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세19. Day 15.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창 37:18~20)
강사 : 안호성 목사
현) 울산온양순복음교회 담임목사
현) CBS 올포원, CTS 4인 4색 강사
한미준(한국교회 미래를 준비하는모임.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 지지 선언) 대표 강사
(1975년 서울 출생, 충북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서울 순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 목회학 석사. 신대원 재학중이던 2004년 울산온양순복음교회 개척.
저서 ‘마음이 없으면 핑계만 보이고 마음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참 멋진 일이다’ 등이 있다.
오늘의 요약: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끝끝내 그 길을 거부하고 세상의 길로 가고자 발버둥을 쳤던 그에게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시고자 두 번의 생명의 고비를 맞게 하신다.
결국 주님께 두 손 들고 항복, '그 놀라운 주님의 사랑 앞에 제가 주의 길을 가겠습니다' 라며 눈물로 고백한다.
그리하여 전혀 생소한 경상도 땅, 울산. 그것도 아무도 찾지 않는 삭막한 시골 온양읍으로 교회를 개척한다. 처음 예배는 그 혼자 드렸다. 심한 적막감에 절망할 터였지만, 그는 주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알았기에 금식으로 주님만 바라본다. 허기와 궁핍함으로 아내가 만삭인 상태일 때 '배고파요'라고 할 정도로 가정은 너무 힘겨웠지만, 그럴수록 더욱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배를 골으면 금식하고, 교회를 지을 돈이 없으면 나가 일해 번 돈으로 모래를 샀다. 그렇게 시작한 고난의 출발. 이제는 그 불가능의 땅에서 500명이라는 성도로 어엿한 믿음의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전국에 다니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외치고 다니는 부흥전도사로 정말 열심히 간증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이야기로 열정을 토한다.)
할렐루야. 앞으로 내게 주어진 한 시간 동안, 즉 인간으로서의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한 시간도,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시간인 것을 믿는다.
나는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집회를 다니는데, 이렇게 떨리는 경우는 처음이다. 그래서 어제부터 모든 일정을 정리하고 오산리 기도원에서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하고 왔다. 또 우리 교회에서 100여명의 성도가 기도로 돕고 있어 감사하다.
이제 내가 만난 '시퍼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려 한다.
[목사 아들... 내 이름은 안호성인데...]
내 아버지는 감리교 목사인데 나는 순복음교단의 목사이다.
나는 아버지나 어머니처럼 본인의 소명이나 동의에 의해 목회자 가정이 된 것도 아닌데,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기에 어릴 때부터 목사여야 했다.
목사의 아들로서 항상 양보하고 지고 살아야 하는 기대가 나는 싫었다. 내 '안호성'이라는 예쁜 이름보다는 '목사 아들'로 불리웠다. 목사의 아들이 아닌,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이 부러웠다.
