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유치장에서 만난 한 청년
80년대 말에 제가 이틀 동안 서울 마포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살을 에는 듯한 한파가 몰아치던 한겨울이었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유치장에 들어갔으니 편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 좁은 유치장 안에 많은 사람이 갇혀 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다들 옆으로 몸을 붙여 ‘칼잠’을 청하듯 자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습니다.
새벽 한 세 시쯤 되었을 때, 유치장 철문이 덜커덩 하고 열렸습니다. 한 청년이 새벽에 그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새벽이라 사람들은 웅성거릴 수도 없고, 조용히 있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유치장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구치소로 이송되거나, 즉결 처분을 받으러 나가고, 결국에는 그 새벽에 들어온 청년과 저, 두 사람만 남게 되었습니다.
혹시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어 본 경험이 있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경찰서 유치장에서는 외부 식당에서 음식을 시켜 먹을 수 있습니다. 그곳 경찰관이 근처 한식당 전화번호를 주었습니다. 제가 육개장 두 그릇을 시켜서 그 청년과 함께 먹었습니다. 그러자 청년의 마음이 열렸는지, 자기가 왜 지금 마포경찰서 유치장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털어놓았습니다.
그 청년은 마포구에 있는 한 동네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는 저녁만 되면 동네 어른들과 고스톱을 치곤 했답니다. 며칠 전에도 늘 함께 고스톱을 치던 동네 어른들과 게임을 했는데, 아주 사소한 시비가 붙으면서 싸움이 벌어졌다고 했습니다. 상대 어른은 주먹을 잘 쓰는 분이었습니다. 그가 이 청년을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고, 청년은 맞다가 땅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더니 그 어른이 청년의 목을 조르려는 듯 위에서 덮쳤답니다.
정말 1초 남짓한 순간에, 청년의 머릿속에 “아, 저 사람이 내 위로 덮치면 나는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고 합니다. 그때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는데, 고스톱 치면서 과일을 깎아 먹던 과도가 손에 잡혔습니다. 그 칼을 상대방 가슴께로 들이댔는데, 그 어른이 그대로 칼 위로 엎어지면서 “푹” 하고 옆으로 쓰러졌습니다. 피가 낭자하게 흘렀고, 청년이 보니 이미 그분이 죽은 상태였습니다.
도망과 절망, 그리고 마지막 기도의 갈망
청년은 너무 놀라서, 신고도 못 하고 현관문을 뛰쳐나와 무작정 달렸습니다. 한참 달리고 보니 강남 시외버스 터미널이더랍니다. 거기서 제일 먼저 출발하는 버스 표를 사서 그 버스에 올라탔는데, 그곳이 ‘김제’로 가는 버스였습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였지만, 청년은 무작정 김제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청년이 아내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그 사람, 죽었냐?” 하고 물었습니다. 사실 칼을 가슴에 댄 순간, 완전히 찔리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기에, 아내로부터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내가 “죽었다”라고 대답하자, 이 청년은 살인자가 된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살 이유도, 살 소망도 없어졌다고 느꼈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김제 시내 약국이라는 약국은 다 찾아다니며 수면제를 사모았다고 합니다. 저녁 무렵 김제에 흐르는 어느 천(川) 근처 포장마차에 들어가, 소주를 한두 병 마시고, 마지막에는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 죽을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당시 지방 교회들은 수요일 저녁 예배 시간이면 종을 칠 수 있었습니다. 언덕 위 작은 교회당에서 울리는 수요예배의 종소리였습니다.
청년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지만, 마포구 동네에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추수감사절 때 교회에 와서 사탕이나 얻어먹던 기억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막 소주를 더 마시고 수면제를 삼켜 죽을 참이었는데, ‘그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죽을 몸, 죽기 전에 하나님이라는 분께 기도라도 한 번 하고 죽자’ 하는 심정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종소리를 따라 자그마한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교회에서의 차가운 반응과 그 후의 전개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추운 겨울밤, 그 작은 교회 안에는 석탄이 활활 타는 화로가 놓여 있어, 따뜻한 열기가 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청년이 들어오니, 입에서 나는 술 냄새가 화로의 열기에 더 확산되어 금세 예배당 안에 퍼졌습니다. 청년은 제일 뒷자리에 앉았습니다. 수요 성경 공부를 하던 교인들은, 처음 보는 젊은이가 술 냄새를 진동시키며 뒤에 앉아 있으니 고개를 돌려서 쳐다봤습니다. 한두 번 본 것이 아니라, 계속 째려보듯이 쳐다봤다고 합니다.
