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9.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4)
강사: 오롬비 (Henry Orombi) 목사
현)우간다 주교 리더십 훈련 및 집회 강사
전)우간다 대주교(2004-2012)
Zoe Life Theological College 명예 신학 박사
한국까지 날아오는데 비행시간만 14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Love knows no distance.(사랑하면 거리는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셔서 감사하다. 우간다는 인구가 3400만에 불과하고 인구 구성도 매우 젊고 기독교 역사도 오래 되지 않았다. 나는 53년전에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우리 가족 중의 첫 기독교인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신앙이 그리 깊지 않아서, 내가 첫 목사이자 (성공회) 주교(bishop)가 되었다. 나는 기독교인이 된 이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오늘 우리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여기 본문에서 '요한'은 세례요한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으니,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에 예수님이 매우 혁명적이고 혁신적인 기도를 가르쳐 주셨는데,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아버지이신가?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첫째, 하늘에 계신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earthly) 아버지가 어떤 지를 아셨다. (그 한계를 아셨다.)
우리 아버지는 좋은 분이셨지만 하나님 아버지에 견줄 수는 없고 나도 그렇게 좋은 아들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이 땅 위의 육신의 아버지는 그다지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의 아버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는 이 땅에 계신 아버지와는 다른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둘째, 거룩하신 아버지이다. 우리와는 완전히 구별된 분이시다. 우리는 그 분을 알 수 없고 오직 그 분이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셔야 (조명 照明)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셨고 모세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셨다. 그 밖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셨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그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길은 완벽하나 우리의 길은 그렇지 못하다. (벧전 1:16 내(하나님)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빚어내실 수 있다.
세째, 만유의 왕(the King of the Universe)이시다. 모든 피조물 위에서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큰바다(大洋)와 산과 숲과 동물과 곤충까지도 모든 것을 통치하고 지배하신다. 그리고 태초부터 그 모든 이 땅위의 피조물을 우리 사람에게 '다스리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권위를 상실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임하소서'라고 기도한다. 이 땅 위에 오셔서 하늘에서처럼 이 땅을 다스리기를 기도한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한다.
그 기도는 (다른 기도가 아니라) '우리를 사용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중보가 되어서,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시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이 땅을 다스리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분명히 하셨다.
네째,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베푸시는 분, 주시는 분(giver)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만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아! 하나님이 진실로 베푸시고 주시는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아기는 벌거벗은 채로 태어난다. 나와 같은 흑인이든, 한국사람이든 누구든 태어날 때는 아무 것도 손에 쥐지 않고 태어난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공수래 공수거'를 이야기 한다. (딤전 6: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그리고 다윗은 시편 24편에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한다.(시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그러면 나와 여러분의 의무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것이 의무다. 주시는 분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 우리 의무다. 다윗은 또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내가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왔다. 사람들은 아프리카에서는 헐벗고 굶주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프리카만 그러한가? 우리 모두 발가벗은 채로 이 땅에 왔고 떠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베푸신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한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 힘을 주시옵고, 하루를 살기에 필요한 지혜와 지식을 주셔서 날마다 살아갈 수 있도록 나를 도우소서.
다섯째,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처럼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윗이 죄를 지은 것을 깨달았을 때 알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시편 51편에서는 왕의 지위에 올랐으나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을 볼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존재이고 절망스러운(helpless) 존재임을 다윗은 깨달았다. 완전히 깨어지고 상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범(role model)이 되어 주신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셨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시므로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는 본을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그로인해 우리도 용서를 구하고(seek) 용서함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여섯째,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갑자기 우리에게 들이닥치는 악이 있다. 영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물리적 공격일 수도 있다. 마귀가 악한 계획을 세워 공격할 수도 있지만,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내 조국 우간다도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았다. 1971년 우간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통치자가 권좌에 올랐다. '이디 아민'이라는 악명 높은 독재자를 알 것이다. 그는 30만명의 우간다인을 학살했다. 그는 내가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head)도 죽였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하나님께서 그의 권력과 모든 권세를 무너뜨리셨다. 우리를 건져주셨다.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자문해보자. 내가 있어야 할 곳에 과연 나는 '서 있는가? 아니면 나는 위험천만한 곳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험에서 건져 주신다. 마귀가 설치해 놓은 덫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아멘)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와 두 가지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존재와도 하나님은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즉,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한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다. 예수님을 믿고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52년 전 18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나는 기도의 학생이 되기를 원했는데,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 사이에 내가 있으니 너무 기쁘다. 여러분과 함께 나도 기도를 배워가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는 분은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는 우리와 가족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 친구가 되기 원하신다.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친구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제는 너희를 더 이상 '종(從)'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하리라' 하늘의 창조주께서 우리와 같은 존재의 친구가 되어 주신다. 함께 걸으시고 함께 먹고 함께 거하시고 예수님을 직접 만질 수 있게 하시고 함께 식사를 하셨다. 서로 눈과 눈으로 마주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우리를 승격시키셨다 (elevation, promotion)
우리 아버지가 되기 원하시고 또 우리 친구가 되기 원하신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첫째, 우리가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아는 분께 기도하게 된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을 가지고 기도하게 된다. 그 무엇(et was)인가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대상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체적으로 아는 분께 기도하는 것이다.
둘째, 확신과 용기를 갖고 기도할 수 있다. 우리 아버지이시므로 강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고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언제든 우리 아버지인 그 분의 방문을 힘껏 두드릴 수 있다. 우리 친구이시기도 하니까.