(부모님은 1973년 부부의 연을 맺었다. 아버지는 9남매의 막내, 어머니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셨다. 두 분 모두 신앙의 1대였다. 결혼 후 누나가 태어났는데 그만 장에 염증이 생기는 희귀병에 걸리고 말았다.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곧 죽게 됐다. 더 이상 갈 병원도 없게 되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딸아이를 살려주시면 목회자로 살겠다고 서원했고 이후 누나는 기적적으로 회복됐다.아버지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회자가 없는 교회를 찾다가 충남 공주 탄천면에 있는 감리교회에 자원해 목회 첫발을 내디뎠다. 이름 없는 시골 목회자였던 아버지는 전형적인 목회자이셨다. 이른 새벽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밤늦도록 목회에만 집중하셨다. 어머니는 기도의 용사였다. 얼마나 금식기도를 자주 하셨는지, 어렸을 때 엄마는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아버지는 건축의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조그만 교회라도 부임하시면 교회를 건축하시곤 했다. 그래서 집보다 교회가 먼저였다. 사례비를 못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우리 3남매는 어린이가 아니라 작은 목사처럼 살아야 했다. 손바닥만 한 동네에서 내 이름은 호성이가 아니라 ‘목사 아들’이었다. 그래서 어릴 때는 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아니, 목사가 너무 싫었다. ‘목사는 무슨 놈의 목사. 난 절대로 목사 같은 짓은 안 할 거다.’ 교인들의 기대치는 너무 높았다. 예배는 절대 빠지면 안 됐다.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교인들의 자녀와는 싸우면 안 됐다. 져주고 양보하는 게 일이었다. 여름성경학교 때 너무 갖고 싶은 물총 선물이 있었다. ‘하나님, 제발 저 물총을 갖게 해주세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정말 경품 추첨 때 물총을 뽑았다. 하지만 행복은 잠시였다. 선생님이 물총을 뺏더니 옆에 친구에게 줬다. “넌, 목사님 아들이니 다른 친구한테 양보해라.” 어쩌면 나는 목회자의 자식으로 살아야만 하는 숙명 속에서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반항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는 4곳을 다녔는데, 5학년 때부터 충북 청원에 정착했다. 시골 학교에선 선생님들이 내가 목회자 아들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삐딱하게 살고 싶어도 그렇게 사는 게 쉽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며 위선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시골 교회의 목사는 모든 일에 다 도움이 되어야 했다. 동네 소가 아파도 새벽부터 불리워 나가야 했다. 동네 누가 돌아가셔도 기독교식 시신 수습부터 묫자리까지 다 돌봐야 했다. 산을 두 개나 넘어야 되는 충남 공주의 산골마을이었다. 모든 고아와 무자녀 가정을 돌보시느라 내게는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었다.
[내 맘대로 살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 없는 먼 곳....)
교회와 거리가 1시간 이상 떨어져 있던 청주 청석고에 진학하면서부터 탈선이 시작됐다. ‘일진’들과 어울려 다녔고 성적은 바닥을 쳤다. 싸움을 즐겨 했다. 그래도 담배와 술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나름 철저히 지켰다. 내신성적은 엉망이었고 모의고사를 보면 바닥이었다.
수학능력시험이 나를 살렸다. 나는 수능 1세대다. 여름과 겨울 2번 시험을 치렀다. 어렸을 때 신문과 책을 많이 있었던 게 도움이 됐는지, 수능에서 좋은 성적이 나왔다. 94년 충북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정치외교라는 말이 왠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대학생활은 내게 자유를 선사했다. 승부욕에 술을 많이 먹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선후배 상관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마음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성이 좋아서 그런지 주변엔 언제나 후배들로 북적거렸다. 그중 홍경민은 가수를 꿈꾸던 친구였다. 약간 어두운 면이 있었던 그 친구는 리더 기질이 있던 나를 유난히 따랐다. “호성 선배, 저를 동생으로 삼아주십시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어, 그래? 좋아. 이제부턴 내가 경민이의 친형이 되는 거다.” “네, 형님.” 심지어 나를 따르던 후배들이 ‘호성스 패밀리’라는 이름으로 모일 정도였다. 나의 긍정적 에너지, 활달한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다. 훗날 스타가 된 홍경민은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해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이때부터 더욱 주님을 떠나서 방황했다. 모태신앙인으로 목회자 아들이었지만 형식적인 예배 생활마저도 등한시했다. 정말 술독에 빠져 살았다. 대학생활은 한마디로 엉망이었다. 그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지금도 놀란다. “안호성이가 목사가 됐다고?” “요즘은 깡패 양아치도 목사를 하나.” 같이 입학했던 동기들이 1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나는 1996년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청주우체국에서 공익근무를 했다.
[살려만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 장결핵]
1999년 제대하고 복학 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영국으로 어학 연수를 갔다.
