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든 것을 가진 자
성경 본문 - 고린도후서 6:10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김성은 목사
- 갈렙선교회 대표
- 탈북민 1,026명 구조 지원
- 「비욘드 유토피아」,「'끝까지 간다' 주성이」,「천국의 국경을 넘다」 외 다수 출연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목사는 군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뒤 기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엔지니어로, 대기업에서 10년간 근무했다. 그는 2000년 초 중국에 갔다가 탈북민 구조활동에 나섰고, 지금까지 구출해서 한국에 데려온 탈북민이 1천여 명에 이른다.
갈렙선교회에서 처음으로 구조한 북한이탈주민은 2000년 박에스더 씨로, 이후 김성은 목사와 결혼하여 현재는 같은 건물에 위치한 천안서평교회의 목사로 재직하고 있다.
북한이탈주민 선교를 위해 쉰들러 사역을 하고 있는 갈렙선교회
저는 탈북민을 구조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갈렙선교회의 대표입니다.
주로 북한이탈주민에 대한 선교를 목표로 탈북 사역 및 중국과 제3 국에서 국적 없이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는 탈북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쉰들러 사역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청년 시절에 탈북민 사역의 소명을 받았는데, 이제 벌써 환갑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탈북민 사역을 하며 느낀 점 중 하나는, 대한민국 내에서도 세대별로 북한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어르신들은 “우리도 그때 그렇게 살았다”라고 공감하시지만, 젊은 세대는 “북한이 뭔데요?”라며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북한의 실상을 모르는 경우도 많습니다.
얼마 전 연천의 군부대에서 강의를 했을 때, 한 국군 장병이 북한의 영상을 보고 “정말 저런 나라가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바로 우리 국경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북한의 현실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보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세대 간의 인식 차이가 크지만, 오늘 제 이야기를 통해 모든 세대가 북한의 현실을 이해하고 함께 기도하며 동참해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도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로마서 9장 3절 말씀처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는 심정으로 북한 사역에 임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김정은 정권 아래에서 외부 세계와 철저히 단절되어 있습니다. 북한 정권은 스스로를 신격화하며, 주민들을 하나님 대신 우상 숭배로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인터넷은 차단되어 있으며,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등 모든 매체가 단 하나의 채널만 허용됩니다. 그들은 외부 정보에 접근할 수 없으며, 오직 정권이 허락한 정보만 접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30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굶주림으로 사망했습니다. 지금도 북한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난 속에서 살아가며, 약 600만 명이 의식주조차 해결하지 못한 채 거대한 감옥과 같은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30명의 학생이 처벌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기독교는 철저히 금지된 영역이며, 하나님을 알 기회조차 없습니다. 이러한 영적 어둠 속에서 사는 북한 동포들의 현실은 지구상에서 가장 안타까운 비극 중 하나입니다.
지방의 가난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생계를 위해 일했습니다
저는 1965년생으로, 대한민국의 1인당 GDP가 150달러 수준이던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아버지께서 서울에서 사업에 실패하시면서 가족은 전북 군산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부도를 맞았고, 우리 가족은 야반도주하듯이 야간열차 비둘기호를 타고 군산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우리 가족은 군산 변두리의 아주 작은 무허가 초가집에서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군산에서는 일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40대였는데, 모든 의욕을 잃으셔서 아예 일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생계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와 제가 책임져야 했습니다.
당시의 대한민국은 가난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대부터 이어진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저희 어머니는 늘 하나님께 의지하며, 새벽예배를 드리고, 11조를 절대 떼어먹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의 그러한 신앙과 헌신은 지금 제 사역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육성회비 독촉을 받으실 때마다 “내일모레”라고 미루시다가 종국에는 “나를 팔아라”며 속상해하시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새벽기도회에 가실 때 저는 신문과 우유 배달 등의 아르바이트를 하며 가족을 도왔습니다.
중학교 방학 때는 고깃배를 탔습니다. 대만 앞바다까지 가는 배였습니다. 당시 일반인이 직장에 들어가면 한 달 급여가 3만∼4만 원이었는데, 고깃배를 타면 보름 정도 일하고 15만∼30만 원을 받았습니다. 상당히 좋은 수입이었습니다. 고깃배에서는 선원들을 위해 밥 짓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깊은 바다에 나간 고깃배에서는 산에서 그러하듯이 밥이 제대로 안 됐습니다. 맨 위는 설익고, 중간은 죽 상태, 맨 아래는 까맣게 타는 삼층밥이 되었죠. 선원들이 밥도 제대로 못 하느냐면서 나를 때리곤 했습니다. 바다에서는 고기가 들어있는 그물에 상어들이 몰려들곤 하는데, 선원들은 내 몸을 들어 올려 바다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나는 키가 작은데, 중학교 때는 더 왜소했습니다. 선원들의 그런 위협은 장난이기도 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엄청나게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그 서러움 속에서 밤마다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원망 섞인 기도를 드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없으셨습니다.
