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16
우리는 복이 되기까지 성장해야 하고, 그를 위해 성장통을 겪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는 반드시 성장통이 함께합니다. 상처도 있고, 넘어짐도 있고, 여러 시행착오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을 다듬고 성장시키기 위한 과정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할 사실은 “넘어질지라도 하나님의 품 안으로 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어떤 실수와 약함 속에서도 우리를 붙드시고, 복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아슬란, 전보다 더 커지셨어요."
“Aslan,” said Lucy, “you’re bigger.”
"그건 네가 나이를 더 먹었기 때문이란다."
“That is because you are older, little one,” answered he.
"아슬란이 커지신 게 아니고요?"
“Not because you are?”
"루시, 난 그대로란다.
하지만 네가 한 살씩 더 먹을 때마다 내가 더 커 보일 거야"
“I am not. But every year you grow, you will find me bigger.”
위 대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C. 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 - 캐스피언 왕자’ 이야기 한 대목입니다.
이 책은 마법의 땅 나니아로 떠나는 네 명의 남매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자 아슬란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묘사됩니다. 위 내용은 막내 루시가 오랜만에 아슬란을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네가 성장할수록 내가 더 크게 보일 것이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이지만, 우리가 자라 갈수록 예수님의 크고 위대하심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아멘.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크기’가 그 사람 믿음의 크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는 성장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장하면 할수록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은 더 커 보이지만, 반면 세상은 더 작아 보일 것입니다. ‘등태소천(登泰小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높은 태산에 오르면 세상이 작게 보인다는 뜻입니다. 눈앞에 있는 문제도 대단히 커 보이지만, 높은 산에 올라가면 아주 작은 문제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의 믿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크게 바라보게 되고, 세상은 더 작게 바라보게 됩니다.
복으로 부름 받은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복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 주어지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성장해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의 첫 시험: 기근(밥의 문제) 앞에서 넘어지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도 우리와 똑같이 성장통을 겪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부터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자 아브라함은 평생 살아왔던 집 등 부동산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자, 그동안 맺어왔던 모든 인간관계, 가족과 친척과 지인들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부르시자, 평생 갈대아 우르에서 쌓아 왔던 자신의 모든 업적을 내려놓고 곧바로 출발합니다.
이 모습만 보면, 아브라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브라함이 우리보다도 못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처음 겪은 시험은 ‘기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 문제 가운데서 무너지고 맙니다.
성경 창세기 12장 10절 말씀을 보면,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급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기근이 심하였다’라는 말은 원어로 ‘카베드’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매우 무겁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강 유역의 기름지고 물이 풍성한 곳에 살던 아브라함이 보기에, 가나안 땅에서의 기근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극심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원래도 가나안 땅은 비가 풍족하게 내리지 않는 지역인데, 아브라함은 그 땅 한가운데서 살 수 없으니 남쪽으로 점점 내려와 ‘네게브’라고 하는 사막 입구 지역에 장막을 치고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이 거친 땅에 극심한 기근이 닥친 것이니, 아브라함은 그 기근 앞에 쓰러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복’으로 살길 원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길 원하지만,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중에도 가장 어렵고 두려운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 일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믿다가 먹고살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이렇게 믿다가는 밥줄이 끊기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과 염려가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그 ‘먹는 문제’ 앞에서 우리의 믿음이 주춤거리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예배 시간에 주기도문을 설교할 때 “밥심으로 산다”라고 나누었습니다. 성경에서 맨 처음 등장한 시험도 ‘먹는 문제’였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관계를 맺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먹는 문제’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통해 ‘먹지 말라’는 명령을 주셨지만, 인간은 그 문제에서 실패했습니다.
출애급 하여 광야를 걷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훈련도 ‘먹는 문제’와 관련이 깊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먹는 문제’로 실패한 사람들을 광야로 데려오셔서 40년 동안 먹는 훈련을 시키고 난 뒤, 비로소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맨 처음 겪으셨던 시험도 ‘먹는 문제’였습니다. 사단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라고 유혹했지 않습니까. 지금도 사단은 이 시험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던집니다. 먹는 문제가 흔들리면 우리의 믿음도 함께 흔들리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길을 시작한 모든 사람, 복이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반드시 이 ‘먹는 문제’를 끝내야 합니다. 먹는 문제의 문턱을 넘어야 약속의 땅, 곧 복의 땅에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길 축복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는 우리를 먹이고도 남을 만큼 풍성한 창고가 있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인생에 일용할 양식을 넉넉히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아멘.
