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본문 : 로마서 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강사 : 손정희 장로
- (주) 와플대학 대표
- 지저스처치 장로
- EBS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 출연
*다음 접은글은 집사님 간증을 가급적 그대로 스크립트로 정리한 것입니다. 원하시면 바로 아래 '더보기'를 누르세요.
그동안 방송에 가끔 나가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 녹화/편집된 영상이었고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생방송으로 무언가를 말하게 되니 떨립니다. 특히나 키도 작고 부족한 제가 믿음의 선배님들 앞에 이렇게 서게 되어 정말 떨리고 또 부끄럽습니다.
다니엘 기도회의 강사분들을 보면 다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고, 부족한 제가 나갈 자리가 과연 맞나 싶었는데, 평신도인 제 간증도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기를 바라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내일모레 일흔입니다. 한 해 두 해, 제 마음보다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서, 종종 '콩'이라고 말하겠다고 생각하고 말했는데 입에서는 '팥'이라고 말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사실 다니엘 기도회 강단에 서기를 더 망설였습니다. 오늘 제가 '팥'이라고 말해도 여러분들이 '콩'이라고 새겨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 시간만큼은, 제가 하다 하다 못해서 그냥 원고를 천천히 읽어 가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실수만은 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부탁드리고 여기 섰습니다.
이번 초청을 받은 후에 다니엘 기도회 포스터에 적을 프로필 요청에, 저는 주저 없이 '장로'라고 적어 달라고 했습니다. 현재 주식회사 와플대학 대표를 맡고 있으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 마지막 직업은 '장로'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오늘 오륜교회 담임 목사님도 저에게 "장로 된 지 몇 년 차냐"라고 물어보시더군요. 이제 겨우 4년 차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철이 아주 늦게 든 부족한 사람입니다. 가끔 믿음 좋은 청년들이 저와 자신을 비교하는 경우가 있는데, 여러분, 그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그 청년이 만약 30살이라면, 30살의 손정이와 비교를 해야 공정합니다. 그런데 30살의 저는 하나님을 '일(1)'도 몰랐고 은혜는 더더욱 몰랐으니 비교 불가입니다. 그야말로 헛산 인생이었습니다. 일찍 하나님을 믿고 젊은 나이에 정진하는 청년들이 제 나이쯤 되면, 저보다 훨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광 돌릴 거라 믿습니다.
성격 급하고 하루하루 먹고사는 생계에 쫓기느라 아무런 희망도 없었는데, 제가 어느덧 17년째 와플 장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와플 대학은 우리나라 와플 업계에서 1등 브랜드가 되었고, 300개가 넘는 가맹점으로 성장했습니다.
"사업의 끝은 망하는 것"이라고 어떤 분이 말하시더군요. 저는 단지 아직 안 망한 것이라면서요. 제가 40대 후반에 뒤늦게나마 하나님과 동행한 덕분에, 아직 안 망하고 17년째 와플 대학을 하고 있습니다.
와플대학이라는 이 특이한 이름은, 제가 2008년 신촌 대학가에서 장사를 시작해서 단골로 오던 학생들이 저의 다양한 크림이 대학의 다양한 학과와 비슷하다고 해서 갖게 된 이름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상상하시는 것처럼 번듯한 가게가 아니고, 불법 노점상이었습니다. 리어카 말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평범했던 제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재물이 끝나야 판결이 나는 곳
저는 평범하고 착한 남편과 28살에 결혼해서 두 딸을 낳고 아동복 가게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열심히 살던 그냥 보통 엄마였습니다. 장사가 나날이 잘되어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 없는 승승장구였습니다. 딸아이에게는 예쁜 옷을 실컷 입혔습니다. 그렇게 장사가 잘되어서 물건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브랜드를 만들고 제조 생산까지 하면서 매장을 몇 개씩 늘렸습니다. 마트에도 진출하고 온라인 쇼핑몰에도 진출하면서 물량이 부족했습니다. 옷이 없어서 못 팔 정도여서 해외 생산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한 시즌, 봉제 불량이 터지고, 그다음 결제대금을 사기를 당하고, 저는 딸아이 돌반지까지 내다 팔면서 버텼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경찰서로, 법원으로, 피고도 되고 원고도 되는 기막힌 처지가 됐습니다.
법원에서 만난 어떤 분이 저에게 재판이 언제 끝나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시더군요. 여러분, 아십니까? 재판은, 재물이 끝나야 판결이 난다고 합니다.
정말 너무 억울하고 힘들고, 아이들만 아니면 그냥 죽고 싶었습니다. 힘들여 장만한 제 첫 집에서 형편없는 월세방으로 이사하고, 가정도, 아이들도 돌보지 못하고 소송에 쫓기다가 지쳐서 돌아왔는데, 어느 날 저녁 문 앞에 10kg짜리 쌀 한 포대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 전도사님이 두고 가셨더라고요. 쌀이 밥이잖아요. '아, 나 거지가 되었구나. 그럼 내 딸들은 그냥 거지새끼들이지.'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도 3대째 내려온 기독교 가문에서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고, 심방을 자주 오시는 한경직 목사님 무릎에 앉아서 컸습니다. 하지만 은혜도 모르고 교회를 그냥 학교처럼 다녔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더는 내 힘으로 안 된다.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자"라고 결심했습니다.
매일 눈만 뜨면 경찰서로, 법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하루아침에 끊고 소송도 접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집안에 남아 있던 단돈 30만 원, 이것을 들고 벼룩신문에서 본 리어카를 사러 동서울 터미널로 갔습니다.
첫 번째 인간 천사, 그리고 붕어빵
저에게 리어카를 파신 분이 어디로 갈 거냐고 물어보셔서 "사람 많은 신촌이요" 그랬더니, "거기까지 어떻게 갈 거냐"라고 하셨습니다. 대책 없는 저에게 5만 원을 빼 주면서 용달차를 불러 주시더라고요. 제가 만난 첫 번째 '인간 천사'였습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사실 오늘의 제 얘기는, 억울하고 힘겨워서 날마다 죽고 싶었던 제가 만난 수많은 '인간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인간 천사를 누가 다 보내 주셨는지 저는 한참 후에 알게 되었지만요. 여러분, 오늘 제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간 천사가 모두 몇 명인지 지금부터 세워 보십시오.