(1년쯤 지나자 영국유학 생활에 적응했다. 2000년 드디어 힘겹던 삶에 해 뜰 날이 찾아왔다. 유럽 전역을 기차로 다니며 배낭여행을 할 기회가 온 것이다. 비행기 표만 끊고 영국에 날아온 내게 나 홀로 배낭여행은 일도 아니었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위스 등 유럽 일대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영국에 돌아왔다. 이층버스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한쪽 다리가 이상하게 저렸다. 처음엔 며칠 지나면 좋아지겠지 생각했다. 하지만 다리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심해졌다. 영국에는 외국인 유학생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제도가 있다. 하지만 피가 나고 뼈가 튀어나올 정도의 심각한 외상이 아니면 무조건 순서대로 기다려야 한다. 진료를 받고 결과를 기다리고 처방받기 위해 또 기다리고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줄만 서다가 하늘나라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도 없는 곳에서 치료받기가 힘들고 해서 결국 유학 생활을 포기했다. 무엇보다 한식이 그리웠다. ‘쫄면, 냉면, 우동, 닭갈비, 감자탕, 막국수, 족발, 짜장면….’ 한국음식이 그리울 때마다 공책에 적었는데 500개가 넘었다.
부랴부랴 귀국해 부모님이 계신 청주에 도착했다. ‘집에 가면 얼큰한 순두부찌개부터 먹어야지’ 했지만 입에 음식이 통 들어가지 않았다. 입맛을 완전히 잃었다. 목으로 넘길 수 있는 것은 요구르트뿐이었다. 몸이 음식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다리가 저리니 정형외과부터 갔다. 혈액검사부터 CT촬영까지 다 해봤는데, 전혀 이상이 없었다. “참 이상하네요. 다리에는 이상소견이 없는데 어떻게 다리가 아프다는 것일까요.” 환자인 내게 의사 선생님이 되물었다. 몇 군데 병원을 돌았다.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해 링거 주사만 맞았다. 신장결석이 의심된다면서 치료를 병행하기도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물리치료도 받았지만,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 못하니 얼굴이 점점 말라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무게가 급격히 줄었다. ‘병명도 모르고 병원에서 이렇게 검사만 받다가 죽을 수도 있구나’하며 절망했다. 키가 179㎝인데 몸무게가 38㎏까지 줄었다. 뼈에 피부가 달라붙었다는 말 그대로 피골이 상접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병원에서 염증 수치가 매우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아니, 그동안 뭐했어요.” “뭘 하긴요. 이것저것 검사도 받고 신장 결석 치료도 받았습니다. 물리치료도 받고요.”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일단 복부 부위 염증이 심해졌으니 개복해서 수술 먼저 합시다. 응급상황입니다.”
장결핵이었다. 비몽사몽 간에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끝났지만, 온몸에 힘이 전혀 없었다. 숨쉬기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수술 집도의는 부모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환자의 장 상태가 너무 나쁩니다. 장기 전체가 녹아내리고 있습니다. 장에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있고 고름이 가득 차서 전혀 손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닫았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겠습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땐 내 옆구리에 큼지막한 튜브가 박혀있었다. 배 속에 있는 고름을 빼내기 위해 임시로 박아놓은 튜브라고 했다. 옆구리에 붙여놓은 거즈에선 냄새가 났다. 생전 처음 맡는 악취였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역했다. 아침마다 의사가 와서 옆구리에 끼워 둔 거즈를 교환했다. 고름이 잔뜩 밴 거즈에선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시궁창 냄새나 걸레 빤 냄새보다 지독했다. ‘송장 썩는 냄새가 이런 것이구나’ 생각했다. 차마 거울을 볼 수 없었다. 고개조차 돌리기 힘겨웠다. ‘이게 사망이라는 거구나. 이대로 죽는 거구나.’ 질병이라는 문제 앞에 마음이 무너지니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기력이 모두 쇠하고 나니 신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죽음 앞에 초라한 실존을 발견했다. “주… 주님, 살려만 주시면 주의 종이 되겠습니다.”
자다가 몸을 뒤척여 튜브가 옆구리 상처를 건드리기도 하면 머리카락이 쭈뼛 솟을 정도로 아팠다.
어머니는 병상 옆에서 물조차 제대로 삼키지 못하는 아들을 바라보며 눈물로 기도하셨다. 아들에게 행여 상처라도 입힐까 봐 더러운 좌욕실에서 끼니를 때우셨다.
