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8. 누더기가 된 인생에 은혜를 담으시는 하나님 (창 49:5-7)
강사 : 김관성 목사
현) 행신침례교회 담임목사
[본질이 이긴다]저자
침례신학대학 졸업(M.Div)
나는 경기도 고양시에서 행신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 그에 비추어 내가 살아온 삶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오늘 성경 본문에 대하여]
오늘 성경 본문은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자식들에게 유언을 하고 있는 장면이다. 대개 유언은 자녀들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에게는 저주를 퍼붓고 있다. 이 본문의 내용은 시므온과 레위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라고 볼 수 있데,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라고 규정지으시며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저주의 내용은 '흩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리라'는 것이다.
이 저주는 시므온 지파에게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민수기 1:23를 보면시므온 지파는 59,300명이었는데, 민수기 26:14의 인구 센서스에서는 22,200명으로 크게 줄어들고, 심지어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시므온 지파는 자기 땅을 확보하지 못하여 결국은 유다 지파에 흡수되어 버렸다.
반면에, 레위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동일한 저주도 받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복도 함께 받게 된다. (신명기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 레위지파는 12지파 중에서 제사장 지파로 임명된다. 벌과 저주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에게 삼킨 바 되어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변했다.
이 레위지파 이야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예수 믿는 신자의 영광은 일반적인 세상의 관점에서의 영광과는 다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인생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걸어간다면 비록 내 삶이 초라하고 비천해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꾸신다.
(그냥 이렇게 말하면 수긍일 갈 수도 있으나 마음에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 성경 본문의 관점으로 내 인생의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
[홍수와 요강]
나도 48세인데 오늘 이 자리에는 나보다도 훨씬 연장자인 분들이 많이 오신 것 같다. 이분들도 지금까지 인생의 구비구비를 살아오시면서 많은 고생을 하며 험한 삶을 사셨을텐데, 그 고단한 삶을 견뎌온 분들께 그 삶에 대한 존경과 예를 드린다. 그런데 내 삶도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더 험난한 것이었다.
나는 결혼해서야 비로소 방 두 칸 짜리 집에 처음 살아봤다. 결혼 전에는 단칸방에 살면서도 이사는 30여 회를 해야 했는데, 이는 술과 노름으로 삶을 허비한 우리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기에 어머니가 새벽 시장에 나가서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가셨다. 저녁이 되어도 우리 집에는 술과 노름을 즐기는 아저씨들로 가득해서 담배 냄새가 언제나 자욱했기에 어머니와 나는 단칸방에서 그나마 담배연기가 덜 심한 책상 밑에 머리를 두고 서로 안고 자야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때로는 자고 있는 우리를 깨워서 욕을 하고 어머니를 구타하고 심지어 숟가락과 포크를 사용해서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해서 어머니는 머리에 피를 흘리곤 했다. 내가 성장해서 힘이 조금 생겼을 때 아버지를 완력으로 주저 앉힌 적이 있는데, 얼마 후에 아버지가 밖에서 칼을 갈아서 죽이겠다며 방으로 들어오셨다. 나는 놀라서 추운 겨울에 팬티 바람에 밖으로 도망갔으나 갈 곳이 없어 교회당으로 피하기도 했다.
나는 막내였지만 성장하여 결혼한 누나들도 내 피난처가 되지는 못했다. 누나들도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고 아버지가 누나들을 식모로 보내고 미리 급여를 당겨 받았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린나이에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며 눈물 속에서 살아야 했다. 남의 집 아파트 베란다에서 떠오르는 달을 보며 엄마 얼굴이 겹치면 엄마를 부르며 울던 날들에 대한 상처가 깊었다. 형님(소년 김무성)은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가출했는데 온몸에 문신과 흉터가 있는 조직 폭력배가 되었다.
열악한 가정 형편 때문에 모두 다 망가진 우리 형제 자매 2남 3녀 중에 그래도 막내인 내가 가장 똑똑했지만, 나도 공부보다는 도둑질의 길로 빠져들어 갔다. 쵸콜렛 300개를 훔치다가 잡혀서 훈방 조치되었는데, 보호자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술과 노름에 빠진 아버지도 아니었고 글을 쓸 줄 모르는 어머니도 아니었고 결국은 조직폭력배인 형님이었다. 본인은 폭력배이면서도 동생은 자기처럼 사는 것이 싫었던 형님은 나를 데리고 동네 우물가로 가서 추운 날씨였지만 나를 발가 벗기고 몸에 물을 뿌린 후에 세 시간 동안이나 전깃줄로 때렸는데, 그 무서운 상황 끝에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는데, 형님이 내게 '이제부터 교회를 가라!'고 했다. 그리고 형님이 헌금도 챙겨주겠다고 해서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형님이 무서워서.