막상 신촌에 왔는데 겁부터 나서, 저는 인적도 드문 한적한 길거리에다 리어카를 내렸습니다. 당시에 저 같은 불법 노점상에게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단속반 공무원, 깡패, 용역이 아닙니다. 같은 노점상입니다. 자기들 밥그릇이 줄어들 걸 염려하는 같은 노점상들이, 단속반보다 먼저 찾아와서 때려 부수고 행패를 부립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 보니, 제가 리어카를 내린 자리는 장사가 전혀 안 되는 곳이라 그냥 뒀다고 합니다. 며칠 하다가 제풀에 접고 갈 거라고, 어차피 그 자리에서 몇 명이 그랬다고 합니다.
세상 어디에나 빈부 격차가 있지 않습니까. 노점에도 있습니다. 자리를 잡고 노점을 오래 하신 분들은 오토바이 모터를 개조해서 전동 리어카를 씁니다. 저같이 가난한 노점상은 초보이지 않습니까. 30만 원에 사 왔으니 당연히 수동 리어카입니다. 바퀴가 있으니까 굴러는 가지만, 저같이 힘이 부족한 여자가 끌고 가기에는 많이 무거웠습니다.
다행히 제가 리어카를 내린 그 자리는 한적해서 앞에 바로 주차장이 있었습니다. 밤에 장사를 마치면 주차장에다 리어카를 끌어다 놓고 무사히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장사 밑천이 없었습니다. 30만 원을 다 썼으니까요. 무슨 장사를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분이 "찬바람 불면 붕어빵 장사야. 골목에서 팔아도 10만 원은 팔아" 그러시는 겁니다.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먹고살 순 있겠다.'
수소문해 보니 붕어빵은 겨울 한철 장사였습니다. 그래서 재료를 쓰는 조건으로 붕어빵 기계를 그냥 빌려준다더군요. 재료비도, 우선 받아서 팔고 그다음 날 재료를 또 받으면서 어제 받은 재료비를 주면 되는, 즉 팔아서 돈을 주면 되는 후불 결제였습니다. 아무 자본이 없던 저한테 정말 딱이었습니다.
고구마 붕어빵과 치즈 칠리 붕어빵
제 이야기는 듣다 보면 반전에 반전이라 '반전 대학'입니다.
"아니, 뭐 크게 잘못하고 산 것도 없는데 내가 왜 이렇게 길바닥 인생이 됐나?" 날마다 죽고 싶었습니다. 너무 창피하고 억울하고 슬프고, 도무지 길에서 밥이 안 넘어가는 것입니다. 목구멍에 딱 걸립니다. 어른들이 말하는 화병이 뭔지 그때 알겠더라고요. 정말 살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니까 때가 되면 배가 고프지 않습니까. 제가 어릴 때 나름 고기반찬을 먹고 자라서 편식이 좀 심합니다. 특히나 팥이나 콩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붕어빵은 팥이 주재료입니다. 처음에는 잘못 구워서 터진 붕어빵, 이거 버리기 아깝지 않습니까. 그래서 팥을 털어내고 겉의 빵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허기를 채웠는데, 그 터진 붕어빵에서 제가 털어낸 팥이 더러운 건 아니지만, 이걸 또다시 넣고 굽자니 뭔가 찝찝했습니다. 그런데다 저는 붕어빵 만드는 실력이 점점 늘어서, 이제는 터진 붕어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뭐 먹어요? 그냥 팥 없는 반죽만으로 맨 빵을 구워서 먹었죠. 맛이 있었겠습니까? 아무 맛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가 아침에 밥 대신 고구마를 삶아 갔습니다. 차디차게 식었겠죠. 길에서 먹기에는 너무 차가워서, 그냥 그것을 조금 뜯어서 붕어빵 안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붕어빵 사러 온 학생들이 "아줌마, 뭐 먹어요?" 하고 물었습니다. 붕어빵은 다 시커먼데 저는 노란 걸 먹으니까 괜히 뜨끔했습니다. "너네 먹어 볼래?" 하고 나눠 줬습니다.
자, 그렇게 인기 최고 '고구마 붕어빵'이 시작됐습니다.
날마다 고구마를 삶았습니다. 그런데 달달한 음식은 끼니로 날마다 먹기에는 저한테는 오래 못 가더군요. 좀 질렸습니다. '고구마 말고 넣을 만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을 하는데, 어릴 적 할머니랑 빚던 만두가 생각났습니다. 예전에는 다 집에서 만두를 빚었지 않습니까. 빚다가 만두 속 한 숟갈씩 먹고. 특히 저희 집안은 6.25 전쟁 때 피난 온 이북 출신분들이라, 만두하고 냉면을 하루가 멀다고 해 먹었습니다.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저 혼자 만두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딸아이가 "엄마는 초딩 입맛이니까 피자 치즈랑 케첩도 넣어 봐"라는 것입니다. 신나게 만들어서 붕어빵에 넣고 먹었더니, 단골 학생들이 또 "아줌마, 뭐 먹어요?" 합니다. 웃으면서 나눠 먹고 작명을 부탁했습니다. 만두에서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속재료가 들어갔으니, 제 부족한 머리로는 적당한 이름이 안 떠오르는 것입니다. 숫자 세고 계신 분들, 인간 천사 한 명 추가해 주십시오. 똑똑한 한 학생이 '치즈 칠리 붕어빵' 이렇게 이름을 지어 줬습니다.
이름을 딱 들으니 좀 당기시죠. 자, 그 겨울에 저에게 어떤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장사가 너무 잘되니까 신촌에 이런 특이한 붕어빵 가게들이 유행하기 시작해서, 자기들이 원조다, 신촌의 명물이다, 막 이렇게 써 붙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화여대 홈페이지에 재학생들만 로그인해서 보는 정보 공유방 같은 게 있었나 봅니다. 거기에 저희 단골 학생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원조 붕어빵 가게들 다 지나가서, 학교에서도 멀리 떨어진 제 리어카까지 꼭 찾아가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덕분에 그 당시 아침마다 누구나 보던 스포츠 신문에 기사가 났습니다. 스마트폰이 당연히 없던 시대, 2008년입니다. 이대를 졸업한 취재진이 자기 모교 홈페이지를 보고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스포츠 신문을 조선일보 기자가 흥미롭게 본 것입니다. 연이어 저의 붕어빵 기사가 3대 메이저 일간지에도 나갔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에 '붕어빵의 100년 변천사', 이거 거짓말 아닙니다, 특집이라 그러면서 KBS 방송국에서 세 분이 취재를 나왔습니다. 100년, 도대체 누가 계산한 걸까요? 엄마가 길거리에서 장사하는 게 알려지면 딸아이가 학교에서 놀림당할까 봐서 촬영을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당장 오늘 저녁 9시 뉴스에 내보내야 한다면서, 얼굴을 거의 못 알아보게 멀리서 찍겠다고 했습니다. 사실 속은 것입니다. 방송국 카메라의 줌 기능도 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정말 제 얼굴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등 따시고 배부른 행복이 시작됐습니다. 그야말로 손님이 줄을 섰습니다. 여의도에서 택시 타고 붕어빵 사러 오고요, 연예인도 종종 왔었습니다.
