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14. 기뻐하는 것이 힘입니다. (마 13:44)
강사: 자두 사모
현) 조이풀시티교회 사모
현) 월드투게더, 굿피플 홍보대사
전) CBS 다음세움 MC, GOOD TV '오 자유여' 게스트
할렐루야.
"잘 말아줘 잘 눌러줘 밥알이 김에 달라 붙는 것처럼 너에게 붙어 있을래"라고 노래를 부르다가 이제는 주님께 밥알처럼 딱 달라 붙어 살고 있는 나는, '가수 자두'에서 '자두 사모'가 되었다.
(가수 자두: '더 자두' 라는 그룹의 멤버(1기는 강두 송용식과 활동). 본명 김덕은. 1982년생.
2002년 제4회 혼성그룹부문상 [M NET KM 뮤직비디오 페스티벌] 상. 2003년 제5회 한국예술실연자대상.
2013년 12월에 미국에서 청소년 사역과 봉사활동을 담당하는 지미 리 목사와 결혼하였다. 과거 2000년대 초반에 명곡 [김밥] [대화가 필요해] 등의 명곡을 발표하면서 인기를 끌었으나 갑자기 활동이 뜸해졌었는데, 자신을 키워준 소속사와 계약이 종료된 후 두번째 소속사에서 계약사기를 당해 수많은 빚을 떠안게 되고 법정에 증인으로 수차례 나서기도 했다. 이로 인해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됐던 절망의 순간이 그녀에게 있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늘 슬픈 표정을 하고 거룩하게 기도하고 힘들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게 '기쁨'에 대해 새로운 것을 알게 하셨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가 의/평강/희락 등의 3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2가지(평강, 희락)이 기쁨과 관련이 있으니, 결국 하나님 나라의 2/3은 기쁨이라는 것이 내게 완전 충격적이었다. 내가 내가 기독교인이라면 이 기쁨이라는 특징이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기뻐하라’의 헬라어 원문 ‘카이레테’은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원하는 일이 성취되었을 때 느끼는 기쁨만이 아니라, 어렵거나 힘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이고, 특히 '기뻐하라'는 명령형이었다, 기뻐하는 것은 선택사항(옵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말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한 기쁨이 없었다. 나도 그러한 '하나님의 기쁨'을 갖고 싶었다. 맛보고 싶었다. 내가 그냥 기쁨 없는 신앙생활을 계속하면 탈진/소진될까봐 두려워졌다.
(느헤미야 8:10하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데는 '힘'이 필요했다. 내게는 쉽지 않았다. 힘이 들었다. 순종을 하기 위해서도, 헌신하기 위해서도, 섬기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했는데, 내 노력이나 힘으로는 턱도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의 기쁨 안에 사는 방법'을 배우자 이제는 모든 것이 힘이 들지 않았다.
예수님의 기쁨 안에 사는 법을 맛보았지만 나는 위의 데살로니가 전서의 말씀처럼 '항상 기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렇게 경건하고 신실한 신자가 아니었다. 나는 원래 소명을 가지고 목회자 사모가 된 것이 절대 아니었다. 그냥, 나를 감당할 만한 사람은 목회자 밖에 없었다. 그냥, 내가 사랑한 사람이 우연히(?) 목사였을 뿐이다. 나는 스스로를 목사 '삼오'라고 부른다. 스스로를 잘 아는데 사모(師母)라고는 차마 못하겠다.
이미 복음을 위한 사역을 주업으로 하고 방송을 부업처럼 하고 있었지만, 내 삶은 기쁨으로만 충만하지는 않았다.
나는 행복을 내 느낌이나 감정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 행복한 기분은 어떤 때는 최고조로 올라갔다가 어떤 때는 저 밑으로 꺼지는 업 다운 (up-down)이 반복되었다. 감정이나 느낌이 내 현실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고 살고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감정이 아님을 깨달았다. 기쁨은 믿음의 선택이었다. 기쁨은 감정의 기복에 따라 업다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가장 강력한 상태였다.
나는 '느끼는 자가 아니라 믿는 자'임을 하나님께 고백했다. 더 이상 내 정체성을 느낌과 감정이 지배하도록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단했다.
나는 '내 기분에 따라 좌지우지 되는 나'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나'이다. 비록 내가 우울함을 느껴도 나는 결코 우울하지 않다.
이렇게 나는 '내 감정'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하게 되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따르면 따를수록 더욱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하고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믿음의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았었다. 내 신앙 체험을 간증할 때도 눈물을 흘리며 '나는 알콜 중독이었구요, 술먹다가 하나님을 만났고요,.....' 이런 아프고 힘들었던 삶을 얘기했다.
나는 거룩은 고통을 겪어내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고통이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
더 깊은 내면의 기쁨이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하고 깨달았다.
