를 믿지는 않았지만 예배에는 참석하게 되었다.
중2 때 여름에는 면(面) 전체 연합 수련회에 참석했다. 큰 교회가 없기 때문에 연합하여 수련회를 갖고 80~1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였고 강사는 각 교회의 교역자들이 분담했다. 죄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가 가장 크다고 가르치셨다. 어느 목사님이 뜨겁게 복음을 전하는데 '예수 믿으면 오늘 천국 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 우리 죄 때문에 지옥 간다.'는 말씀을 처음 들었을 때는 '어린 중고등학생들이 죄를 지으면 얼마나 지었다고 지옥을 가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교를 통해 '남을 속이고 훔치는 것이 죄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의 죄가 제일 큰 죄이며 지옥 가는 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이 꺼지고 '주여~'를 외치며 회개 기도하고 예수님께 와주시기를 기도하자고 해서 따라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회개하고 예수님을 뜨겁게 영접하게 되었다. 예수님을 모르고 지옥에 갈 부모님 생각에 마음이 아파서 울면서 집으로 왔다.
그 후에 1년 동안 토요일 중고등부 예배를 마치고 나면 주일 새벽기도회 때까지 밤을 새워 기도하고 찬양하며 불 꺼진 예배당에서 부모님을 위해 철야기도했다. 그 기도 응답으로 아버지는 내 나이 22세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예수님을 영접했고, 어머니는 내 나이 서른 즈음에 영접하고 지금은 권사가 되었다. 만약 안 믿는 가족이 있다면 '눈물로 기도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라'라고 믿음으로 권한다. (나는 미국에 유학 가서 21년 동안 신학을 마치고 목회하다가 2년 전에 한국에 돌아왔다. 21년 동안 아들 노릇 못하다가, 얼마 전에 고향에 내려가서 오랜 방황 끝에 돌아온 야곱처럼 가족들과 만나 목사로서 설교도 하고 형님은 대표기도를 하는 믿음 안에 하나 된 가족의 예배를 뜨겁게 인도하고 왔다.)
그렇게 교회를 사랑해서 밤이고 낮이고 교회에서 지내다가 고등학교를 울산 시내로 다니게 되었다. 학교를 마치면 1~2시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오는 상황이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를 도와야 할 허드렛일들이 많았다. 주말에 그 일들을 하고 주일에는 주일학교 보조교사, 대예배 성가대, 오후에는 중고등부 예배까지 마치고 울산행 막차를 타고 나가면서도 너무너무 행복했다. 고2 때는 우리 교회 학생회 회장이 되어 찬양 인도도 하고 중고등부 친구들에게 울산 시내에서 배운 신문물 가스펠 송도 가르치고 입으로 반주도 해가며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 교회는 꿈이었고 희망이었다.
고2가 끝나갈 무렵에, 조금 오래된 교회들이 대개 문제가 생기듯, 처음으로 교회를 통해 아픔과 상처가 생겼다. 예배 중이었고 나는 성가대석에 앉아 있었는데, 성찬식을 하려 할 때 가장 연로하신 수석 장로님이 구둣발로 강대상으로 올라가서 성찬기를 빼앗아 던져버리셨지만 놀라기만 할 뿐 아무도 말리지 못했고, 성찬식은 진행되지 못했다. 나는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어나 장로님께 항의하고 엉엉 울며 성가대 가운을 벗고 교회당을 걸어 나왔다. 다음 주에, 목사님께서 이웃교회에 성찬기를 빌리셔서 성찬식을 강행하려 하자 장로님이 일어나 또 강대상에 올라가셨다. 이번에는 득달같이 달려가 한 팔을 잡았는데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어 어린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벙어리로서 배운 것은 별로 없지만 성경책을 들고 나무하러 다니던 형님 한 분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는지 뒤에서 달려와 장로님의 다른 손을 잡고 말렸다. 그렇게 겨우 장로님을 말려서 성찬식이 진행되었다. 주일을 지키고 울산 자취방으로 왔는데 아버지가 자취방주인집으로 전화하셔서 받았더니, 큰 소리를 지르며 교회가지 말라시며 무슨 짓을 했느냐고 야단치셨다. 그 장로님이 팔을 부러져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하셔서 아버지가 대신 사과하고 왔다며 다시는 시골로 내려오지 말라고 하셨다. 무시하고 주일날 교회를 갔는데 그 장로님은 나를 부르셔서 "너, 우리 교회를 영원히 떠나라"라고 하셨고 나는 그 정든 교회를 떠나야 했다. 내게 무척 큰 상처가 되었지만, 수년 후 기도 중에 "병락아, 그날 고마웠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상처가 치유되었다.