그런데 '반전 대학'이라고 했죠. 자연의 섭리를 어쩌겠습니까? 겨울이 가고 봄이 왔습니다. 5월까지는 어떻게 버텼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재료도 상하고 제가 너무 더워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12제자와 12가지 크림
막막했습니다. 겨우 하나 시작한 붕어빵 장사인데, 여름에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요. 길거리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평소에는 장사하러 나오지도 않던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헤매고 다녔는데, 신촌 로터리에서 뭔가를 먹으면서 막 뛰어가는 연대생들을 보고 등교를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와플'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아, 저거다."
이렇게 와플과의 만남이 시작됐고, 저는 다양한 붕어빵을 팔아서 재미를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그 경험을 살려서 고구마 크림을 포함한 12가지 크림을 팔게 됐습니다. 어릴 적 주일학교에서 예수님의 12제자를 재미있게 배우면서, 그냥 '열두'이라는 숫자에 막연하게 친밀감이 생겼습니다. 왠지 잘 될 것 같다, 그런 기대감을 갖고 제빵 전문성 하나도 없으면서 일을 벌였습니다.
당시 시중에는 바닐라, 딸기, 초코 세 가지 크림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거기다 아홉 가지 크림을 제가 더 만든 것입니다. 눈빛을 보니까 무척 궁금해하시는 눈치라, 제 원고에는 없는데 어떻게 만들었는지 예를 들어 드릴게요.
커피 크림이 있습니다. 어떻게 만들었을까요? 그 당시가 커피 믹스가 나와서, 커피 하나, 설탕 하나, 프림 하나 이렇게 타던 커피가 한물가고 커피 믹스가 부상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안 타 먹는 인스턴트커피 가루가 병에서 굳어가고 있었어요. 저희 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 바닐라 크림에다 커피 가루 붓고 휘저었어요. 커피 크림 됐죠?
또 하나만 더 알려 드릴게요. 우리 딸이 친구 집에 가서 뭘 맛있는 걸 얻어먹고 왔는지, 저를 따라서 슈퍼를 오더니만 엄마 저거 사 달래요. 뭔가 하고 봤더니 땅콩버터크림, 유리병에 든 것이었습니다. 요만해도 비싸요. 빵에 발라 먹으면 더 맛있다는 것입니다. 큰맘 먹고 사 줬어요. 그런데 단맛이 없는 걸 산 거예요. 애가 한번 발라 먹고 나서 안 먹어요. 비싸게 주고 샀는데 너무 아깝잖아요. 바닐라 크림에 넣고 휘휘 저었죠. 자, 무슨 크림 됐나요? 땅콩버터크림입니다.
여러분도 다 와플 장사하시면 성공하시겠습니다.
이렇게 아홉 가지 크림을 어찌어찌 만들어서, 각각의 통에 담고 리어카에서 흔들리지 않게 고정시키고, 또 나름 위생적으로 해야 하니까 아크릴로 뚜껑을 만들어서 덮었습니다. 그리고 리어카를 밀고 첫날 와플 장사를 나갔습니다. 뭐 했겠습니까? 하나님한테 정말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더도 말고 하루에 10kg짜리 와플 믹스 한 포대만 팔게 해 달라고. 그럼 우리 네 식구가 사계절을 다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어떻게 됐을까요? 붕어빵을 사 먹던 단골 학생들한테 시식을 해 가면서, 저는 첫날 한 포대를 다 팔았습니다.
딸의 새벽 기도와 천 번의 헌금
자, 이제 여기서 노점 얘기는 그만 접고, 저의 가족과 교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느새 50이 다 되어 가는데, 아동복 사업이 완전히 망했지 않습니까. 처음에 월세 50만 원짜리 방 두 개짜리 서울 변두리 아파트로 이사 갔습니다. 채권자들이 딸아이 학교까지 찾아가는 바람에, 이름 대면 다 아는 명문 고등학교(서울예고)를 다니던 저희 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자퇴를 했습니다. 이것도 모녀의 운명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그 무렵에 우연히 친구를 따라서 교회를 갔더라고요. 저는 몰랐습니다. 하루는 제가 자다가 새벽에 깼는데, 아이가 옆에 없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여기저기 찾아봤죠. 그런데 조그만 베란다에 혼자 방석을 깔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너 뭐 하니?" "혼자 기도를 드린대요. 엄마, 새벽 예배가 너무 가고 싶은데 버스는 안 다니는 시간이고 택시는 못 타잖아." 안고 엉엉 울었습니다. "이사 가자. 너 지금 다니는 교회 옆으로 이사 가자."
그때는 몰랐습니다. 크지 않은 교회 옆에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요. 보증금 겨우 500만 원으로 교회가 있는 용산에다 방을 얻었습니다. 오래된 단독 주택에 아주 작고 형편없는 방 두 개를 겨우 얻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부모라도 자식에게 좋지 않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밖에 없다면 정말 미안합니다. 정말 아이에게 미안해서 "정말 미안하다" 그랬더니, "엄마, 성경 말씀에 '인자도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나와. 엄마랑 아빠가 이혼 안 하고 우리 식구 비 안 맞고 같이 살아서, 나는 여기도 좋아."
정말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아, 오래된 얘긴데도 또 목이 메네요.
자, 다음날부터 딸아이가 바로 새벽 예배를 가는데 안 따라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직 밖이 깜깜한데, 새벽 5시에 17살짜리 어린 딸을 아무리 피곤해도 엄마가 돼서 어떻게 혼자 보내겠습니까? 믿음도 없으면서 그냥 보호자라고 한 달 넘게 따라다녔습니다.
