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12. 예수 그리스도 (엡 1:7)
강사 : 이지웅 목사
현) 더바이블미니스트리(The Bible Ministry) 대표
전) 예수전도단 스위스 로잔 성경 연구 학교장
오늘의 본문: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贖良, redemption)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에베소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 27권 중에서 13개의 서신을 기록했다. 그 바울 서신들을 통털어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구원' '그의 몸된 교회' 등 3가지이다. 즉, 십자가, 구원, 교회 등 3 단어가 가장 중요한 핵심어가 된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메시아를 보내신다는 약속과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차있다. 그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의 몸된 교회라는 주제가 가장 드러난 성경은 로마서와 에베소서, 두 권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와 에베소서 이 둘의 구원에 대한 접근 방법이 다르다.
로마서가 인간의 처참하고 처절한 죄로부터 시작하여 구원에 접근하고 설명(bottom-up)하는 반면에,
에베소서는 태초부터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과 웅장한 계획에서 시작해서 구원에 이른다(top-down).
하나님의 구원을 알기 위해서는 이 두 권을 같이 읽어 모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에베소서에서는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이 담겨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에베소서는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의 뜻과 주권으로부터 엄숙하게 시작된다.
그런데 2절에서 샬롬~ 인사말에 이어 바로 뒤에 오는 에베소서 1장 3절~14절까지의 12절은, 우리 말로는 여러 개의 문장으로 보이지만, 원문 헬라어 성경에서는 12개 절이 아니라 단 하나의 문장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별하다. (이것은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그리스 수사학에 익숙했던 바울의 다른 서신의 문체와는 매우 다르다. 아마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비밀과 은혜의 경륜을 깨달은 후 감격에 싸여서 썼기 때문 아닐까?)
그러면 이 긴 하나의 문장을 어떻게 풀어 이해할 수 있을까?
방법 중의 하나는, 세번씩 반복되는 동일한 후렴구(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6,12,14절)를 중심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첫째 파트(3절~6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
둘째 파트 (7절~12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이야기한다.
세째 파트 (13절~14절)는 '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령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이야기 한다.
즉,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무엇을 하였는지가 언급되어 있다.
대개, 구원을 언급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만 이야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핵심 원리인 것은 맞지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단지 예수님뿐만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관여하신 것이라는 점이 여기 에베소서 시작부분의 특별한 메시지다. 하나님은 천사를 활용하신 것도, (천지창조 때와 같이) 멀리서 말씀으로만 하신 것도 아니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다 동원되어 모든 지혜와 능력, 온 힘을 다해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가?
에베소서 2장에서 말하는 '우리'는 공중의 권세 잡을 자를 따르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 곧 죄많은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앞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보다도 더 절망적인 '이미 죽었던' 아무 소망 없는 존재였다.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에베소서 1장 3절~14절의 긴 하나의 문장의 말씀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사역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연합/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은혜 가운데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하셨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예정하시고 구속의 사역을 계획/추진하셨다.)
복(福)을 구하지 말고 누리고 사용할 줄 알아야 한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여기에서는 시제(時制, tense)가 중요하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 문장이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즉, 신령한 복은 '이미 주셨다'는 것이다. 부족함이 없고 다함이 없는 복을 '이미'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은 2절 '풍성한 긍휼'처럼 다 주신 것이다. 마 14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자. 거기에서도 '모든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었다는 것이다.)
풍성한 복을 이미 주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이미 주신 복을 새롭게 달라고 구하기 보다는, 풍성히 모두 다 이미 주신 복을 우리가 알고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은 이 땅에 속한 육적인 복이 아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이다.
그 복은 어디에서 맛보고 경험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그 밖에서는 그 복을 알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이 복을 누리고 맛볼 수 있다.
내가 찾아 헤매던 행복은, 기쁨과 즐거움은 예수 안에 있다. 내 깊은 절망과 혼란과 공허를 채우고 구원받을 곳도 예수 안에 있다. 오직 예수 안에서 누릴 수 있다.
누가 이 복을 주시는가?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주신다.
지존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 문장에서는 주어(主語)다.
(엡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일뿐 아니라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 놀라우신 창조주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이다. 이것이 놀라운 구원의 시작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포인트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 구원의 계획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가만히 있고 잠잠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4절은 얘기한다. '찬송하리로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쓸 때 온갖 고난을 겪은 후에 감옥에 갇혀 있을 때였다. 그 때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라고 감격에 휩싸여 외친다. 나같은 죄인을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이 모두 온 힘을 다해 구원해주셨는데 내가 겪은 고난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합당한 모든 감사와 존귀와 영광을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무엇일까?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하셔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하셨으니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하신 것.... 그것이 신령한 복입니다.)
(4절~6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의 장대한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셨다.
