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에 각 언론 매체들은 기도와 관련된 희한한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제주도에 살고 있는 올해 52세 남자가 5년 전에 자기 집에 기도방을 만들었습니다. 집 안에 기도방을 별도로 만들 정도라면, 그 당사자의 신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막상 자신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당시 아직 어렸던 자신의 두 딸을 직접 만든 기도방에서 매일 기도하게 했습니다. 어린 두 딸이 무슨 특별한 영적 능력이 있거나, 혹은 그 두 딸에게 무언가 한이 맺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딸들이 남달리 영험하다고 확신했던 그 남자는, 어린 두 딸이 기도하면 경마에서 어떤 말이 우승할지 알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아버지의 강요로 인해, 어린 두 딸은 매일 새벽부터 밤 12시까지, 짧게는 하루 7시간, 길게는 하루 8시간씩 우승마를 맞히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2년 전부터는 아예 두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상상하기조차 힘든 끔찍한 생활을 그 기도방에서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동학대 등의 혐의로 그 아버지가 제주도지방경찰청에 체포됨과 동시에, 그 어린 두 딸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지난 5년 동안 그 어린 두 딸이 받은 영육 간의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슴 아프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욕구 성취의 도구로 전락한 기도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단지 경마에서 우승할 말을 알아맞히기 위해 두 딸에게 기도를 강요했던 그 한심한 남자는, 실상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됩니다. 그 남자에게 기도는 단지 경주마를 알아내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경주마를 알아맞히면 그날의 기도는 응답된 기도요,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응답받지 못한 기도였습니다. 이처럼 철저하게 자기 욕구 성취의 수단으로 전락한 기도를 5년이 아니라 50년을 계속한다고 해도, 그 기도하는 당사자나 그렇게 기도를 시킨 사람이 거룩하게 변화될 리는 만무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은 아닙니까. 그 남자에게 기도는 자신이 빠져 있는 경마에서 우승마를 알아맞히기 위한 수단이었듯이, 우리 또한 기도를 오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고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간주하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남자가 자기가 기도하는 대신 두 딸에게만 기도를 강요했다는 점을 제외하고, 그 남자와 우리 사이에 무슨 본질적인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우리 자신이나, 경주마를 알아맞히지 못했다고 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그 남자나, 근본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한심하게 여기는 그 남자나 우리 자신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다를 바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 기도가 이 세상은 고사하고 우리 자신마저도 소생시키지 못할 것임은 불을 보듯이 뻔하지 않습니까?
자기중심적 기도: 기도가 오직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면, 아무리 오랜 기간 지속해도 사람은 거룩해지거나 변화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드리는 기도 중에도 “내게 필요한 것만”을 구하는 순간, 본질적으로 그 기도가 자기 이익을 위한 주문에 불과하지 않은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기도 - 하나님과의 동행과 신뢰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 속 사도들은 기도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대체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명료하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위기 속에서의 기도
밤새 감옥에 구금되었다가 날이 새자 장시간에 걸친 재판 끝에 겨우 산헤드린 법정에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의 몸을 먼저 추스르려 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료들에게 가서, 동료들과 한마음으로 큰 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풀려난 두 사도에게 육체적 휴식이 시급해 보였던 그 순간에도, 그들은 자신의 몸을 돌보거나 향후 대책 회의를 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
그것은 기도 자체에 어떤 주술적·마술적인 힘이 있거나, 기도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들에게 기도가 중요한 것은, 그들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뒤로는 그저 과거의 유물처럼 계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만물을 새롭게 빚어 가시는 현재의 창조주로, 인간의 역사와 삶 속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계시자로, 흑암 같은 혼돈 속에서도 신비스러운 섭리의 수레바퀴를 어김없이 돌리고 계시는 섭리자로 믿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들에게, 그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천지를 소유하시고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데스포티스, 즉 대주재입니다.
데스포티스-대주제(大主宰), 그리스어: δεσπότης , 영어: Despotes
동로마 제국에서 쓰인 칭호 중 하나로, 시기에 따라 황족, 제후, 군주에게 사용했다.
데스포티스는 원래 그리스어로 '주인(主人)'이란 뜻인데, 어원을 따지면 집의 주인, 즉 가부장을 뜻했다. 가부장을 뜻하는 단어가 점점 의미가 커져서 나라의 주인, 즉 임금이나 지배자를 뜻하게 되었다. 후에는 재위 중인 황제의 자식들이나 사위에게 붙여주는 칭호로 바뀌었다. 군림하고 있는 황제들의 아들들에게 경칭으로 부여했고, 황제들 자신을 칭하기도 하여 동전에 바실레우스 대신에 데스포티스가 널리 사용되었다.
