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매일 자기 자신을 죽이는 사람이 어른이 됩니다.
사람은 생명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죽고 난 다음까지 호칭이 계속 바뀝니다. 엄마 뱃속에 생명이 잉태되면 ‘태아’라고 부릅니다. 아직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태아가 열 달이 지나 세상에 나와야 비로소 사람이 됩니다. 처음 태어나면 ‘영아(유아)’라고 부릅니다. (출생 직후부터 만 1세까지는 영아, 만 2세부터 만 5세까지는 유아) 조금 크면 ‘어린이’가 되고, 조금 더 지나면 ‘청소년’이 됩니다. 그다음에 ‘청년’, ‘중년’, ‘장년’이 됩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으면 ‘시체’라고 부르지,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영아, 유아, 어린이, 청소년, 청년, 중년, 장년으로 가는 과정까지는 순서가 같습니다. 그런데 장년이 되어 60세가 딱 되는 고비를 넘으면, 그다음 호칭이 갈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노인’이라고 불리고, 어떤 사람은 ‘어른’이라고 불립니다.
'노인'은 집안에 있으면 건강하면 건강할수록 가족들이 괴롭습니다. 평생 자기를 죽이는 법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더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야 하니까 주변 사람이 힘들어집니다. 세월이 흐르면,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노인’이 됩니다. ‘어른’은 누가 되느냐 하면,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면서 사는 사람이 나이 들어서 어른이 됩니다.
매일매일 자기를 죽인다는 것은, 곧 상대를 배려하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젊었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하게 되고, 젊었을 때 품지 못했던 다른 사람의 부분을 품게 되고, 젊었을 때 열지 못했던 지갑도 열게 되는 것입니다. 어른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해서부터 계속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며 사는 사람이, 결과적으로 나이 들어서 어른이 됩니다. 어른은 병이 들어 운신을 못하고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있어도, 그 주위에 사람들이 늘 붐빕니다. 어른은 얼굴만 보아도, 목소리만 들어도, 사람들이 위로와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결혼식은 배우자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예식입니다.
결혼은 ‘알기 시작하는’ 예식입니다. 거의 모든 커플이 결혼할 때, 상대를 다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속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태어나서 부모와 함께 몇십 년을 살아도, 부모를 다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같은 피를 나누고 살을 부대끼며 살아온 부모도 잘 모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몇 년 교제하고 결혼한다고 상대를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혼하기 전까지 상대를 안다고 여겼던 것은, “내 배우자는 이런 사람일 거야” 하고 스스로 상상한 허상(虛像) 일 가능성이 큽니다. 결혼이란 그 허상을 깨뜨리는 예식입니다. 결혼하는 순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실상(實狀) 임을 깨닫고, 겸손하게 매일매일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결혼 전까지 가졌던 허상을 진짜라고 여기고 평생 붙잡고 삽니다. 그러니 “결혼하고 변했다”거나 “날 속였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허상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제가 30여 년간 목회를 하면서 많은 부부와 상담해 왔는데, 공통된 점은 부부가 신앙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남편을 잘 안다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아내가 남편을 잘 모르고, 남편 역시 아내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결혼하는 순간 “우리는 서로 다 알았다”라고 속단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허상을 붙잡고 사니 날마다 불만이 생기고 갈등이 생깁니다.
결혼은 내가 이제부터 ‘알기 시작한다’라는 것을 깨닫고, 겸손하게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알아가면, 해를 거듭하며 살수록 “내 아내의 마음이 정말 깊구나” 하고 깨닫고, “내 남편의 생각이 정말 고귀하구나” 하고 존중하게 됩니다. 매일매일 알아가려는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운 아내와 새로운 남편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 1절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여기에 “동침”이라는 단어를 주목하시면, 성경(개역개정)에서 그 단어 앞에 숫자 ‘1’이 붙어 주석으로 “알다”라고 설명합니다. 히브리어로 “야다(yada)”라는 동사는 ‘남자와 여자가 동침한다’는 뜻과 동시에 ‘알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면서도 서로를 진심으로 알기 위한 겸손과 기쁨이 없다면, 단지 육체적으로 동거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오직 남편과 아내만이 한 몸을 이루고 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동침할 때, 서로를 더 깊이 알아가게 되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결혼은 서로의 ‘성(性)’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본문을 주의 깊게 보시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남성성만 지니신 분이라면, 남자만 창조하셨을 것이고, 여성성만 지니신 분이라면, 여자만 창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시므로, 남자와 여자를 모두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도록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을 묶어 주심으로,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회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결혼의 신비입니다.
