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익산
저는 전북 익산시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습니다. 제가 살던 때의 이름은 이리(裡里)였습니다. 이곳은 원래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서해 바다의 특성상 만경강의 범람으로 인해 바닷물이 자주 밀려오던 습지여서 갈대밭으로 덮여 있던 곳입니다.
지금은 익산시로 모두 합해져 있지만 원래 익산은 마한/백제/고려로 이어오면서 줄곧 큰 마을이었던 '금마(金馬)'지역을 말하며 원나라 순제의 기 씨 황후의 외가 쪽 고향이어서 '익(益)'이라는 글자를 하사 받아 고려말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오면서 익주/익산 등의 명칭이 자리 잡았습니다.
갈대밭이었던 과거의 이리시 지역은 조선시대에는 전주군 남일면으로 속해 있다가 고종 때 전주에서 분리되어 익산군에 편입되었습니다. 일제 강점기가 되면서 '이리'라는 명칭이 처음 생겼는데, '우거진 갈대밭 속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속리'라고 불렀는데, 솜리(갈대꽃이 솜털과 같아서..) 또는 솝리(습한 지대여서...)라고도 부르다가, 이를 한자화하면서 (옷)속'리(裡)'자를 사용하여 이리(裡里)가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 옛말에서 '북'이 '붚(붑)'에서 변했듯이 '속'도 '솦(솝)'이라 발음했기에 '솝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리시는 일제 강점기에 철도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이 발달하면서 조선인 및 일본인 인구가 급증하여 도시를 형성하여 '읍'이 되고, 해방 이후에는 익산군에서 분리하여 이리부/이리시가 되었었습니다. 이리라는 신도시가 철도 요지로 개발된 것이, 대전에서 목포로 이어지는 호남선 철도가 전주를 통과 한다는 말에 전주의 양반들이 반대하여 이리에 기차역을 건설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호남선을 유치하기 위해 전주와 군산에 사는 일본인들이 너무 치열하게 싸워 딱 중간인 이리에 기차역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친일파 지주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기차 노선이 정해졌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리역 주변의 땅은 우리나라 대표적 친일파 부호인 박기순, 박영철 부자(父子)의 소유였고, 당시 익산군수는 박영철이었기에, 버려진 습지였던 그들의 땅이 이리에 철도가 들어오며 역세권이 되어 어마어마한 이익을 얻었고 나중에는 상업은행을 세우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지역 일본인들의 입김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군산이 개항된 것은 1899년이었습니다. 개항된 군산으로 새로운 기회를 찾아 많은 일본인들이 모여 들었고, 그들은 다시 가까운 이리로 모여들게 되었습니다. 이리가 1917년에 지정면이 되었는데, 경성부를 포함한 12부 중심도시 다음으로, 전국 2500여개 면 중에서 23개를 '지정면'으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전라도만 놓고 보면 항구인 목포부와 군산부 등 2개의 부가 있었고, 지정면은 전주, 광주, 익산 등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신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던 이리는 1912년 호남선 건설과 함께 시작되었고, 1937년 완공된 전라선도 이리를 기점으로 여수까지 철도를 놓게 되었습니다. 1915년 익산면의 인구를 보면 일본인이 2053명으로 한국인 1367명보다 많았습니다. 이들의 이익을 대변해 이리역과 도시가 생겼고, 그렇기에 익산역 일대에는 번화한 일본풍 거리가 자리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95년 도농복합형태의 통합시 설치 시점에서 훨씬 역사가 있는 '익산'이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시내의 구슬재(주현동)에서 살았기 때문에 근처의 마동, 갈산동, 동산동, 남중동, 창인동, 인화동 등도 활동 반경 안에 있었습니다.
오늘은 마동 쪽으로 살펴봅니다.