어떤 성도 한 분이 젊은 교역자를 불러 “저 술 취한 사람 혹시 예배 중에 물건 훔쳐 갈지 모르니 감시 좀 해라”라고 귀띔했고, 그 교역자는 앞으로 나가 청년 쪽을 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청년은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과 교역자의 감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예배당을 나왔습니다. 다시 소주를 여러 병 사서 여인숙에 들어갔고, 소주를 진탕 마신 뒤 마지막 잔과 함께 주머니에서 모아둔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안 죽었더랍니다. 여인숙 이불 위에 수면제가 다 흩어져 있었습니다. 취해서 삼킨다고 삼켰는데, 제대로 삼키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시 죽을 용기가 나지 않아, 결국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 앞으로 기약 없는 도피생활을 해야 되는데, 돈이 떨어졌다. 나한테 돈 좀 가져다줘.” 그러자 아내가 “그래, 대구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만나자. 거기로 가져갈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곧장 마포경찰서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살인 사건 주범이 내 남편인데, 내가 지금 만나러 가기로 했다. 내가 대신 자수하는 꼴이니까, 남편이 자수한 것으로 참작해 달라. 함께 대구에 가서 남편을 잡자.’ 경찰과 함께 대구로 간 아내는, 아무것도 모른 채 돈을 받으러 나올 남편을 현장에서 붙잡았습니다. 그리고 그날로 청년은 서울로 압송되어, 제가 있던 마포경찰서 유치장 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저는 경찰서를 나오게 되면서, 제가 갖고 있던 성경책을 그 청년에게 건네주었습니다. 이후 그 청년은 정상이 참작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을 마친 뒤, 제가 목회하던 교회의 교인으로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진정한 교회란 무엇이며 어떤 곳일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청년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이라는 분께 기도라도 해 보고 죽으려고 그 교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의 시선에 쫓겨났습니다. 그날 술에 취해 제대로 수면제를 삼키지 못해 살아남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제대로 삼켜 죽었다면 어땠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 청년의 생명을 누구에게 물으셨을까요? 분명, 그 교회의 교인들에게 물으셨을 것입니다.
그날 추운 겨울밤, 수요예배에 참석해 목사님의 설교를 듣던 교인들은 얼마나 ‘신실한’ 크리스천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죽으려는 마지막 순간에 교회로 들어온 청년을 쫓아낸 그 교인들이, 아무리 십일조를 많이 하고, 아무리 봉사를 열심히 한다 해도 주님 보시기에 과연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청년을 쫓아낸 그 교회가, 주님의 몸 된 교회일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지금 이처럼 아름다운 교회당에 우리가 모여 말씀을 듣고 있는데, 만약 지금 이 순간 문이 열리고,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비틀대는 누군가가 들어와 우리 곁에 앉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함께 예배드리겠습니까, 아니면 김제의 그 교회와 똑같이 쫓아내겠습니까? 누군가 “형제님, 혹시 무슨 일로 이렇게 술에 취한 채 교회에 오셨나요? 제게 말씀해 보시지요” 하고 다가갈 수 있을까요?
제자들의 경쟁과 교회에서의 거짓 소문 경계 - 요한복음의 경고
어제는 사복음서의 마지막 결론 장이자,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과 베드로가 나눈 대화를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대로 다녔지만, 이제 늙으면 두 팔을 벌려야 한다. 남이 네게 띠를 띠어 원하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순교당할 것임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곧 요한을 보았습니다(‘블레포’, 곧 주목하여 본다는 뜻). 그러면서 예수님께 “주님, 그 사람(요한)은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평소에 서로 라이벌 관계처럼 지내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올 때까지 요한을 살려 둔다 하더라도, 그게 너에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대답하십니다(요한복음 21장 22절).