<부르심, 목회를 결심하다>
고3이 될 때쯤 울산에서 교회를 정해야 하는데 친한 친구가 울산 침례교회에 다녀서 그 교회를 같이 다니게 되었다. 그 친구가 자신은 목사가 되기로 결심을 한 후에, 내게도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강권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갈 생각이었다. 몇 달 친구와 실랑이를 하다가 새벽기도에 가서 기도해 보기로 했다. 80여 명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냥 '육군사관학교에 가는 것이 맞죠?'라고 기도를 하려 했으나 나도 모르게 나는 손을 들고 '하나님, 주의 길이 맞다면 주의 길을 가겠습니다.'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주님의 부르심을 거기에서 느꼈다. 부르짖으며 통성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영음과 영안을 열어 주셨다. 양탄자 같은 것이 풀어지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가는 길은 있는데 돌아오는 길은 없는 길이었다. 영음은 음성이 없어도 똑똑히 들리는 수리다. 누군가 말하는 소리가 두 번 들렸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길을 내가 기뻐하노라' 그 분명한 부르심에 목회적 확신이 생겨 지금껏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렇게 대전에 있는 침례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작년 다니엘 기도회 강사였던 김관성 목사가 바로 그 친구다. https://governance.tistory.com/591 )
2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다가 복학을 한 후, 처음에는 뒷모습이 너무 예뻐 따라다녔는데 가장 오래 기도하는 사람도 그 자매여서 7번 차이고 8번째에 오케이 받아서 연애를 하고 졸업 후에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3주 만에 3주 만에 유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군대 있을 때 유학생각이 있어서 단어를 외우고 토플공부를 했는데, 결혼하고 3주 만에 미국 텍사스 달라스의 사우스웨스턴 신학대학을 가게 되었다, 그때는 1998년은 IMF 경제위기의 정점이었던 때여서 환율이 높았고 결혼까지 하는 바람에 저축해 놓았던 유학자금이 반토막이 나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한 학기 돈과 부부기숙사비를 내고 나니 전혀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아내는 태국 레스토랑, 가발가게 등등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일하며 내조했고, 나는 폐가 수리를 하고 그릇을 닦고 그 외에 여러 힘들고 무서운 일들도 해나가면서 유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마음껏 공부하고 싶었지만, 나중에 목회하면서 보니 성도들이 이민 와서 하는 일들이 모두 우리가 해 본 일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성도들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미리 광야 공부를 시키셨던 것이다.
키 큰 나무들이 흐드러진 캠퍼스를 걸어갈 때는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여기서 공부를 마친 뒤에는 한국에 돌아가든지 크게 써주시기를 바라며 원서들을 읽으며 밤을 새워 공부를 했다.
<세미한, 세계와 미국과 한국을 그리스도께로!>
개척된 교회 부사역자로 우리 부부가 초빙을 받아 사역을 하게 되었는데 교회가 갑자기 큰 어려움을 겪으며 성도의 80%가 다 떠나버리고 10여 명만 남았는데, 목사님이 언제라도 떠나실 것 같았다. 아내와 나는 목사님 사택에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람이 포기해서 문 닫는 교회는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이 문 닫으라는 교회 없다'라고 부탁하여 2년을 더 목회하셨다. 그래도 교회는 계속 어려워지던 중에, 목사님이 한 달 후에는 교수로 가기로 되었다며 전도사이던 내게 교회를 맡으라고 하셨다. 나는 미국에서 목회할 생각을 한 번도 안 했고 더군다나 달라스에서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당시 달라스에서는 도넛 가게가 1000개면 한국사람이 하는 곳이 950개일 정도여서, 매우 고단하게 일하는 삶이 일반적이었다. 그분들은 오후 2시에 예배가 있는 교회만 겨우 참석할 수 있는데 교회에 남아있는 분들이 다 그런 분들이었다. 자체 교회당이 없어 미국교회를 빌려 쓰는데 오후 2시면 문을 열고 오후 4시면 무조건 문을 닫아야 했다. 게다가 교회가 있던 곳은 공항지역이어서 한인들이 살지 않는 외각지역이었고 2년간 새 가족도 안 오고 사례비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맡지 않으면 남겨진 성도 열몇 명은 목자 잃은 양같이 될 것 같은 걱정에,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마음으로 목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운 마음으로 하자는 생각으로 세미한(세계, 미국, 한국을 그리스도께로) 교회로 이름을 정하고 교회가 시작되었다.