그 시절 대한민국은 가난했지만, 북한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있었습니다. 남한은 해외 선교사들이 전쟁 복구를 도왔고, 부모님의 신앙은 뜨거웠습니다. 반면 북한은 우상 숭배로 땅이 저주를 받아 해마다 소출이 적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았어도 모든 풍요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탈북민 구조에 나서다
2000년 1월 1일, 은사 목사님의 제안으로 북중 국경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목사님과 함께 중국 투먼(圖們)에 갔습니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처음으로 중국 쪽에서 두만강을 봤는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부르시던 '두만강 노래'에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는 가사가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푸른 물이 아니었습니다. 근처의 무산광산에서 흘러나오는 석탄 물 때문에 강물이 시커먼 색깔이었고 뱃사공도 없었습니다. 북한 쪽 산은 높은데,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풀뿌리까지 다 캐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걸 보니 눈물이 나왔습니다.
어느 날 두만강 변에 갔는데, 5∼6세로 보이는 한 아이가 내 손을 잡고는 "고저 같은 민족끼리 같이 삽시다"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10살은 됐지만 못 먹어서 덩치가 작은 북한 꽃제비였습니다. 그 아이는 내가 남한에서 온 것을 알아보고는 그렇게 구걸을 한 것이었습니다. 약간의 돈을 그 아이에게 줬더니 갑자기 내 주변에 20명이 넘는 꽃제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해서 탈북민 구조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만나 갈렙선교회를 설립하다
그때 북한을 탈출한 여성이 하나 있었는데, 제가 중국에서 섬기던 교회로 숨어 들어왔습니다. 지금 저를 보시면 아시다시피, 키가 작고 배가 좀 넓지요? 그 여성이 저를 보더니, “고저, 우리 장군님 닮으셨습니다!” 하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이 말이 최고의 칭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사람도 그녀의 눈에 좋게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함께 성경 공부도 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서로 가까워졌습니다. 그 여성의 아버지는 과학자였고, 유학도 다녀온 엘리트였지만 고난의 행군 때, 굶어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을 때는 조국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아버지가 죽으니, 눈이 확 돌아갔다고 합니다. 여기 계속 있으면 어머니도 죽을 것 같아 탈북해서 나왔는데, 하필 저를 만난 것입니다. 서로 호감이 생겼고, 저는 이 여성을 한국으로 보내서, 신학교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한국으로 데려오려고 몽골 사막을 뒤졌고, 동남아 밀림을 수도 없이 다녔습니다. 그녀가 한국에 온 과정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그녀는 허무하게도 2시간 만에 비행기로 한국에 오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한국에 온 아내가 저한테 고백을 했습니다. 탈북하다 잡히면 본인만 아니라 가족들이 모두 위험해지기 때문에 혼자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하나님의 뜻이라면 한국 가서 신학을 하겠습니다. 이 민족을 위해 저를 써주시고, 신학교를 보내주세요. 그리고 하나님, 저는 몽골이 어딘지, 동남아가 어딘지 모릅니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면 비행기를 타고 2시간 안에 가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가 태평양에서 배를 타고 기도할 때는 응답이 없으시던 하나님이 그녀가 기도할 때는 바로 응답해 주신 겁니다.
사실 아내 기도가 응답될 줄 알았으면, 몽골 사막과 동남아 밀림을 조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걸 통해 탈북 루트를 알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탈북 사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탈북민 여성 한 분과 함께 성경 공부를 하며 교제하게 되었고, 지금의 아내인 그녀를 남한으로 데려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결국 비행기를 타고 남한으로 올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저는 다양한 탈북 루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1032명의 탈북민을 도울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온 아내와 저는 탈북민을 섬기기 위해 갈렙선교회를 설립하고, 아내는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북중 지역 두만강과 압록강을 다니면서 탈북민 구출과 복음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을 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많이 팔려갔습니다. 두만강을 넘다가 죽은 사람도 굉장히 많았습니다. 시체가 떠내려오면 중국 군인들이 긴 대나무로 북한 쪽으로 밀어냅니다. 그러면 북한 군인들도 긴 막대기로 다시 중국으로 보냅니다. 중국은 자국민이 아니니까 떠밀 수 있지만, 북한 군인들은 조국을 배반했으니 우리 인민이 아니라며 떠밀었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중국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참혹한 일을 겪습니다. 중국에서 체포되면 북송되고, 여성들은 인신매매로 팔려가며 성적 학대를 받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탈북자 신분이어서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 합니다. 탈북한 여성은 중국에서 인신매매단에 의해 성매매 업소에 팔려가기도 합니다. 14세의 탈북 소녀가 68세 중국 노인에 팔려가 아이 낳기도 하였습니다. 장기 적출을 당한 탈북민의 시체가 두만강에서 떠내려오는 일도 있습니다.
