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요한계시록 2장 5절 상반절에서 하나님은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을 우리가 멀리 차 버렸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을 주님께서 묵과하실 수 없다는 겁니다. 수용하실 수도 없다는 겁니다. 5절 상반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의 의미를 오해하여, 단순히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내가 언제, 어디서 하나님을 등지고 벗어나기 시작했는지를 깊이 성찰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그 진의를 잘못 받아들이십니다. 흔히들 “그러므로 어디서 처음 사랑을 떨어뜨렸는지 생각해 봐라”라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쓰여 있는 책도 굉장히 많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뜨렸는지 생각해 봐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떨어지다’ 동사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원어적 해석 : '떨어지다'의 의미
헬라어 원문에 ‘핍토(πίπτω)’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주어는 ‘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피했다(떨어졌다)’는 것을 생각해 봐라.” 이 ‘피한다’는 것은 ‘떨어지다’라는 의미도 되지만, ‘실족하다’, ‘빗나가다’, ‘벗어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서 나갔는가, 어디서 벗어났는가 생각해 봐라”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본질: '과녁에서 벗어남'
여러분도 성경 공부를 통해 잘 아시겠습니다만, 죄를 헬라어로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라고 하잖습니까? 그런데 하마르티아라는 단어의 뜻은 ‘과녁에서 벗어남’입니다. 과녁을 정조준하고 그 과녁으로 가야 하는데,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니까 살인, 강도, 거짓말 같은 것은 죄의 결과이지요. 그것들은 과녁에서 벗어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저기 회색 네모판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그 화살이 과녁에서 벗어났다면, 그 ‘벗어남’은 결과 아닙니까? 그런데 그 과녁에서 벗어난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과녁이 잘못된 게 아니라, 제가 조준을 잘못한 것입니다. 제가 다른 곳을 향해 조준했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선택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과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데 과녁에서 벗어나면, ‘아가페 프로텐(ἀγάπη πρώτην)’이 소멸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태양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태양이 아름다우니 창문을 통해 따뜻한 햇볕과 밝은 빛, 그리고 따스한 열기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그 창에 검은 암막을 쳐 버린다면, 태양을 막는 동시에 태양의 열과 빛도 사라집니다. 내가 하나님을 과녁판으로 삼지 않으면, 태양과 나 사이에 막을 친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던 ‘아가페 프로텐’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 ‘아가페 프로텐’이 없어지니, 그 동력으로 살던 새로운 삶도 증발해 버립니다.
‘아가페 프로텐(ἀγάπη πρώτην)’, 즉 처음 사랑이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누리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네가 어디에서 하나님을 과녁으로 삼는 삶에서 벗어났는지 생각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생각하라”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가 ‘네모(νέμω)’인데, 이것은 ‘주의 깊고 면밀하게 관찰하고 들여다보라’는 뜻입니다.
성찰과 회개의 필요성
마태복음 6장 28절에서 예수님께서도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메시아 앞에 모인 인간들은 “전보다 더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는 문제만 들고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요.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따르면서 먹고사는 문제만 그렇게 따지느냐. 들의 백합화를 생각해 봐라. 그들이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솔로몬의 옷보다 아름답지 않으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저렇게 입히신다면,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생각 한번 해 봐라.”
그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동사는 ‘카타노에오’입니다. 이는 ‘깊이 생각하라’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입히시는 일을 깊이 생각해 봐라”라는 말씀이지요.
지금 요한계시록 2장 5절의 ‘네모’는, “네가 그 하나님의 ‘아가페 프로텐’ 안에서 감격하며 살다가, 언제 어느 과정에서 과녁판이신 하나님을 네 스스로 내팽개쳤는지, 네 인생 전반에 걸쳐 면밀히 들여다보라”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길이를 강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인생에 대해 생각할 때, 한편으로는 ‘카타노에오’처럼 깊이 생각해야 하고, 또 한편으로는 길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길게 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고민하는 모든 상황의 답이 이미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깊이 생각해 봐라”라고 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두 가지 경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아가페 프로텐’으로 400년에 걸친 죄와 사망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감격하며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가나안을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 하나님을 등졌는지 살펴보면, 바로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등지는지를 판박이처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상치 못한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버림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두 경우에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목전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위기나 장애물을 만났을 때입니다. 그들은 서슴없이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출애굽 후 홍해 앞에 진을 쳤을 때, 변심한 바로가 이집트의 전 군대를 이끌고 뒤쫓아 왔습니다. 앞에는 폭 32km의 홍해, 뒤에는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이집트 군대가 있습니다. 도저히 빠져나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원망합니다(출애굽기 14장 11~12절).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이르기를,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겠다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즉, 인생의 장애물 앞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삶에서 실족해 버린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라면, 차라리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다가 죽을래” 하고 말이지요.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에 보내 지형을 살피게 했습니다. 그들이 40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 그중 10명이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원주민들은 키가 장대한 거인들인데, 우리가 그 앞에 서면 메뚜기 같습니다. 절대 못 이깁니다. 들어가면 안 됩니다.”