2001년 3월 아버지의 친구 목사님들이 찾아오셔서 내 몰골을 보시더니 깜짝 놀라셨다.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주셨다. “오 주님, 이 아들을 살려주시고 치료해 주시옵소서.” 그렇게 펑펑 우시는데 내가 다 민망할 정도였다. 기도에 확신도 없어 보였다. 의사는 가망이 없다고 했고 목사님마저 마지막을 준비해야 할 것 같다는 기도를 했다. 정말 답이 나오지 않는 삶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절망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병실로 들어오시더니 갑자기 이불을 확 걷어붙였다. 그리고 난데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다 죽어가는 아들 사진을 찍어대는 아버지를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아, 내가 살 가망이 없다는 걸 파악하시고 아버지가 정신까지 놓으셨구나.’
아버지는 사진 촬영을 마치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성아, 너 안 죽는다. 넌 반드시 산다. 얼른 살아나서 이것 가지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해 다오.” 나는 마음은 '할렐루야! 아멘~' 하고 크게 외치고 싶었으나 실제로는 워낙 쇠약해진 상태였기에 '신음같은 아멘'으로 화답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신음같은 아멘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시니 얼마나 감사한가?
아버지가 하셨던 선언은 정말 현실이 됐다. 기적적으로 고름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악취도 나지 않았다. 분비물이 노란색에서 맑고 투명한 액체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염증은 줄어들었다. 몸이 스스로 치유되는 속도를 느낄 정도였다.
의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교회에도 다니지 않는 의사였는데도 “야, 이거 정말 기적이네.”라며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할 정도였다. “선생님, 제가 지금 낫고 있는 게 맞죠?” “낫는 정도가 아니라 회복 속도가 엄청 빨라요.”
튜브가 꽂힌 옆구리 구멍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튜브에 살이 달라붙는 것을 막으려고 의사가 좌우로 무자비하게 흔들어댔다. “아아악, 사람 죽네!” 사람 죽는다는 소리도 살만할 때 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죽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살만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진짜 죽을 사람은 죽겠다는 신음조차 내지 못한다.
옆구리에 박힌 튜브를 빼는 작업은 정말 신음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아침에 의사가 왔다. “안호성씨, 오늘부터 튜브를 빼겠습니다. 하루에 빼는 것은 아니고요. 조금씩 뺍니다.” 1m 50㎝나 되는 튜브를 옆구리에서 뺀다고 했다. “자 이제 뺍니다.” “으악.” 의사가 순식간에 튜브를 잡아당기는데 옆구리가 통째로 잘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창자가 몽땅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날부터 하루 2~3㎝씩 튜브를 뽑아냈다. 아침마다 쇼크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1개월 넘게 튜브를 뽑아냈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처음엔 의사 선생님이 대장암 말기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장결핵이었다. 연세가 지긋한 의사분이었는데 장결핵 환자는 30년 만에 처음 봤다고 했다.
“요즘엔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병인데 말이죠. 거 참.” “그럼 다 나은 것인가요.” “약을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잘만 하면 완치됩니다.”
튜브를 다 뽑고 며칠 뒤 퇴원했다.
말라 죽어가는 아들의 변을 받아내던 어머니... 하루에도 몇 번씩 모자는 서로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울었었는데, 마침내 기도의 응답으로 병이 나아서 병실을 나오는 아들로 인해 어머니는 통곡을 하며 감사했다.
난 태어나서 처음으로 '햇볕이 맛있는' 경험을 했다. 하늘만 봐도 감사했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악몽 같았던 첫 투병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주님을 떠나 멀리 살아왔던 탕자 같은 내 삶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
[요나... 일본, 다시스로 가다]
그런데, 은혜에도 유통기한이 있었다.... 건강을 되찾자 은혜는 잊어버리고 신학교 입학을 피해서 일본으로 도망갔다. 요나와도 같았다. 그러나 그 일본에서 비로소 예수님을 전 인격적으로 만났다.
