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7. ‘왜?’라는 질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은혜 (욥기 2:7~10)
강사 : 박수영 선교사(중남미 선교사)
현) 중남미 선교사
전) 태국 선교사
[뇌성마비 선교사 남편, 뇌종양 찬양 사역자 아내..... 박숙희 선교사는 박수영 선교사의 아내다]
나는 원래 여행 계획이 없었으나 2주 전에 친정 어머니가 갑자기 소천하셔서 입국하게 되어, 예정에 없었지만 김은호 목사님의 권유로 이 자리에 잠시 섰다.
갑과 을 중에서 사람들은 '갑'을 선호한다. 내게는 살아가기에 녹녹지 않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삶의 갑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이 있어야만 우리가 먹을 수도 즐길 수도 꿈꾸는 것을 이루어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갑으로 모시면 그 누구도 우리 인생을 망가뜨릴 수 없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걱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자.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이 갑이 되는 삶이 되기를 축복한다.
나는 23세에 결혼했다. 처음만난 사람과 40분 이야기하고 결혼 결정하고 팔짱을 끼고 언니에게 찾아가 결혼하겠다고 하고, 이틀 후에 상견례를 했는데 그날 바로 혼인신고를 하고 20일만에 결혼을 했다. 그 과정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강력하게 있었다.
[박수영 선교사.... 왜?]
너무 두렵고 떨린다. 이유는 혹시 내가 드러날까봐 걱정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오직 하나님만이 드러나시기를 원한다.
누구나 불행과 고난을 겪는데, 진짜 힘든 것은 불행과 고난은 한꺼번에 닥쳐 오고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몰려온다는 점이다. 내 삶이 그러했지만 오늘 본문의 욥의 인생도 무척 기구한 것 같다. 그는 한 날 한 시에 모든 재산과 자녀를 잃었으나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자 사탄은 결국 욥의 몸을 친다. 이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왜?'라는 질문이 나오게 된다.
우리 삶에는 '왜?'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어려운 상황들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은 지난 수십년 동안 나같은 뇌성마비 환자도 오늘의 이 상태까지 고쳐오셨다. 나는 오늘, 내 인생을 통해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나누려 한다.
나는 1967년 2월, 3남매 중 막내로, 정상인으로 건강하게 태어나서 세 살까지 잘 자랐다. 우리 집은 경제적 형편은 매우 어려웠지만 부모님의 지극한 사랑으로 매우 행복했다.
세 살 때 잘못 맞은 뇌염주사로 인해 40도의 고열이 계속 되었는데 어머니는 내 열을 뺄 목적으로 담요로 말아서 아랫목에 두셨다고 한다. 그 때의 고열이 모두 뇌로 가게 되어 소뇌의 90%가 못쓰게 되어서 경직성 뇌성마비에 걸리게 되어 온 몸을 가눌 수 없게 되었었다. 몸뿐만 아니라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어서 내 말은 내 어머니도 알아듣지 못할 상황이었다.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나를 낫게 하기 위해 지성을 다해 좋다는 모든 약을 구해왔고 무당도 불러서 굿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고강도로 몸을 뒤트는 재활훈련이 너무 괴로워 어머니께 죽고싶다고 얘기했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내게 어느 정도의 지능이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일반학교로 보내셨다. 지극 정성이셨던 어머니께서 나를 업고 등하교를 시켜 주셔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는데 나는 유달리 성적이 좋았고, 그로 인해 더욱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다. 나는 늘 외톨이였고 '병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친구들은 아마도 집에서 '병신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으며 살았기에 내가 그렇게 싫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특히 힘들었던 것은 나로 인한 부모님의 불화였고, 그로 인해 나는 죽는 것이 소원이었다.