이리 농림학교
마동은 1922년 설립한 이리 농림학교가 대표적 교육기관이었습니다. 해방 후에 (캠퍼스 통합 이전의) 전북대 농대, 이리 농고, 농공전문학교, 익산대학을 거쳐서 지금은 전북대학교 특성화 캠퍼스가 되었지만, 일제 강점기 설립 시에는 전국 유일의 5년제 공립 농림학교였고 최초의 농업 전문 교육기관이었습니다. 친일파라고 비난을 들을 수도 있으나, 이곳의 많은 졸업생들이 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보리피리' 시로 유명한 한센병 환자 시인 한하운 님도 이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지원했다가 떨어졌다고도 하고, 미원그룹 창립자 임대홍 회장도 이 학교를 강점기에 졸업했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하림그룹의 창립자 김흥국 회장이 명실공히 대표적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옆에는 저희 아버님과 숙부들과 저희 남매들이 모두 다닌 이리초등학교가 있습니다. 1915년에 개교했습니다. (https://governance.tistory.com/569)
그 아래에는 농고 방죽이라고 하던 '농림학교 방죽'이 있었는데 익산 사람들의 많은 사연이 함께 있던 곳이지만, 1990년대에 도시계획에 의해 지금은 모두 메워져 전북대 캠퍼스가 되었습니다. 현지 사람들도 잘 모르는 '시녀지'라는 이름이 그 방죽의 공식 명칭인데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올라갔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광사
지금의 마동 근린공원 안에 개인 사찰인 보광사가 있습니다. 이 낮은 언덕 같은 작은 산 부근에는 '약수'가 나오는 우물도 있어서 우리 집에 피부병이 돌았을 때는 남매들이 줄지어 그곳까지 걸어가서 그곳 약수에 목욕을 하고 온 기억도 있고, 이리초등학교가 가깝기 때문에 2학년 때는 야외학습을 보광사로 갔는데 교회만 다니던 제게는 '관음전'에서 풍기던 향 냄새가 견디기 어렵고 사찰의 그림들도 무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마동 133번지입니다. 몇 해 지나면 바로 그 옆에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설 계획이므로 기억을 위해 번지를 명시합니다. (전주 미곡상 출신으로서 이리시 개발의 이권을 챙겨 조선 4대 부자가 된 박기순/박영철 부자가 친일파로 유명한데, 아파트 공사를 위해 그들의 묘를 이장하다가 고려시대 유물이 나왔다고 합니다. 마한/백제 유물은 예전부터 많이 나왔지만, 고려시대 유물은 매우 드문 경우입니다.)
그래도 이 허름한 곳이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 님이 원불교의 모태가 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1924년에 가졌던 곳입니다. 이 산을 예전에는 죽산(竹山)이라고 불렀나 봅니다. 제 기억에는 대나무는 없고 신우대 숲은 기억납니다. 또 고봉(高峯)산이라는 명칭도 이 일대의 훨씬 넓은 지역의 공식적인 이름으로 불리는데, 익산 출신인 제게도 무척 낯선 이름입니다. 이유를 살펴보면, 우리는 '노프뫼 (높은 뫼)'라는 이름으로 그 지역을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를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한자로 표시해서 '고봉'이라고 한 것 같습니다.
수도산
신흥초등학교 근처의 야산은 수도산이라고 부릅니다. 예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고 억새 군락도 멋있었던 곳입니다. 일제가 고산 대아리와 경천 저수지에서 흘러오는 수로의 물을 원래는 닭뫼 또는 운룡산(雲龍)이라고 불리던 이 야산의 정상으로 끌어올려 정수장을 설치하게 되면서 수도산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수도산의 시내 쪽 기슭에 있던 공동묘지 아래쪽에는 공용 화장막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도산에 이리시 최초의 풀(pool) 장이 생기기도 했었고, 언덕 위에 하얀 병원이 생겼는데 이곳이 원광대학교 병원의 최초 설립지이고 이곳이 나중에는 신경정신과 병원이 되었다가 지금은 그 일대가 모두 아파트 단지가 되었습니다. 수도산 왕지 평야 쪽 기슭에는 망산(望山)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춘포 쪽에서 보면 들판 너머 '언덕 위에 보이는' 마을이어서 생긴 이름입니다. 춘포는 일제강점기에 대표적인 일본인 농장이 있었습니다. 그 소유주였던 호소카와 모리다치는 훗날 1990년대에 일본 총리를 지낸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러나 부재지주로서 농장주는 조선에 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장자산
제가 어릴 때 직접 본 정수장은 수도산보다는 근처의 장자산(長者山)에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그곳에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이곳에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를 안장했습니다. 이 산, 저 산.... 얘기는 하지만 모두 해발 100미터도 안 되는 40~50미터 정도 되는 야산들입니다. 이 너른 들녘에서는 그 정도의 야산들도 의미 있는 지명이 됩니다.
