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많은 목사님과 장로님들을 보고 만나 오면서 가슴 한편에 서운한 것이 있었다.
불교에는 고승이 있어서 선문답같은 말씀을 남기기도 하고, 또 도를 닦은 사람들은 공중부양술이나 여러 신기한 이적들을 보여주는데, 교회 안에는 그런 신통력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점이 바로 그 서운함이었다.
때때로 신유집회가 있어 가보면 병든 사람들이 낫는 광경을 볼 수 있었지만, 그것은 고승이나 도사의 신통력에 비하면 너무 소시민적인 것으로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 분들은 그 치유의 역사를 나타내신 분은 자기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일쑤였기에, 그 분들이 그렇게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성경 고린도후서 4장 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보배를 두신 곳에 대해 얘기한다. 우리들은 보물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금고나 특별한 보안시설이 된 장소에 둔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하나님은 그의 보배를 질그릇같은 우리 안에 두셨다고 가르쳐준다. 질그릇은 흔해 빠졌고 지극히 평범해서 값도 쌀 뿐만 아니라 깨지기도 쉽다. 왜 그랬을까? 하나님은 보배를 질그릇같은 우리 안에 두심으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우리 곧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모세처럼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대화'하는 체험을 했던 절대적 지도자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은 물이 나오도록 반석을 친 횟수때문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가 신격화되어 이스라엘 민족과 모세 자신이 타락하는 것을 막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게 된다.
교회의 큰 부흥을 일으킨 뛰어난 목사님들이 자녀들에게 교회 재산을 물려 주거나 성적인 문제를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 추문을 일으킨 경우에도,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오직 하나님의 일하심이었음을 분명히 해주는 측면도 있다는 위안도 삼아본다. 교회에는, 기독교에는 영웅이 있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도구'들이 있을 뿐이다.
기독교를 믿으며 또 마음에 허전함이 있는 것은 내 신앙에 '완성이 없다'는 점이다.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믿었고 그것도 열심히 믿었지만, 어느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내 연약한 믿음을 너무나 자주 목격하게 된다. 그러면서, 기독교에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조차 하게 된다. 성령의 역사를 힘입어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간증하는 사람들도 몇 해 뒤에 보면 나와 마찬가지로 날마다 넘어지는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도 자주 보게 된다. 교도소에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새사람이 되었다고 하던 사람이 또 다시 죄를 짓고 입건되는 뉴스도 별로 충격적이지 않다. 왜 그럴까?
심지어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를 세계종교로 전파한 바울도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괴로워했다. 교회의 어느 목회자가, 어느 선배가 완성된 신앙을 내게 보여주었을까? 없다. 없어도 너무 없다. 한 명도 없다. 지금 오직 칭찬만 받는 목사님을 위해서도 나는 아침마다 그 분이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한다.
이것이 하나님께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어서일까?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시요, 우리는 언제나 '내가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겸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의 진정한 능력이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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