(엡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속량'은 예수님의 구원하심을 이야기 할 때마다 함께 사용되는 로마의 세속적 일반적 단어이다.
특히 시장의 수많은 물건들 중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노예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을 때 죽을 때가 다 된 늙은 노예들을 얼마간의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속량이다.
종은 노예다!
(요 8: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다. 도망자(FUG)라는 낙인이 찍힌 처참한 노예... 그 노예의 몸값을 지불하고 사는 것을 '속량'이라고 한다.
하나의 광경을 생각해보자.
나는 노예시장에 내 몸값이 적힌 팻말을 달고 처참하게 서 있다. 예수님이 그 앞을 지나가시다가 문득 나를 향해 돌아서시며 나를 가리키신다. 사탄의 비웃음(헐~ 저런 물건을 골랐어? 제 정신이야? 저 인간이 얼마나 악하고 위선적인지 몰라? 저 숨겨진 죄악을 들춰봐. 악취가 진동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나를 가리키신다. 그리고, 내 몸 값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나에 대해 지불하실 의사가 있는 몸값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생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모두 깜짝 놀란다. 사탄의 비웃음 소리가 더 크게 들리지 않는가? "저 더럽고 음란하고 욕심 많고 이기적인 저것을 왜 그렇게 비싸게 사려고 해?"
우리의 왕이신,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이런 식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것이다.
내 죄로 인해 내게 임박한 심판과 진노 앞에서 내가 떨고 있을 때, 조용히 예수님이 내게 다가와 나를 두 손으로 잡아 자기의 높은 자리로 옮기신 후, 당신께서는 내가 섰던 자리에 본인이 서셔서 내가 받아야 할 조롱을 예수님이 다 받으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라.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는 메시아가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기에 역사적으로 유대인은 메시아에 대한 갈망이 강렬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언급된 구원자 메시아의 모습과 사람들이 기대하는 강력한 메시아의 모습은 달랐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신21: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사 50:6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모습은 우리가 기대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사 53:1~8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우리의 왕이신 예수의 구원 방법으로서는 아무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곳이 십자가였다. 공의와 사랑이 만나 곳... 내 모든 절망을 가져가시고 소망을 주신 곳이다.
예수님이 당한 '수치'를 아는가?
수치란 내가 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을 대신해서 그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다. 내 경우는 3개월간 30분 이상 잠들 수 없는 정도의 수치를 당한 적이 있다.
예수님이 당한 수치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할 그 조롱과 수치를 당하심으로, 나로 하여금 존귀함을 받게 하신 것이다. 나를 대신해 정죄를 받으시고 내게는 없는 의(義)를 주신 것이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잠잠할 수 없다. 두번째 부분의 마지막인 '영광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오랫동안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기다린 사람이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라. 그 십자가 외에는 방법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 십자가는 이론이 아니다. 철학적 개념도 아니다. 실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나같은 사람을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다.
함께 찬양하자.
무엇이 변치 않아 내 소망이 되고 무엇이 한결 같아 내 삶을 품으리
그 누가 날 만족케 해 내 영이 쉬며 그 누굴 기다려 내 영이 편하리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소망이 있네. 십자가 십자가 그 그늘 아래 내 생명이 있네
다 주의 크신 이름 높이며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 감사하세
오 주의 신실하신 그 사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예수님의 초청이다. 상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이다.
절망과 중독에서의 놓임과 벗어남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인도)
우리는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에 대해 들었다. 이제는 십자가를 우리가 체험해야 한다.
진리는 체험되는 것이다. 체험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무엇인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은 것이다.
이 밤에 그 십자가의 사건을 우리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한다.
예수님이 그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해 '수치'를 당하셨기에,
예수님의 그 가시면류관으로 인해 우리가 지금 생명의 면류관을 받은 것이다.
십자가는 심볼이 아니다. 십자가는 능력이다.
죄책감에서, 인생의 수치 안에서 사탄의 참소 아래 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수치를 당하셨다.
이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왜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는가?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기 위함이다.
"예수는 그리스도 예수는 주, 하나님의 영으로 경배 드리리"
예수 그리스도가 '내 인생에'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고 선포하는 기도를 드리자.
'Jesus Christ > 다니엘 기도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세19. Day 15.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창 37:18~20) (1) | 2019.11.16 |
---|---|
단세19. Day 14. 기뻐하는 것이 힘입니다. (마 13:44) (0) | 2019.11.15 |
단세19. Day 13. 놀라운 기적(Great Miracle) (사도행전 2:7) (0) | 2019.11.13 |
단세19. Day 11. 반전의 하나님, 나를 써주소서 (욥 22:27) (0) | 2019.11.11 |
단세19. Day 10.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하나님의 은혜 (예레미야 33:3) (0) | 2019.11.10 |
단세19. Day 9.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 11:1~4) (0) | 2019.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