하루는 딸이 주보를 들고 오더니, "엄마, 엄마, 어떤 안수 집사님이 특별 감사 헌금 1천만 원을 드렸어. 나도 드리고 싶어."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아동복 사업 잘되던 옛날 같으면 당장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방을 빼도 500만 원밖에 없었습니다. 방을 빼도 못 드릴 돈이었습니다.
'나한테 갚을 빚 있는 사람이 탁 나타나서, 그동안 죄송했습니다, 하면서 돈을 갚는 상상.' 이것을 수없이 했습니다. 새벽 예배 나가서 매일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제 상상대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그렇게 한 달이 가니까, 슬슬 짜증이 나더라고요. '내가 갖겠다는 것도 아닌데 천만 원이 왜 안 생기냐? 하나님, 내 기도 왜 안 들어주시냐?'
그렇게 투덜대다가, 어느 날 새벽에 머리를 한 대 딱 맞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돈이 필요하신 게 아니다. 중심을 보시는 거다. 천만 원이 별거냐? 만 원짜리 집회 천 장이면 천만 원이다. 지금 단돈 만 원도 없니?'
저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는 천만 원을 한 번에 드리는 것보다 이 방법이 훨씬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헌금을 드리는 동안은 하나님이 제 딸을 꼭 지켜 주실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려니까, 교회에 있는 헌금 봉투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제가 저 두툼하고 하얗고 좋은 봉투를 천 장이나 써야 하는 것이 죄송스럽더라고요. 문방구로 갔습니다. 100장에 한 묶음으로 파는 값싼 봉투를 사다가, 직접 손으로 하나하나 번호를 쓰고 나서 저 좋아서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까 또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예배 시간에 헌금 시간이 있나요? 아니죠. 그럼 이거 어떻게 냅니까? 이것도 어쩌나, 그러면서 하나님한테 기도하고 얻은 답은, '누구보다 제일 일찍 교회에 가서 강대상에 먼저 살짝 놓는 방법'이었습니다.
"내가 다 안다"
자, 여러분, 정말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찌나 예배가 기다려지고 말씀이 꿀처럼 달고, 교회 가는 제 발걸음이 설레던지요. 교회, 하나님 집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예배를 마쳐도 집에 안 가는 것입니다. 계속 서성거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을 하나씩 보여 주시더라고요.
예배드리고 나서 함께 식사하고 교회 주방에서 설거지를 한동안 했습니다. 그거 끝나도 집에 못 가고 두리번거렸습니다.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교회에 더 있고 싶어서 화장실 변기, 바닥은 물론 닦고, 문도 닦고, 벽도 닦고, 나중엔 천장도 닦았습니다. 여자 화장실 청소는 그래도 할 만했는데, 남자 화장실 청소할 때는 조금 민망한 일도 생기더라고요.
여러분, 교회 가서 누구 눈치 보거나 사람들 말 듣고 흔들리지 마세요.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가난 때문에 안 그래도 무너진 자존감에, 무심하게 던진 사소한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더라고요.
내 상처에 못 이겨서 교회 뒷마당에서 울다가, 울지 않으려고 하늘을 봤습니다. "하나님, 아바 아버지, 억울합니다. 내 마음 아무도 모릅니다." 일렀죠. 하소연했습니다. 그때 들렸습니다. "다 안다. 내가 다 안다."
하나님 다 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녀의 작은 신음 소리 다 들으십니다.
이 1천 번의 헌금을 시작할 때, 딸아이한테 말했습니다. "만약에 엄마가 다 마치지 못하면, " (왜냐하면 전 계속 죽고 싶었으니까) "이 헌금은 하나님과의 약속이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네가 성인이 돼서 돈을 벌어서라도 꼭 맞춰야 된다."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말이죠. 제가 일주일 내내 13번의 모든 예배에 헌금을 드렸습니다. 2년이 흘렀습니다. 머리 좋은 분 빨리 계산해 보세요. 1만 원권 1천 번을 드린 1천만 원의 헌금이, 매주 13번의 헌금을 드리면 2년 안에 끝납니다. 2년도 안 돼서 제가 다 끝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목사님이 설교하시다가 "우리 교회 화장실에 밥알이 떨어져 있으면 저는 주워 먹을 수 있습니다" 이런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화장실 청소 2년 가까이 한 이 가난한 노점상, 교회 등록 2년도 안 된 저를, 단 한 분의 반대도 없이 정식으로 집사 임명해 주셨습니다.
아, 쫄딱 망한 거 보지 않고, 아동복 사업이 잘 나갈 때 그때 돌아가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저희 할머니, 외할머니, 친정엄마가 천국에서 보신다면, "저것이 이제야 제대로 산다" 이러면서 얼마나 좋아하실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지금도 예배 때마다 네 번째 1천 번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1만 원이 아니죠. 여러분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제가 '서장훈의 이웃집 백만장자'에 나갔던 사람이니까요.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한때는 생활고에 자식 뒷바라지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빨리 늙고 싶었습니다. 교회를 좀 다니다 보니 죽으면 안 된다는 건 알았고, 그래서 빨리 늙어서 80 노인이 되고 싶다고 하나님한테 엉뚱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내가 80이면 세상 짐 다 내려놓고 성전 맨 앞줄에 앉아서 하나님 찬양하고 느긋하게 성경책 봐도 아무도 날 방해하지 않으니까.'
하나님, 어이없으셨겠죠. 그랬던 제가 오늘 이렇게 70도 안 돼서 맨 앞줄도 아니고 강단에 섰습니다. 실로 우리 하나님의 계획은 절대 미리 눈치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냥 성실하게 사세요. 하나님 눈치 못 챕니다.
저 매일매일 새벽 기도 드리면서도 하나님 말씀이 너무 재밌고 사모가 돼서, 장사하면서 성경책을 보다가 조그만 성경책을 반죽 통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장사가 잘되는 날은 한시도 눈과 손을 쉴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못 보는 게 안타까운 것입니다. 이것도 좀 해결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네 머릿속에 성경책을 가져라."
