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인생과 하나님의 때... 40년이 차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모세는 자기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의 고통 속에 있을 때에도 이집트 왕궁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이 마흔이 되던 해, 한 이집트 병사를 살인한 사건과 관련하여 어쩔 수 없이 이집트 왕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무작정 찾아간 곳은 미디안 광야였습니다. 최고·최대의 제국인 이집트 왕궁의 왕자 신분에서 하루아침에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로 추락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모세 역시 그 고달픈 삶에서 얼마나 빨리 벗어나고 싶었겠습니까.
그 모세에 대하여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 30절에서 32절을 통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40년이 차매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모세가 그 광경을 보고 놀랍게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가 있어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신대 모세가 무서워 감히 바라보지 못하더라.” 이는 하나님께서 비천한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에 불과했던 모세를 위대한 신앙 지도자, 곧 출애굽의 대지도자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그때 모세의 나이는 어느덧 여든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흔 살에 이집트 왕궁을 떠나 미디안에서 제2의 양치기 인생을 시작한 지 정확히 40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왜 하필 그때였을까요? 스데반은 그 까닭을 “40년이 차매”라고 말해줍니다. 그 기한을 정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다는 뜻입니다. 곧, 모세로 하여금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양치기의 삶을 살도록 결정하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 40년이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시고 당신의 위대한 도구로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와 인간의 조급함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도 동일한 메시지를 접하게 됩니다. 아무리 모세가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며 기도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40년이 차기 전까지는 광야 양치기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광야 생활을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모세가 자기 뜻대로, 자기 임의대로 광야를 벗어났다면, 하나님의 위대한 출애굽의 대지도자로 부름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3,50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그를 기억하거나 기릴 이유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가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 생활을 스스로 벗어던지고 임의로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면, 그는 3,500년 전 광야의 먼지로 의미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한평생을 살고도 영원 속에서 그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없다면, 그것보다 더 비참한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사도행전 7장 35절과 36절에서 이렇게 계속 증언합니다. “그들이 이르되 ‘누가 너를 관리와 재판장으로 세우려 하느냐’ 하여 거부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께서는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신 천사의 손으로 관리와 구원자로 보내셨으니, 이 사람이 그들을 이끌어 내어 이집트와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여든 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세는 이후로 이집트에서, 홍해에서, 광야에서 수없이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는 제3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만약 모세에게 그 제3의 인생이 없었다면, 성경 속에서 우리가 아는 모세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모세가 그 의미 있는 제3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40년에 걸친 미디안 광야의 양치기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훈련을 받는 제2의 인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훈련의 과정
그런데 왜 그 두 번째 인생의 길이가 꼭 40년이었을까요? 왜 20년도, 30년도, 50년도, 60년도 아닌 하필 40년이었을까요? 그것은 모세보다 모세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모세가 출애굽의 대지도자이자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에서 40년간의 훈련이 필요함을 정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한 뒤, 그 400년의 때가 가까워졌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들을 해방시키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왜 하필 400년이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하나님의 선민’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400년 동안 노예 생활이라는 가장 밑바닥 인생을 거치며 세상에서 가장 강인한 민족으로 연단되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3,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성과 애국심을 지닌 민족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우리나라 경상남·북도 정도의 면적밖에 되지 않는 이스라엘이, 그것도 아랍권 제국들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중동의 최강국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강림과 '하나님의 때'
성탄절 앞에는 대림절이 있습니다. 2천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모든 죄인을 죄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사건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인류에게 약속해 오신 하나님의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그 약속이 2천 년 전에 이루어졌을까요? 왜 1천 년 전이나 1,500년 전 혹은 그보다 더 훗날이 아니라 2천 년 전이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서 답해 줍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그 때를 정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을 인간 자신보다 더 잘 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죄 많은 인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당신을 계시해 보이실 가장 적합한 때가 바로 2천 년 전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2천 년 전에 오신 일 또한,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찼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며, 우리는 참으로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 그 약속이 우리의 삶 속에서 성취되는 시점을 결정하시는 분 또한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고 해서, 그 약속이 내가 정한 시간표대로, 반드시 내 생전에 전부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집착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는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는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참되게 믿는다면, 그 약속이 성취되는 때마저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영원’을 믿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한시적인 약속이 아니라 영원한 약속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을 때,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 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볼 수도 있지만, 훨씬 더 많은 약속들은 우리가 세상을 떠나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에 안긴 뒤에, 곧 영원 속에서 성취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관점에서 보아야 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한평생은 영원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깨닫고 믿을 때, 우리는 진정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되, 그 약속이 영원한 약속임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과 무덤마저도 그 영원한 약속을 위한 이정표로 삼았고, 그 결과 그들이 믿었던 약속은 영원 속에서 그들의 후손들의 삶 속에서 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졌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영원한 약속으로 믿을 때에야, 오늘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이 무엇인지 바르게 분별하고 실행할 수 있으며, 우리 후손들은 우리가 믿고 뿌린 그 약속의 씨앗이 맺은 열매를 영원 속에서 거두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만사의 때가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결국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때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영원한 약속임을 확고히 믿는 것입니다. 지혜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때를 정하시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성숙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맞이하는 매일 하루하루가 곧 영원의 일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신실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는 자답게, 오늘 내가 뿌려야 할 씨앗을 최선을 다해 뿌리는 것입니다.
무엇이 참된 ‘믿는 이’의 절정이겠습니까?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잘 아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행복한 그리스도인이겠습니까?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의 약속이 내가 정한 때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집착에서 해방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믿음의 조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믿은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그의 후손들의 삶 속에서 대를 이어가며 결실을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주님, 우리의 코끝에 호흡이 있는 동안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원합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하기 원합니다. 바른 분별력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진정 행복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예외 없이 영원한 약속임을 믿게 하여 주옵소서. 그 약속이 성취되는 시점을 결정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심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믿는 자답게, 오늘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을 최선을 다해 뿌리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심을 인정하게 하시고, 그 약속을 믿는 자로 날마다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믿는 그 약속의 열매를 우리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가며 거두게 하시고, 결과적으로 우리 모두가 참된 신앙의 선조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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