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은 믿는 가족의 죽음을 너무 슬퍼해서는 안된다고 배웠습니다.
가족뿐만 아니라 자기의 죽음까지도, 이 세상이 전부요 끝이 아니기 때문에,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기뻐하며 죽음을 맞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도 드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자 요셉은 애굽의 장례법대로 준비하고 70일간의 애곡기간을 거쳐 성례한 장례를 치룹니다.
이 장례는 요셉에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어서는 아닐 것입니다.
그 보다는 이 땅에서의 아버지와의 이별에 대한 슬픔의 표현일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은 우리는 죽음 이후에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이별로 인한 슬픔까지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자식으로서 아픈 마음을 표현하고 최선을 다해 장례를 치러내는 것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내가 친구가 상을 당했을 때 위로하는 믿음의 마음 자세 입니다.
* 추가 의견.... 제게는 두 명의 친구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의 의견을 덧붙입니다.
의견1. 제대로된 생각이라고 보여진다.
상당수의 신자들이 믿는 사람은 울면 안된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성경해석이다. 그래서 교회다니는 사람들은 자기 부모가 죽어도 눈물 한방울 안흘린다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예수님도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 무덤 앞에서 울지 않았던가?
살전 4:13-14을 보면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에도 울지말라는 말씀이 아니고, 슬퍼하되 소망이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는 말라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소망없는 사람들(불신자들)은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울고 불고 난리를 치지만(그래서 영결식이라고 부름), 신자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소망없이 다시 못보다고 생각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신자의 슬픔은 슬퍼하되, 다시 만날 소망이 있으므로 위로받고 서로 격려하라는 말씀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슬픔이 없다면, 그게 사람인가? 슬픔의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성품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슬퍼할 때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곳에서는 함께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 신자다.
의견2. 다른 목사님은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로 의견을 주었다.
눈물 <김현승>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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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아들을 잃은 '상명(喪明)지통'을 겪은 슬픔을
기독교적 신앙의 바탕 위에서,
눈물로 역설적으로 종교적으로 승화시킨 시입니다.
기독교인에게도 죽음을 접할 때, 이별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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