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집의 추억
입주한 지 10여 년이 흐른 아파트에 들어가서 산 지 30여 년이 되어간다. 당연히 재개발 조합이 구성되어 있고, 조합장 선거라든지 설계라든지 여러 이슈를 단체 톡 방에서 접하게 된다. 그때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의 하나는 '남향 구조인가? 전체 세대 중에서 어느 정도가 남향인가?' 등의 문제가 된다.
재개발을 앞둔 아파트에 투자하기는 어렵고 그냥 살기도 어려워, 낮은 금액으로 전세를 내주고 웃돈을 얹어 보다 깨끗하고 넓은 주상복합 아파트 전세로 나왔다. 이때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포인트 중의 하나는 '남향'이라는 것이었다.
내가 어릴 때 살던 한옥은 동향집이었다. 해가 일찍 떠올라 도저히 늦잠을 잘 수 없는 구조였고, 언제나 집 뒤쪽으로 보이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매일 느낄 수 있었지만, 늘 어머님의 남향집에 대한 선호의 말씀을 들으며 지냈다.
그래서 당연히 우리나라는 역사적, 전통적으로 '남향집 선호' 사상이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이에 대한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는 기고문을 하나 보았다.
남향 선호는 역사적이지 않고 아파트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는 주장
한국의 집은 무덥고 습한 여름 바람과 차고 건조한 겨울바람에 적응해야 했다. 그런데 일반적 재료는 물과 습기에 약한 목재와 역시 습기에 약한 황토와 문풍지였다. 많은 비에 목재로 만든 집을 보호하기 위해 집보다 훨씬 큰 (기와) 지붕을 덮었고, 황토와 문풍지로 마감된 내부를 건조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잔잔한 바람으로 습기를 말릴 수 있는 흐름이 중요해서 항구적인 대류현상이 발생하는 배산임수를 중시했다.
남향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것은 집 수요가 많아진 근대 이후다. 지붕 처마가 길게 나오는 한옥에서는 바람에 비해 향(向)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서향이 여름에 덥다고 해도 지붕 처마가 가려 주니 큰 문제는 아니었고, 한옥의 모든 방은 직사광이 아니라 마당에서 반사되는 간접광에 의지하는 구조였기에 향에 강하게 구속될 이유도 없었다. 따라서 남향에 대한 집착도 없었다. 전통 가옥들이 창밖 경치나 경사 흐름 같은 지형에 순응하는 식으로 지어져 온 이유다.
요즘처럼 남향집이 도시를 지배하게 된 데는 아파트가 큰 역할을 한다. 아파트는 풍수지리의 가장 높은 가치인 배산임수를 실현할 수 없었지만, 낮은 가치였던 남향은 어렵지 않게 만족시킬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배산임수를 포기하고 남향을 선택할 정도로 사람들은 남향에 집착했다. 70년대 서울 강남 한강 변에 들어선 고급 아파트들은 멋진 한강 전망도 북쪽이란 이유로 포기하고 옆 아파트 뒷면밖에 안 보이는 남향을 선택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파트가 남향으로 지어져도 사람들은 남향의 이점을 누리며 살지는 못하고 있다. 대개의 아파트 설계는, 남쪽에 거실과 안방이, 반대쪽에 두 개의 작은방과 주방이 있는 것이 4인 가족 기준 32평 ‘표준 평면’이다. 이 구조에서는 남쪽 안방과 거실은 해가 진 뒤에나 사람이 들기 시작했고, 심지어 가장 좋은 자리인 넓은 안방은 밤 10시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오히려 직접 빛이 들지 않는 침침한 북쪽에 자리한 주방과 아이들 방은 오후 내내 형광등을 켜놓고 사용하고 있었다. 밝은 남향 빛의 혜택을 입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TV와 소파 그리고 안방의 침대였다. 그들은 남향집이 아니라 북향집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다른 생각...
남향보다는 배산임수가 먼저라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다. 또한 한옥에서는 직접 광에 의존하기보다는 마당 등을 통한 간접광에 의지하는 구조라는 것에 대해서도 공감한다.
그러나, 한옥에서는 향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고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남향이 도시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것은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배산임수가 마을의 입지 조건을 결정하는 데 큰 역할을 했겠으나, 큰 마을 내부에서 집이 어떻게 자리 잡을 것이냐를 결정할 때는 한옥에서도 이미 남향에 대한 선호가 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호 위에서 아파트를 높이 지으면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남향으로 가급적 아파트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과거 한옥의 마당과 마루에서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는가, 그리고 그 햇살 가득함에 대해 지금은 요양병원 침대에 계시는 내 어머님께서 얼마나 행복해하셨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마당과 마루와 토방에 고추를 말리고, 빨래를 말리고, 메주를 띄우던 모습이 선하다.
그런데도, 아파트에서의 삶이 거실과 안방의 햇살을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긍정이 된다. 그렇지만, 이것도 꼭 그럴까?
햇살 가득한 너른 마당은 예전 한옥의 집안 전체를 따뜻하고 밝게 해 주었듯이, 햇살 따뜻한 거실은 아파트 집 전체를 밝게 만들어 주는 것 아닐까? 꼭 그 공간 안에서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남향 아파트의 따뜻한 햇살은 큰 의미를 준다고 생각한다. 또, 공부방이 남향이어서 햇살이 가득하면 졸리기만 해서 적절하지 않다. 위의 주장에 많은 공감을 하면서도 온전한 지지를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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