기쁜 마음으로 하루 한 절씩 말씀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장, 여러분 다 아시죠? 저는 그렇게도 좋더라고요. 흠 많고 완벽하지 않은 인간, 심지어 죄지은 인간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들어 쓰셨는지, 또 얼마나 사랑하고 귀히 여기셨는지. 믿음의 선진들은 시련과 연단 속에서 얼마나 순종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는지. 외우고, 머리 나쁘니까 또 반복해서 외우고, 날마다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사라, 이삭... 하루하루 외우다가 저는 21절에서 큰 은혜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요셉이, 야곱이 완벽한 인간이었나? 나도 지팡이 머리에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끝까지 착하고 부지런한 종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러 가리라.' 저절로 결심이 서더라고요.
장로가 되다, 그리고 만학도
저 이제 늦은 나이에 장로 직분 받은 스토리 말씀드릴게요.
와플대학이 노점을 벗어나고 사업자 등록증을 내고 나날이 발전해서 법인 회사가 되니까, '감사(Auditor)' 직이 필요하더라고요. 신용 불량자를 거쳐서 파산 면책까지 받은 제가, 하늘 아래 누구에게도 부탁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푸념처럼 한탄하던 제 말을 우연히 들은 저희 담임 목사님께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그거 제가 해 드릴게요" 하셨습니다.
저 그 순간 결심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사는 동안, 목사님 같으신 분이 나같이 가난한 사람에게 무슨 부탁할 일이 있으랴. 그래도 만약에 뭐라도 부탁하신다면, 0.1초도 망설이지 않고 "예" 하리라.'
그런데 수년이 흘러서 어느 날 목사님께서 저에게 "장로해 주세요" 하셨습니다. 물론 저 바로 "예" 했습니다. 그런데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게 '여고 중퇴', 즉 '중졸'인 제 학벌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여자라서 주목받을 텐데, 제 학벌은 제 개인의 부끄러움이 아닌 것 같아서 차마 말씀도 못 드리고 참으로 송구했습니다.
남들 얘기로만 알던 만학도가 되어, 여고 교복 벗은 지 45년 만에 고졸 검정고시에 도전하고 합격했습니다. 아무리 작고 작은 발걸음도 선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 덕분에, 지금 저는 경영학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하나님께 지혜만을 구하며, 듣는 자의 마음을 주시길 기도드립니다. 저, 돈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기도, 맹세코 단 한 번도 안 했습니다. 그냥 그건 저절로 되더라고요.
생계형 노점에서 사업가로
자, 그럼 많은 분들이 제일 궁금해하실, 생계형 불법 노점 장사가 사업으로 어떻게 커져 갔는지 이 이야기할게요. 머니와 관련된 거니까 제일 열심히 들으실 것 같습니다.
잘된다고 입소문이 나니까, 처음에는 저보다 더 어려운 처지의 분들이 한 분 한 분 찾아오셨어요. 저는 제가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절 처음 찾아온 40대 남자분은 휠체어 타는 어린 딸이 있다면서, 사기를 당해서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한강으로 뛰어들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손을 안 내밀면, 자기 손 안 잡아 주면 죽어 버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랬는데... 정말 죽어 버릴 것 같아서, 그 심정 아니까. 정말로 한강에 뛰어들어서 뉴스에 나오면 저는 알지 않습니까. '나 때문에 죽었구나.'
결국 재료도 나눠 주고 노하우도 알려 주고, 제 장사는 덮어 놓고 직접 가서 장사도 함께 해 주고 그랬습니다. 왜냐고요? 여자보다 남자가 약해요. 비만 오면 장사 안 하려 그래요. 비만 오면 제가 쫓아가서 같이 리어카 끌어내서 "비가 와도 장사해야 된다, 이놈의 자식아. 왜? 넌 아빠잖아. 넌 총각이 아니잖아."
주변에서 저보고 바보냐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아본 저에게는 전혀 망설일 일도 아니고, 그저 기뻤어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돈을 줍고 일어났습니다. 지갑에 돈이 없어도 가난한 자가 아니고, 세상을 다 가진 하나님의 자녀라는 기쁨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와플 장사라도 해보겠다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상담을 시작하면, '장사 밑천이 얼마 있냐' 이런 현실적인 걸 물어봐야 하는데, 저마다 가슴 아린 사연이 있어서 먼저 부둥켜안고 울다가 어떻게든 장사를 시작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번번이 속고 이용당한 적도 많았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저보다 어려운 사람이 아니고, 집도 있고 저보다 훨씬 형편이 좋은 분도 있더라고요. 하지만 다 괜찮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저는 "아버지, 아시죠?" "그래, 내가 다 안다." 그 음성이면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충분히 좋았습니다.
교회는 용산인데, 점점 사업 공간이 부족해져서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서 회사가 강북구로 옮겨갔습니다. 30분의 새벽 예배를 드리려고 왕복 2시간 버스를 타고 다녀와서 출근을 했는데, 안 피곤한 것입니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10여 년을 흘러서, 가맹점이 60개 정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저는 한 가지 기도만 했습니다. "다시 교회 옆으로, 용산으로 이사 가게 해 달라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지금 와플대학 본사는 용산구 한강대로에 있습니다.
코로나의 터널, 그리고 '엄카'의 기적
하나의 가맹점이 첫 영업을 시작하는 날, 소위 말하는 개업 날, 저도 벅차서 꼭 그 현장에 갑니다. 믿음을 가진 분들이 창업을 하면 개업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불쑥불쑥 갑자기 저에게 기도를 시킵니다. 준비도 없는데 기도했습니다. 짧고 간단하게. "하나님, 부디 이 가게에서 십일조 100만 원 하게 해 주세요." 십일조 100만 원이면 수입이 얼마입니까. 보통 열 평도 안 되는, 그것도 소위 B급 상권에서 제가 참 간 큰 기도를 했습니다.
여러분, 혹시 제 자신의 십일조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으시죠? 이쯤 되면. 드리는 기쁨을 알게 해 주시고 헌신한 이상으로 항상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사실 저는 '떼쟁이'였습니다. 한 달 수입이 천만 원이 되길 바라고 꿈꿨을 때, 저는 먼저 100만 원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언제고 반드시 그런 날이 오게 해 주실 거라고 굳게 믿었으니까요.