목회를 시작하는데 처음 1년 동안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심했다. 그런 목회를 하게 될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유학 갈 때의 꿈과는 너무 달랐다. 천성이 땀과 열정이 많아서 성도들은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겠으나 나는 고민이 심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목회를 해야 하지만, 왜 하필 그 누군가가 내가 되어야 하는가? 왜 내게는 다섯 달란트가 아닌 한 달란트를 주셨을까? 하나님께서 떠라라는 말씀이 없으면 평생 거기서 살아야 하는 것이 너무 암울했다. '나는 수준이 높고 성도들은 수준이 낮아서 아무리 말해도 못 알아듣는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교인들 수준이 안 맞으니 나는 내 수준에 맞는 목회지를 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회를 하니 목회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옛날 '서울의 달'이라는 드라마에서, 주인공 한석규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성공하려 애쓰지만 꽃뱀에게 당하고 깡패에게 두들겨 맞으면 뒷산에 올라가 달을 보며 씁쓸히 담배를 피울 때 나오는 주제곡 '아무래도 나는 떠나야겠어. 이곳은 내게 어울리지 않아' 이 노래를 찬송가보다 더 많이 부르며 지냈다. 한국사람도 없고 목회적 환경도 어렵다는 등등의 핑곗거리가 많았다.
1년이 되던 해 다른 교회의 청빙을 받았다. 미국의 어느 교회였는데 어른성도가 400명에 교육관이 잘 지어져 있고 본당도 새로 건축했다는 것이었다. 지난 1년 간의 내 열심을 인정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같아서, 가겠다고 했다. 다음 주일에 호숫가에서 야외 예배를 드리며 간단히 설교를 하고 20여 명으로 성장한 성도들을 한 명 한 명 바라보았다. 밤을 새워 일한 후에 한 시간씩 운전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서로 음식으로 섬기는 성도들과 모래 놀이를 하는 아이들 두 세명을 보니, 진짜 수준이 낮은 것은 그들을 버리고 도망갈 생각만 한 나였음을 알게 되었다. 눈물을 흘리며 가지 않기로 포기하고 나니 성도들이 무척 귀하게 여겨졌다.
목사가 성도가 고마워지니까 성도가 사랑스러워지고 목사가 드디어 양을 사랑하니까 하나님께서 양을 맡기기 시작하셨다. 안 오던 성도들이 멀리서 찾아오기 시작했다. 2년, 3년째가 되니 성도가 50~60명이 되었다.
갑자기 미국 교회를 6개월 내에 비워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수십 개의 교회를 찾아보고 알아봤지만 대책이 없어서 마음이 무겁던 어느 주일날, 강대상 아래에 큰 쓰레기봉투 6,7개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드릴 게 없어 깡통을 주워드립니다. 우리에게도 자체 성전을 주시옵소서. 김용호 집사' 70이 넘으신 고령에 딸네집에 왔다가 복음을 알게 된 분이 주께 무엇을 드릴까 하다가 깡통이 반짝반짝 빛나길래 7 봉지(2000~3000개) 가량 주워서 드린 것이었다. 이것을 80불 80센트(10만 원 정도)를 받고 팔게 되어 감격의 첫 번째 건축헌금이 되었다. 그랬더니 다른 성도들도 감명을 받아서 (집에 있는 돈을 가지고 와서 헌금한 것이 아니라) 집에 있는 깡통이란 깡통들을 다 가지고 오는 바람에 심방 다닐 틈도 없이 깡통을 팔러 다녀야 했다. 그렇게 모두 온 힘을 다 합해서 창고같이 생긴 첫 번째 자체 성전을 구입했다.
