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부르는 찬송 중에는 예수님의 '보혈(寶血)'이 많이 나옵니다. 대강 알듯하면서도 보혈을 강조하는 이유를 정확히 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죄의 삯으로 내가 이미 죽었음의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피인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어젯밤 읽은 소설에서 사람이 살해당한 흔적으로 제시된 엄청난 핏자국 얘기가 이를 더 실감 나게 합니다.)
중보자 그리스도 예수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나를 '중보(仲保)' 한다는 개념은 구약의 제사장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대변하는 것과 같지만, 결코 아무런 논거 없이 기회를 더 주시기를 간청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정 드라마에서는 가끔 나오는 장면이지만 실제로는 변호사가 배심원이나 판사의 심금을 울리거나 교묘하게 말꼬투리를 자아서 승소할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궤변이나 감정 호소가 아니라 '설득력 있는 논거'인데, 그것이 예수님께 있습니다.
"아버지여, 내 백성이 죄를 범하였으니 법대로 죄의 삯은 사망이지만, 내가 그 죗값을 치렀습니다. 여기 죽음의 흔적인 내 피를 보십시오. 십자가에서 내가 죄의 형벌을 다 당했사오니 같은 죄를 두 번 벌하는 것은 의롭지 못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아버지의 자비가 아닌 정의를 구합니다."
요한일서 1:9에서도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의 '의로우심'으로 인해 용서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 홀로 있으면 죄인이지만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는 온전하고 옳고 아름답고 의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대언자이신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룬 일을 보시고 이제 그들을 내 안에서 받아 주십시오'라고 우리를 위해 대언하시는 보혜사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성령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도우시는 보혜사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약속하신 분이 있는데 이 인격적 존재를 예수님은 '또 다른 보혜사'라고 부르십니다. 성령은 여러 명칭을 가지고 있는데 대언자, 상담자라는 이름을 통해 성령님이 우리 마음속에서 행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데 우리의 에너지 수위를 확 높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깊은 진리를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첫째 대언자인 예수님이 '하나님께' 우리를 대변하시지만, 둘째 대언자인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셨으나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을 가르치고 생각나게 하심으로 구원사역을 깨우치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정보를 가르치시는 강사일 뿐 아니라 대언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도전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이루신 일과 그 결과에 합당하게 살도록 우리를 설득하고 훈계하고 권고하고 간청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시대에 살며 그분을 실제로 만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더라면 더 좋았겠다고 생각하고 그랬다면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겠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틀린 생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간을 함께 생활했지만 예수님의 죽음/부활/승천 이후에 성령께서 지금처럼 강력하게 부어지기 까지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하고 절망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그리스도를 보고 그분의 임재와 사랑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참 평안
어느 가족들이 한 숙모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숙모는 신앙이 좋은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숙모가 의식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몇몇이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참 박복한 삶이야. 고달픈 인생에 남편을 둘이나 사별하고 병치레도 잦더니 죽을 때도 이렇게 가난하니..." 그 순간 갑자기 그 숙보가 눈을 뜨고 빙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누가 나더러 가난하대요? 나는 큰 부자입니다. 잠시 후면 담대히 그분 앞에 설 것입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 숙모에게 평안이 있었던 것은 이런 뜻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남편을 사별했지만) 천국에서는 죽을 수 없는 유일한 남편이 내게 있고 영영 사라지지 않을 유일한 부유함도 내게 있다. (병치레도 잦았지만) 나를 정말로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병은 죄인데 내 구주 예수께서 오래전에 그것도 해결하셨다. 그러니 내가 어째서 가난하단 말인가? 내 영혼 평안해~'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 '팀 켈러의 인생 질문'을 기반으로 조금 제 이해를 가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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