영국 유학 생활도 끝이 나버렸기 때문에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곧바로 학교에 복학했다. 짧지만 유학 경험이 있다 보니 청주대 유학센터에서 일하게 됐다. 주로 유학상담을 하고 관련 서류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몸도 낫고 생활도 안정이 되자 ‘주님, 살려만 주신다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라고 했던 고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이 달랐다. 서원은 뒤로 한 채 두 번째 유학지인 일본으로 향했다.
(누나가 마침 일본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매형의 할머니가 일본에 맨션을 갖고 있어서 주거비 걱정 없이 유학 생활을 했다. 일본 유학은 내게 큰 즐거움이었다. 월세를 내지 않으니 그 돈으로 어려운 유학생을 도와주고 전도도 했다. 일본에 파견 나와 있던 대기업 간부의 자녀 과외도 했다. 오사카 한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인생의 또 다른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가 또다시 슬슬 아파오기 시작했다. 불길한 느낌이 왔다. ‘아, 이 통증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기에 겁이 덜컥 났다.
(오사카 한인교회에 출석하는 재일교포 의사 선생님을 찾아갔다. 염증 수치가 꽤 높게 나왔다. “호성군, 아무래도 종합병원에 가야겠는데….” 2년 전 수술을 했던 그 날이 기억났다. ‘또다시 올 것이 왔구나.’ 2003년 3월 20일 일본 오사카의 종합병원에서 수술 절차를 밟았다. “엄마, 배가 또 아파요. 수술해야 한대요.” “아들아, 어떡하냐. 우리 아들 많이 아파?” 국제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흘리셨다. 당시는 아버지의 목회가 바쁘던 시절이라 어머니도 일본에 올 수 있는 형편이 안됐다. 설상가상으로 같이 있던 누나는 결혼 준비 때문에 한국에 가 있었다.
일본 의사가 말했다. “안상, 수술 전 몇 가지 검사를 하겠습니다. 계속 염증 수치가 올라가고 있어요.” 한국에서처럼 일본 의사도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결국, 배를 열어보기로 했다. 일본 병원은 웬만해서 전신마취를 하지 않는다. 부분마취로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 얼굴 아래로 커튼을 치고 수술이 시작됐다. 일본 의사들은 자기들끼리 뭐라고 했다. 마취 주사를 놓는 것 같았다.
“안상, 느낌이 옵니까.” “아아, 왜 찔러요?” 갸우뚱하더니 주사를 다시 놨다. “안상, 아직도 느낌이 옵니까.” “아아.” “이상하네요. 아무런 느낌이 없어야 하는데 말이죠.”
세 번 정도 더 주사를 놨다. “안상, 느낌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이제 주사를 놨으니 아프지 않을 겁니다. 이대로 수술하겠습니다. 지체하다간 마취가 풀릴 수도 있어요.”
의사가 메스를 들고 칼을 긋는데 서늘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으으으.” “안상, 느낌이 전혀 없을 순 없어요.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슥, 슥, 슥.” ‘배가 세 겹인가.’ 세 번 긋는 느낌이 왔다. 그때까지는 참았다. 근데 뭔가 좌우로 벌리는 느낌이 들더니 갑자기 배가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아악!”
의사들이 허겁지겁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론 기억이 없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신마취를 뒤늦게 했다고 했다.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왔다. 옆구리부터 확인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이국땅에서 가족도 없이 홀로 병상에 누워있으니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동안 제멋대로 살았던 삶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회개 기도가 절로 나왔다.
한참을 기도하는데 또렷한 하나님의 첫 번째 음성이 들려왔다. “아직도 내 양을 칠 목자가 부족하다!” “주님, 한국에 교회가 5만개가 넘는데 목자가 부족하다니요.” 두 번째 음성이 다시 들렸다. “아직도 내 양을 칠 목자가 부족하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정말이라면 저에게 확신을 주십시오. 비전을 보여주시면 제가 주의 종의 길을 가겠나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3가지 감동을 분명하게 주셨다. “교단의 벽을 허물라. 한국교회 희망의 불씨가 돼라. 상처 입은 성도들을 치유하는 교회, 병원과 같은 교회를 세우라!” 주님의 명령은 너무나 확실했다. 귀국 후 원서를 내려던 대기업도, 인생 계획도 모두 바꿨다.