그런데 요한복음 21장 23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그 말씀(“만약 내가 그를 재림 때까지 머물게 한다 하더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이 제자들 사이에 ‘요한은 죽지 않는다’라는 거짓 소문으로 퍼져 나갔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던 제자들 사이에서조차 거짓 소문이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자신의 복음을 마무리하면서, 그들이 퍼뜨린 거짓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께서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 가정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라고 일일이 정정해 놓았습니다. 복음서의 마지막 결론이자, 교회가 태동하는 사도행전 직전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만큼 ‘교회’가 거짓 소문, 시기, 질투, 모함의 온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루는 사람들이 정말 ‘주님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 않으면, 아무리 많이 모여도, 아무리 열심이 특심해도, 서로의 시기와 질투가 부딪히면서 거짓 이야기가 퍼지기 십상입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 하신 분이라면, 거짓 소문 때문에 고통받은 경험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 - 겸손한 섬김의 삶
베드로가 순교자로 부름받을 것을 들었을 때, “그럼 요한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묻는 모습에서, 제자들끼리도 라이벌 의식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려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교회 안에서 늘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떠돌기 마련입니다. 복음서 마지막, 그리고 사도행전 시작부가 전하는 교훈은 이렇습니다. “그건 너에게 달린 일이 아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가 교회를 어떤 자세로 일구어야 하고, 교회가 무엇인지, 나는 과연 바른 교회의 일원으로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건물도, 제도도 아니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敎會: 가르칠 교(敎) + 모일 회(會)). 그렇다면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란 구체적으로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마태복음 16장 16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반석 같은 고백 위에 “내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때 ‘내 교회’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리 교회, 너희 교회’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주인 되시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을 주인으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 가치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는 시기나 질투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보십시오. 대부분 ‘봉사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 때문에 싸움이 생기던가요? 아니면, ‘봉사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분란이 생기던가요? 보통은 후자입니다.
성경의 헬라어로 ‘악(惡)’을 가리키는 단어 ‘포네로스(πονηρός)’는, ‘바쁘다’를 뜻하는 동사 ‘포네오(πονέω)’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정말 여기저기 바쁘게 봉사하는 분들 가운데, 사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네 자신을 부인하라”는 명령을 외면하고, 오히려 ‘내 가치를 구현하려고’ 뛰어다니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교회라는 공간만 바뀌었을 뿐, 세상에서 늘 하던 방식을 그대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기와 질투를 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헌금이나 봉사를 많이 해도, 먼저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나를 따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가복음 8장 34절)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내 목숨’을 걸 때, 주님께 걸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썩어 없어질 나에게 목숨을 거는 것은 결국 사망으로 끝날 것이고, 주님께 목숨을 걸 때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예수님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증인(μάρτυς, 마르투스)이 된다는 것은, 내 목숨을 걸 만한 분이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삶입니다. 그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마가복음 10장 42절에서 45절에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이 권세를 부리는 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세상의 집권자들은 ‘높은 자리에 앉아 군림하는 것’을 크다고 생각하지만, 교회 안에서는 ‘섬김과 낮아짐’이 참된 위대함이라고 예수님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시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짐승의 밥통인 구유(짚통)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가장 수치스러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물이 되셨습니다.
특히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길 내 몸이요, 흘릴 내 피다” 하시며 성찬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내 사명은 끝났으니, 너희들 차례대로 와서 내 발을 씻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 발을 씻으려면, 물동이를 들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왜 오셨고,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리에서 섬겨야 하는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 주님의 모습을 증언하며, 그분을 따라 실제 삶에서 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속한 교회가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땅끝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80년대 마포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한 청년의 비극적인 이야기는, 단순히 한 개인의 절망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특히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만듭니다. 죽기 전 마지막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우리가 과연 따뜻하게 받아들이고 위로할 수 있을지 자문해 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공동체로서, 형식과 관행이 아니라 진실한 사랑과 섬김의 실천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예배당 문턱을 넘을 때, 혹은 우리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아픔과 절박한 외침을 마주할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서로를 감싸 안고 섬기는 마음을 잊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작은 실천이, 주님의 사랑을 온전히 전하는 참된 교회로 나아가는 길이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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