내게 친구라고는 아무도 없다가 6학년이 되었을 때 친한 친구가 생겼는데 내게 의문은 '왜 이 친구는 다를까?'였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화장실에 가는 것이었는데, 이 친구가 그 일을 늘 도와줬다. 감동이 되어 친구에게 물었더니 그 친구가 예수님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수영아 네가 예수님을 만나면 변화할 수 있어.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내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그 친구 때문이었다. 예수님을 알아서 교회에 나간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교회는 세상과는 좀 달라 보였다. 교회에서도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는 않았지만 사회보다는 훨씬 덜했다. 나는 교회 사람들이 좋았고 교회가 좋아서 어머님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내 몸의 상태가 조금씩 좋아지게 되었다. 스스로 앉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계속 불자로 남았으나, 지금은 완전히 변하여 교회 권사님이 되었다. (하나님 눈으로 보면 감기 환자를 고치는 것이나 뇌성마비를 고치는 것이나 다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그 하나님을 우리는 믿고 있다.) 조금씩 좋아져서 일어서게 되고, 걷게 되고 보조 장비 없이 학교를 다닐 수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할 때 교회에서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바닷가로 간다고 했다. 부모님께 사정해서 수련회를 갔는데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음성을 들려 주셨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 몸을 드리고 싶다고 헌신하는 서원 기도를 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내 유일한 소원은 신학교를 가는 것이 꿈이었다. 그래서 경기고 졸업 후에 바로 신학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 교회에서도 뇌성마비 장애자인 나를 써주지 않아서, 100통의 이력서를 제출하고 교회를 찾아다녀야 했다. 결국은 좌절과 방황 끝에 신학교 3년만에 휴학을 하고 전문대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해서 수석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늘 갖고 있던 심리적 부담은 중학교 2학년 때 드린 서원이었다. 컴퓨터를 잘 했기에 총무로 봉사하기 위해 3주간 필리핀으로 해외 단기선교를 따라 갔다가 다시 선교사로서의 내 사명을 발견하고 돌아와서는, 신학교에 복학/졸업을 한 후에 러시아에 3년 간의 단기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나는 추우면 경직성 뇌성마비가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에 영하 30도 아래로 내려가는 극심한 추위의 러시아로 가는 것을 부모님이 반대했으나 결국은 가게 되었다.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지다, 박숙희 선교사를 만나다]
그러나 여러 분들의 따뜻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었다. 뇌성마비로 인해 결혼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던 나였지만, (러시아에 도착하니 러시아 여인들이 무척 아름다웠고)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장애인이자 선교사인 나로서는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40일간 작정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 저도 짝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던 중에 21일만에 위문편지를 받았는데 그 핑크빛 편지가 감동적이어서 마음에 두었다가, 비자를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 편지를 보낸 여인을 찾아갔으나 그 분은 이미 다른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극동방송 ‘장애인은 내 친구’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다가 끝날 무렵에 기도제목으로 '배우자를 찾고 있음'을 내놓은 후 6명을 만나게 되었는데 모두 장애인 여성들이었다. 나도 장애가 있는데 배우자도 장애가 있으면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들을 퇴짜 놓았다.(1997년의 일이다)
그런데 7번째 연결된 여성과는 첫 전화가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는데도 1시간 정도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짝이 맞는 것 같았다. "내 짝이 맞으면 1시간 내에 프로포즈하겠습니다. OK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장애인이라고 생각하고 월요일에 만났는데 그녀는 너무 아름다운 정상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하고 만남 장소에 들어가며 바로 포기했다. 그러나 예의상 40분 동안 내 얘기만 했다. 당연히 No라고 대답할 것을 예상했기에 서둘러 내 할 말을 하고 마지막으로 프로포즈하고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 40분간의 대화 끝에 곧바로 Yes를 받아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왜?" 후에 아내는 그 때 내 안에 있는 보배를 보았다고 했다.
그녀는 곧바로 내 팔짱을 끼고 언니에게 가서 결혼을 하겠다고 했는데, 아내는 혼인신고할 때까지도 내 뇌성마비 상태를 알아채지 못했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가리우신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기도했던대로 그녀의 언니도, 오빠 목사님도 다 반대가 없었다. 그래서 만난 지 70여시간 만에 공식적으로 혼인을 하게 되었는데, 그 직후 내 어눌한 모습과 삐뚤어진 모습이 아내의 눈에 보이게 되었다. 그래서 아내는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 응답은 '나는 죽인 자도 살린다. 내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결혼 후 러시아에 가서 선교를 하다가 아이를 낳기 위해 한국으로 나왔고, 서울 기독신학대학원 대학교에서 M. Div 과정을 다니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그 후 태국에 가서 16년의 문화선교를 했다. 그 후에는 멕시코로 가게 되었다. 지금은 멕시코에서 작은 교회를 섬기며 선교와 빈민사역을 하고 있다.
과거 태국 사역이 6년쯤 되었을 때 아내에게 유즙이 나오는 이상 증세가 있었다. 태국 병원에서 검사 결과 뇌하수체 선종이라는 뇌종양 선고를 받게 되었다. "하나님, 왜 우리에게 이러십니까? 저 하나로 부족합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기도조차 할 수 없었다. 도저히 풀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한국 병원에서의 정밀 검사 결과는 더 좋지 않았다. 종양이 시신경과 대동맥 사이에 있어서 수술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아무리 기도를 해도 응답은 없었다. "왜 나에게..."라는 아내의 질문에 적절히 답해줄 수도 없었다.
그런데 계속 기도하다가 마지막으로 MRI를 찍어 뇌를 검사하니, 처음에는 줄어들 수 없다던 종양의 크기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음에도 기적적으로 0.5센티로 1/4가량 작아져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낫게 하실 수도 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 상태가 다시 악화될 수도 있다. "왜?"라는 질문이 우리 인생에 수없이 찾아오더라도 그것은 '인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는 섭리'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를 모시고 살고 있는가?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한다.
모든 어눌하고 삐뚫어진 것들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자.
선교사의 건강과 사역을 위해 1분씩 기도를 당부한다. "선교는 기도다"
[찬양]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세요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이 주실 축복 미리 보면서 감사하세요.
너무 견디기 힘든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이 일하고 계시잖아요
남들은 지쳐 앉아 있을지라도 당신만은 일어서세요.
힘을 내세요 힘을 내세요 주님이 손 잡고 계시잖아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는다면 어떤 역경도 이길 수 있잖아요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인도)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을 던지며 스스로 포기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고난을 고난으로만 보지 말자. 고난 가운데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자.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는다. 고난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자.
우리의 기도 가운데 우리의 편견을 내려 놓자.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지 말자.
배필을 위한 기도...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사람을 만날 수 있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귀한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하소서. 좋은 멘토와 친구를 만나게 하소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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