(기도 후 눈을 뜨니 옆구리에 박힌 튜브와 그것을 덮은 거즈가 보였다. 발뒤꿈치부터 면도날로 살을 벗겨내는 듯한 소름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하게 섰다.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다시 통증이 밀려오는 듯했다. “아, 제발, 제발 주님 도와주세요.”
이번에도 배에 염증이 가득했고 원인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항생제 때문에 차도가 있었는지 상태가 좋아졌다. 드디어 튜브 뽑는 날이 다가왔다. “안상, 내일 아침에 튜브를 뽑을게요.” 정신이 아득해졌다. 밤새 기도했다. “주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사흘이 지나도 의사가 튜브를 뽑지 않았다. ‘거참 이상하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다. “왜 아직 튜브를 뽑지 않는 겁니까.” “아니, 사흘 전 아침에 뽑았잖아요.” “네?” 그렇다. 하나님께선 나의 고통을 아시고 알지도 못하는 순간에 튜브를 뽑는 고통을 제거해 주셨다.)
"교단주의 벽을 허물어라. 한국교회 희망의 불씨가 돼라. 위로가 필요한 성도들을 위로하는 교회를 세워라."
퇴원하고 그해 5월 곧바로 귀국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돌아온 요나, 니느웨에서 외치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소속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지만, 신학교는 순복음을 택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던 비전 중에서 첫번째인 '교단주의 벽을 깬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를 순복음교회로 보내주시면 평생 회개하는 마음으로 교단의 편견을 깨고 성령 운동을 전파하는 데 목숨을 걸겠습니다.”
2003년 9월 서울 순복음신학대학원대학교에 원서를 내 합격했다. 나는 아버지의 매우 보수적인 교회만 다녔다. 아버지의 고향은 충청 서천이었다. 그런 내게 순복음교단 신학교에서의 채플은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원색적인 성령운동을 경험하지 못했던 내 오만함을 하나님이 깨주셨다. 이렇게 나는 신학교 입학 전에는 순복음 교회를 하루도 안 다녀보고 순복음교회 목사가 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곳에 교회를 개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원래 개척 예정지는 세종시였다. 충청도에서만 산 내게는 적절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먼저 '누구에게나 들리는 것이 아니라 내게 들리는 나의' 말씀이 들려지면 그 때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영적 청력'이 필요하다.
신학대학원 수업 중에 강헌식 평택순복음교회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울산은 순복음의 무덤이다.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고향인데 왜 순복음이 자리를 잡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 한마디가 나를 울산으로 이끌었다. 개척지를 울산으로 변경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울산에 가봤다. 시내에 개척하기 위해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땅값이 상상을 초월했다. ‘시내보다는 외곽에 싼 땅을 사서 그곳에 교회를 직접 지어야겠다.’ 여기저기 장소를 물색하다 보니 울산 시내에서 점점 멀어졌다.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농촌마을까지 갔다.
그곳은 우상과 미신에 찌든 곳이었다. 복음이 들어온 후 한 번도 순복음 교단의 교회가 세워진 적이 없는 동네였다. 작지만 장로교단의 텃밭이었다. “이곳이다. 순복음의 무덤에 생명의 꽃이 피어나게 하리라!”