민수기 14장 1~4절은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아내와 자식들이 노략거리가 되리니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결국 가데스바네아에서 또 하나님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이집트로 가자”는 겁니다. 여러분, 이집트로 돌아가면 자기네가 살 집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적금이라도 들어놨을까요? 아닙니다. 다시 노예살이를 해야 합니다. 그래도 “거기로 가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자.” 그 종국이 결국 이집트 공동묘지일 텐데도요.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과녁판을 버린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새 리더를 뽑아 이집트로 돌아가자.” 인간은 자기 인생 앞길에 계산 밖의 장애물이 나타나면, 그 즉시 하나님을 벗어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가페 프로텐’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뒤, 우리 인생길에 때로는 위기가 찾아오게 하실까요? 우리가 인생의 장애물과 위기를 직접 겪어 봐야, 그 안에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더 크신 능력을 우리의 온 삶을 통해 체험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위기를 많이 겪은 사람일수록 믿음의 경지가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지은 시편 중에서 시편 23편이 대표적입니다. 시편 23편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당장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신다면, 아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데려가지 않으시면 되지 않나?” “내 육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매지 않아도 되게 하시면 되지 않나?” “왜 병 주고 약 주시는 것처럼 하시는가?”
그 답이 이어집니다.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내가 어떤 상황을 당하더라도,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며 당신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지키시는 그 하나님을 체험하려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 보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사망의 골짜기를 통과해 본 사람만, 이론이 아니라 삶의 고백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증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장애물만 만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왜 홍해 앞으로 데려가셨습니까? 돌아가게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그 거대한 이집트 군대를 수장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시려는 은혜의 기회였습니다.
욕망이 커질 때 하나님을 버림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하며 양식도 가축도 챙겨 나왔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떨어졌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지자, 하나님께서 매일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들은 40년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광야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풀 한 포기, 물 한 방울 없이 40년을 생존했다는 것은 매일 내린 만나 덕분입니다. 얼마나 기이하고 감사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민수기 11장 4~6절을 보면, 그들 중 일부가 욕을 하면서 이렇게 불평합니다. “우리에게 고기를 주었으면 좋겠노라. 우리가 이집트에서 거저먹던 생선이 생각나고, 외도 생각나고, 마늘도 생각나고…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매일 만나를 먹다가 욕망에 사로잡히니, “이거 지겨워서 못 먹겠다. 더 맛있는 게 필요하다, 고기를 먹어야겠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은 뭔가 자기 기대가 충족될 때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잘 믿겠다고 하다가도, 욕망이 더 커지는 순간 하나님의 과녁을 떼어 버립니다.
광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종류의 만나를 내려 주셨습니다. 하나는 육체를 위한 만나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을 위한 만나, 곧 말씀입니다. 창세기부터 신명기에 이르는 율법, 그 방대한 말씀이 모두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모세를 통해 내려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두 종류의 만나(양식과 말씀)를 통해,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훈련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순간, 썩어 문드러질 고깃덩어리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습니다. 결국 하나님이라는 과녁판을 떼어 버린 것이지요.
이렇듯 인간은 원치 않는 장애물과 자기 욕망에 사로잡힐 때 처음 사랑이 소멸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과녁판을 상실하면, 거기서 비롯되는 ‘아가페 프로텐’도 절로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버린다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교만하다’를 ‘자신을 부풀린다’고 표현하는데, 인간은 자기를 실제보다 부풀려 더 크게 여기고, 자기가 앉아야 할 자리(피조물의 자리)보다 더 높은 곳, 즉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갑니다.
아까 이스라엘 백성의 예를 보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상황으로 인도해?”라는 식으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 위에 두었습니다.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나님보다는 우리가 더 낫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네가 언제부터 하나님의 과녁판에서 벗어나, 스스로 교만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지를 깊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성찰한 다음, 회개하라”는 말씀입니다.
회개의 본질
여기서 ‘회개하라’는 헬라어 동사는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로, 절대 자복(엑소몰로게오)이 아닙니다. 자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입으로만 하는 것이며, “하나님, 제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회개(메타노에오)는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가던 길이 잘못됨을 깨닫고 방향을 180도 돌이키는 것,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을 “이건 아니구나” 하고 칼로 물을 자르듯 끊어 내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자복은 회개의 시작은 될 수 있어도, 회개의 완성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언제, 어디서 내 과녁판을 버렸는지 네 인생 전체를 면밀히 살펴보고, 찾았다면 회개하라. 곧 내게로 돌아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네가 스스로 올라앉아 있던 하나님의 자리에서 내려와, 나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믿는 이에게 회개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왜 우리를 여기서 죽게 하느냐. 이집트에 매장지가 없더냐”라고 원망했을 때,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출애굽기 14장 13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즉 “너희들이 하나님이 아니니, 말하지 말고 가만히 보고 있으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보라는 것”입니다.
시편 46편 10절에도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고 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부풀려 하나님 노릇을 하기에, 하나님께서 “얘들아, 좀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내가 하나님임을 알아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55장 8~9절 말씀도 그러합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하늘과 땅 사이를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거리가 먼 것처럼, “내 생각은 너희들 생각보다 훨씬 높고, 내가 일하시는 방식과 길도 너희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기본 전제를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얘들아, 내가 여호와야. 너희와 달라.”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서라는 것, 즉 “내가 앉은 그 높아진 자리에서 내려와, 나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인정하라”는 것, 그것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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