돈으로 해결되는 고민은 고민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돈은, 얼마나 많은 가정과 인생에 안정과 화합을 주는 최소한의 치료제인지 맞습니다. 그런데 저의 경우에는, 헌신의 기쁨부터가 믿음의 시작이라고 믿었습니다.
되돌아보면 어려움은 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견디지 못할 시련은 없었고,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서면 연단받은 만큼 사업은 또 버텨냈습니다. 직원들 급여 먼저 이체해 주고, 같은 날 제 급여도 가져갈 수 있기를, 그래서 십일조를 따박따박 제 날짜에 내보는 것, 그것이 그 시절 저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렇게 월 매출 1억이 꿈이었던 사업이, 코로나 2년을 넘기면서 어느새 월급여 1억이 나가는 회사가 됐습니다.
수많은 회사가 휘청거렸습니다. 전 세계가 다 같이 어둡고 힘든 시절이었는데, 저한테 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한 달에 겨우 한 개 정도 가맹점을 오픈하면서 거북이처럼 천천히, 그러나 포기를 모르며 꾸준히 해오던 와플 사업은, 주고객층이던 학생들이 코로나로 인해 등교를 못 하면서 '엄카'(엄마 카드)로 배달을 시키는 상황이 됐습니다. 바쁜 현대 사회에 지친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킨이나 짜장면 정도를 배달시키던 문화가 정말 빠르게 전 업종으로 확산됐고, 저희 회사가 인건비 절감을 위해 남들보다 빠르게 이미 정착시켜 놓은 '키오스크'가 또 한몫을 하더라고요. 배달을 하니 코로나 전보다 오히려 매장마다 매출이 더 올랐습니다.
가정을 지탱해 나가야 해서 "이런 시기에 뭘 해야 되나" 고민하던 예비 창업자들에게는, 어떤 브랜드보다도 투자 대비 만족도와 가성비가 좋다는 입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이미 10년 넘는 시간 동안 검증이 된 회사 연혁에 힘입어서, 2020년부터 2021년 코로나 2년간, 매주마다 두세 개의 매장을 신규로 오픈하는, 저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광고도 전혀 안 했는데, 유명 브랜드들도 주춤하는 그 어려운 코로나의 터널 안에서 말입니다.
회사도, 저의 집도 다시 용산으로 이사했습니다. 감사할 일을 날마다 생기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선한 사업, 그리고 라스베이거스
그리고 또 한 분, 저희 지저스 처치 안민호 담임 목사님, 많이 모자란 저를 교육하시고 훈련하셔서 장로까지 만드신 안민호 목사님께 이 자리를 빌려 꼭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회사가 연 매출 100억이 넘어가니까, 무엇보다 기뻤던 건 주저 없이 하나님께 헌신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거였습니다.
자신이 전역한 군부대를 다시 찾아가서 후배 장병들에게 와플을 먹여 주고 싶다는 한 청년 사장님이, 혼자 못 가겠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남자분들, 자기 제대한 부대 쪽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던데, 이 사장님 참 특이한 분이었죠. 저희 회사 신우회 회원 직원 10명 정도가 전방 부대로 함께 갔고요, 이 봉사를 계기로 저는 푸드 트럭을 만들었습니다. 이때 가서 너무 고생했다고 합니다. 천막 치고 재료들 내리고 기계 내리고 다시 싣고 오느라고. 그래서 깔끔하게 2억 들여서 푸드 트럭 만들었습니다.
고단한 인생, 멈추면 누구에게나 한 번은 다시 찾아가고 싶은 곳이 있지 않습니까. 와플대학과 함께하는 분이라면 그곳이 떠나온 고향이든, 모교이든, 전 직장이든, 저희는 함께 갈 준비 다 됐습니다.
저희 회사는 이번 주에 404번째 직원 예배를 신우회 중심으로 드렸습니다. 1년이 52주이니, 8년이 다 돼 갑니다. 기도와 찬양으로 함께 예배 자리를 지켜주는, 눈물 나게 감사한 친구들도 여기와 있습니다.
지난 5월 스승의 날에는, 제자들한테 간식을 주고 싶다는 부산의 한 중학교 선생님이 "선생님이 쏜다"는 행사를 하고 싶다 해서, 저희 푸드 트럭이 그 학교로 갔다 왔습니다.
매장이 노후화가 돼서 천장에 물이 새어 리모델링을 걱정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와플대학'을, 100% 본사 비용으로 올 리모델링해 드리고, '가장 오래된 와플대학'이라는 저 작은 표시를 걸면서 저는 또 꿈을 꾸고 기도했습니다. '두 번째로 오래된 매장도 이렇게 리모델링해 드리고 싶다.' 1년 후에 오픈한 지 10년 되는 두 번째로 오래된 매장을 리모델링해 드렸고, 저는 다시 또 꿈을 꾸고 기도드렸습니다. '지나온 10년에 더해 앞으로 10년 더 운영하시고, 일생을 와플대학 한 브랜드만 하시는 사장님 생기게 해 달라고.' 이 기도 이루어질까요?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와플 가게, 4층 통 건물에 저는 하나님과 함께 와플대학 간판을 걸었습니다. 여기서 1일 와플 클래스도 운영하는데, 어린아이들, 가족들, 커플들이 전국에서 오다 보니까 '와플의 성지'라는 말도 듣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아들에게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교 가라"라고 하셨답니다. 서울대학교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반격을 하더래요. "아빠, 우리 집에서 제일 가까운 대학은 서울대가 아니고 와플대학이야." 고객들 입에서 순수하게 시작된 "대학 중의 대학은 와플대학". 이 별칭, 너무 감사합니다.
제가 올해도 여러 명의 인간 천사를 만나서, 이제 한 달 후에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와플대학 직영점을 오픈합니다. 하나님이 그러셨어요. "네가 안 해본 거, 남에게 해 보라고 시키는 거 나쁜 거다." 그래서 해외 1호점을 저희는 직영으로 엽니다.
반대하는 사람 많았습니다. 불과 6개월 전에 저 혼자 난생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라스베이거스 공항에 내려서 "I don't know English." 그런데 하나님이 저한테 속삭이셨어요. "땅끝까지라도 함께 가주마. 너를 사랑한다."