한국에서 유학센터를 하고 일본에서 과외를 하며 모아뒀던 돈으로 교회부지 264㎡(80평)를 사고 자그마한 예배당을 짓기 시작했다. 교인 한 명도 없이 재정적 후원 없이 개척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젊은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홀몸으로 겁도 없이 개척을 감행했다. 신학교를 오가면서 손수 벽돌을 지고 등짐을 날랐다. 가진 건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몸뚱이 하나뿐이었다. 서울에 공부하러 올라갔다가 주말엔 내려와서 건축 작업을 했다. 돈이 없으니 아르바이트를 해서 재료비를 모으고 그렇게 오랫동안 공사를 했다. 2개월이면 끝날 158㎡(48평... 불법적으로 2평정도 달아내서 50평....^^) 예배당 공사가 6개월이 넘도록 계속됐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에 젖는 골조를 보며 마음도 촉촉하게 젖었다. ‘젊다는 게 뭐냐. 젊은 날엔 고생도 사서 한다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 몸을 바친들 그 무엇이 아까우랴.’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다는 기쁨에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정말 피와 눈물과 땀으로 건축한 건물이었다. 건물 형태는 대략 갖췄지만, 막상 꼭 필요한 것들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다. 강대상도, 마이크도, 앰프 시설도 없었다. 심지어 장의자도 하나 없었다. 의자는커녕 당장 내일 먹을 쌀도 없는 지경이었다. ‘신앙의 선배들처럼 정말 돗자리를 깔고 사과 궤짝이라도 갖다 놓고 예배를 드려야겠다.’ 기적적으로 한 기도원에 버려진 강대상과 장의자가 몇 개 있다는 단비 같은 소식을 들었다. 한걸음에 달려가 얻어왔다. 개척했다가 문 닫은 교회에서 내놓은 장의자도 몇 개 주어왔다. 멀리 부산에 있는 군부대에서 부대교회를 새로 건축하며 낡고 오래된 의자들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장 트럭을 빌려 싣고 왔다. 그렇게 의자를 갖다 놨는데 각각 크기가 다른 의자들이 비뚤배뚤 자리를 잡았다. 제대로 줄이 맞지 않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예배당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정글의 나뭇가지 헤치듯 요상한 춤을 추며 간신히 의자에 앉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전도사님, 예배당이 중고 성구사 전시장 같아요.” “길이가 제각각이죠?” “전도사님, 의자 길이가 제각기 다른 것은 무슨 심오한 뜻이 있나요. 길이도, 모양도, 높이도 다 다르네요.”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예배드리러 올 때 다윗처럼 즐겁게 춤추며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배려이며 기가 막힌 섭리입니다.” 얻어 온 피아노는 소리도 제대로 나지 않았다. 방송시설은 꿈도 못 꾸고 야유회 때나 들고 다니는 이동식 앰프에 1만3000원짜리 마이크를 사용했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춰진 게 없었다.
‘예배당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자.’ 그렇게 울산에서 서울로 신학교를 오가며 공사하랴, 창립 예배 준비하랴 분주하게 한 해를 보냈다. 드디어 2004년 1월 1일 건물이 완공되지도 않았는데 창립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신대원 1학년 때인 나이 30에, 울산 온양으로 내려가서 어느덧 15년이 흘렀다. 사명의 심장소리를 나침반 삼아 내려갔다. 50평짜리 작은 건물에서 시작해서 개척 11년 만에 다섯 번 교회 건축을 했다.
15년 전 농촌교회로 시작한 울산온양순복음교회는 특별한 프로그램도, 새신자 양육도, 제자훈련도 없지만 5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비결은 예배 설교에 있었다.
(목회자의 권위는 가운을 입는다고 해서 세워지는 게 아니다. 목회자의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말씀선포에 목숨을 걸면 영권(靈權)이 생긴다. 나는 강단 밑에서는 어린이들과 장난치는 삼촌 같지만, 강단에선 포효하는 사자같이 말씀을 전한다. 말씀에 어긋나면 강단에서 나이, 직분 여부와 상관없이 호통치는 모습을 본 감리교 소속 원로목사인 아버지가 “세상 살다가 너처럼 목회하는 사람 처음 본다”고 했을 정도다. 그렇게 말씀의 권위를 세우니 성도들이 몰려들었다. 2003년, 2005년, 2009년, 2013년 교회 건물을 세웠다. 2015년에는 또다시 60억원을 들여 교회를 신축했다.)