동네에는 장로교회와 침례교회가 있었는데 어디든 교회를 가야했기에 손바닥에 뱉은 침이 가리키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두 교회 중에서 장로교회가 아닌 '울산 침례교회(1949년 울산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침례교회)'로 가게 되었다. 나는 항상 옷에는 담배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고 말 표현은 거칠었기에 교회에서도 묘한 배척을 받기도 했지만 형이 두려워 꾸준히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
어느 날, '예수를 진실하게 믿으면 한 사람뿐 아니라 한 가정 전체를 바꾸신다'는 목사님 설교를 들었다. 그 말씀이 열악한 가정형편으로 힘들어 하던 내게는 절실하게 다가와서, '나와 가정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바꾸시는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해보자'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여러 해 동안 어쩌면 담임목사님보다도 더 뜨겁게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했다. 그랬더니 주변에서 신학교에 가라고 강력하게 추천해주었고 나는 시험을 봐서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우리 집안에는 아무 변화도 없었다. 너무 낙심이 되어 목사님께 질문을 했는데 목사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열심을 다해 신학교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다.
그렇게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이제는 교회를 개척해야 하는 때가 되었다. 교회를 개척하려면 후원이 있어야 했는데 나는 아무 돈도 없어서 겨우 겨우 마음 맞는 전도사님 몇 분과 작은 학원을 개조해서 초라하게 개척을 시작했다. 그러나, 개척한 지 5년이 지나도 아무런 부흥이 없어서 나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서 엎드려 기도했다. '저는 하나님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달려 왔는데,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언제 한 번이라도 도움을 주신 적이 있습니까? 한 번만 내 손을 잡아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었다.
결국은 내가 개척했던 그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비록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의 작은 교회였지만 다른 곳에서 목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택도 있다는 것도 개척했던 교회를 떠난 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사택은 지하에 있어서 장마철만 되면 홍수처럼 물에 잠기게 되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밤새도록 물을 퍼내고 겨우 아침이 되면 지하 사택은 온통 곰팡이가 피어나서 아이들은 늘 폐렴을 달고 살았다. 내 삶이 너무 초라해 보여서 견딜 수 없었다.
또, 지하 사택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사택 밖으로 나가서 모퉁이를 돌아 교회 밖에 있는 공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다. 남자나 어른은 그래도 감내할 수 있었지만, 추운 겨울 밤에 용변을 보러 공중화장실을 들락거리는 것은 어린 딸아이에게는 엄청난 심적 부담이 생기는 상황이었지만 어찌 할 도리가 없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집에 '요강'을 두고 그것이 차면 공중화장실로 가져가 비우는 것이었다. 방에서 쓰레기통을 하나 찾아내 요강으로 삼고 "No 똥, Only 오줌!!"을 규칙으로 했지만, 요강을 비울 때마다 손에 소변은 흘러 내렸고 아들이 돕다가 계단에서 엎질러 오물을 뒤집어 쓰게 되는 경우도 잦았다.
이러한 가난하고 열악한 삶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삶이 힘드니 내가 목회자였지만 부끄럽게도 하나님의 존재조차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번 주에는 손님들 많이 왔나?" "니는 목사 스타일이 아니다. 노가다 스타일이다." 목회를 그만 두고 생활인이 되라는 어머니의 눈물 섞인 호소로 인해 나는 마침내 목회를 내려 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평범하게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라는 원망 속에, 고향으로 내려가면 목회는 커녕 나 자신이 교회를 다닐 지 어떻게 될 지도 모를 정도로 믿음의 마음이 피폐해져 있었다.
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기 직전이었는데, 폐교를 앞두고 한 학년에 한 반 정도 밖에 없는 작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들이 고양시 글짓기 대회에서 1등했고 경기도 대회에 고양시를 대표해서 나가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아들이 나중에 상처를 받지 않도록 아들에게 "나는 안 된다!"는 절대비관정신을 가르쳐줬다. 그런데 글짓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오후 늦게 귀가한 아들이 '대상 먹었다'는 것이었다.