주여 삼창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성전이 생겼다며 성도들과 감격으로 시작했는데 하나님께서 부흥시키셔서 3년 뒤에는 앉을 곳도 설 곳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나님이 5분 거리에 지어 놓은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새 건물을 또 허락해 주셔서 구입하고 이전했다. 그렇게 한주에 30명씩 새로운 성도들이 나오기 시작하니 3년 지나니까 그곳도 꽉 차기 시작해서 3년 후, 즉 세미한 교회를 시작하고 9년 만에 하나님께서 미주의 4300개 한인 교회 중에 2,3번째로 큰 교회당으로 들어가게 해 주셨다. 그곳에서 정말 많은 사역을 감당하게 하셔서 미주 20개 도시에 교회를 개척하는 CPI (church planting instute)를 세우고, 방글라데시아에 학교도 세우고 성도들 가정을 통해 난민들 정착을 돕기 시작하고, 장애인들에게 고정적 수입을 만들어 주기 위한 커피숍을 만들기 시작하고 native American 즉, 미국 인디언들에게 한 팀 두 팀 일 년에 수백 명씩 단기선교도 가는 등 사역을 활발히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한국에서 4분이 찾아오셨다. 강남 중앙 침례교회에서 왔다시며 '제3대 담임 목사님이 되셨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원한 적이 없는데.
신학생 때부터 우러러보던 교회이고 꿈같은 교회였지만,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던 사역의 정점에 서있었기에 갈 수가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몇 개월 뒤에 또 사람들이 찾아와서 강권했다. 기도하는 중에 10개월이 흘렀다. 아내와 아이들도 가지 말라며 반대했다. 미주에 있는 850개의 한인 침례교회가 모이는 제37차 전국 총회를 세미한 교회에서 2018년도에 섬길 기회를 주셔 날아갈 듯 기뻐서 전 성도가 힘을 모아 준비하고 있었고 다음 주 월요일이면 총회가 시작되는 날, 총회를 일주일 앞두고 새벽기도하는데 16년 전에 보았던 환상 하나가 다시 떠올랐다. 하늘에 떠 있던 비행기 5대가 내 영안이 열리면서 백 대, 천 대가 되면서 하늘을 쭉 덮던 모습이었다. 전 세계에서 세미안교회를 보러 오는 비행기라는 환상이었다. 그런데 이번 전국 총회가 그 환상의 성취라는 말씀과 함께 내 사명은 여기 까지라는 말씀을 들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할 수 없었다. 나는 16년 동안 성도들과 예배를 마칠 때마다 '세계와 미국과 한국을 그리스도께로'라고 외치며 기도했는데, 이제 서울의 강남교회로 나를 보내셔서 그 기도를 이루려 하신다며 세미한의 비전을 다시 깨우쳐 주셨다.
총회를 잘 마치고 지난 10개월간 쓴 일기를 성도들에게 읽어주며 한국으로 파송해 주시면 강남교회와 세미안교회가 힘을 합쳐서 세계를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교회를 세워보자고 설교했더니, 2000명의 성도가 눈물을 흘리며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서 "세계와 미국과 한국을 그리스도께로"라고 하며 2시간 20분의 파송예배를 받고 훌륭한 후임목사님을 세우고, 나는 2년 전에 그렇게 한국에 왔다. 그렇게 강남교회에 와서 이 비전을 말씀드리니 기쁘게 모든 성도들이 그 비전을 함께 품어줘서 두 교회가 형제교회를 맺게 되었다.
작년에는 우리 교회 청년 100명이 자비량으로 달라스로 넘어가서 세미한 교회 청년들과 3박 4일 연합수련회를 드리고 그 300명이 다 인디언지역으로 흩어져서 일주일간 단기선교를 가기도 했다.
오늘의 간증이 교회자랑이 되는 것을 진심으로 경계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은 교회를 포기하신 적이 한 번도 없다.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돌아보면 왜 하나님이 내게 이런 복을 주셨는가? 모두가 떠나는 순간에도 교회를 지켰던 모습에 고맙다고 하셨구나... 주님은 평생 그것을 기억해 주신 것이다.
여러분이 가장 적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교회에 다니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아무리 영상에서 훌륭히 설교하는 분이 있어도 여러분이 아플 때 달려가는 목사님은 여러분의 목사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코로나 가운데서도 일하신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감옥 안에 있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나는 오늘 달려간다'라고 했다. 손발이 묶여있는데 어떻게 달려가는가? 하나님이 달리시는 것이다.
1400개의 다니엘 기도회 참여 교회의 성도들 속에 하나님 다시 일하실 것을 확신한다. 교회를 포기하지 않으시며 일하시고 다시 한번 부흥을 주실 것을 확신한다
여러분 교회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시고 하나님 하시는 일 가운데 한 명도 낙오자 없이 신실하게 따라가시는 여러분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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