[뜻 밖의 인생,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은 참 멋진 일이다.]
경상도 땅은 참 낯설다. '온양'은 행정구역명일 뿐이고 일상에서 생활하는 이름은 '남창'이다.(男唱) 정관, 대변 등이 옆 동네 이름이다. 재미있는 이름들이다. 내가 이러한 경상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참 낯설다. 완전 내성적인 성격의 내가 이렇게 부흥사가 된 것도 예전에 생각했던 모습과는 완전 다르다. 심지어 나는 부산 출신의 고신(고려신학교의 약자로 순복음과는 완전 다른 형태의 정통 예배 형태를 보임)측 여인과 살고 있다. 울산에서 낳고 키운 2남 1녀의 세남매는 자기들이 사용하는 말이 사투리인 것도 모른다.
이렇게.... 내 생각대로 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너무 감사하고 행복하다.
내 뜻대로 다 되었다면 내 모습은 무엇이 되었을까?
'생각대로 되지 않는 건 참 멋진 일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빨간 머리 앤에서 나오는 명대사 중 하나이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하더라도 또 다른 길로 인도받아 가다 보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 나오기도 하는 것 같다.
소년 요셉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그의 일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일생은 애굽의 총리로 만들기 위한 지금길이었다.
아버지 심부름을 갔는데 형님들이 반기기는 커녕 구덩이에 던져 넣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밖에서 형들이 수군대는 소리는 죽일까, 팔아버릴까...의 의논이라면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겨우 애굽 종살이에 적응하는데 주인집 아내의 유혹과 무고... 그리고 투옥...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 갔다.
그러나 우리가 이른 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면 그 생각대로 되지 않은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생각하신 대로' 애굽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하고 큰 민족으로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
‘인생의 8할은 내 예상대로 되지 않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우연한 일인가? 당연한 일인가? 예상외의 일들이 일어나면 당황할 것인가?
이제 성도라면 내 뜻을 이루기 보다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써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진정한 행복은 자기 사명을 찾는데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내 이야기는 한 때 사명을 버리고 떠난 자가 사명을 다시 찾았더니 행복이 밀려왔음에 대한 간증이 아닌가?
(우리의 인생이 과연 내 뜻대로 된 것이 얼마나 될까? 가만히 곱씹어 본다면 얼마 되지 않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학업, 결혼, 직장, 건강, 창업, 노년 등 백퍼센트 나의 의지와 바람대로 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 죽기 살기로 세상을 미치도록 살아보지만 정작 자기의 멋진 뜻을 성취하기란 정말 어렵다. 인생의 8-9할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비관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나는 마치 내 뜻을 이루기 위해 성경의 요나처럼 니느웨를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한다. 목사의 사명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쳤다. 영국으로 일본으로 두 번이나 도망쳤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나를 두 번의 큰 수술과 고난을 통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려 놓으셨다. 니느웨로 보내시고 목사로 부르셨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한 때 불평과 불만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감동과 회개의 눈물이 흐른다. 주의 은혜가 임함으로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음이 오히려 축복임을 깨닫는다. 더 멋진 인생임을 알게된다.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더 좋고 더 멋지고 더 축복된 일임을 깨닫는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성도는 나의 뜻보다 하나님 뜻을 먼저 구해야 한다. 하나님 뜻이 더 옳고 멋진 일이다. 성도가 하나님 뜻만 구한다면 이보다 더 멋진 삶이 없다.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자는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원칙에 순종하며 오늘도 행복함으로 주의 길을 걸어간다.)
주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믿음의 선진들은 순수한 동기로 섬겼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행복이다.
이제 뜻 밖의 위대한 인생이 시작될 것이다. (아멘!) 하나님의 한 수 , 신의 한 수가 인생에 개입될 것이다. 인생의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보자.
적용기도 (김은호 목사)
여러분의 인생이 여러분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모두 경험하고 있다.
우리 생각 속에는 우리의 정욕으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 목사님을 살리신 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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