1974년부터 장자산 근처에 공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장자산 공동묘지에 '신흥지'라는 상수도 정수장을 개발해서 익산시민의 식수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정수장 근처로 교회에서 소풍을 가서 보물 찾기를 자주 했는데, 근처에 남아 있던 무덤이나 이미 이장한 흔적으로 움푹 파인 곳들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수도산의 정수장 용량이 3만 톤이었는데, 장자산은 45만 톤 규모로 크게 만든 것입니다.
황등제
전라남북도를 호남(湖南)이라고 할 때 그 기준이 되는 호수가 어디냐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있지만, 그중의 하나는 황등제입니다. 삼한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하는데, 반계수록 및 대동여지도에 나타나 있고 1910년대에 발견된 '요교비'에 의하면 1700년대에 크게 보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둘레가 25리(약 10km)에 달했다고 합니다.
즉, 조선시대가 되어서는 호수를 자주 보수해야 했고 방치하면 습지처럼 되어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제가 1910년대에 황등에 둑을 쌓아서 동쪽 금마와 미륵산 쪽에 큰 저수지를 만들어 물을 대고, 서쪽의 습지를 임피 평야 너른들로 간척하여 쌀 생산 기지화해서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산 대아리에 이어 1935년 완주군 화산면에 경천저수지를 만든 후 충분한 물이 확보되자 관리가 어려운 황등제(요교호)를 약 2년 동안 메꿔서 또다시 너른들로 만들어 쌀 생산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경천저수지의 물을 대기 위한 수로를 개발하면서 산 밑으로 남북으로 흐르는 지하 수로를 만들었고 그 터널 입구에 저희 본가가 있던 '터질목'이 생겼습니다. 터질목이 터널의 남쪽이고 지금은 모두 복개되고 신도시로 개발된 팔성다리가 터널의 북쪽 끝입니다. 그때 수로공사를 하던 엔지니어들 8명의 성이 모두 달라서 팔성(八姓) 다리라고 수로 위에 놓은 다리 이름을 지었고, 그곳이 '양지'로 되었다가 '어곳'과 합해 새로운 행정동을 만들면서 지금의 '어양'동이 되었습니다. 어곳에는 제 고조부님부터의 산소들이 있었는데, 이 어곳이라는 지명도 그 북쪽에 있던 황등제의 존재감이 남아있는 이름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고기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던 동네였거든요. 근처에 있는 '느릇'이라는 마을에는 먼 친척들이 사셨는데, 그 명칭도 '늘곳 > 늘옷 > 느릇'으로 이름이 변한 것입니다. 그 호수 근처에 '곶(곳)'이라고 부르는 동네가 흔히 있습니다.
제 조부모께서 군산에서의 신혼 생활을 마치고 수리조합에서 현장 관리자 일자리를 구해 고향인 북일면 새멀(새마을, 新洞)과 가까운 터질목에 정착하게 된 때가 1930년 중후반 즈음입니다. 예전 요교호가 있던 곳을 흐르는 '탑천'이라는 만경강 지류에 아버지께서 자주 낚시를 가셔서 저도 한 두 번 따라갔던 추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황등제 또는 요교호와 관련된 이 모든 일(습지 > 호수 > 들판으로의 변화)이 저희 아버님도 유아 시절에 일어났던 일이라 전혀 아시지 못했고, 저도 전혀 상상도 못 하던 옛일이어서, 신기한 마음에 기록으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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