아내는 밥을 먹을 때마다 굶어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울먹이곤 합니다. 이러한 트라우마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탈북민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갈렙선교회는 동남아에서 탈북민들을 3개월간 영적 훈련을 시킨 후 남한으로 데려오고 있습니다.
갈렙선교회 사역들과 열매
탈북민들이 북한 내에서 국경에 도착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고, 다행히 두만강을 넘어도 메콩강을 건너 1만 km의 고단한 여정을 거쳐야,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올 수 있습니다. 북한 주민들은 외부와 정보가 차단되어 있어서, NGO 단체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러한 여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렵게 한국에 와서도, 그동안 겪은 일들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갈렙선교회에서는 탈북 인도를 도와주는 것뿐만 아니라, 영적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3개월 동안 동남아에서 성경 공부를 시키고, 인격적인 예수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초창기 탈북민들이 탈북하고 나서, 바로 잡히는 경우가 많았는데, 바로 북한에서 입고 온 옷이 표가 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20년 전에 우리 교회 성도들과 사모가 한국 아파트에서 옷을 주어다가 사이즈별로 세탁을 하고, 이민 가방에 꽉 채우면 40-50kg 나가는데, 이걸 3개 정도 들고 중국으로 가서 탈북민에게 입혔습니다. 그게 첫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탈북자 옷을 가지고 가다가 두만강변 얼음판에서 넘어져 추간판이 탈골되었습니다. 9시간 30분 동안 수술을 받고, 목에 6개의 철심을 박은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중국 블랙리스트에 올라 중국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탈북민을 데리고 밀림을 헤쳐 나가다 절벽에서 떨어져 담낭이 파손돼 수술받기도 했습니다. 허리 수술만 7번을 받았으며 현재도 장애로 인해 진통제를 맞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며 탈북민을 돕고 있습니다.
탈북민 사역은 단순한 구조 활동을 넘어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고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경험과 고난을 사역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와 형제들, 그리고 조카들까지 제 사역을 돕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저는 중국에서 사역을 하다가 공안에 체포되어 수감된 적도 있으며, 제 어머니 역시 탈북민을 돕다가 중국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어머니께서는 76세의 나이에 한 달 동안 찬송을 부르며 감옥에서 믿음을 지키셨고, 결국 정신 이상으로 오해를 받아 석방되고 추방당하셨습니다.
사역 중 가장 힘든 순간은 첫아이가 7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이었습니다. 우리 부부의 첫 아이는 뇌 병변 장애를 갖고 있었는데, 우리가 탈북민 지원 자금을 얻기 위해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7살의 어린 나이로 숨졌습니다. 아내는 큰 슬픔에 빠져 죽기를 원하며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 하나님의 크신 슬픔을 깨닫고 사역에 다시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특히 꽃제비(길거리 아동)들을 구조하는 일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첫아이를 잃은 후, 처음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생명을 구하고 사람을 살리겠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내 자식을 데려갑니까?” 한국에 와서 첫아들을 낳은 아내가 “하나님, 사무엘 같이 키우겠습니다.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겠습니다” 하고 키운 큰아이를 하나님이 데려가시니까, 아내는 죽고 싶다는 겁니다. 아내가 저에게 “여보, 나 오늘부터 40일 금식이야.” 지금 슬픔도 이기지 못하는데, 금식은 안 해야 할 것 같다고 말렸습니다. 게다가 아내 금식 제목이 기가 막혔습니다. ‘하나님, 40일 금식하는 동안 저도 데려가십시오. 저는 예수 만나고, 천국을 소망하기에 아무 미련도 없습니다.’ 아내의 금식기도가 20일이 되었는데, “여보, 밥 먹읍시다.” 하는 겁니다. 아내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을 보았는데, 지옥으로 셀 수 없이 무리 지어 가는 사람들을 봤다는 겁니다. “하나님, 뭐예요?” 물어보니, 로마서 9장 3절에 ‘너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다.’ 하셨답니다. 북한의 저 동족 형제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저 지옥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내 아들 하나도 가슴이 저리는데, 셀 수 없이 죽어가는 영혼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을 섬기고 고통받는 북한의 자녀들을 보게 하셨으니, 나의 슬픔은 하나님의 슬픔과 비교할 수 없다고 깨달았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에게 줄 사랑보다 더 큰 사랑으로 탈북민을 섬기자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큰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갈렙선교회가 꽃제비들을 가장 많이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북한의 노동교화소와 공개 재판, 고난의 행군 당시 인육 섭취 등 북한의 참혹한 현실을 영상으로 기록하며 증거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꽃제비를 구조할 때 아동 납치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한 방어 수단이 되었습니다. 저희가 북한 아이들을 데려와도 현재 국내법으로는 입양이 안 된다고 합니다. 법을 바꾸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나, 아직 개선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거리 아동들, 흔히 '꽃제비'라 불리는 아이들은 부모를 잃거나 굶주림 속에서 길거리에서 생존을 위해 구걸하며 살아갑니다. 2018년, 갈렙선교회는 장기 적출 밀매의 위험에 처한 두 아이를 구출했습니다. 이 아이들은 국경을 넘다가 중국으로 밀려들었고, 인신매매범들에 의해 끌려가던 상황이었습니다. 