세째,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 분이 절대 우리에게 거짓말 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실을 약속하셨다. 또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네째, 우리 안에 갈망이 생겨난다. 그분과 함께 하고 싶다는 갈망, 그래서 나는 21일간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있는 한국교회를 너무 사랑한다. (시편 42:1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아 헤매듯이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나이다.) 다윗에게도 그런 열망이 있었다.
다섯째, 우리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갈 수 있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무나 위대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알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는 없다.
이제는, 내가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나누고 말씀을 마무리하려 한다.
난 지금도 기도를 배우고 있는데, 예수님께 배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도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지금도 계속 배우고 있다.
내가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이끄시는 모습을 보았다. 수천 명에게 ‘예수님을 영접하기 원하는 분,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하면 정말 많은 사람이 앞으로 나와 예수님을 영접하는 모습을 보았다.
우리 가정의 기도의 용사는 내 아내다. 말씀을 전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기도한다.
원수들 가운데서도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을 경험했다. 서로 원수가 되어 서로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한 데 모아 화목하게 하신 것을 보았다. 원수되었던 그들이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쏟아냈다. 원인은 기도의 힘이다.
절망과 죄책감과 심지어는 지루함으로부터도 하나님께 건짐을 받는 것을 보았다.
또, 산산조각 난 존재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를 하나님이 하나되어 온전한 존재로 만드셨다. 왜냐하면 기도 때문이다. 저는 수많은 공동체를 보면서, 끝없는 절망(helpless)에서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는 공동체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았느데, 이 모든 변화가 다 기도 덕분이었다.
나와 내 아내 모두 천사와 만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 천사를 보게 하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게 하신다. 너무나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생명을 찾을 수 없는 끔직한 상황에서도, 오직 기도의 힘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생명과 소망을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하늘 아버지를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알고 있는가?
그분이 당신을 아신다. 그분은 당신을 아신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문 곁에 몸이 마른채로 마비되어 있던 사람을 고치셨다. 고침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몰랐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을 아셨다.
당신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였다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권세가 당신에게 있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친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기도할 수 있게 하셨다. 미국인들의 아버지, 한국인들의 아버지, 유럽인들의 아버지, 아프리카인들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가족이 진정한 한 가족이 되길 하나님은 원하신다. 다니엘기도회를 통해 모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이 마음을 한가운데로 모으시기 때문이다. 오직 그분께만, 모든 영광과 존귀가 지금부터 영원토록 있을지어다. 감사합니다, 축복합니다!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인도]
오롬비 목사님은 참 귀한 분이다. 우간다에는 25,000개의 교회가 있고, 미션스쿨이 5,000개 있다. (개신교의 일종인) 성공회에서 유색인종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대주교이고, 복음주의에서 가장 큰 선교대회인 3차 로잔대회 의장을 맡아 섬겨주었지만, 아프리카 성공회가 동성애를 지지하자 총회에 2008년부터 참석하지 않고 있다. 동성애를 반대하시기 때문이다.
목사님이 우리에게 많은 기도제목을 주셨는데....
기도는 내용보다 기도의 대상이 중요하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이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 기도이다.
기도의 대상이 중요한 이유는 기도의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 기도의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도는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아버지는 한계가 많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거룩한 분이시고, 만유의 왕이시고, 오늘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기를 원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길 원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고 악에서 구해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면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내 인생 가운데 가장 필요한 ‘일용할 양식’이 무엇인지 알고 구해야 한다. 세 번째, 기도는 용서이다. 많은 분들이 ‘왜 이렇게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가?’라고 말하지만, 많은 경우에 용서해야 기도의 문이 열린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 내가 용서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더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룩’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내가 용서할 때에 내 영혼이 사는 것이다. 내가 용서할 때에 나를 향한 마귀의 간계가 수포로 돌아간다. 용서를 선포할 때에 우리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이 일어한다. 용서하고 치유 받은 사람이 많다.
*김은생입니다.
오늘 오롬비 목사님의 설교를 임하면서 우리가 기대했던 것은 아마도 '아프리카의 빈민 국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오롬비 목사님의 설교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주기도문을 바탕으로 평이하게 (글로벌 표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약간은 놀라지 않았나요?
그래서 우간다에 대하여 잠깐 살펴보려 합니다.
---+_---
우간다는 동아프리카 중동부에 위치하며 적도상에 있는 국가입니다. 우간다라는 국명은 '간다 민족'의 나라라는 의미로, 국민 대부분은 가톨릭이나 성공회 개신교 신자입니다. (카톨릭 42%, 성공회 개신교 42%, 이슬람 12%)
빅토리아 호의 풍부한 수자원과 아직 개발되지 않은 천혜의 자연 자원 덕에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리웁니다.
빅토리아 호는 아프리카 제1의 호수이자 담수호로는 세계 제2의 큰 호수로, 주변 땅이 매우 기름져 농작물이 잘 자라고 세계적인 로부스타 커피도 여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우간다에 대해서 별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 기아 등과 관련하여 기금을 모으기 위해 매우 열악한 환경의 어린이들의 사진들이 집중적으로 소개되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1인당 국민소득 1천불도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이지만, 이 정도의 경제수준의 국가는 아시아에도 많이 있습니다. 그저 동정하거나 낮게 보기 보다는 하나님 안에서 같은 형제요 자매로 생각을 갖는 것이 좋은 것 같아서, 머니투데이 이재은 기자의 기사에 소개되었던 유튜브 동영상 2편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우간다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간다의 시골 여성들이 등장한 광고 동영상입니다. (머니 머니...를 반복하는 것은 우간다의 여성들도 '동일한' 것을 원한다는 정도로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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