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사건의 배경
오늘 창세기 11장은 그 유명한 바벨탑 사건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온 땅의 언어가 하나이고 말이 하나였던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10장에 족보가 하나의 족보로 시작되니, 홍수 이후를 배경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절에서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였으며”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짓는 어리석은 짓을 행한 곳이 바로 시날 평지입니다.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잠시 정착했습니다. “동방으로 옮겼다”는 말을 우리말로 더 쉽게 표현하면, “동쪽으로 가다가 시날 평지에 멈췄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히브리말로 보면 조금 더 구체적인 의미가 드러납니다.
히브리말로는 ‘미케뎀(קדמת)’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 ‘케뎀’이라는 단어는 ‘민’이라는 전치사와 ‘케뎀’이라는 동쪽을 가리키는 명사가 합쳐져 있는 형태입니다. 히브리말에서 ‘민(מן)’이라는 전치사는 “어디로부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 원전에 따르면 “동쪽으로부터 오다가 시날 평지에 도착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말 번역이 완전히 틀렸느냐 하면, 그 자체로서는 틀렸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간다고 할 때, 강릉에서 보면 저는 서쪽인 서울에서 오므로 “동쪽으로 온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천에 사는 사람이 볼 때는 서울이 동쪽이 되므로, “동쪽에서 동쪽으로 간다”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번역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우리말 번역이 완전히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에덴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인류
그런데 to/from의 표현보다는, 이 ‘동쪽’이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본문은 에덴에서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원래 에덴 가까운 곳에 있다가, 에덴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다가 시날 평지에서 바벨탑을 짓는 어리석은 일을 한 것이지요. 에덴이라는 곳은 우리가 되돌아가야 할 영원한 믿음의 본향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에덴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공간적으로만 멀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적 중심이 에덴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동쪽’을 뜻하는 히브리말 ‘케뎀’은 위치나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시간을 뜻할 때는 태고, 다시 말해 창조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시간적으로도 창조의 시점에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절에서 바벨탑을 짓는 어리석은 짓을 한 그들이 “동방으로부터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거했다”는 말은 무엇을 전달해주고자 하는 것입니까? 이들이 되돌아가야 할 믿음의 본향인 에덴으로부터 신앙의 중심이 점점 멀어졌는데, 그것은 시간, 즉 세월이 흐르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쇠퇴와 세월의 영향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창세기를 공부해 오면서, 창세기가 계속해서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점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가인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으시자, 왜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지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께 화를 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세월이 흐른 뒤 이전과 달라졌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하늘의 사람이었던 노아가 홍수 이후에는 땅의 사람으로 전락하여, 꼭지가 돌 정도로 술을 마시고 자기 몸조차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월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자녀들은 모두 방주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니, 얼마나 하나님을 열심히 섬겼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한 아들 ‘함’은 엉뚱한 짓을 합니다. 그리고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이렇게 세월은 때로 독약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도 세월은 흐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누구에게는 오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반듯하게 세우는 은혜의 시간이 되지만, 또 누구에게는 오늘 하루가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겠습니까? 에베소서 5장 16절 말씀처럼 “세월을 아끼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아끼라’는 단순히 “절약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건져 올린다”는 뜻이라고 하지요. ‘엑사고라조’라는 단어입니다.
그 세월을 진리로 건져 올려서, 그 세월의 흐름이 나를 농익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세월이 흐르면 자칫 교만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쉬운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서 깨어 있고 그 세월을 영적 양약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류가 처음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때가 에노스 때라고 합니다. 에노스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부르기 시작했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세월이 흐를수록 그 시간을 더욱 나를 바로 세우는 영적 양약으로 삼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에노스임을 날마다 인식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루가 지났다는 것은 내 죽음의 날이 그만큼 가까워졌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교만해질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 땅에서 생을 마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온다는 것을 안다면, 세월의 흐름이 교만의 강물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를 더욱 겸손하게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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