성령께서 나를 하나님께로 이끈 것은 고통이나 불행이 아니라 기쁨을 위함이었다. 그 기쁨이 주 안에 있다.
나를 변화시킨 그 기쁨이 진정 다른 사람들도 변화시킬 수 있다. 그 기쁨이 우리의 다음 세대를 살려낼 수 있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찬양한다.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우리 하나님~~~)
당신은, 아니 내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기쁨이 있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의 아담과 이브처럼 하나님의 눈길을 피하며 경원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오! 하나님, 안녕하세요~~?'라고 기쁘고 좋아서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
기쁨은 하나님의 성품과 매우 가깝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를 향한 깜짝 선물과 같았다. '대박~~! 완전 짱~~!' 이런 표현이 적절한 분이었다.
사랑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의 상태가 기쁨이었다. 사랑하게 되었을 때의 그 흥분된 기쁨을 기억하는가?
신앙 간증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삶을 증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전혀 돌아볼 것이 없는 허물 많은 삶이지만 그러한 인생에게 찾아가셔서 변화시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에 속한다.
'본받을 것은 없지만 이런 인생조차도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는 경우가 내 간증의 케이스다.
오늘 본문 성경 말씀이 내게는 놀라운 대박이었다. 깜짝 선물과도 같았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 사람은 보물이 있는 밭을 보았을 때 중대한 '결정'을 해야 했다. 기존에 살던대로 comfort zone에서 편하게 살 지, 아니면 그가 가진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야할 지, 즉 그의 전부를 그 밭과 바꿔야 할 지를 결정해야 했다.
또 '발견한 후'라는 부분이 내게 의미가 되었다. '발견 (헬라어 원문: 휴리스코)'은 우연히 발견하다는 뜻이 있다.
즉,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저 (우연히) 발견한 것일 뿐이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내게 거저 주신 것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더 나같은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왜냐하면, 내 어떠함이 하나님께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영향을 끼치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늘 변덕스럽게 심한 감정의 기복을 겪지만 우리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시기 때문에 나는 늘 기뻐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하나님이 '거저주시는 기쁨'을 은혜로 받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나는 '~하는 만큼 하나님도 은혜를 주시는' 줄 알았다. 하나님을 일일이 계산하고 재는 분으로, 째째하고 속 좁게 봤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자꾸 내게 은혜를 주시는 것이었다. 내 상태가 최고든, 최악이든 어떤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은 동일한 것이었다. 이렇게 거저 주시는 기쁨을 조금씩 받을 수 있게 되자 내 안에 기쁨이 넘치게 되었다.
억지로 거룩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연스러운 기독교인이 되어갔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친해지자 다른 사람의 찬양이나 예배나 간증을 흉내내지 않아도 되었다.
기쁨으로 내 믿음이 더해지기 시작했고 넉넉히 이기고 진실로 변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변하자 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내게 주어졌다.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먼저 변화한 것이었다.
이 기쁨으로 나는 회복되고 자유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을 술을 먹다가 만났다.
내가 모든 것을 잃고 실패하고 공황장애로 괴로워할 때, 나는 내 방안의 술자리에 하나님을 초대했다. 하나님의 임재였다.
그 이전에는 나는 죄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자 죄를 미워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단지 피상적으로 자기가 억지로 거룩하거나 즐겁고 기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주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자두의 생각과 고민들, 우울한 마음이 자두만 특별히 겪은 일일까? 다 내게도 있고 아니 세상 사람들 모두의 지지고 볶는 삶에 늘 있는 일이 아닐까? 인생은 고해(苦海)라는데 세상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지 답이 없는 것이지.... 행복하고 기쁘지 않은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분들에게 자두의 오늘 간증은 큰 도전이 된다. 답이 안 보이는 이 인생의 문제에 해답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다. 힘을 내고 일어서시기를 축복한다.)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인도)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자. 하나님의 이미지는 근엄/진지/엄숙이 아니라 기쁨과 환희가 충만한 분이다.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이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나를 봐도 실망스러운데 어떻게 하나님이 나로 인해 기쁨을 억누르지 못할 정도가 될까....하는 의심을 갖는다.
그러나, 기쁨은 선택이다. 소위 '지옥에서 출장온 사람'같은 얼굴로 주 앞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느 8:10하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여호와로 기뻐하는 것이 힘이다.
여호와로 기뻐할 때 우리 힘으로 몰아낼 수 없는 근심과 불안과 슬픔을 몰아내고, 악한 영(슬픔과 탄식의 영)이 떠나간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기로 작정하자. 그러면 두려움과 염려가 사라지게 된다.
(시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마음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다. 기뻐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것이다.
조건절과 주절을 바꾸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기쁨의 근거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 내 자신에게는 실망할 때도 많고 연약하여 넘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요 17:13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나는 이제 슬퍼하지 않겠다. 기뻐하리라!" 이 시간 선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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