그 작은 것을 팔아서 무슨 돈이 되냐고, 상가를 계약하면 무시를 당했었던 저의 작은 와플입니다. 매장에서 직접 반죽하고 하나하나 손으로 구워서 바로바로 드리는 작은 와플 빵 하나가, 어느새 100가지가 넘는 메뉴가 됐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 가서 고단한 누구에게 이 작은 빵이 달콤한 위로가 될지, 전 이제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모험을 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전 이제 하나님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벽을 만날 때마다 함께 기어 올라 주시고, 함께 뛰어넘어 주시고, 안 되면 부수고라도 같이 나갈 동역자, '인간 천사'를 셀 수도 없이 보내 주신 나의 하나님, 아바 아버지.
저에게 왔던 인간 천사 한 분이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마 모르실 것입니다. 자신이 언제 하나님의 도구로 쓰였다는 걸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서로에게 인간 천사가 되어 주는 삶을 살아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찬양) 행복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가진 것이 적어도 감사하며 사는 삶, 내게 주신 작은 힘 나눠주며 사는 삶,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눈물 날 일 많지만 기도할 수 있는 것, 억울한 일 많으나 주를 위해 참는 것, 비록 짧은 작은 삶 주 뜻대로 사는 것, 이것이 나의 삶의 행복이라오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세상은 알 수 없는 하나님 선물, 이것이 행복 행복이라오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행복이라오
믿음은 의리입니다
AI 시대라고 합니다. 앞으로 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해서 저 죽기 전에 설령 타임머신이 생긴다 해도, 그래서 저를 공짜로 태워 준다 해도, 저는 결코 타지 않겠습니다. 제가 다시 젊고 빛나는 청춘이 된다 해도, 하나님 모르고 살던 그 시절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거든요.
이제 저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배움도 부족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은, "믿음은 의리다"입니다. 헛되고 헛된 세상에 미련 갖지 말고, 하나님, 성령님 배신하지 말고 의리를 지키세요. 평생이요.
부디, 포기에도 이유가 있는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부탁드립니다. 먼저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전 오늘 계속 하루만 사는 사람으로, 아무 계획 없이 비우고 살면서, 언제든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착하고 부지런한 종으로 살다가, 야곱처럼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저 천성 가기를 소망합니다.
아바 아버지, 저 오늘 스케줄 없습니다. 저 쓰세요. 저요.
기도드리고 마치겠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어리석고 어리석으며 또 어리석나이다. 오직 하늘의 지혜를 구하오니, 듣는 자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내며 끝까지 거룩한 길을 가도록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저희들의 남은 생은 로마서 16장 19절 말씀대로,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도록 하나님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랑이 많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받들어 감사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지저스처치에 대해서는 이 글의 맨아래에 있는 '더보기'를 누르세요.
"아버지, 아시죠?" 30만 원 리어카에서 100억 '와플대학' 신화가 되기까지
(주)와플대학 대표이자 지저스처치 장로로 섬기고 있는 손정희입니다.
내일모레 일흔인데, 제 생각보다 노화가 빨리 진행되는지 생각대로 말이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장로가 된 지는 이제 겨우 4년 차입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서 참 늦게 철이 들었습니다. 30세의 젊은 시저의 저는 하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 지금, '사업의 끝은 망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지만, 저는 아직 망하지 않고 17년째 '와플대학'을 하고 있습니다.
재판은 '재'물이 다해야 '판'결(끝)이 나는 것이랍니다
저는 평범한 남편과 28세에 결혼해 두 딸을 낳고 아동복 가게를 하며 살았습니다. 장사가 잘 되어 직접 브랜드를 만들고 제조, 생산까지 하며 가게를 늘렸고 온라인 쇼핑몰에도 진출했습니다.
물량 확보가 필요해서 해외 생산까지 손을 댔는데, 한 시즌 봉제 불량이 터지고 설상가상으로 결제 대금을 사기당하는 바람에,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원고도 되고 피고도 되는 신세였습니다. "재판은 재산이 다해야 판결이 난다"는 말처럼, 집도 모두 사라지고 교회에서 쌀을 얻어먹는 형편으로 전락했습니다.
3대째 기독교 집안의 모태신앙이었지만, 그때까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못했습니다.
손 장로는 아동복 사업 실패와 10억 원 빚더미, 가족의 위기와 주변의 오해 속에서 죽고 싶은 절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두 딸을 위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성경 말씀에 매달리고 밤새 시편을 필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였다고 고백합니다.
첫 번째 인간 천사, 그리고 붕어빵 장사를 시작하다
모든 재판을 멈추고 당시 가지고 있던 현금 전체인 30만 원에 동서울 터미널에서 리어카를 한 대 샀습니다. 그런데 막연히 장사 장소로 생각했던 신촌까지 갈 방법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장님께서 그 30만 원에서 5만 원을 빼서 용달차를 불러주셨습니다. 제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인간 천사'였습니다.
신촌의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리어카를 멈추었습니다. 노점상에게는 단속반보다 이웃 노점상이 더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리를 잡은 곳은 전혀 장사가 되지 않는 곳이어서,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한철 장사인 붕어빵 기계와 재료는 후불 결제가 가능했습니다. 그 덕분에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지만, 저는 팥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던 고구마를 붕어빵 속에 넣어 봤는데 시식을 해 본 학생 손님들 반응이 좋았습니다. '고구마 붕어빵'의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단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다른 것을 궁리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먹던 만두가 생각났습니다. 만두소에 피자 치즈와 케첩을 넣어 붕어빵을 만들었습니다. 어느 학생이 '치즈 칠리 붕어빵'이라는 멋진 이름도 붙여주었습니다.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이대 게시판에 원조로 알려지면서 스포츠 신문과 KBS 방송국에서 취재가 나왔고, 손님이 줄을 섰습니다. 연예인들도 종종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가고 봄이 오자 붕어빵 철이 끝났습니다. 여름 품목을 찾아다니다가 연세대 학생들이 와플을 들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12가지 크림을 넣은 와플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기존의 바닐라, 딸기, 초코 3가지에 커피 크림, 땅콩버터크림, 오렌지 크림, 고구마 크림 등 9가지를 더한 것입니다. 매일 '크림 한 포대를 다 팔게 해 달라'라고 기도했고, 그 기도는 응답받았습니다.