저희는 정보를 입수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국경 지역으로 들어가 구출 작전을 펼쳤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는 동안, 중국 공안과의 마주침을 피하기 위해 수일간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구출된 아이들은 한국으로 데려오기까지 수개월간 동남아의 한 보호소에서 지내며, 성경 공부와 상담을 통해 안정감을 찾았습니다. 현재 그 아이들은 한국에서 학업을 이어가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 탈북 여성은 북한에서 팔려가 중국의 농촌 마을에서 결혼 생활을 강요받았습니다. 그녀는 그곳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탈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녀는 갈렙선교회에 도움을 요청했고,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그녀와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 작전을 세웠습니다. 중국에서 인신매매범들의 감시를 뚫고 그녀를 보호하며, 아이와 함께 동남아를 통해 안전하게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자유와 기회를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눈물로 감사를 전했습니다. 그녀의 아들은 현재 한국의 한 중학교에 재학 중이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탈북 가족이 정착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는 북한에 있는 다른 가족을 데려오려고 온 힘을 쏟다 보니 생활이 너무 어려운 겁니다. 탈북민 숫자는 2000년 이후에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습니다. 탈북민이 많아지자 중국에서는 탈북민의 약점을 이용한 범죄가 증가하고, 조직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탈북 여성들이 먹잇감이 되어가던 중, 한 탈북민 청년이 배로 중국에서 데려오자고 해서, 레이더를 피할 수 있도록 목선을 사서, 거기에 고속엔진을 달아 중국에서 공해상으로 내려오고, 저는 한국에서 배를 타고 공해상으로 올라가 만나서, 탈북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거친 폭풍 속에서 목선을 타고 탈북민들을 구조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습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 위험한 작전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저희를 지켜주셨고, 그날 여러 명의 탈북민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습니다.
탈북민을 구출해 배를 타고 오면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김 목사, 나는 너의 어린 시절에 생선으로 맞으며 밤마다 눈물 흘리는 기도를 모른 척하지 않았다. 내가 들었다. 그 고난을 너에게 허락하는 내 마음이 아팠다. 오늘 배를 태우고 사람을 구출하는 네가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그 고난을 네게 허락했다. 너는 이제 고기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다.” 제가 어린 시절 고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마음이 생기니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고난 받는 분이 계실 텐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믿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고난을 받으시고 열매를 맺으시고, 분명히 역사하신다는 것을 저의 경험을 통해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말씀에 나오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기간 동안에는 탈북민들을 위해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집을 짓는 등 생활 기반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가 끝나니까 중국이 반간첩법을 만들어 탈북자를 도와주면 구속되고, 13년씩 감옥에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하려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탈북민을 구하는 비용이 10배로 올라버렸습니다. 과거 1명당 300만 원이던 비용이 10배로 증가하였습니다.
결국 탈북민 사역을 보류하고 공동체 사역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코로나 직전에 찍었던 ‘비욘드 유토피아’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선댄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알려져 영국 BBC방송에서 나오고, 미국 PBS 방송에서 100만이 봤다고 합니다. 하버드, 코넬 등 전 세계에서 저를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저는 전 세계를 다니게 된 것입니다. 선댄스 영화제는 독립영화제인데, 주로 동성애 등 소수자의 영화가 많이 출품되는 영화제입니다. 그런데 우리 영화는 기독교 영화인 데다, 그 내용을 보면 탈북자들이 기도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미국 사람들이 저희 영화를 보고 감동해서 후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10배로 오른 탈북 비용 때문에 구출 사역을 하지 못했는데, 하나님이 후원자를 확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지금 갈렙선교회가 3명을 구출하면, 2명은 미국분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갈렙선교회는 단순히 탈북민을 구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남한 사회에 정착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남한에 온 탈북민들은 여전히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일부는 극심한 외로움과 상처 속에서 삶을 포기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치유와 회복을 도울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희 갈렙선교회는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며, 더 많은 탈북민들이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은 비록 고난과 희생의 연속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루실 열매를 바라보며 앞으로도 나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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