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끝자락, 마지막 주에 오페라에 가자는 문자가 왔다.
호산나 찬양대의 오랜 피아노 반주자인 강혜경 집사의 평생 반려자인 이정근 집사가 오페라 '내 잔이 넘치나이다' 서울 앵콜 공연 티겟을 확보하고 성가대에 그 은혜를 베푼 것이다.
여러 상황 속에서, 겨우 세 명만이 지원을 했으니 교회 차를 이용하기도 어려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성가대 총무인 심뽀리 집사께서 다른 일정때문에 오페라는 볼 수 없으나, 데려다 주는 수고는 자원했다. 3명이란 숫자는 그랜저의 안락함을 만끽하기에 완전한 구성이었다.
돌아오는 길이 걱정이었는데, 이번에는 세 명 중의 한 분인 김근자 권사님의 사위이자 티켓 제공자인 이정근 집사가 바쁜 일을 마무리하고 국립극장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데려와 주었다. 공연 외적인 측면에서 볼 때, 평생동안 가장 호강한 음악회였다. ^^
내용으로 가 보자.
남대문 교회의 전도사였던 맹의순은 장로의 아들(평양 장대현교회 맹관호 장로의 차남. 1926년생. 형제/어머니를 다 여의고 아버지와 단 둘이 1946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로서 신학을 공부하다가 (한국 신학 대학 3학년) 어느 주일날 오전부터 무의촌에서 학생들(중등부 담당)을 인솔하고 의료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 날, 625가 발발하고 (부친 맹관호 장로는 납북되었고) 인민군으로부터 빠져나온 피난길에서 오히려 UN군에 의해 잡혀 (대구 북서방5리 지점에서 매복중이던 미군의 오해로) 전쟁포로가 된다. 그 과정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후배 (용기)의 억울한 죽음을 보며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약해져, 거제도 포로 수용소 (지금의 부산 연제구 중앙대로 12001)에서는 여전히 봉사와 전도를 하지만 초점과 열정 없이, 하나님에 대한 무기력한 복종만이 있을 뿐이었다.(사람의 관점으로는 이보다 더한 삶이 어디있을까... 이해가 된다.)
그러다 어느 소년병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하나님께서 그를 왜 그 곳에 보내셨는지에 대한 소명을 깨달아 중공군 포로들을 위한 희생과 섬김을 다하다가 (수용소에서 '광야교회'를 1950년 12월에 창립하여 별세 때까지 목회), 석방 하루 전에 폭동 주도자들에 의해 중공군 포로를 대신해 죽게 된다.(남대문교회의 자료에 의하면 1952년 석방 하루 전인 8월11일에 수용소에서 '뇌막염'으로 별세한 것으로 나온다. 그는 쓰러진 상태에서도 시편 23편을 외우면서 5절의 '내 잔이 넘치나이다'를 반복해서 외웠다고 한다. 2018년에 총회에 의해 순직자로 지정되었다.)
오페라 내내 무척 은혜롭고 아름다운 노래들이 계속 되지만, 가장 압권은 맹의순의 신앙을 회복시킨 소년병의 찬양이었다. 그 곡을 오랫동안 찾아 헤매다가, 여러 꼼수를 통해 직접 녹음을 해서 여기 올린다.
함께 공연을 참관했던 김권사님과 황운채 집사님의 은혜를 되살리게 하고, 다른 대원들이 그 은혜를 함께 나누길 바라는 마음으로 오랜만에 재주 좀 피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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