빚과 실패를 딛고 고구마 붕어빵을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딸과 함께 고안한 다양한 와플 메뉴로 사업을 재기하여 전국 프랜차이즈로 성장시켰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마다 만나게 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이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딸의 새벽 기도, 그리고 천 번의 헌금
그전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제가 50세가 다 되어갈 무렵, 아동복 사업은 완전히 망했습니다. 채권자들이 딸아이 학교까지 찾아갔고, 결국 딸은 서울예고 2학년 때 자퇴를 해야 했습니다.
그 무렵, 그 아이가 친구를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새벽, 베란다에서 방석을 깔고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 딸을 발견했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기를 사모하는 딸의 마음을 생각하여, 그동안 살던 서울 변두리에서 딸의 교회가 있는 용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보증금 500만 원, 월세 17만 원인 형편없는 자취방이었습니다. "인자도 머리 둘 곳이 없다"는 성경 말씀처럼 초라한 집이었지만, 딸은 "가족이 함께여서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17세 딸이 새벽 기도를 나가기에 보호자로서 저도 따라나섰습니다. 이것이 영적 부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딸이 원하는 것처럼 천만 원을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을 탓하다가, '만 원씩 천 번의 헌금'을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자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예배마다 맨 먼저 가서 강대상에 헌금 봉투를 올려놓았습니다. 예배가 기다려지고 기뻤습니다.
예배 후에는 설거지 봉사, 화장실 청소 등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남자 화장실 청소까지 하다가 억울한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며 울 때, 하나님께서는 제게 "그래, 내가 다 안다"는 응답을 주셨습니다. 2년 후 일천 번의 헌금을 마쳤고, 교인 모두의 동의로 집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네 번째 일천 번의 헌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버지, 아시죠?"
짬을 내서 읽던 성경 말씀이 너무 좋았는데 장사가 잘 되면서 성경을 읽을 짬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네 머릿속에 성경책을 가져라'는 기도 응답을 붙들고 히브리서 11장 성경 암송을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 말씀을 계속 외우고 울며 기도하고 또 외웠습니다. 21절에서는 더욱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야곱은...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했다..." 저도 그렇게 살고 늙고 싶었습니다. 지팡이에 의지할 때까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면, 내 마지막이 하나님 경배로 끝난다면, 그것이 가장 큰 행복이자 보람된 인생 아니겠습니까?
와플 대학이 법인이 되자 '감사(Auditor)'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파산 경험이 있는 제가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담임목사님(지저스처치 안민호 목사님)께서 자원해 주셨습니다. 그 감사함에 목사님이 부탁하시면 무엇이든 순종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수년 후, 목사님께서 "장로를 해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고 중퇴'라는 제 학벌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만학도가 되어 45년 만에 고졸 검정고시에 도전하여 합격했고, 지금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돈을 많이 벌게 해 달라는 기도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장사가 잘되어 입소문이 나자, 어려운 상황에 있는 많은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도와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재료도 나누어주고 노하우도 알려주고, 그곳을 찾아가서 함께 장사도 해주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감사해서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의 사연을 듣고 공감하며 함께 울어주었습니다. 물론, 때로는 속고 이용만 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아버지, 아시죠?" 하고 여쭈면, 하나님은 "그래, 내가 다 안다"라고 답해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이면 충분했습니다.
믿음은 의리입니다
어려움은 늘 있었지만, 하나님과 함께 견디지 못할 시련은 없었습니다.
저는 가맹점마다 십일조 100만 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는 기도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전부터 믿음으로 미리 그 금액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월 매출 1억을 꿈꾸었는데, 코로나 2년(2020, 2021년)이 지나면서 직원 월급여가 1억씩 나가는 회사가 되었습니다. 기도했던 대로 회사도, 우리 집도 용산으로 다시 이사했습니다.
회사가 연 매출 100억 원이 넘어가면서 선한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 신우회가 전방 부대에 섬기러 갔다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1억 원을 들여 푸드 트럭을 만들어 봉사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404번째 신우회 예배를 드렸습니다. 8년이 다 된 것입니다.
한 달 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와플대학 직영점'을 오픈할 예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가주신다는 약속 하나만 붙잡고 미국까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모험을 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으며, 질문 없이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 천사'들을 동역자로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인간 천사가 되어주는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타임머신이 생겨도 하나님 모르던 시절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믿음은 의리다.' 하나님을 향한 의리를 지킵시다. 하나님의 계획에 참여하는 복된 우리가 됩시다.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합니다.
"아버지, 오늘 저 스케줄 없습니다. 저를 써주세요. 저를 써주세요. 저요."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6:19)

지저스처치와 지저스커피에 대하여
https://jesus-church.kr/ 지저스처치. 커피와교회
성결교. 서울신학대학교. 현재로서는 손정희 장로님 한 분. 와플대학과 선교 협력.
커피와교회는 실제 카페 공간을 교회로 사용하는 이색적인 형태의 기독교 공동체로, 서울 용산구 갈월동(숙대입구역 인근)에 위치해 있습니다. 2011년 안민호 목사에 의해 “카페처럼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교회”라는 모토로 설립되었으며, 평일에는 일반 카페로 운영되지만 주일에는 예배 공간으로, 주중에는 성경 공부, 큐티 모임, 새벽 기도회 등 다양한 신앙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최근에는 ‘지저스처치(JESUS CHURCH)’라는 연합 선교공동체로 발전하여, 한서중앙병원교회, 와플대학교회, 성윤교회 등과 연합한 예배와 사역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 사회공헌 활동으로는 와플대학(이익공유형 프랜차이즈) 등과의 협력을 통한 사회적 선교, 취약계층 지원, 청소년 사역 및 도심 속 CCM 라이브카페 운영 등이 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며 복음이 흐르는 공간,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일상 속의 교회를 지향합니다.
“필생(必生), 반드시 살아난다”는 표어를 바탕으로, 수익보다는 사람을 중심에 둔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100개 교회 설립이라는 중장기적 목표 아래, 교회 개척과 선교적 사역에 적극적입니다.
커피와교회는 단순히 예배당이 아닌, 일상 공간에서 신앙과 지역사회가 자연스럽게 만나는 새로운 교회 모델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지저스커피 강남점은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본부 1층에 위치하며, 주변 스타벅스 매장과 경쟁할 만큼 인기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지저스커피는 ‘예수’라는 이름을 내세우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세련된 브랜드로 인식되도록 하여 자연스러운 접촉점 역할을 하며, 예배와 선교 본질에 충실한 운영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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