이것이 사도들이 세상 권세자들의 어떠한 위협이나 핍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이유이며, 석방되자마자 가장 먼저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까닭입니다. 기도를 통해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함께하심을 확인한 이상, 이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만난 것입니다.
사도들 기도의 세 가지 요지
오늘은 본문 29절에서 30절에 나타난 사도들의 기도 내용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사도들이 천지의 대주제이신 하나님께 간구했던 기도의 요지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상 권세자들을 굽어보아 달라(물리쳐 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으며 (인도하심을 간구)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이 낫고 표적과 기사가 드러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들의 이 기도 내용 속에서 대단히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들의 이 기도는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드린 기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그러니까 이미 오순절 성령 세례를 받고 사도직을 감당하던 시점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이 기도를 드리기까지의 과정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체포하고 구금한 뒤, 산헤드린 법정으로 소환하여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위협하고 협박하던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에게, 두 사도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스스로 판단하라.” 다시 말해, 사도들은 이미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의 위협을 조금도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유대인들과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라고 서슴없이 질타했던 것입니다. 세상에 그보다 더 담대한 선포가 어디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던 선천성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태어난 이후로 40여 년 동안 전혀 걷지 못했던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표적이요 기사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득히 먼 옛날에 있었던 옛이야기가 아니라, 불과 하루 이내에 사도들의 삶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그 모든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자신들을 위협하는 자들을 굽어보아 달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이 낫고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게 해 달라고 다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사도들이 방금 전 일어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우리는 이 기도가 지닌 심오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자신들의 개인적인 염원이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에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지 판단하라”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결의했던 산헤드린 의원들에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라고 담대히 증언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전 미문 앞의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사도들의 기도는 바로 그 사실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기도였습니다.
더 나아가, 천지를 주관하시는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한 앞으로 어떠한 위협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할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전하는 사도의 길을 걸어갈 것임을 확신하는 신앙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도들의 기도는 자기들 삶 속에서 함께하시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다시금 확인하고, 그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위급한 순간에 자신들의 개인적 필요나 소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도의 직무를 올바로 감당하기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사도직을 제대로 행하기만 한다면,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의 결과를 본문 31절은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마자, 그들이 있던 곳이 진동했습니다. ‘진동하다’라는 뜻의 헬라어 동사 ‘살레우’는 바다의 큰 파도를 의미하는 ‘살로스’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들이 기도를 통해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재확인하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맡겼을 때, 어찌 그들의 삶의 터전과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의 파도와 생명의 파도, 능력의 파도, 진리의 파도, 감격의 파도가 일지 않았겠습니까.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위대한 사도들이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을 둘러싼 가난이나 위협, 핍박과 환난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어도 여전히 가난했고, 그들을 위협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에워싼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었습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한 뒤나 상황은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한, 그 부정적인 상황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한, 가난과 핍박과 환난이 결코 사도로서의 길을 걷는 그들의 발목을 붙잡는 올무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기도하는 한, 그 모든 부정적인 상황은 하나님과 더 깊이 동행하게 하는 신비스러운 은총이었습니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어진 바로 그 상황 안에서 사도들을 정금처럼 빚으시는 창조주이셨고, 바로 그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 또렷하게 체험하게 하시는 계시자이셨으며, 바로 그 상황 안에서 오묘한 섭리를 이루어 가시는 섭리자이셨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기도를 통해 확인하게 되었을 때, 비록 상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어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은혜와 생명과 능력과 진리와 감격의 파도가 가득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31절의 결론은 조금도 낯설거나 놀라울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담대히 전했다’는 것은 단지 입으로만 선포했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여 그 말씀대로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즉, 사도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했고, 기도를 통해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의 삶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는 한,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임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도들의 마음 깊은 곳에 은혜와 생명, 능력과 진리의 파도가 출렁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넋두리’가 아닙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위한 ‘자기 최면’이나 ‘자기 수양’도 아닙니다. 기도는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도는 내 삶 한가운데 나와 함께하고 계시는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확인하면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시간입니다. 기도는 유치하고 유한할 수밖에 없는 내 생각을 내려놓고, “땅보다 하늘이 높음과 같이 내 생각보다 더 높으신” 하나님의 뜻과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그 기도를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한, 그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생명과 능력과 진리의 파도를 경험하기 시작하는 새로운 시발점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역사
제가 쓴 「회복의 신앙」이라는 책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1998년 9월 22일에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해 숙소를 얻고 자취 생활을 시작한 직후의 일입니다. 어느 날 부엌에서, 한국에서 가져온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다가 가위날에 잘못 손을 대 고무장갑이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고무장갑을 말린 뒤에 찢어진 부분을 노란 테이프로 붙였지만, 물이 계속 새더군요. 그때만 해도 제네바에 막 도착해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고무장갑을 사야 할까?” 잠시 고민하고 있던 차에, 현관 벨이 울렸습니다. 문을 열었더니 우편배달부가 서 있었고, 미국에서 어느 성도님이 보내주신 소포를 전해주었습니다. 소포를 뜯어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 노란색 고무장갑 한 켤레가 들어 있었습니다. 제가 방금 전 찢어 버렸던 고무장갑과 똑같은 색깔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네바에서의 생활이 7개월째 접어든 1999년 4월 하순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국산 녹차를 우려 마셨습니다. 한국에서 가져온 녹차가 그것으로 동이 났습니다. 슈퍼마다 수십 종의 서양 차가 진열되어 있었지만, 저에게는 한국 녹차가 가장 입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동이 났으니 마실 길이 없었습니다. 그날 점심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려 물을 끓이려는데, 또다시 현관 벨이 울렸습니다. 문을 열었더니 역시 우편배달부가 서 있었고, 한국에서 어느 성도님이 보내주신 소포를 건네주었습니다. 박스를 열어 보니 그 안에 한국산 녹차가 들어 있었습니다. 시중에서 흔히 살 수 있는 차가 아니라, 그해 봄에 제주도 다원에서 처음 딴 잎으로 특별히 만든 신차였습니다.