"홍수와 요강' 이 아들의 글 제목이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비만 오면 홍수가 나는 지하 사택, 화장실이 없어서 요강을 두고 살며 오물을 묻히던 우리 집의 슬픈 이야기를 가지고 아들은 글을 써서 '대상(大賞)을 받은 것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몸부림치며 살고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아도 아무 것도 안 되는 내 인생이 '홍수와 요강'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초라한 내 삶도, 그것이 하나님 손에 올려지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재료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열심히 살고 성실하게 땀 흘리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찾고 기도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눈물과 한숨으로 자기 인생을 통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무척 힘들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척교회의 작은 목사인 나는, 연예인들이 연말 시상식 자리에서 큰 상을 받게 되면 손을 하늘로 들어 올리면서 얘기하는 '이 상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는 고백을 들을때마다 '내 인생은 무엇인가'하는 자격지심에 시달려야 했다. 내게는 일평생 단 한 번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만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초라한, 가장 막막한 인생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재료가 될 수 있다. '홍수와 요강'처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낸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재료가 된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음을 알기에 십자가가 소망이 되기도 하지만, 처음 십자가를 겪었던 그 때의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린' 칠흑같은 어둠의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절망적인 죽음을 가지고 사흘만에 영광의 부활로 예수님을 살려내신 것이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적인 것으로 자랑거리를 삼으면, 세상은 교회가 자랑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을 가지고 교회를 조롱하며 자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어떤 세상 것으로도 절대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고 소유하지 못한 것으로 자랑거리를 삼아야 한다. 바로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 예수님이다.. 그것으로 충분해야 한다.)
잘 나가는 큰 교회 목사가 아닌 그냥 그저 그런 작은 개척 교회의 목사여도, 나의 삶이 초라하고 비참할지라도, 내가 구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그 삶을 만족해할때 하나님은 이미 내게서 큰 영광을 받으셨다
40중반을 넘어선 나이, 아무것도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 없는 초라한 내 모습... 선교지에 나가지도 못했고... 나로 인해 주님을 알게 된 사람이 몇명인가 계수할 때 초라하기 그지없는 나의 성적표... 그래도 하나님은 괜찮다고 하십니다. 빈수레여도, 아무것도 보여드릴께 없어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유일한 회중으로 삼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쁨과 만족을 얻으면,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나님, 내 인생에는 역전은 없습니까? 반전은 없습니까? 우리는 울부짖지만, 우리 인생에 '반전은 없다!' 그냥 초라하게 살자. 그래도 그 인생을 통해 하나님은 가장 큰 영광을 받을 것이다.
왜 일까? 베들레헴 침례교회의 존 파이퍼 목사님의 얘기다. ' 하나님을 기뻐하라.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해할때 하나님은 우리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
(김관성 목사의 책 220페이지에서 발췌한 내용을 공유함. "조금만 더 나은 환경이 주어진다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며 살겠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 그러한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의 일’을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루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적으로 최소한의 배경이 필요해지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하나님 그분을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대단한 업적과 성취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
내 삶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칭송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이 아니다. 눈물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도... 초라하고 별볼일 없는 그 삶을 신실하게 가꾸어 가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막막하고 답답한 길이 주어지더라도 그 현장에 몸을 던지고 나면 해야 할 일과 사역이 보인다. 내 야망과 꿈으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것 같이 초라해 보이는 현장에 우리 인생을 던질 때,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하늘의 평강과 은혜가 비로소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잠시 살다가 갈 인생 길.... 우리 자신의 꿈과 비전, 그 따위 것은 과감하게 무시해 버리자. 그것이 우리가 지금 이 시점에서 용기 있게 걸어가야 할 '자기 부인의 길'이 아니겠는가?)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인도)
신앙생활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값싼 복음에 속으면 안 된다.
우리 삶이 이해되지 않고 눈물로 점철되고 세상이 나를 버린 것 같더라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십자가를 붙들고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간다면, 그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부귀와 영광을 누리면서도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다.
내 목회에 열매가 없어서 포기하고 싶은 목회자들에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비교하지 말자. 갈렙은 여호수아와 비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 사는 사람은 내 인생과 다른 사람의 삶을 비교하지 않는다. 우리는 야망을 따라 살지 않고 비전을 따라 산다.
나는 일어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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