그렇다면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결혼기념일마다 다이아몬드를 선물하는 것으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부어주신 ‘여성성’을 지켜주는 것이 남편이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자가 여성성을 온전히 지키고 있어야, 좋은 아내가 되고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결혼한 뒤, 아내를 자기 마음대로 부리면서 여성성을 훼손해 버립니다. 여성성을 잃어버린 아내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수족’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돕는 배필’이 될 수 없습니다.
여성성의 특징은 부드러움과 섬세함입니다. 이것은 그 가치를 인정해 주고 소중하게 지켜 주는 남편의 사랑 속에서만 온전히 꽃이 핍니다. 만약 남편이 아내의 여성성을 인정해 주지 않으면, 그 여성성은 상실되고 맙니다.
이제 제 개인적인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3년 동안 혼자 스위스 제네바 한인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교회는 20년 동안 담임목사가 없어서, 제게 “3년 동안 봉급 100%를 못 드리지만, 가족은 한국에 두고 혼자서 교회를 도와달라”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안 가는 사역지이기에, 제게 주님께서 주신 부르심이라 확신하고 가기로 했습니다.
아내에게 “내가 가면 당신은 3년 동안 아이 네 명을 혼자 키워야 하는데 괜찮겠느냐”라고 물었더니, 아내가 “당신이 다녀오라. 아이들은 내가 책임지겠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네바로 떠났고, 3년 동안 방학이 되면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제네바에 왔다가 개학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살았습니다.
그렇게 6개월마다 한 번씩 왔는데, 처음 왔을 때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 올 때 점점 다른 모습이 보이는데, 한 번은 공항에서 아내가 걸어 나오는데, 제가 알던 ‘여성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무슨 전사(戰士) 같은 모습으로 나오더군요. 아이 네 명을 데리고 생활하다 보니, 여성성을 지킬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네 번째 방학 때, 제네바에 와서 함께 식사 초대를 받았는데, 아내가 평소엔 하지 않던 귀걸이를 하고 나오는 겁니다. 그것도 서울 홍대 앞 노점에서 파는 플라스틱 귀걸이였습니다. 아내가 6개월 넘게 남편 없이 지내면서 스스로 여성성이 고갈되는 것을 느끼고, ‘한 번이라도 나를 예쁘게 꾸며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 귀걸이를 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남편에게 예쁘다고 인정받고 싶었던 것인데, 제가 첫마디로 “그거 빼면 안 돼?”라고 말했습니다. 아내 표정이 처참해지더군요. 그 사정을 알고 나니, 제가 너무 미안했습니다.
다섯 번째 방학을 앞두고, 제가 런던을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비행기 잡지에서 여성용 장신구 카탈로그를 보고 80달러 정도 하는 진주 귀걸이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오기 전에 옷장 안에 넣어 두었습니다. 아내가 도착해서 그걸 발견하고는, “여보, 나 귀 뚫어도 돼?” 하고 묻더군요. 그 귀걸이는 실제로 귀를 뚫어야 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럼, 하자” 하고 함께 스위스에서 귀를 뚫었습니다.
제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옷을 입을 때, ‘이런 거 입어도 되느냐’고 내게 묻지 말고, 당신이 입고 싶은 대로 입으시오.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왜냐하면, 아내가 여성성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최희준 씨가 부른 노래 가사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스무 살 처녀 때는 수줍던 내 아내가, 첫아이 낳더니 이만한 고양이로 변했네, 눈밑에 잔주름이 늘어나니 무서운 호랑이로 변했네.” 만약 여러분의 아내가 지금 무서운 호랑이가 되어 있다면, 그것은 남편인 내가 아내의 여성성을 지켜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성성을 잃으면, 어떻게 아내가 남편의 돕는 배필이 될 수 있겠습니까?
반대로 아내가 남편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편에게 부어주신 남성성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텔레비전을 보면, 여성화된 남자들이 인기가 많지만, 그런 남자들은 가정의 책임을 온전히 지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남성성은 너그러움이 특징입니다. 남편이 결혼해 점점 마음이 좁아져 간다면, 아내가 남편의 남성성을 짓밟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남성성을 존중해 주는 것은, “당신이 우리 가정의 머리입니다”라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의 마음은 점점 더 너그러워지고 커집니다. 밖에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면 아내와 아이들이 “아빠 최고!” 하며 반겨주면, 남편의 남성성은 더욱 확장됩니다.
만약 내 아내가 할머니가 되었는데도, 석양을 보며 봄에 피는 들꽃을 보면서 감격해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여성성을 곱게 간직하고 있다면, 그 남편은 아내를 진정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내 남편이 할아버지가 되었는데도, 그 마음이 태평양처럼 넓은 어른이 되었다면, 그 아내는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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