미국에서 고무장갑을 보내주신 성도님, 한국에서 녹차를 보내주신 성도님 모두, 제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의 성도님들이었습니다. 제가 쓰던 고무장갑이 찢어진 바로 그때, 대서양을 건너 제게 고무장갑이 도착했고, 한국 녹차가 다 떨어진 바로 그날, 지구를 반 바퀴 돌아 한국산 녹차가 제네바에 도착했습니다. 그분들이 제가 고무장갑이나 녹차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걸 알 수 있었겠습니까. 설령 알았다 하더라도, 그 시점에 1초의 오차도 없이 고무장갑과 녹차가 도착하도록 만들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원한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런 일이 어떻게 현실에서 일어났겠습니까.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찢어진 고무장갑이나 다 떨어진 녹차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창립된 지 20년이 지나도록 목회자를 청빙 하지 못할 정도로 미자립 상태였던 제네바 한인교회를 섬기기 위해, 가족들과 떨어져 제네바로 간 것은 “가장 작은 자를 섬기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당신의 능력으로, 부족한 제 삶의 자잘한 부분까지 굽어보시며, 하찮게 보이는 고무장갑과 녹차를 위해서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역사는 3년 내내 밤낮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네바에 체류하는 그 3년 동안, 나이가 들어 직접 밥을 해 먹고 빨래를 해야 하는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그 상황 속에서도 떨어지는 이슬을 보면서도, 심지어는 몰아치는 폭풍을 보면서도, 제 심령에서 넘쳐나는 은혜와 생명과 능력과 진리와 감격의 파도를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파도의 힘으로 3년간 주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의 올바른 자세 -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기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화 속 그림이나 돌·대리석으로 깎아 만든 조각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는, 천지를 소유하시고 절대적으로 주관하시는 살아 계신 대주재입니다. 그 대주재께서는 오늘도 우리 각자의 삶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상황이 곧 그 대주재께서 주신 상황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상황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그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임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럴 때 우리 삶의 터전과 우리 심령 속에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은혜와 생명, 능력과 진리, 그리고 감격의 파도가 출렁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도의 밀물과 썰물로 인해, 바로 그 상황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말씀의 사람으로 빚어질 것입니다. 마치 사도들이 주어진 상황을 피하지 않고, 도리어 그 상황 속에서 바른 말씀의 증인이 되기 위해 기도했을 때, 미천한 갈릴리 어부였던 그들이 새 역사의 막을 여는 사도행전의 주역이 되었듯이 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셨기에,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 각자의 체질과 성정을 정확히 아시고, 우리 각자의 연약하고 잘못된 부분을 온전히 치유해 주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체질과 형편에 맞게, 우리를 새롭게 빚으시는 삶의 상황을 허락하셨습니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삶의 상황을 회피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게 하여 주옵소서. 지금 주어진 삶의 자리와 상황 속에서도, 말씀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대주재이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으로 우리 각자의 삶을 굽어보시고 온전히 책임져 주심을 믿음으로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와 생명, 능력과 진리의 파도가 일어나게 하시고, 그 생명의 파도로 인해 사막과도 같은 이 세상이 소생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본문의 메시지는 기도가 단순한 주문이나 자기중심적인 소원 성취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상황 속에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으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랍니다.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기도할 때, 우리 삶 속에 은혜와 생명의 파도가 넘실거릴 것입니다. 기도로 시작하는 우리의 하루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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