그런데 아브라함도 약속의 땅에서 맨 처음으로 이 시험을 겪게 되었습니다. 기근이 왔습니다. 기근이 오자, 아브라함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동원해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애급으로 내려가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지도 한 장을 생각해 보시면, 가나안 땅 맨 남쪽 끝, ‘네게브’라고 불리는 지역에 아브라함이 장막을 치고 있었는데, 거기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해안길을 따라 애급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이 ‘해변길’은 당시에 상인과 군사들이 자주 이용하던 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는 6,400km 길이의 나일강이 흐르고 있고, 거기는 기근이 없으며 먹을 것이 풍부하다”는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정보와 고민을 더한 끝에 아브라함은 결국 애굽으로 내려가기로 결단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위기가 닥쳤을 때 기도하지 않고 고민만 많이 하면, 바로 그 ‘고민한 대로’ 일이 꼬이기 쉽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위기 순간에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생각과 고민이 앞서다 보면, 오히려 그 고민이 현실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고민되는 상황에서도 기도하기 시작하면, 기도한 대로 하나님의 응답을 누리게 됩니다.
영성가 F.B. 마이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 자녀이지만 곤경에 처하면 어떤 방법이라도 취하려 든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과 재앙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즉, 기도하지 않고 깊이 고민하여 만들어 낸 자구책이 결국 사소한 곤란을 피하려다 더 큰 불행의 씨앗을 뿌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겪게 된 두 가지 위기
복이 될 사람이었던 아브라함이 택한 자구책은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을 떠나자마자 곧바로 두 가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두 가지 위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1. 약속의 땅이 위협받다
첫 번째 위기는 ‘약속의 땅’이 위협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나 온 목적은 그저 ‘좋은 땅’을 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땅을 찾으려면 애초에 떠날 이유도 없었지요. 아브라함의 목적은 ‘열국의 아비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려면 가장 먼저 ‘땅’이 필요합니다. 그 땅이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비록 척박하고 비가 적게 오는 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땅 위에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절대 그 땅을 떠나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비전의 땅’, ‘사명의 땅’, ‘약속의 땅’,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땅에 들어왔듯이, 그 땅을 떠날 때도 하나님 말씀을 따라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생각을 따라 그 땅을 떠난 것입니다.
성경은 애굽에 대해 상징적으로 말합니다. 이사야 31장 1절에서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앙모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즉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표현은,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보다 애굽이 자신을 더 안전하게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 앞부분에서 “결국 복이 되는 사람의 세 가지 특징”을 살펴보았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간다.
2.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약속의 땅을 지킨다.
3. 가는 곳마다 재단을 쌓는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시작하여 “너는 복이 될지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근이 오자, 먹고사는 문제가 흔들리자, 그는 이 세 가지를 전부 놓아버렸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2. 그 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약속의 땅을 떠났습니다.
3. 애굽에 가서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재단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도 침묵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큰 위기입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면, 곧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우리의 예배와 재단이 무너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옵니다. 믿음으로 출발해도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맞이하는 고난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우리는 “내가 진짜 누구를 의지하고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평소에 아무리 믿음이 좋은 척해도, 막상 극심한 기근이나 위기를 만나면 우리가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출발한 뒤에 찾아오는 고난 앞에서 보이는 우리의 반응은, 내가 진짜 누구를 믿고 있는지 보여주는 시험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기근이 찾아올 때, 우리가 진짜 붙잡고 있는 분이 누구이신지 당당히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쓰러지더라도 하나님의 품 안에서 쓰러지는 것입니다.
2. 약속의 자녀가 위협받다
두 번째, 애굽으로 내려가자마자 맞이한 위기는 ‘약속의 자녀’가 위협받은 것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신앙의 선을 넘어가면, 정말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불신으로 인해 신앙의 국경선을 넘어가면, 결국 우리가 두려워했던 일들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집니다.
약속의 땅을 벗어나 애굽으로 갈수록 기근 문제는 해결되는 듯했습니다. 정말 소문대로, 애굽은 먹을 것이 풍부한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더 큰 문제가 아브라함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내 사라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를 보며 “어제보다 더 예쁜 것 같다. 내일은 더 예뻐질 것 같다. 이러다 누군가가 나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고심 끝에 사라에게 말합니다. “여보라고 하지 말고, 내 누이라고 해 주시오.” 사실 이것이 전혀 거짓말은 아닙니다. 창세기 20장 12절에 따르면,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복누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남편이 자기 살겠다고 아내의 안전을 팽개치는 일은 도무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방인도 이런 짓은 하지 않는데,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사람이 세상에서도 하지 않을 일을 하면서 자기 안전을 우선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앙의 국경선을 넘어, 오직 자기 생각만으로 해결책을 만들었을 때의 민낯입니다. 하나님을 벗어나 스스로 방안을 마련하려다 보면, 그 수준이 이렇게 비참해질 수 있습니다.
위기는 ‘머리’를 쓸 때가 아니라 ‘믿음’을 쓸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기의 순간에 머리로 계산하기보다, 믿음으로 나아가길 축복합니다. 아멘.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이렇게 말했을 때, 사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말문이 막혔겠지요.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만큼 실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애굽에 도착한 뒤로 사라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십니다. 오직 아브라함 혼자 이것저것 말하며 거짓말을 이어갈 뿐입니다. 신앙의 경계를 넘어가면, 이렇게 인간관계까지 무너지게 됩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사실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포기했다는 것은 ‘아내’만 포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룰 ‘백성’을 포기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한 두 번째 필수 요소가 바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열국의 아버지가 되려면 사라와 함께 자손을 이뤄야 하는데, 그는 그 사명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이 두려워한 “굶어 죽을 것 같다”는 걱정이나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 것이다”라는 두려움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후에 바로를 만나보면, 오히려 바로가 아브라함보다 윤리적으로 더 바른 사람처럼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두려움 때문에 꾸며낸 시나리오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자 세상 모든 것이 두렵게만 보였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렇게 잔뜩 겁먹고 거짓말을 하다 보니 또 다른 거짓된 삶에 스스로 발목이 잡히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쓰러져도 하나님 품 안으로 쓰러지십시오. 아멘.
결국 아브라함이 엉뚱한 계획을 세워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속이자, 애굽의 바로가 사라를 후궁 후보로 궁에 데려갑니다. 그러자 12장 15절에 보듯, 아브라함은 왕의 ‘처남’ 대접을 받으며 엄청난 재물을 얻습니다. 애굽 입장에서는 “미혼 누이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예물”이었던 것이지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내 사라의 안전을 담보로 얻은 재물이었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한 사람이 믿음을 내려놓고 세상의 것을 얻으면, 결국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한 사람은 끝까지 믿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놓고 얻은 것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훗날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실제로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얻은 재물과 종들 사이에서 나중에 다툼이 생기고, 바로 그 가운데서 또 다른 어려움이 일어납니다. (이때 받은 여종 하갈이 나중에 이스마엘을 낳게 되어, 더 큰 가정갈등을 초래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 머리로 계산해 얻은 것들은 결코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만이 우리를 보호하고 살릴 수 있습니다. 아멘.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열심’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열국의 아비, 약속의 땅, 약속의 자손)이 위협받게 생겼으니, 빨리 이 사태를 해결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로와 그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십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재앙’이라는 단어는 훗날 출애굽기에 나오는 ‘열 가지 재앙’과 같은 단어입니다. 그만큼 큰 재앙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애굽은 아브라함으로 인해 엄청난 재앙을 받게 되었고, 바로는 “이 재앙이 왜 임했나?”를 조사하다가,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알게 됩니다.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거짓말을 했느냐! 네 아내라면 아내라고 말했어야지!” 하며 크게 질책합니다. 오히려 바로가 더 윤리적이었던 것이지요. “너 살겠다고 아내를 팔아넘기다니, 말이 되느냐?” 하고 책망합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는 애굽에서 쫓겨납니다. 창세기 12장 20절에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과 그 아내와 모든 소유를 보내게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바로가 준 예물도 다 빼앗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떠나게 합니다. 결혼반지까지 다 들고나가라고 합니다. 그만큼 기가 막히고 화가 났던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다시 기근이 있는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길을 상상해 보십시오. 들어올 때는 아내와 함께 손잡고 왔지만, 나갈 때는 아브라함은 고개를 떨군 채 앞장서고, 사라는 한참 떨어져 뒤에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앞서 걷는 아브라함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고, 뒤에 오는 사라는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아브라함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종들은 또 어떻게 바라봤을까요. “저 많은 재물은 아내를 팔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라고 수군댔을 것입니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으로 출발한’ 사람이 결국 ‘믿음을 놓고’ 얻은 부는 부끄러운 것이었습니다.
이 실수를 기록한 이유 – 우리의 성장통
이 모든 실수를 성경은 왜 자세히 기록하고 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토록 민망한 실패담을 길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12장 앞뒤 문맥을 그대로 이어가면 이야기가 더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성경은 굳이 이 실패 장면을 포함시켰습니다.
이는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가, 출애굽해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입니다. 광야의 1차 독자는 “우리가 정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 땅에서 잘 살 수 있을까”를 늘 불안해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렇게 큰 실패를 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를 약속의 땅으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통해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로 지금 광야를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 아브라함의 이야기 = 광야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1. 기근을 피해 애굽에 들어가다
2. 하나님이 큰 재앙을 애굽에 내리셨다
3. 바로가 패배하고 놓아준다
4. 나올 때 큰 재물을 얻었다
5.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다
즉, 아브라함처럼 이스라엘 백성도 실수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이 결국 가나안 땅에서 민족을 이루었듯, 이스라엘 백성도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 약속을 이루게 되리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모세에 의해 이 창세기 12장 후반부 이야기가 기록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결국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굶어도, 쓰러져도, 넘어져도, 반드시 하나님 품 안에서 쓰러지십시오. 아멘.
하나님은 구부러진 화살을 통해서도 과녁을 맞히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구부러진 우리 인생도 하나님 손에 들려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제 몰랐던 하나님, 작년에 몰랐던 하나님을 이제 점점 더 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아슬란이 루시에게 했던 말처럼, “나는 그대로지만, 네가 자랄수록 나를 더 크게 보게 될 거야.”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실패를 경험했지만,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크고 두려우신 분임을 깨닫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넘어졌지만, 그 넘어짐 속에서 크신 하나님을 만난 아브라함은 다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날마다 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나의 힘을 의지할 수 없으니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소망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세상의 것 의지할 수 없으니
감사하고 낙심하지 말 것은
주께서 참 기쁨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의 인격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길
원하고 바라고 기도합니다”
이 찬양의 고백이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고, 예수님의 인격이 나의 성품이 되고, 성령님의 권능이 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 땅을 살아가다 보면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출발해도, 우리는 중간중간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내가 진짜 누구를 붙들고 있었는가”가 드러나는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위기 때 ‘머리’가 아닌 ‘믿음’을 쓰십시오. 무릎을 꿇고 나아가십시오. 아멘. 하나님은 우리의 구부러진 인생도 당신의 손에 붙들려 있으면 반드시 쓰십니다. 구부러진 화살로도 명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의 구부러진 인생을 주님 손에 맡깁시다.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이끄십니다. 이 믿음으로 한 주간을 시작합시다. 그리고 한 주간의 끝에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믿음의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우리를 반드시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게 하옵소서. 위기 가운데 머리를 쓰기보다, 무릎 꿇어 기도하며 믿음을 적용하게 하옵소서. 구부러진 화살도 하나님의 손에 있으면 과녁을 명중하듯, 우리의 구부러진 인생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복이 될 줄 믿습니다. 한 주간을 이 믿음으로 살 때, 마치는 순간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인도하시고 함께하심이 넘어지더라도 주님의 품 안에서 안식을 누리길 원하는 모든 성도들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까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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